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프락시아' 를 읽고 
 병장 이승일 03-24 21:12 | HIT : 231 



 제가 요즘에 겪은 변화가 임정우씨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듯 싶어 용감히 글을 써봅니다. 저 자신도 이 변화의 과정중에 있을 뿐이고, 무어라고 단정지어 말하는 것은 제 능력 밖의 일임을 알면서도, 그러나 무언가 말을 할 수밖에 없군요. 

 저 역시 <데미안>을 그 누구보다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최근에 또 읽기도 했죠. 저에겐 아프락시아 (저는 '압락사스'라고 번역되어있는 책을 읽었는데.. 음 ..똑같은거겠죠?) 가 주는 의미가 너무나도 만족스러웠어요. 제가 기독교의 신을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었던 것은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선한 척 하면서도 악을 허용하는 신, 메피스토펠레스와 내기를 하는 신.ㅡ 오, 저는 그가 정말로 존재하고, 이 세상의 창조자라고 하더라도 그를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체 그가 악마보다 나은 점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것이 어째서 공의의 하나님이고 정의로운 신입니까? 그것은 독재자요, 압재자일 뿐 아닙니까? 
 만약 이 세상의 고통과 악은 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면, 그 또한 문제일 것입니다. 이 경우 기독교의 신은 단지 부분적인, 완전하지 못한 신이며, 신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아주 훌륭한 인간일 뿐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한편, 헤르만 헤세 자신이 인도 여행에서 깊은 감명을 느꼈다는 사실, 그리고 헤르만 헤세가 찬양하는 니체의 정신적 스승이 쇼펜하우였다는 사실은 우리를 한가지 텍스트로 이끕니다. 바로 우파니샤드이죠. 우파니샤드를 읽어보셨나요? 저는 그속에서 제가 상상하는 신의 형상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격성과 비인격성, 선과 악을 포함한 완전한 신의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힌두교를 믿은 것은 아니지만, 저는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최소한 이와 비슷한 어떤 것이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논리를 초월한, 선악을 초월한, 그 모든 것을 초월한 완전성을 가지고 있어야한다고 생각했죠. 문화적으로 특수화되고, '두 세계' 중 한쪽을 버리기를 강요하는 기독교의 신은 도대체가  정서에 맞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전 (정확히는 고작 어제의 일입니다.) 저는 모든 생각이 한순간에 바뀌었습니다. 아, 이것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할지 잘 모르겠군요. 상상할 수 없는 기쁨과 제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대한 자각에 몇시간 동안이나 몸서리를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은 진정으로 물질일 수 없으며, 영원한 영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악이란 궁극적으로 보자면 無에 지나지 않으며, 단지 선의 결여에 불과하다는 믿음을 말이지요. 물론 이 모든 것은 이전에도 이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었던 것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정말로, 진짜로 '사실' 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왜 선한 신이 창조한 이 세상에 악이 있느냐고요? 아니요. 악이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실체로서의 악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는 유일한 것은 선이고 진리이며 사랑일 뿐입니다.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왜곡된 진리, 왜곡된 사랑일 따름이며, 모든 왜곡이 그러하듯 그것은 단지 현상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모르기 때문에 다투게 되며,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오만에 빠집니다. 

