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간 갑자기 신종 플루와 관련된 현상에 대해 생각해보다가 느낀 바가 있어서 끄적거립니다. 다소 깁니다. 쓸데없이요


1. 


 자, 우선 들어가기 전에 신종플루가 뭔지 알아 봐야겠습니다. 아, 신종플루에 대해서 충분히 아신다고요? 그렇다면 신종플루란 단어 자체부터 잘못된 거란 건. 아시나요?

 우리가 신종플루 혹은 돼지독감 이라고 부르는 것의 정식명칭은 인플루엔자A(H1N1)입니다. 09년 4월 30일 WHO(세계보건기구)가 정식으로 명명했습니다. 이 중 A란 것은 인플루엔자의 타입을 얘기하는 것이고(A~C까지 존재), H1N1이란 것은 바이러스의 조합방식을 나타냅니다. 감기는 표면 단백질인 헤마그글루티닌(HA)과  뉴라미니티아제(NA)의 조합으로 생성됩니다. 전자는 H1~H16까지 16종류로 역할은 이로 인해 바이러스가 표적세포의 수용체에 자리 잡게 하는 것입니다. 후자는 N1~N9까지 9가지 종류가 존재하나 인간의 타액 또는 장내 아밀라아제 같은 인체 당단백질 효소를 닮은 N1과 N2만이 인간에게 질병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HA와 NA는 이론적으로 144가지 조합이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H1N1, H2N2, H3N2, H5N1을 비롯한 6가지만이 인체에 질병을 유발합니다. 이번 인플루엔자 뒤에 붙은 H1N1은 H1과 N1. 추정 잠복기는 대부분 1~4일, 최대 7일이고, 증상은 잘 알려졌듯이 일반감기와 유사한 증세에 발열 증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최근 발생은 멕시코에서 시작됐으나, 최초 발생은 1976년 2월 5일 미국 육군의 한 부대에서 이뤄졌습니다

 초기에 쓰이던 돼지독감(Swine Influenza)이란 말은 돼지가 단지 H1N1을 만드는 혼합체일 뿐임을 인식하지 못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정부나 방송에서도 돼지독감이란 말은 쓰지 않습니다. 이 용어를 쓸 경우는 양돈농가나 업계에 피해가 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종플루’란 말은 1976년 최초 발생해서 계속 지속적으로 변종을 만들어가는 이 질병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신종이란 말은 예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뜻하고, 그렇기에 대비책이나 준비가 없었다는 것을 내포합니다. 하지만 WHO는 이 질병이 발생한 이래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왔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치료약 타미플루만 하더라도 1996년에 개발되었습니다. 치료약까지 개발되어 있었던 질병에 ‘신종’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 듯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돼지독감이나, 신종플루라고 부르는 대신 정확한 명칭이나 ‘이번 인플루엔자’라는 용어를 쓸 필요가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이유는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번 인플루엔자A타입의 치료약은 세 가지 정도가 있습니다. 그중 널리 쓰이고, WHO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치료약이 ‘타미플루’입니다. 타미플루는 인산 오셀타미비르(Oseltamivir Phosphate) 성분을 기반으로 합니다. 1996년 미국 캘리포니아 제약회사 질리어드(Gilead Sciences)가 스위스 제약회사 로슈홀딩(Roche Holdong)에 특허권을 팔아서 지금은 로슈홀딩이 독점 생산하고 있습니다. 특허권의 유효기간은 2016년이고요. 로슈홀딩은 이 약을 판매하기 전까지 꽤나 험로를 걸었지만, 지금은 타미플루로 인해 주가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 ‘리렌자’는 공2위 약품으로 타미플루에 묻혀 있다가, 타미플루에 내성을 보이는 돌연변이의 발견으로 인해 다시금 주목받고 있습니다. 

 지금의 인플루엔자A(H1N1)은 아직도 확산기를 거치고 있는 중입니다. 국내에서도 감염자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고요. 환절기에 접어들면서 인플루엔자가 확산될 거라는 예측아래 6단계 전염병 경보인 대유행(pandemic) 발령도 예상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위기설도 나오고 있기에 WHO도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2. 


