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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내글내생각] 언어--영혼 에 대한 소결론: "같은 시간, 또다른 세상" 을 작성한 뒤에 오래전부터 제가 개진하고 싶었던 생각들을 구체화 시키고 싶어 논문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입궁 전에 논문이라고는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는데 책마을에 와서 종종 출몰하곤 하는 괴수들을 통해 논문이란 것도 몇가지 사회적·정치적인 요인들을 제하면 그저 하나의 텍스트에 불과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기에 이러한 시도도 가능하게 된 것 같네요. 그러한 측면에서 책마을이라는 공간은 우리가 생각할 때 비록 작지만, 어떤 전체를 대표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에게는 커다란 공간이 될 수 있는 것 같구요. 전역하면 쌩 하고 지나가버리는 조각난 시절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지간에 책마을에게 감사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최근 점점 깨닫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논문인고 하니 제가 시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신비함을 느끼면서,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이 승자없는 게임에 참여해볼까 하는 마음이 자라나기 시작할 때쯤 아는 분이 한 번 읽어보라고 보내 준 텍스트입니다. 제가 읽어본 결과 그리 대단할 것 없는, 그저 몇몇 신학자와 철학자, 과학자들의 시간에 대한 의견을 나름 객관적으로 수집하여 하나로 엮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크게 인상받은 내용은 없고 단지 그러한 내용들을 글로 접해보니 제 사유의 도서관에 하나의 소스로서 꽂혀질 수 있는 정도가 된 것 같네요. 하윤주라는 분이 누군지 저는 알길이 없습니다만, 그 분이 어쨌든 역사신학 석사학위로 제출한 논문인 것 같습니다. (만약 저희 동네에도 사지방이 된다면 직접 더 찾아볼텐데 아쉬운 마음 뒤로 하고 다음 설탕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용을 크게 잘라 보면 시간에 대한 관점과 시간관의 변화를 신학적·철학적·과학적으로 간략히 조망한 후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이해와 현대물리학의 시간 이해를 다루었습니다. 사실 진작에 내용 전체를 읽고 느낀 커다란 감정과 생각들을 간략한 내용 소개와 함께 한 편의 글로 작성해 보려고 했지만, 여러가지 상황이 좋지 않아 일단 가능한대로 몇 편에 나누어 먼저 내용 자체를 여러분께 소개해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실제 텍스트상 목록과 상관없이 제가 임의적으로 엮어서 작성해 봤습니다)


