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의 <불안>을 읽다.

솔직히 알랭 드 보통의 이름만 많이 들어봤지 그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책을 썼는지는 잘 몰랐다. 골든회원으로써 입대후 무수한 책들을 구매하고 있는 알라딘을 뒤적거리다보면 알랭 드 보통의 이름과 그가 쓴 책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그저 그렇게 스치면서 마주친 몇 가지 책들 <여행의 기술>, <불안> 따위를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1년 전 쯤 같은 배럭barrack에서 사는 한 아저씨가 <불안>을 구매한 걸 봤다. 나는 거의 편집증적으로 뭐든 책같이 생긴 것이 눈에 보이면 그것을 들추어보고 출처나 소유자를 알아내려 애쓴다. 알랭 드 보통의 책 정도의 트랜디한 인문학 도서라도 이곳에서는 마주치기 매우 힘든 책이기에 나는 그 책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 지난 1년간 모 아저씨의 얼굴을 마주치며 떠오른 다음 맥락은 항상 “불안”과 “알랭 드 보통”이었다. 그러고보면 책이란 무수한 사물들 중에서도 참 기괴한 마술적 힘을 지니고 있는 사물이다. 그 존재, 표지의 출현 자체로 아직 그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를 포스를 만들어내니까.

이 책은 계열체적 서술로서 현대 사회에 사는 모든 인간에게, 그들의 일상 곳곳에 상존하고 있는 ‘불안’이란 것의 정체를 무제한적으로, 경계없이 파헤치는 작업으로 탄생한 책이다. 불안에 대해 원인과 해법이라는 두 가지 형식을 갖추고 원인에는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을, 해법에는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를 제시하고 있다. 이것들은 17세기 부르주아 사회의 출현 이후로부터 현재까지 근대인의 일상을 점령하고 있는 테마들의 목록과도 같다. 요컨대 현대 사회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지위’에 대한 끝없는 욕망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은 곧 사랑에 대한 결핍을 느끼는 것과 같다하겠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 “실패자” 또는 “성공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에 의해 우리 인간들이 자기 스스로에게 어떤 결핍된 것에의 갈증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것은 곧 탐욕, 야망, 부, 권력, 명성 따위의 끊임없는 갈망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가 인간 개개인의 생리들을 지배하는 두 번째 층위에는 바로 이런 사회적인 욕망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바로 그 욕망들이 부유한 이든, 권력자이든 명성이 드높은 자든, 또는 그 반대편에서 소외된 자들의 영역에 속한 사람들이건 그 모두에게 ‘불안’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은 속물근성이라고 지칭되는 부르주아적이며 귀족적인 허세 행위들에서도 등장한다. 아마도 한국사회에서 우리는 이런 부르주아적 허세들을 ‘강남’이라는 지역적 조건이 만드는 독특한 문화로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로 ‘기대’는 자본주의적 소비문화가 불러일으키는 유행과 소비에 대한 욕망들과 연결된다. 우리는 어떤 유행하는 옷 따위를 걸쳐입은 것으로 그 사람의 모든 됨됨이를 미리 판단하곤 한다. 요컨대, 깔끔하고 댄디한 스타일의 이태리제 정장을 입은 남성에게는 신사적인 매너와 어느 정도의 교양, 지식 따위가 당연히 겸비되어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심리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능력주의에 와서는 ‘부자 유용론’의 오랜 신화가 등장한다. 자본주의가 안정적으로 세계 곳곳에 안착하고 모든 이들의 일상을 점령한 그 즈음부터 ‘부자’는 더 이상 혐오적이며 악마적인 욕망의 괴물같은 잔인한 사람조차 아니었다. 그들은 심지어 빈자보다 쓸모있으며, 훌륭한 인격을 갖추었고, 근면성실한데다 보다 더 ‘진화한’ 인류들이라는 신화까지 덧씌워진다. 본래부터 훌륭한 종자들이기에 부자가 되었으며 충분히 부를 누리고 심지어는 신으로부터 영광된 자리를 얻을 자격까지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자들이 있기에 자본주의 체제가 작동하며, 빈자들을 포함한 평범한 모든 이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것이라는 논리까지 덧붙여진다. 어느새 ‘부’는 이데올로기의 중심 위치를 차지한 괴물이 된 것이다. 더 이상 사람들은 기독교적인 윤리로 부자들을 평가하지 않기 시작했다. 끝으로 삶의 불안정성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보다 더 강고한 불안을 안겨주었다. 이것은 그들이 스스로 해방을 꿈꾸거나 삶의 어떤 진전으로부터 그 자신을 얽고있는 옥쇄를 풀 극복의 여지조차 앗아간다. 우리는 실패를 괴로워하기에 어떤 경쟁의 사슬에서 반 발자국만 실패쪽으로 벗어난 이들은 더더욱 실패자들의 영역이라는 나락으로 빠지기 쉬워지게 된다. 두 번째 기회는 없는 것이다. 어쩌면 더 이상은 첫 번째 기회조차 없는 사회인지도 모른다.

해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그 해법의 다양하고 서열 없는 방향들을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종교), 보헤미아로 나누어 펼쳐놓는다. 그것은 쇼펜하우어적인 염세주의나 다다이스트들의 과격한 행동주의 예술부터 시작해서 기독교 문화가 갖는 만민이 주님 아래에서는 평등하다는 유신론적 평등주의, 그리고 막수 이후의 막수주의와 예술의 모든 경향들까지 다양하다. 특히 철학이나 정치가 아니라 보헤미아를 책의 마지막에 배치한 선택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저자는 그것이 실패한 도전들이었던데다 어떤 점에서는 어리석고 치기어린 예술적 경향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명백히 하면서도 그것의 도전적인 태도와 예술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 전반에 끼친 영향을 ‘아직’ 종결지어지지 않은 것으로 평가하는 듯하다. 사실 ‘보헤미안’들의 초현실주의 예술로의 도전들은 ‘예술’의 영역에서도, 또 지적인 염세주의라는 이름의 철학으로도 다루어질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것이 따로 나뉘어 다뤄진 것은 삶의 양식으로서의 무엇으로 제시된 해법들 중 가장 급진적이고 도전적인 것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불안의 위치는 바로 우리의 일상 곳곳이며, 또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가장 정신적인 부위에 위치한 불안의 극복은 결국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거의 항상 언제나, 불안을 느낀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이 어디있겠는가. 나는 자신이 불안하지 않다고 도사처럼 말하는 사람들의 말은 믿지 않는다. 화장했더니 사리가 얼만큼 나왔다는 이들이 말은 차라리 무수한 수련으로 인한 자기 암시와 주문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싶다. 자본주의라는 속세에 살고있다면 어찌 그 누가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있으리오. 우리는 산 속 오두막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기에, 불안을 느끼며 불안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외면하거나 회피하거나 무시할 순 없다. 백번천번 인정하고 돌파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