 우리에게는 WHO가 관심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아! 정말 엄청난 위기이구나.’라고 느껴집니다. 하지만 WHO가 촉각을 곤두세웠던, 아니 세우고 있는 거대 전염병은 이번 인플루엔자A가 처음이 아닙니다. 20년 전부터 WHO는 네 개의 거대한 전염병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봐 왔습니다. 에이즈(AIDS), 변종 크로이츠펠트-야코브병(인간 광우병), SARS, 조류독감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다섯 번째로 인플루엔자A타입이 찾아왔습니다. 비교를 위해 이 병들을 간단히 살펴봅시다.

 에이즈(HIV - human immunodeficiency virus)는 이 논의에 주로 사용되지 않기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후천성 면역 결핍증’이란 우리말만 덧붙입니다. 변종 크로이츠펠트-야코브병(vCJD)을 우선 살펴보겠습니다. 이 병은 소의 뇌에 스펀지처럼 구멍이 뚫리는 신경질환입니다. 치매, 방향감각 상실, 정신착란, 시력장애, 10년 이상의 오랜 잠복기가 특징으로, 발병 1년 내에 대부분 사망하는 치사율 100%의 병입니다. 노인들에게 주로 발생하던 크로이츠펠트-야코브병(CJD)이 80년대 들어 젊은 층에 그 증세를 변형시켜 나타남에 따라 vCJD로 새로운 병을 명명하게 되었습니다. SARS(Ser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는 우리말로 하면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이 됩니다. 새로운 종류의 N1, N2로 전파된다고 의심되어 의학계의 주목을 끌지만, 지근거리 전염 그리고 신체접촉을 통해서만 전염되었기에 최초의 예상만큼 큰 파장을 일으키진 않았습니다. 조류독감의 정식명칭은 Influenza A(H5N1)입니다. 지금의 인플루엔자와 비슷한 예입니다. 하지만 이 독감이 양계업계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계속 조류독감으로 불리는 이유는, 조류가 직접적으로 병원균을 퍼트리고 매개하기 때문입니다. 고병원성(사람에게 전염되는)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Highly pathogenicavian influenza A, H5N1)는 2002년 말부터 발생하여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철새가 질병의 운반자 역할을 해서 전 세계적으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 질병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전달 매개체(에이즈의 HIV바이러스나, 광우병이 해면상외증의 프리온 단백질) 또는 알려진 바이러스의 변형이었다는 것이 첫 번째. 그리고 전부 동물성 전염병의 일종으로 종간 면역 장벽을 넘나든다는 점이 두 번째입니다. 결국 이 질병들은 우리가 그 동안 쌓아온 의학지식을 벗어나 존재했기에 우리에게 위협이 되었던 것입니다.

 앞의 4가지 질병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번 인플루엔자로 인한 위험은 세계가 겪는 최초의 ‘질병으로 인한 위기’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염병으로 지구가 멸망하는 영화들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아니겠지’라고 웃고 넘겨버리지만, 그 웃음이 상쾌하지만은 않습니다. 이러한 바탕에는 이번 인플루엔자에 대한 과도한 포비아(Phobia)가 깔려있습니다. 사실 이번 인플루엔자는 우리가 지금 느끼는 것처럼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인플루엔자A(H1N1)의 위험성을 수치적인 측면에서 한번 살펴봅시다. WHO보고서를 참고해 앞서 설명했던 4가지 질병의 치사율과 비교해보겠습니다. 1등은 단연 광우병입니다. 치사율 100%이긴 하지만 감염자 자체는 적어서 1996년 이래 214명이 광우병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2등은 조류독감. 치사율 60%로 08년까지 조류독감으로 인한 사망자수는 248입니다. 꼴지는 SARS로 치사율은 10%입니다. 하지만 늦은 대응으로 2003~2009년까지 916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에이즈는 1983년 이래 25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지만, 면역결핍으로 인한 타 질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딱히 치사율을 따지긴 힘듭니다. (굳이 따지자면 치사율은 100%겠지요) 