1. 신학적 측면에서의 시간관의 변화

신학적 측면에서 시간에 대한 관점 변화를 논문에서는 크게 고대 이스라엘과 초대 기독교, 종교 개혁가들 그리고 현대신학자들 시기로 대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시간 이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직선적인 서구 기독교적 시간이해가 아닌 '사건'을 중심으로 한 시간이해라 할 수 있습니다. 폰 라드(von Rad)와 같은 사람은, 히브리어에 서구인들의 '시간' 개념을 위한 말이 전혀 없으며, 이스라엘이 안 것은 '채워진 시간' 뿐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령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특정한 사건 없는 시간은 전혀 생각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들은 의식 속에서 신앙을 통한 삶의 흐름을 규정하고 시간을 이해하였으며, 역사 기술에 있어서도 주제별로 연관을 시킴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구분하지 않고 시간을 이해한다고 합니다. 초대 기독교의 시간관은 신약성서에서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데, 신약성서의 시간관을 가장 분명히 설명해 주는 세 표현은 아이온(aion; age), 크로노스(chronos; a space of time), 카이로스(kairos; a point of time) 입니다. 신약성서에서 명사 '아이온'은 100회 이상, 크로노스는 54회, 카이로스는 바울서신에 30회 누가저술에 22회 나타납니다. '아이온' 이란 긴 시간, 시간의 지속, 즉 유한하든 무한하든 시간의 길이를 의미하며 전체로서 끝없이 펼쳐지는 시간이므로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영원'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쉽게 생각하면, 정형화 되지 않은 시간의 바다와 같은 이미지를 떠올려볼 수 있겠습니다. '크로노스'는 기간이나 시점을 뜻하는데, 어떤 상태나 행위의 길고 짧은 지속기간이 보통 크로노스로 표현되곤 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몇 시 몇 분, 얼마 동안 무얼 하는가 하는 따위의 일반적인 시간 개념이 아마 크로노스일 듯 싶네요.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의 시간 개념이 굉장히 서구화 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겠구요). '카이로스'는 이스라엘의 시간 이해와 가장 잘 연결되는 개념인데, 흔히 세속적인 용법으로 쓰일 때는 어떤 사업을 시작하기 알맞은 시기, 즉 기회로서의 시간 따위를 일컫는 말입니다. 성서에서 특히 계시록에서는 종말론적 사건의 결정적인 순간을 카이로스로 표현하고 있구요. 크로노스가 직선적인 시간 개념이라면 카이로스는 점적인 시간개념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수행하신 때, 바로 그 특별한 위치를 가지는 시점이 카이로스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초대 기독교의 시간관을 종합적으로 살펴본다면 그들의 시간관은 시간의 기원이나 본질에 대한 관심보다는 시간과 역사에 새 의미를 부여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종교 개혁가들 시기의 시간관은 초대 기독교와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현대의 신학자들은 시간에 대해 좀 더 확장적인 의미를 획득하려고 노력합니다. 바르트(K. Barth)와 같은 신학자는 그리스도를 '계시'와 동일시하여 '영원'이 시간 속으로 침투하여 들어오는, 그리스도 안에서 시간과 영원, 유한과 무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강조함으로써 종말론 안에서 시간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계시로서의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이라는 사건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시간이 되는 것이므로, 따라서 신약성서의 시간은 모두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증거하기 위한 시간으로 존재합니다. 쿨만(O. Cullmann)은 시간 개념을 구속사적 입장에서 보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그 중심점으로 하여 미래, 현재, 과거를 일직선상에 놓고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쿨만의 '선으로서의 시간'은 미래로 뻗어 나아가는 선이며 완전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선을 의미합니다. 불트만(R. Bultmann)은 이러한 쿨만의 시간관을 비판하면서 명제 즉, "역사라는 개념이 구속사와 결합될 때 무슨 뜻을 가지게 되는가"라는 물음으로 쿨만을 공격합니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사건이란 현재 결단하는 실존적 차원에서 하는 결단이 진정 본래적 사건이며, 그것은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실존적인 해석학의 방법론을 취하는 시간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시간이란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하여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부터 현재안으로 들어와 현실화되어 나가는 종말의 실현과정으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그의 시간성이란 미래를 향하는 즉, 시간의 미완성되어진 존재적 현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2. 철학적 측면에서의 시간관의 변화

