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의 1월에는 눈이 자주 내리지 않았다. 하늘에는 칼바람이 날아다녔고, 겨울은 한창, 그 꽃을 피우고 있었다. 1월 답게도 영하 위로 오를 줄 모르는 기온이 서러웠고, 나는 분명 내무실의 기온도 영하 위로 오르지 않고 있다고 믿었다. 내무실의 공기에도 칼바람이 날아다닌다고만 생각했다. 내무실의 기온은 실은 25도를 웃돌았지만, 부대에 갓 전입온 이등병이 달리 생각할 여지는 없었다. 차라리 실외가 더 따뜻했고, 사람 사이의 온기 같은 건 찾기 힘들었으니까.    
      
   어서 게이트로 나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칼바람 몰아치는 내무실에서 고참들의 눈살과 입담에서 벗어나서, 정직한 추위만이 나를 맞이할 정문으로 나가버리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추위는 23년의 시간동안 익히 경험한 것이고, 나는 평택의 1월을 잘 알고 있으니까. 신병 대기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나는 원하던대로 곧 정문으로 나갔고, 헌병의 장구들을 주렁주렁 매단 선임 옆에서 업무에 대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월말의 마지막 한 주일은 그렇게 매일 오전, 아니면 오후의 시간동안 교육을 받으며 흘러갔다. 생각하던 대로, 단 한 명의 고참과 함께하는 근무 시간은 내무실만큼 절망적일 정도로 힘들지는 않았다. 예상을 벗어난 것은 다른 쪽이었다.    
      
   1월의 추위, 도로 위에서 마주하는 겨울의 숨결은 아직 내가 사회에 거할 때 접했던 그 모든 것들과는 격을 달리했다. 선임들의 조언대로 입은 다섯겹의 바지, 일곱겹의 웃옷에도 불구하고 냉기는 가슴 속까지 스며들었고 손과 발이 얼어들었다. 단지 한 두 시간만에 손은 볼펜을 집을 수도 없을 정도로 마비되곤 했다. 경기도 평택에서, 해가 뜬 오전의 시간에, 세겹의 장갑을 끼었는데도 불구하고. 23년을 겪어온 경기 남부의 추위였지만 나는 이러한 추위를 단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나와 면식이 없는 사이라고 해야하나. 앞으로 2년간, 이런 근무를 나는 매일 7시간 이상 해야만 한다 - 절망섞인 한숨을 내쉴 틈도 없었다. 군대의, 아스팔트 위에서의, 바람막아줄 그 무엇도 없는 겨울의 한 복판은 그토록 추웠다.    
      
   아마도 군에 입대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평생 겨울이 얼마나 추운 것인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두터운 겨울외투에, 따스한 라지에이터 품에 안긴채로 겨울은 고작 이 정도만큼만 추운 것이라고, 겨울의 한기는 견딜만하다고 생각해 버렸을 것이다. 거리의 추위는 온갖 사람과 건물들로 바람을 가둔 거세된인 겨울이라는 사실을, 캠퍼스의 한기는 건물과 건물 사이를 걷는 시간만큼의 추위라는 진실을 나는 끝까지 몰랐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고작 바람을 거세한 수십분씩의 추위를 23년의 겨울의 경험이라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진짜 겨울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 내가 아는 그 어떤 것을 겨울 그 자체라고 믿어버리면서 살았을 것이다. 게이트에서 차가운 총 한자루, 치렁한 헌병 장구에만 의존하였을 때 나는 거대한 자연, 광폭한 겨울을 온 몸으로 맞이하였다. 내 발 끝을 잘라내는 듯한 추위, 나를 돌아 보지 않고 내닫는 맹렬함. 나는 겨울을 사랑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정확히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만큼만 세상을 이해한다. 목장의 소를 쓰다듬고 자라난 아이는 물소의 돌진을 상상치 못하고, 인간의 입맛대로 변질된 그들에 스스로를 길들여 버린다. 비대한 젖을 힘겹게 끌며 얌전히 여물을 씹는 홀스타인 젖소는 딱 그만큼 인간의 비대한 자의식이 만들어낸 비참함일 것이다. 그런 젖소를 기르며 사랑한다 말하는 것은, 적확히 그 말 그대로의 의미밖에 갖지 못한다. 인간의 의지, 확장하여 나의 의지대로 길들여진 그들에게, 그리고 그런 그들의 모습에 길들여진 자신에게 사랑을 준다는 의미 외엔 되지 못한다. 실로 소, 주변과 야생의 모든 소들을 사랑할 수는 없다. 알지 못하는 것을 사랑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목장에 갇힌 소를 바라보는 소년은 실은 스스로도 목장의 울타리에 갇혔다는 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입맛대로, 인간은 환경을 변화시켰고 변화한 환경은 다시 인간을 길들였다. 인간은 결국 스스로에 갇히어, 인간을 넘어서는 법을 잃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익숙하게 주어진 주변의 경험들, 그리고 그 환경이 은연 중에 선사하는 안온함에 젖어 세상 자체를 직시할 능력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주어진 세상, 보여지는 모습 밖에 사랑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우리는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나' 내가 경험하고 살아가는 그 바깥을 보지 못하기에, 우리가 만들어낸 허상 속에 갇혀 사랑할 따름이다.    
      
   아마도 진실은 지금 창 밖에 흩날리는 눈보라처럼 가혹하겠지만, 진실을 알지 못하면 사랑할 수도 없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유로워져야 하고, 자유를 얻은 모든 이는 냉엄한 진실 앞에서 행복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은 그런 얘기다. 그러나 스스로를 가혹함에 내던진 자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울 수 있을 것이다. 눈물을 마신다는 것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