 신은 '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선밖에 없기 때문에 선한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완전히 선한 신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우리에게 선과 악이라는 선택지가 주어져 있고, 자유 의지에 의해 그 중 하나를 택해야하는줄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자유라면 우리는 악을 택할 권리도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용기있는 사람이라면 - 예컨대 니체의 초인이라면 - 스스로 악마가 될 수도 있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진정 무지의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에겐 단지 하나의 선택지만 주어져있고, 그것을 얼마나 온전히 성취하느냐만 문제가 될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악인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는 악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단지 선의 결핍에 불과한 것이며 우리는 그에게 그것을 알려주려고 노력해야할 따름입니다. 만약 우리의 능력이 부족하여 그것이 실패한다면, 우리 자신이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의 일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를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오만이며, 이것은 본질적으로 사랑의 일종입니다. 사랑이란 당연히 선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 협소한 부분집합, 즉 자기 자신만을 향한 사랑은 우리를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이 짧디 짧은 삶을 너무나도 사랑합니다. 물질적 보상과 육체적 쾌락, 남들의 인정과 칭송의 향기는 너무나도 달콤합니다. 결국 우리는 이것에 얽매여 더 크고 완전한 실체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가장 아름답고 환희로 가득찬 무언가의 한 파편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보다 무한히 더 좋은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악이란 바로 이러한 소극적인 의미, 즉 선을 방해한다는 현상적인 의미에서만 악인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실체가 아니며, 영원할 수 없고 따라서 우리가 신의 속성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신이 창조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선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부분적으로만 그렇지요. 우리는 불변하는(것처럼 보이는) 자연의 모습을 보며 영원성에 대한 감각을 깨울 수 있고, 주변 사람들과 연인에 대한 애정을 통해 사랑을 발견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신의 영원성, 그리고 신의 사랑에 속하는 한 부분일 뿐입니다. 그것은 결코 전체가 아니며, 전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결국 극복되어야 할 것들입니다. 위대한 자연에 경이감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신이 그것을 창조한 목적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을 최고의 숭배 대상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결코 더 높은 곳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정말 삶의 아이러니와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서는 하나하나의 막대기를 붙잡을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하나의 막대기를 붙잡고 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습니다. 악이란 이렇게 절대적인 실체가 아니라 단지 상대적인 현상일 따름입니다. 마치 냉기(冷氣) 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열의 결여따른 상대적인 현상일 뿐이듯 말입니다. 때때로 '냉기' 라는 개념을 실재와 대응하는 것처럼 사용할 수 있고 그것은 심지어 유용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말하는 방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름을 가진 모든 것이 실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혼돈에 빠진 저에게 구원의 빛을 준 책이었습니다. <데미안> 과 비교해보았을 때 그것은 얼마나 더 완전에 가까운 책인지 모릅니다. <데미안>이 주었던 광명. 카인의 표식이 주었던 강렬함. 그것이 단지 진정한 기쁨의 중간 쯤에서 주저앉어버린 일종의 도착증에 불과했다는 것을 저는 <고백록> 을 읽기 전까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무지에 대한 옹호이며, 자기 자신이 남들보다 더 뛰어나다는 착각을 유지하려는 오만일 뿐이었음을 저는 알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각성은 '자각' 이 아니라는 것, 즉 자기 스스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알지 못했습니다.

 부디 무한히 높은 산의 중턱을 또다른 산의 정상으로 착각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산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병장 홍연택 
 승일씨, 적절한 때에 적절한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하네요.읽고 느낀바가 많습니다. 03-24   

 병장 안수빈 
 저도 잘 읽었습니다. 03-24   

 병장 임정우 
 신이 완전히 선한 신일지도 모른다는데는 동의합니다. 악을 선의 결여라고 말씀하신것 역시 너무나 놀랍고도 훌륭한 인식이라 보는내내 동의하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없었습니다. 

 그런데 약간의 의문 역시 생기더군요. 문제는 우리의 인식은 선의 결여를 악이라고 착각하기에서 생기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선의 결여를 악이라고 생각하는 과정 역시 선의 결여에 포함되겠지만, 이 영원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인식체계 자체가 어쩌면 '악'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만약 -이건 그야말로 만약이지만- 현 세상에서 오직 저와 승일님만이 이 진리을 깨닫고 악의 인식체계를 초월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개인은 완전한 의미에서 개인일수가 없습니다. 개인은 개인이면서 동시에 우리이지만, 우리는 우리이면서 개인일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저와 승일님의 깨달음은 의미가 없는것입니다. 만약 저를 제외한 전 인류가 진리를 깨달았다 해도 제가 무지하다면 선의 결여는 악이 될테고, 세상엔 악이 존재해 버리는 겁니다. 정말로 우연이 승리하여 전 인류가 이를 깨달았다 해도 이미 지나간 시간에 무지했던 누군가로 인해 진리가 다시 무의미해 지겠지요. 
 진리는 진리이기 때문 만으로 진리일수 없습니다. 선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바로 내일 모두가 현명하고 사랑하며 행복할지라도, 오늘 자식을 잃은 어떤 어머니의 슬픔은 모든 진리와 선, 악과 신을 산산히 부수고 말겁니다. 03-25   