철학적 측면에서 접근한 시간 이해는 크게 고대(아리스토텔레스, 플로티누스), 중세(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근세(뉴튼, 칸트), 현대(베르그송/후설,하이데거/베르자예프) 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대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을 운동과 관련시켜서 분석했기 때문에 그는 시간을 '운동의 수數'로 정의하는데 이 '수'라는 개념이 그의 시간에 대한 중요개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운동을 기준으로 우리가 선先과 후後를 지각할 수 있을 때에만이 시간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따라서 시간이란 선후先後에 따르는 운동의 수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합니다. 플로티누스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론을 비판하며 시간의 문제를 영원의 문제와 연결시켜 설명하려고 합니다. 플로티누스는 그의 책 <에네아데Enneades> 에서 "시간은 마음 속에서 드러나며 시간은 오히려 마음 안에 있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시간과 마음이 하나인 것입니다. 그에 의하면 우리의 마음은 그 작용 및 동작이 차례 차례로 다양한 계기 속에서 이룩되며, 마음은 영원 대신에 시간을 '생산'함으로써 마음 자신이 '시간적'이 되며, 마음은 자기로 말미암아 생긴 '세계(감성계)'를 시간에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 마음의 전개가 영원 아닌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기에 우리 마음 자신이 '시간적이 된다'는 견해인 것입니다. 중세의 시간 이해를 대표하는 사람들로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는데, 논문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로 다루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는 빠져있었습니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경험을 위주로 하는 자연적 실재론의 입장에서 그 나름의 영원에 관한 해명과 시간에 대한 규정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선'과 '후'를 수량화하여 시간을 파악하고, 운동이 없이 항상 같은 방식으로 있는 것에 있어서는 '선'과 '후'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고 파악합니다. 따라서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나 운동 밖에 있는 것'의 제일성齊一性을 포착함에 있어서 영원의 개념이 성립된다고 합니다. 이로써 영원이란 끝없는 것, 한 없는 것이어서 시작과 끝남이 없는 것이고 영원 자체는 '그 전체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어떤 '계기'가 없다고 아퀴나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근세로 넘어가면서 등장한 뉴튼의 '절대시간'이라는 개념은 굉장히 큰 의미를 지닌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천체 운동을 관찰하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수학적으로 증명하면서 상정하게 된 것인데, 그의 저작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 따르면 '절대적인 참된 수학적 시간은 그 자체에 있어서 그 독특한 본성으로부터 외부의 어떠한 것과도 관계없이 일양적一樣的으로 흐른다'고 합니다. 이렇게 뉴튼은 시간(거기다 공간 까지)을 모든 실재를 포괄하는 영구적이고 무한한 자존적인 '절대존재'로 생각하게 됩니다. 뉴튼이 측정의 대상으로서 객관적인 '절대존재'로 생각한 시간·공간을 인간의 인식주관의 '선험적 감성형식'으로 생각한 사람이 바로 칸트입니다. 그에 의하면 시간은 어떤 경험으로부터 추상된 경험적 개념이 아니라 일체의 직관의 기초에 구비되어 있는 '필연적인 표상'이라고 합니다. 베르그송은 이러한 칸트의 선험적인 시간에 맞서서 '생활하는 시간'을 지적하고 형식적 시간에 대해서는 '지속하는 시간'을 보여줍니다. 그는 직관으로서 '순수지속'을 포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생명과 함께 끊임없이 생동하는 '인식사실' 속에서 '질적 다양성' 으로서 시간을 직관함으로서 이러한 지속의 파악이 가능하다고 여겼는데, 후설은 이처럼 지속하는 나 자신의 의식의 흐름을 냉정하게 관찰하면서 그 의식의 흐름 속을 파고들어 가게 됩니다. 후설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학자 중 하나가 바로 하이데거로, 그의 철학의 최고 주제는 다들 잘 아시다시피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존재는 '시간'이라는 개념과 근본적으로 관련된 개념이라는 점에서 특징적입니다. 그에게 있어 존재는 시간이라는 지평위에서 밝혀질 그 어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존재 이해 일반(존재의 갖가지 양태나 파생태의 이해 까지)을 가능케 하는 지평으로서 시간을 해석하는 것이 우선적인 목표라고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의 생각은 존재 자체가 시간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성격이 '시간적'이라는 것입니다. 즉 존재가 '시간적'이라는 것이죠. <존재와 시간>에서 나타나는 시간은 '시간성'이라는 단어로 축약되는데 '시간성'(Zeitlichkeit)이란 '현존재의 존재'라고 다시 일컬어 집니다. '현존재의 존재'란 쉽게 말해 인간이 본래 이러이러하게 되어 있다는 그 근본적인 모습이며 따라서 현존재의 존재로서의 시간성이란 시간성이 인간의 근본적인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근원적인 시간성에 기초해서 소위 '세계시간'(배려적으로 마음쓰여진 시간, 우리가 세는 시간, 우리에게 허용되는 시간)이 가능해지며 세계시간의 완전한 구조가 시간성으로부터 파악된다고 하는 것, 그리고 그 세계시간이 평판화되고 계산됨으로써 '통속적인 시간 개념'으로서의 '지금-시간'이 파생되어 나오며 이 지금-시간도 결국은 근원적인 시간성으로부터 발원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시간론은 시간이 존재라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현존하는 인간 자신이 곧 시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르자예프는 인식의 차원에서 시간을 논한 후설이나 현존재의 차원에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시간성을 다룬 하이데거와는 달리, 시간의 이면성(二面性)을 논하였습니다. 그에 의하면 변화가 시간의 소산이 아니고 시간이 변화의 소산인 것입니다. 가고 오는 것과 지속은 바로 시간의 본질적인 이면성이며 이 지속은 항상 생동하는 지속인데, 이것은 생성하는 자연 및 변화하는 주위환경과 더불어 질적 다양성을 지니는 지속인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은 우려와 희망, 불안과 환희, 염려와 해방과 같은 이중성을 지니며 이러한 시간의 병에서 극복되는 길은 베르자예프에 의하면 순간만이 영원에 참여하는 것이며 따라서 현재의 창조적 활동 속에서만 극복될 수 있습니다. 