 이번엔 우리가 흔히 걸리는 질병들과 비교해볼까요? 주로 우리나라 북쪽지방에서 발병하는 말라리아의 치사율은 치료시 0.4~4%, 미 치료 시에는 10%나 됩니다. 세계적으로는 매년 100만 명이 말라리아로 인해 숨을 거둡니다. 당뇨는 어떨까요? 당뇨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매년 약 400만 명의 사람들을 땅으로 돌려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인의 생활습관은 당뇨의 치사율을 점점 높이고만 있습니다. 또한 빈곤국에서는 위장염만으로도 어린이 100만 명, 성인 10만 명이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는 위험관리학(Riskology)에서 정말로 위험하지만, 일반인은 잘 모르는 경우에 전형적으로 언급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까지 설명한 질병들보다 더 심각하다고 느끼는 이번 인플루엔자A(H1N1)의 치사율은 어떨까요? 

 WHO에 따르면 신종플루의 치사율은 0.7%~1%라고 합니다. 계절 독감의 치사율 0.4~1%와 비슷한 수준이죠. 수치상의 이견이 있지만 치사율이 낮다는 것에는 전문가들도 이견이 없습니다. 국내 사망률은 더욱 낮아서, 28일 기준으로 자동차 사고로 사망할 확률과 비슷한 0.06%로 집계되었습니다. ‘아 그렇다면, 이번 인플루엔자가 위험하지 않다는 겁니까?’ 하고 묻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건 아닙니다. 다소 위험하기도 하고, 주의해야 할 부분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독감으로 인해 영화처럼 지구 대멸망같은 상황이 발생할 경우는 극히 희박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WHO는 1948년 창설 이후부터 이 질병을 계속 주시해왔기 때문에 더욱 가능성은 낮죠. 그럼 우리 사회에 퍼진 ‘신종플루’라는 거대한 포비아(Phobia)는 왜,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요?


3.


 ‘신종플루 포비아(Phobia)’의 형성에는 언론의 보도와 뱃지 아저씨들의 대응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미국보고서 수치를 그대로 이용하면 1천만 명이 우리나라에서 걸리고, 그 중 1만 5천명이 사망하게 될 것이다.’ ‘전 국민의 30%가 감염될 것이다.’ ‘가을이 고비다. 방학이 끝나는 9월부터 난리가 날 것이다.’ 우리가 매체에서든 주변에서든 흔히 듣고 있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유통되는 말의 최고정점은 ‘그리고 우리에겐 치료약이 부족하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정부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이죠.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듭니다. ‘아 바보 같은 뱃지 아저씨들 다른 건 못해도 이런 건 좀 잘해주시지’ 우리나라의 대응이 늦어서 또 국력이 부족해서 질병에 걸릴 사람들을 살리지 못하게 됐으니까요.   이 생각의 연쇄에서 ‘살리지 못하게 되었다’는 인식에 주목해봅니다. 이 인식에는 약간의 비틀림이 있습니다. 정부가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고 밝히는 타미플루는 치료약이지 예방접종약이 아닙니다. 간혹 예방의 목적으로 쓰이긴 하지만, 미국 같은 경우에도 고위험군 환자(노약자, 만성질환보유자, 유아)를 제외하고는 예방 목적으로 투약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타미플루 자체를 ‘있으면 절대 인플루엔자A(H1N1)에 걸리지 않는 약’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타미플루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더욱 공포를 느끼는 것이고요. 