 병장 이승일 
 정우 /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무한집합인 자연수의 집합은 당연히 유한한 부분집합들을 포함합니다.(예를 들어 {1,2,3} 이 있습니다.) 이 사실은 무한집합의 흠이 아니며, 오히려 바로 이렇게 모든 유한함을 부분으로 삼는다는 점 때문에 자연수의 집합이 무한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유한함과 결여가 발생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한함은 유한성에 의해 침해받지 않습니다. 자연수의 무한함이 그 부분집합의 부족함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03-25 * 

 병장 임정우 
 인간이 수학적일수 있다면 승일님 의견이 옳겠지요. 산의 정상은 실제 하나겠지만 우리들은 제각기 다른 정상을 갖고 살수밖에 없을테니깐요. 다리에 힘이 부족한 사람은 때로 그 착각을 기대어 살아가야만 할겁니다. 03-25   

 병장 이승일 
 정우 / 우리가 착각을 기대어 살아가기 쉽다고 말씀하신다면 전적으로 동의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래야한다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끔씩 슬픔에 기대어 살아가게 되는 것은, 진정한 기쁨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가능한 일이고 우리에게 자주 찾아오는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정말로 원하고 또 원해야하는 상황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아, 이 모든 것이야 말로 왜곡된 사랑의 귀결이 아닐런지요. 이것이야 말로 사랑의 경이로움을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사랑의 힘은 너무나 대단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결핍조차 사랑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완전한 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면 말입니다. 03-25 * 

 병장 임정우 
 승일님이 말씀하시는 신의 사랑이 그토록 완벽하고 경이롭다면, 우리가 굳이 산의 정상으로 표현된 진리를 향해 가야만 할까요. 우리가 산입구에 있던 중턱에 있던 정상에 서던 우리가 보는 광경은 나름에 완벽한 풍경을 보여주고 말테니깐요. 
 땅속에 묻혀있는 진리를 꺼내기 위해 우리는 맨손으로 땅을 헤집습니다. 파헤쳐진 땅속에서 작은 상자를 발견하고 상자를 엽니다. 그 안에는 새하얀 종이가 있고 우리가 그 종이를 만지는 순간 종이는 더럽혀집니다. 진리라 불리는 새하얀 종이는 우리에게 땅을 헤집는 행위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 더럽혀질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만약 그 상자안에 새하얀 종이가 있는걸 알고 미리 장갑을 구비할수 있지만, 만약 확신할수 있다면 땅을 헤집을 필요도 없겠지요. 03-25   

 병장 이승일 
 정우 | 하얀 종이는 더러워질지 모르겠지만, 유한한 것은 완전한 것에 대한 비유로 사용될 수 없습니다. 저는 어떤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성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단지 하나의 관념으로, 하나의 상으로 지각될 수밖에 없는 영원성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순간성에 의해 훼손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순간들의 무한한 모임이야 말로 영원이 아니던가요? 정우씨가 말씀하신 산 중턱의 아름다움은, 비록 정말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지만, 충분히 아름답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들입니다. 마치 우리의 영원할 것 같은 군생활이 결국은 한낱 꿈으로, 한순간 추억으로만 남아있다가 그마저 사라져버릴 운명에 처해있듯 말이지요. 더 좋은 것을 얻고자하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우리의 속성이며, 만약 한 인간이 더 좋은 것을 구하려하지 않는다면 이는 단지 그것이 정말로 더 좋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 따름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완전히 파멸시킬 용기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항의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영원함을 받아드리지 못한다면, 대체 무엇에 항의하고 있단 말입니까? 03-25 * 