40.6.1.143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12-10
10:31:20 



상병 윤정기 
22.33.1.117   흥미로운 글이네요. 
예전부터 시간의 방향성에 대해 생각해본적이 많았는데, 좋은 글을 써주신것 같습니다. 
다만, 몇가지 의문이 듭니다. 먼저, 불트만의 시간에 관한 생각입니다만, 

'그에 의하면 시간이란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하여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부터 현재안으로 들어와 현실화되어 나가는 종말의 실현과정으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그의 시간성이란 미래를 향하는 즉, 시간의 미완성되어진 존재적 현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 불트만의 생각과는 반대의 방향인 전자를 상정하고 있는데요, 
좀 헷갈립니다. 그렇다면, 시간이 과거로부터 미래로 흘러간다는 것은 완성되어진 존재적 현실을 가정하는 겁니까? 그리고 미래로부터 시간이 현재로 흘러들어온다면, 그것은 존재의 현실을 미완성으로 상정하고 다시 미래를 향하게 되는 것입니까? 

그리고 2번 글에서, 
'하이데거의 시간론은 시간이 존재라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현존하는 인간 자신이 곧 시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라는 것은 결국 시간과 존재, 존재와 시간이라는 것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듯 하다가도, 유동성이라는 개념에 있어서 시간의 우위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결국, 저는 이러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존재와 시간의 관계에서, 그 방향성이란, '고정된 인간의 존재가 유동적인 시간에 의해 유동당하는 형태'로 서로 맞부딪히며 흘러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왜 존재는 시간이라는 유동성을 통해서 유동성을 획득하게 되는가 하는 생각도 들구요. 
그래서, 좀 불확실한 말입니다만, 히브리어에는 '정지' - 즉, 서양의 관점에서 물리적 정지를 가리키는 단어가 없었다고 합니다. 모든 사물은 항상 움직이는 '변화'의 상태에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이것을 시간과 존재의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결국 한 사물의 존재 자체는 항상 변화하고 있으므로, 시간은 존재의 변화를 정당화시켜주는 역할을 하는것 같습니다. 즉, 우리는 시간에 의해서 존재당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물의 변화, 즉 존재의 항상성있는 변화에 의해 시간으로부터 존재의 정당성을 획득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제가 말해 놓고도 헷갈리네요. 허헛. 존재와 시간을 읽고도 헷갈리는 1人이었습니다.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2009-07-20
16:59:48




상병 진수유 
40.6.1.143   1. 불트만의 시간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과거→현재→미래 의 순으로 이해하는 시간흐름을 거꾸로 이해하고 있다는 데서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시간이 미래로부터 과거로 흘러간다는 그의 시간 이해는 다분히 종말론적인 관점이 결부되어 있음에 분명합니다. 