 아저씨들 탓은 이제 좀 그만하라고요? 맞습니다. 병이 생겨난 건 아저씨들 책임이 아닙니다. 하지만 ‘신종플루’를 만든 건 그 아저씨들입니다. ‘신종’이란 말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예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뜻하고, 그렇기에 대비책이나 준비가 없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신무기’, ‘신상’을 연상한 다음, ‘신종플루’를 연상해보면 플루 앞에 붙은 신종의 의미는 더욱 명확해집니다. (사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이런 과정을 거치고 있죠.) 또 어떤 이는 공포를 퍼트린 건 사실이나, 해결책도 제시하고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보건소의 진료확대와 지정병원 운용, 1830운동이 대표적이겠습니다. 하지만 이 해결책은 공포를 근본적으로 해소해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더욱 강화할 뿐이죠. 물론! 제시하는 해결책도 진실이고, 액션도 진짜입니다. (그 부수적인 효과는 논외로 치고 말이죠) 하지만 이것이 포비아(Phobia)를 누그러트리진 못합니다. 오히려 강화할 뿐이죠. ‘교과서 위주로 예습, 복습을 철저히 하면서 학교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누구의 말일까요? 우리는 이 말을 믿고 그대로 공부했을까요? 사실은 이것도 진실입니다. 부정하지만 누구나 마음 한 구석에는 그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해결책으로 제시되면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을 부정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불안감을 심화시킵니다. 그래서 당연한 말들 속에 꽁꽁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는 해결책을 찾아 바삐 움직입니다. 학부모는 ‘족집게 과외’를 찾아 헤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계절성 독감 예방 주사를 맞고, 다른 청결제품을 사며, 개별적인 소비로 포비아(Phobia)에 맞서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 ‘신종플루’에 대한 정부의 대응 방식은 작년 촛불 때와는 정반대의 양상을 취하고 있습니다. 위험을 은폐하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위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검열, 국내 시장의 원산지 표시제 강화, 성분표시 강화 등등 해결책을 준비했으니, 자신들을 믿으라던 그때. 아직 해결책이 마련되지 않아서 위기라는 지금. 괴리감이 느껴집니다. 광우병의 위험은 한사코 은폐했던 아저씨들이 지금은 오히려 위험을 강조하고 강화합니다. 아니 적어도 재생산되는 포비아(Phobia)를 방치하고 있습니다. 관료화된 무능이라 치부하기에는 1년도 지나지 않은 그때와 대응 양상이 너무도 차이 납니다. 
 저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아저씨들이 생산하는 지금의 포비아(Phobia)는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 것일까요? 


4. 


 잠시 시선을 돌려보겠습니다. 지금 세계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으로 인한 금융위기와 메이도프 금융사기 사건 등 여러 악재들로 인해 경제가 침체된 시기입니다. 더군다나 이제까지 새로운 시장으로 각광받았던 중국과 인도의 성장으로 인해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기업들이 찾아 헤매던 ‘저임금 노동시장’도 점점 사라져가고 있죠. 성장은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생산은 자본, 노동, 기술로 이루어집니다. 초기에는 노동에 의존한 산업이, 그리고 중반에는 대자본에 의한 규모의 경제가 성장을 주도했고, 후기에는 기술혁신이 규모의 경제를 대체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점점 한계를 드러내고 있죠. 이러한 상황에서 블루오션(Blue Ocean)전략이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이 전략은 2005년 2월 하버드에서 동명의 단행본이 나오면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차별화와 저비용을 통해 경쟁이 없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경영전략. 산업혁명 이래로 끊임없던 경쟁을 피해, 고객조차 모르던 시장을 창출하는 것. 그로 인해 고객과 기업이 상호 윈윈(win-win)하게 되는 것. 이것이 블루오션(Blue Ocean)전략의 요지입니다. 

 이번 인플루엔자도 조금 다르긴 하지만, 일종의 블루오션(Blue Ocean)을 생성하고 있습니다. 포비아(Phobia)로 인해 생성된 소비가 바다를 늘려서 경쟁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일부 시장을 늘려버렸죠. 로슈홀딩 등 제약회사들의 매출이 급증하고 있고, 병원들도 늘어난 환자들로 인한 검진과 신종플루 확진검사(Real time RT-PCR)로 인해 꽤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 계절성 감기 주사와 의약외품 등을 구매해 여타 다른 부분도 지금 호황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대표적으로 데톨로 대표되는 손세척제 시장을 들 수 있습니다. 과거에 외국계 기업이 손세척제를 우리 시장에 풀어놓은 경우가 있었지만, 수요의 부족으로 인해 다시 철수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신종플루’는 데톨로 대표되는 손세척제 시장을 새로이 만들어 냈습니다.(여담이지만 대웅제약은 데톨을 인플루엔자가 확산되는 시기에 쥴릭파마코라이라는 회사에 넘겨서 실질적인 재미는 못 봤다고 합니다.) 이러한 공포로 인한 시장의 창출은 1999년의 Y2K공포를 떠올립니다. 당시 모두들 2000년이 되면 컴퓨터가 죄다 오류를 일으켜 세계에 엄청난 위기가 올 거라고 생각했었죠. 저도 다 믿지는 않았지만, ‘내 컴퓨터가 고장 나서 게임을 못하면 어떡하나’하고 걱정했던 기억이 납니다. Y2K공포는 역설적으로 IT사업의 부흥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때와 지금이 겹쳐 보입니다. 만약 주식을 사려고 생각하는 중이라면, 저는 과거의 IT산업 대신 의학 관련한 ‘바이오산업’쪽을 추천해 드립니다.


