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의 섬 
 병장 이승현 06-26 14:12 | HIT : 62 



 이 글은 장 그르니에의 <섬>에 대한 다른 후기입니다. 전역하기 전에 올리는 마지막 글인데, 아쉬움이 많이 남는군요. 모두들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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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의 섬

 여행을 하며 느끼는 것은 세상의 어느 곳을 가도 모든 것이 빈틈없이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존재한다. 어떤 여백도 없이. 오직 인간에게만 여백이 허락되어 있다. 인간만이 백지를 대면한다. 그것은 기묘한 감각이다. 어떤 절대를 마주한다는 것은. (기실 백지를 앞에 두고 있다는 것은 그 자신의 고유한 무를 깨닫는 것이다.)  
 어느 오후에 언뜻 목가적인 한 때의 풍경 속에 서 있는 꿈을 꾸었다. 소리 없는 바람에 흔들리는 수없이 많은 갈대들을 지나 멀리 가을의 숲에 석양의 붉은 빛이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내가 이르러야 할 마지막 그곳. 일그러지고 뒤틀린, 그리고 때론 너무나 아름답게 채색된 꿈의 인상들의 아득함과는 달리 그 소박하고 선명한 풍경의 짧은 순간 속에서 나는 분명히 보았다. 마지막 안식을. 죽음을 위한 그리움을. 나는 그곳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풍경 속의 갈대 하나로, 원을 그리는 바람 하나로, 숲에 머무는 햇살의 한 가지 색으로 살게 될지도 모른다. 죽음은 간극을 넘는 것. 하나의 삶만을 사는, 절대로의 귀의이다. 그것이 존재이든, 무이든. 

"과연 어떤 광경들, 가령 나폴리의 해안, 카프리 또는 시디부 사이드의 꽃 핀 테라스들은 죽음에의 끊임없는 권유와 같은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워주어야 마땅할 것들이 마음속에 무한한 공허를 만들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명승지와 아름다운 해변에는 무덤들이 있다."   
- 장 그르니에, 섬 p.99

 쏟아지는 햇빛 속에 서면 그 햇빛들이 나를 끝없이 씻겨 내리는 것을 느낀다. 씻기고 씻겨서 나는 최소한으로만 남고 곁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때 삶은 충만함보다는 오히려 완전한 무심에 더 가깝다. 눈앞을 가득 메우는 저 눈부신 빛이 나 자신을 지워버리고 있다는 것. 존재의 충만함이 오히려 무를 일깨우고, 나는 그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른 채, 그 어느 것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망연히 서 있을 뿐이라는 것. 존재와 무 사이에서, 나를 매혹시키는 절대와 절대 사이에서 못 박힌듯 혼자 고립되어 있는 나 자신을 직면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섬들을 생각할 때면 왜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 되는 것일까? 난바다의 시원한 공기며 사방의 수평선으로 자유스럽게 터진 바다를 섬 말고 어디서 만날 수 있으며 육체적 황홀을 경험하고 살 수 있는 것이 섬 말고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섬에 가면 <격리된다isole>-섬ile의 어원 자체가 그렇지 않은가? 섬, 혹은 <혼자뿐인> 한 인간. 섬들, 혹은 혼자씩일 뿐인> 인간들."  
- 장 그르니에, 섬 p.124   

 우리 삶의 비천한 조건에 대해 의식을 갖는다는 것. 그것은 절대로의, 일체의 비인간성으로의 도약을 꿈꾸게 한다. 신앙과 예술은 절대에의 끝없는 향수를 표현한다. 그러나 그 모든 시도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불가능함을 향한 도약, 혹은 불가능한 도약이다.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지 간에.

 절대를 향한 끊임없는 소요 속에서 우리에겐 필경 죽음밖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일까. 우리가 끝내 다다를 곳은, 우리가 안식할 곳은 정말 죽음뿐인 것일까. 삶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죽음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진실하다고 할 수 있을까.  언젠가 저녁 어스름 무렵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땅거미가 질 무렵, 하늘은 짙푸른 어둠에 잠겨 가고, 나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놀이터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들, 웃음소리. 그들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겠지. 그리고 내일이 되면 또 놀이터에 모일 테고. 저녁 하늘에 흩어지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어쩌면 영원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안도감이 든다. 잠시 내 곁을 머물렀을 뿐인 그 웃음소리가 나를 위로해 준다. 한 순간, 나는 절대를 향한 모든 시선을 거두어들인다. 그 기억, 그 목소리, 내 삶에 진실한 안식의 섬들. 너무나 인간적인, 그래서 너무나 쉽게 허물어지고 말 그 희망을 나 역시 절망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다.  


 병장 배진호 
 저는 이러한 안식의 '섬'을 생각하니 갑자기 섬에 커다랗고 기나긴 다리를 놓는 
 장면이 생각되네요. 우리가 각각의 섬에 살고 있지만, 이제는 서서히 
 서로가 다리를 놓아가고 있으니 말이죠. 

 연결의 이미지는 그와는 대조되는 개념인듯 싶네요. 06-26   

 상병 구본성 
 뱀을 보고 두려워하고 피하는 인간의 모습을 생각하다가 저 너머에 대한 갈망을 맞닥뜨리니, 현재의 뇌에 관한 이론들이 단순하게만 느껴지는군요. 전역 축하드려요. 06-26   

 병장 배진호 
 본성// 왠지 그 책은 어디서 본건만 같은 착각이 드네요.. 심리를 다룬 어느책이었던거 같은데 말이죠.. 흐음 뭐죠? 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