'그에 의하면 시간이란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하여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부터 현재안으로 들어와 현실화되어 나가는 종말의 실현과정으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그의 시간성이란 [미래를 향하는] 즉, 시간의 [미완성되어진 존재적 현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위 문장에서 [미래를 향하는] 과 [미완성되어진 존재적 현실] 은 동치라고 보입니다. 즉, 불트만은 현재적 시간에서는 [미완성되어진] (것으로 보이는) 실제적(존재적)인 '하나님 나라', 그러나 반드시 도래하고야 말 기독교적 최후 종말을 '미리' 확신하고 그 [존재적 현실] 의 실현 과정으로서 역으로 이해하는(해야만 하는) 시간의 흐름을 상정한 것입니다. [미래]를 향한다는 의미는 바로 그러한 '종말'을 향한다고 이해하시면 맞을것 같네요. 이와 같은 시간 이해에서 불트만은 현실의 모든 시간들에 '목적성'을 부여한 것이고 그러한 '목적성'에서 인간의 모든 행위와 역사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죠. 정기님께서 과거→현재→미래 순으로 시간을 이해하신다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시간 이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불트만에게 있어서 특수하게 적용되는 위와 같은 단어나 맥락들 때문에, 정기님이 이해하시는 시간 흐름에 대해서 같은 명제에 역을 구한 문장이 적용되기란 쉽지 않을 것 같네요. 


2. 먼저 정기님께서 말씀하시는 '유동성' 의 개념을 정확히 포착하기 어렵네요. 정기님의 생각을 두가지로 요약해보면 이런 것 같습니다. 