5.


 글을 쓰는 동안 저는 의도적으로 공포라는 말 대신 포비아(Phobia)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단어가 가장 지금의 현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포비아(Phobia)란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공포증, 공포의 감정이 강박적으로 특정 대상에 결부되어 행동을 저해하는 이상반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로는 적면공포증(홍조), 고소공포증, 밀실공포증, 선단공포증이 나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공포증 환자는 그 대상 또는 대상으로 상징되는 사물과 관련하여 과거에 자기가 위험에 처하게 되었거나 자기 욕망의 좌절 등 불쾌한 체험을 가지고 있으며, 다만 이를 억압함으로써 망각하고 있는 상태이다’라고 덧붙여져 있습니다. 저는 이 단어가 지금의 ‘신종플루’로 인한 현상을 잘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조금은 다르지만 광우병이 동인이 되어 커졌던 작년의 촛불과 이번 인플루엔자로 형성된 포비아(Phobia)와 비교하여 지금의 현상을 더욱 세밀하게 분석해보고자 합니다.


6.


 작년 촛불 때, 오른손만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던 오른손 타자들은 말했습니다. 광우병 공포는 과장되어 있다고. 그리고 촛불을 든 이들은 영화 ‘미이라’에 나오는 미라처럼 ‘이모텝’을 외치며, 광우병 괴담에 끌려 다니는 좀비들이라고. 

 놀랍게도 그들의 분석은 정확했습니다. 그들은 광우병 사태가 자신의 기본욕구를 위협받고 있어 일어선 이들의 힘이라는 것을 정확히 간파했습니다. ‘소 뒷걸음치다 쥐’를 잡은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뒷걸음은커녕 뒤도 돌아보지 않았지만, 우리의 쥐를 잡지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촛불의 행동동인 자체가 기본욕구에 의한 것. 그것을 간파하고 높은 동인으로 끌어내지 못했다는 것. 두 가지 때문이었습니다. 작은 촛불들이 광우병 위협을 의식주 자체에 대한 욕구 혹은 안전 욕구. 어느 쪽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는지는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기본 욕구가 아닌, 상위욕구를 동인으로 나선 이들은 드물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있긴 있었죠. 우리나라의 불평등한 현장에서 항상 싸워왔던 우리는 계속 거기 서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서 있기만 했습니다. 87년도 이후로, 그리고 96년도 연세대를 끝으로 우리는 사람들의 동기를 높이는 방법을 대부분 잊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단지 서 있기만 했을 뿐, 촛불들을 높이 도약시키지도, 방향성을 같이 탐색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휘청거렸고 작은 성공과 큰 실패를 맞보고 있습니다. 무수한 가능성과 함의만 남긴 채……. 