 병장 임정우 
 저는 승일님의 치열함의 방식을 이해할수 없습니다. 제가 기독교를 거부하는 가장 큰 이유역시 비슷합니다. 기독교에서 그리는 신은 완벽하지만 무엇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를 믿으면 구원하겠다는 조건같은것 말이죠. 마치 흰 종이가 실제로 우리에게 흙을 파기를 요구하던 아니던 우리가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자체에서 이미 조건적인 관계를 포함되는 것처럼요. 승일님이 산의 정상을 보았고 그 형상에서 느끼신 인식은 너무나 소중하며 정상을 향해 올라가야 하는것까지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인식이 정상에 도달하는 순간에 완성된다고 믿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저는 진리가 한 점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매순간 점들의 집합이고 선이고 면이고 공간입니다. 선을 정면에서 본다면 점으로 보일테고 정육면체를 정면에서 본다면 사각형(면)으로 보일 뿐입니다. 
 참고로 저는 하얀종이를 유한에 대한 비유로 사용한게 아닙니다. 그 진리나 선이란 녀석이 자신의 의도를 떠나서라도 조건적인 무언가를 제시한다면 그것은 그순간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03-25   

 병장 이승일 
 정우 / 저 역시 같은 이유에서 기독교를 받아드릴 수 없었고, 때문에 정우씨의 감정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몰랐던 것은 그것이 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집착, 작고 유한한 것에 대한 집착을 극복하게 해주는 매체인 것입니다. 
 저는 저 자신이 특별히 치열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치열하고 안하고는 어디까지나 그가 그의 목표를 정말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누구라도, 정말로 더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치열하게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이는 단지 그것이 정말로 더 좋은 것인지 의심이 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우선 신과 그 영원성이 단지 관념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설사 그것이 실재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위해 제가 포기해야할 것들이 만만치 않아 보였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금욕 따위는 전혀 받아드릴 용의가 없었습니다. 그 달콤한 모든 것을 왜 포기해야하나요? 그리고 그러한 것으로 저를 협박하는 신을 어떻게 선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제가 정말로 포기해야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 모든 것 역시 선의 일부이니까요. 그러나 더 큰 선이 있다면, 이것 대신 그것을 좇을 것이며 이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저의 이해 역시 너무나 부족하지만, 최소한 한가지는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더 좋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진심으로 알게된다면 갈등은 자연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03-25 * 

 병장 배진호 
 승일님의 글을 잘읽었습니다.. 잠시의 공백사이에 
 몇가지 변화가 있으신듯 하네요.. 
 전적으로 공감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어느정도 
 내 마음의 울림이 있었고 승일님께서 이야기 하시려는 
 뜻은 전달이 되었습니다.. 

 선의 결여... 그 인식의 차이가 그도록 큰것이었군요.. 
 고백록이라.. 어떤 내용인지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마음의 변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전 일생의 가장 큰 궁금증은 사람이 어떻게 마음이 변화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입니다.. 분명한것은 누군가를 억지로 변화시킬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변해야 하겠죠.. 
 변화의 이유.. 특별한 것이 있을까요? 
 소통의 과정 중에도 변화가 올 수 있는 걸까요? 03-26   

 병장 이승일 
 진호 / 전적으로 공감하시기에 무리가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의견이 불완전하기 때문일테지요. 저 역시 항상 변화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정말로 인간이 변화할 수 있을까? 책을 읽고 삶이 바뀌었다는 사람, 어떤 경험을 한 뒤 바뀌었다는 사람... 등등 변화를 겪은 사람은 많지만, 그것은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부분이었죠. 변화는 언제나 그것이 직접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 존재를 결코 진심으로 느낄 수가 없지요.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중에는 물론이고 그렇지 않을 때도 찾아오지요. 변화의 이유란 정말 무한히 많은 것입니다. 우리는 무한히 작은 존재이고, 그만큼 변화의 가능성도 무한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