 기본욕구는 강렬합니다. 하지만 방향성과 더불어 지속성도 결여되어 있습니다. 일단 욕구가 만족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되면 여운 없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쥐를 잡지 못한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겠죠. 자신들의 것이었던 포비아(Phobia)를 강탈당한 뻔했지만, 우리는 서 있기만 했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권위와 힘을 '시간의 정치‘를 통해 지킬 수 있었습니다. 사실 포비아(Phobia)는 항상 그들 편이었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그 얼굴과 마주봐야 했었죠.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자코뱅과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같은 것들도 단지 그들에게 빌려온 ‘임시방편’으로서의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결국 빌려온 수단을 쓰던 이들 모두가 무너졌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포비아(Phobia)를 강탈당할 뻔 했던 촛불을 통해 그들도 많은 함의와 가능성을 넘겨보았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우리의 행동을 통해 포비아(Phobia)의 새로운 사용법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 사용법은 ‘자상한’ 우리가 사용할 수 없는 도구들을 통해 실현되고 있습니다. ‘엄격한’ 그들은 아들, 딸들이 ‘바른 길’-그들이 생각하기에-로 걸어가게 하기 위해서는 도구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결과는 수단을 정당화합니다. 비도덕이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가치체계는 그렇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포비아(Phobia)의 형성이나, 과장 그리고 언론 선전을 통한 재생산 등의 방법을 쓰는데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외에 그들만의 도구들을 통해 그들은, 포비아(Phobia)를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작년의 촛불이 남긴 함의를 분석하고, 그리고 다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이코프씨도 말했듯이 그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아니 어떠한 면에서는 그들이 더 뛰어납니다. 그들은 이미 새로운 사용설명서를 습득하고 실행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포비아(Phobia)를 다시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훨씬 다양한 방식으로. 이 방식은 이제 목표인 통합을 위해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생기는 균열도 받아들였습니다. 예전에는 없애려고만 했던 균열을 충분히 이용하면서 통합도 이루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죠. 여기에는 자본의 도움이 컸습니다. 포비아(Phobia)를 통합에만 사용해 독점하는 것보다 균열을 이용한 다음, 다시 재통합 시키는 것이 훨씬 유익함을, 자본이 그들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들은 이제껏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균열과정에서, 균열의 틈으로 부스러기들이 떨어지고 그것을 긁어낼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어떤 종류의 균열은 자신들에게는 전혀 해가 되지 않는 ‘불평등한 갈라짐’을 유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인플루엔자로 흔들리는 층은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상위계층이 아니라 그 반대 계층이라는 연구결과의 발표는 이를 시사 합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불평등하게 갈라짐’이 발생하고 난 다음의 과정입니다. 놀랍게도 균열을 지나 재통합의 과정에 이르면, 일종의 강제 블루오션(Forced Blue Ocean)이 생기게 됩니다. 소비가 증가해서 관련 시장의 크기 자체가 증가하게 되고, 재통합이라는 대의는 위기감을 통해 임금 노동자들이 낮은 임금과 지불연기등을 수용하게 만들었습니다 중국과 인도의 발전으로 인한 저임금 노동시장의 감소. 그리고 비정규직(노동의 유연한 해고)에 대한 공격에 지친 자본에게 이것은 ‘olleh!'를 외칠만한 일이었습니다. 포비아(Phobia)로 인한 ’불평등한 갈라짐‘과 재통합 과정에서 생기는 강제 블루오션(Forced Blue Ocean)현상을 지칭해 이제부터 블루포비아(Blue Phobia)라 부르겠습니다. 이는 불온한(Blue) 포비아(Phobia)의 과장과 그로 인해 생기는 강제 블루오션(Forced Blue Ocean) 현상을 단어 자체가 잘 표현해주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도 그들은 거대 포비아(Phobia)를 유포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레드 포비아(red Phobia)가 대표적입니다. 과거에 그들은 해결책이란 모습으로 제시된 목표를 위해 포비아를 꺼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배웠습니다. 포비아를 제시하고 그 과정을 이용하는 것이 더 유익함을. 사실 그들은 얼마 전까지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9.11테러로 무너진 세계무역센터(WTC) 자리에 생긴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는 강제 블루오션(Forced Blue Ocean)의 시작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 그들은 그라운드 제로가 무엇을 발생시킬지 모른 채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포비아를 사용했습니다. 테러와의 전쟁. 하지만 기대하지도 않던 새로운 결과가 생겼습니다. 그라운드 제로에 일종의 신경제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을 통해 이제 그들은 재통합의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균열은 어떻게 활용할지 점차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강제로 생성된 블루오션은 생산성 체감법칙의 예외를 생산합니다. 한계 생산성 체감 법칙과 블루오션(Blue Ocean)에 나오는 비용이란 말 속에 숨은 것은 ‘퍼센테이지’입니다. 강제 블루오션(Forced Blue Ocean)에서 절대가격을 상승하고(소비증가에 따라) 가격에서 임금이 차지하는 상대적 비율은 낮아집니다. 이것이 그들이 그동안 계속 고민해왔던  ‘지속가능한 개발’문제, 다른 말로 ‘개발의 지속’에 작은 빛을 비춰줬습니다.


7.


 이제 마지막으로 아직도 우리사회 깊숙이 작용하고 있는 레드 포비아(red Phobia)와 ‘신종’ 블루포비아(Blue Phobia)와의 비교를 통해 작용양상과 영향을 더 알아보겠습니다. 그전에 우선 현상을 분석할 틀을 하나 더 가져오겠습니다. 매슬로우(Maslow A)의 동기부여론이 그것입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가끔 나오는 이론이죠. ‘인간은 만족할 수 없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행동은 만족하지 못한 욕구를 채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인간의 욕구는 기본욕구(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와 상위욕구(소속감과 애정의 욕구, 존경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까지 5단계로 나뉘며 상위욕구는 하위욕구가 충족될 때 동기가 부여된다.’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분석했습니다. 1단계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 2단계 안전 욕구(Safety Need)로 나뉘는 기본욕구와 소속감과 애정의 욕구(Belongingness and Love Need), 존경욕구(Esteem Need), 자아실현의 욕구(Self-Actualization Need)로 구분되는 상위욕구. 이를 바탕으로 레드(red)와 블루(Blue)를 파고들어 보겠습니다.

 레드 포비아(red Phobia)의 역사는 참 깊습니다. 우리의 근현대와 함께 해왔고, 지금도 우리의 소통자체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레드(red)는 적을 상정한 ‘나와 너’의 논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거대적의 상정을 통해 ‘나’의 통합을 유도합니다. 레드(red)의 논리는 표면적으로 기본욕구를 공격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상위욕구를 타격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 정말 거지되고 못 산다.’라는 것이 표면적이었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소속감의 욕구’를 만들어 내서 그것을 충족시키길 요구한 것이죠. 사상 자체가 기본욕구를 공격하기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1,2번 욕구를 타격함으로써 공격받을 실체를 흐리게 했고, 한동안은 기본욕구가 가지는 폭발성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는 상위욕구의 특성에 따라 지속성도 지니게 되어 아직까지 우리를 외발로 걷게 합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레드(red)가 상위욕구의 제시와 타격을 통해 작동하는 것임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강제로 욕구를 주입시킨 ‘가해자’에 대해 대립의 각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논박하고 토론함으로써 강제로 제시된 욕구를 배제시키고 점차 레드 포비아(red Phobia)를 지워갈 수 있었습니다.

 반면 블루포비아(Blue Phobia)는 ‘적 대 적’의 논리가 아닙니다. 표면적 타격점이나 실질적 타격점 모두 기본욕구에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도구 자체는 사상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신 이것은 타격의 ‘가해자’를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것은 블루(Blue)가 레드(red)와는 다르게 강제적인 욕구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기본욕구를 ‘부재’하다고 인식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본욕구에 대한 타격이기에 지속성 대신 폭발성을 가질 수 있었고, 그것은 그들에게 장기적인 통제의 편의를 가져다 주엇습니다. 레드(red)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을 만들었던 이들의 통제를 벗어났고, 간혹 그들을 향해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블루(Blue)는 지속성이 없기에 그런 역효과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기본욕구에 대한 직접 타격은 자연적으로 위와 아래를 분화시킵니다. 왜냐하면 상위욕구는 하위욕구가 충족되어야 충족될 수 있지만, 일단 상위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된 이들은 기본욕구의 부재라는 타격에 어느 정도 냉정하게 생각해 볼 여유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죠. 더군다나 방어에도 용이합니다. ‘가해자’를 숨겨주기에 이를 공격하는 이들은 음모론으로 비춰지기 십상입니다. 왜냐하면 기본욕구의 부재는 모든 것을 논의의 뒤편으로 몰아냅니다. ‘아, 지금 같은 시기에 그런 이야기를 꺼내다니!’라는 말을 내밀면서 말이죠. 9.11테러만 하더라도, 화씨 911로 대표되는 이들이 다른 주제라면 벌써 인정되었을 만큼의 증거로 무장하고 공격을 가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아마도 우리는 높은 사람들의 입에서 직접 ‘~하세요.’란 말이 나오는 녹화 테이프를 보기 전에는 블루포비아(Blue Phobia)를 직접 인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인식을 못하면 공격자체도 어렵습니다. 

 문제는 바로 이 부분에 있습니다. 레드(red)는 사상으로 논박이 가능했고, 지속성을 가지기에 그것을 붕괴시키는 과정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블루는 그것이 블루포비아(Blue Phobia)라는 것을 인식한 순간, 이미 모든 것이 끝나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것의 결과만 남기고 말이죠. 또한블루(Blue)는 기존에 형성된 사상의 대립각을 뚫고 다른 방식으로 침투하기에 아무런 여과없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둘로만 구별해냅니다. 가진 것이 정보든 권력이든 돈이든 지식이든 말이죠. 또 블루(Blue)는 아무에게도 전쟁을 선포하지 않습니다. 개별적인 ‘부재’의 강조를 통해 파고들 뿐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싸울 수 있지만, ‘우리는’ 싸울 수 없습니다. 싸울 도구도 부족합니다. 레드(red)적인 방식에 대해서 우리는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을 꽤나 보유하고 있지만, 블루(Blue)에 대해서는 거의 전무합니다. 프로파간다, 개인이나 집단이 특정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악의적으로 조성하는 여론이나 행동을 뜻하는 이 말도 레드(red)를 공격할 때는 꽤나 효과적이었지만, 블루(Blue)에게는 날이 잘 박히지 않습니다. ‘가해자’가 너무나 꽁꽁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언론의 모습에서도 그런 곤란함이 보입니다. 그동안의 보도를 반성하고 ‘과대 공포’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긴 하지만, 그 대상이 부재합니다. 그렇기에 단지 ‘아, 거 아들 겁먹게 너무 무섭게 하지 마이소.’라는 논조를 유지할 뿐이죠. 또한 흔히 말하는 ‘좌파’인 민주노동당도 본질을 꿰뚫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국민의 복지를 위해 뱃지 아저씨들은 치료약과 대책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는 논조로 무딘 날을 꺼내고 있을 뿐입니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건, 그들이 레드(red)를 아직 포기한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의 효용성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도 레드(red)로 규정하는 것은 모든 문제에 대한 소통자체를 방해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블루(Blue)를 이번으로 끝낼 것 같지도 않습니다. ‘재미’를 충분히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광고가 문득 생각납니다. 난 레드. 난 블루. 넌? 그들은 대답하겠죠. 난 둘 다. 우리는 지금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둘 다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8.


 사람은 자기 외부에 존재하는 자기, 사회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안심합니다. 이러한 정체성과 통일성(identity)을 확인하고자 하는 개인의 욕구로 만들어진 것이 국가입니다. 그래서 엥겔스는 ‘국가와 종교의 본질’을 ‘인류의 자기 자신에 대한 불안’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권력은 바로 그 불안에 기생하고 또 그렇기에 공포를 퍼트리고 결속하게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의 블루포비아(Blue Phobia)는 방법적으로 새롭기는 하나, 본질에 있어서는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환상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그 위험성은 과소평가하지 않는 시선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중도와는 또 다른 개념입니다.

 레드든 블루포비아(Phobia)든간에 맹점은 분명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역설적이게도 포비아(Phobia)는 그 현상을 직시하고 수단만 완비해서 극복하면, 그 환상의 구조가 오히려 우리에게 힘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시도나 자코뱅과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도 여기에 일정부분 시사점을 줍니다. 포비아(Phobia)의 극복은 우리가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과 연대하게 만드는 힘의 구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죠. 그것을 위해 우리는, 우리의 소통과 이해를 가로막는 환상을 가로질러 권력이 유포하는 환상에 대한 싸움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