1) 인간은 고정적인 존재이다. 시간은 유동적인 것이다. 인간은 시간에 지배를 받게끔 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은 유동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2) 모든 사물(존재?)은 항상 변한다. (변화는 존재의 증명, 즉 '존재 자체'처럼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시간도 항상 변한다. 따라서 존재란 시간에 의해 스스로에 대한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하이데거의 <시간과 존재>를 읽어보진 않았지만, 제가 느끼기에 그는 아마 존재의 가장 확실한 분석을 위한 접근으로서 시간이라는 기제를 끌어들인 것 아닌가 싶습니다. 즉 존재에 대해 고민할 때 그는 먼저 스스로에 대해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고민에서 시간이라는 고민이 함께 엮여 나온 것이고, 시간이라는 고민에서 존재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해결점이 도출되어 나온 것이죠. 하이데거의 시간성에 저도 꽤나 인상을 받았는데 저는 약간은 다른 설명을 해보고 싶습니다. 아직 내용 소개가 끝나지 않았으니 2편에도 계속 이어질 이야기들을 종합해서 한 편의 글로 제시해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건만 가능하다면야 텍스트를 책상 위에 보란듯이 펼쳐놓고 요리조리 맛있게 써 볼 수도 있었겠는데요, 첫번째 글을 올린 이후로 밀려오는 업무와 설탕 때문에(..) 계속 미뤄두고 있었습니다. 최근 제가 있는 곳의 상황 또한 여러모로 좋지 않아서.. 양해의 말씀 부탁드리고요, 약간은 불편하고 죄송한 심정으로 두번째 글을 올려보겠습니다. 아래와 비슷한 내용을 접해보신 분들이 아마 책마을에는 많으시리라 짐작됩니다. 아래 내용은 '거의, 다' 논문에서 발췌했으며 임의로 재단한 것임을 밝혀드립니다. 실제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은 어쩌면 이 다음에 있지 않을까 싶은데, 일단 이것으로 내용 자체에 대한 소개는 거의 끝나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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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과학적 측면에서의 시간관의 변화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과거 전통사회들이 역사적이고 선적인 시간에서 벗어나 신비적이고 신성한 시간 즉 '위대한 시간'으로의 주기적인 복귀를 동경해 왔다고 하였다. 또한 플라톤의 순환하는 우주에 대한 주장은 그리스인들과 이후 로마인들의 사상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체의 운동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시간의 근본적인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지만 시간이라는 개념을 구체적인 수학적 변수로 도입시키는데 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시간은 운동이었다. 이 발견은 당시 거의 혁명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태양의 움직임이든 시계판 위의 시계바늘의 움직임이든, 우리는 시간을 운동을 통해 인식한다. 사물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시간의 개념, 그 자체의 독자적 실재로서의 시간 개념은 유럽의 중세 말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과거의 모든 인류 문화에서는 자연 속에 들어있는 질서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으며 이는 그 질서에 대해 명확하고 객관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된 근대과학의 등장 이후에야 가능했다. 기록에 따르면 시간은 우주의 법칙과도 같은 활동성 중에서 기본적으로 측정 가능한 양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정립한 사람은 갈릴레오였다. 갈릴레오는 자신의 손목의 맥박으로 램프가 흔들리는 시간을 측정해서 진자(振子)의 주기가 진폭과 무관하다는 법칙을 발견하였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유럽 전역에 정밀시계의 시대가 도래하였고 기능공들은 날로 정확한 계시기(計時機)를 고안해 냈다. 17세기 말 뉴튼의 연구를 통해 우주의 법칙에서 시간이 차지하는 결정적인 위치가 드러났다. 뉴튼은 자신의 글에서 "절대적이고 진정한 그리고 수학적인 시간은 그 자체로 그리고 그 본질로 인해 그 이외의 어떤 것과의 관계도 없이 한결같이 흐른다."고 쓰고 있다. 뉴튼의 전체 이론 체계의 핵심은 물체는 공간 속에서 '예측 가능한' 경로를 따라 움직이며 그 운동은 엄밀한 수학적 법칙에 따라 물체를 가속시키는 여러 가지 힘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런 법칙들을 발견한 뉴튼은 투사체의 경로와 지상 물체들의 움직임 뿐 아니라 달과 행성의 운동까지 계산할 수 있었다. 이것은 물리적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이해의 거대한 진전을 의미하였다. 사람들은 뉴튼의 역학법칙을 문자 그대로 우주의 모든 물리적인 과정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이러한 믿음에서 우주는 거대한 시계장치 메커니즘으로서 가장 미세한 세부에 이르기까지 예측이 가능하다는 우주관이 등장했다. 우주는 시계장치로서 물리적 세계의 작동으로 시간을 가장 근본적인 변수로 간주한다. 역학법칙들에 도입된 시간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이며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시간이고 이 시간은 우주라는 거대한 시계 장치에 의해 충실하게 지켜졌다. 시간은 인과관계의 법칙을 포괄하며 우주의 합리성 자체를 집약하고 있다. 또한 이 시간은 이 세계에 '시계공으로서의 신'이라는 강력한 상(像)을 제공해 주었다. 뉴튼은 엄격한 결정론, 무한히 정밀한 법칙적인 원리들 속에 맞물려 있는 생명없는 입자와 힘들로 이루어진 세계로서의 우주를 인류에게 준 것이다. 뉴튼 이래 시간의 경과는 의식의 흐름 이상의 무엇이 되었다. 시간은 물질적 세계를 기술할 때 근본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고 무한한 정확성으로 해석될 수 있는 무엇으로 간주되었다. 뉴튼을 통해 시간은 엄밀하게 측정 가능한 차원으로 개념화되었다. 이러한 뉴튼의 시간은 2세기 동안 세계를 지배하였고 서구에서는 그 시간에 대해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을 엄밀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보는 단순한 견해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보편적인 시간에 대한 뉴튼적인 개념은 물체의 운동과 광신호의 움직임 등에 대해 역설적인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 후 뉴튼적 세계관은 몰락했고 그와 함께 시간에 대한 상식적 관념도 무너졌다. 이러한 전환의 길에는 한 물리학자의 연구가 있었고 시간의 개념은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시작된 이래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해석되게 되었다.

4. 현대 물리학의 시간 이해

아리스토텔레스와 뉴튼은 모두 절대시간을 믿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우리가 두 사건 사이의 시간 간격을 명확하게 측정할 수 있으며 정확한 시계를 사용하기만 한다면 이 시간은 누가 측정하든 똑같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공간과는 완전히 분리되었고 아무런 관련도 없는 전혀 별개의 무엇이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식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비교적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사과나 행성과 같은 사물을 다룰 때에는 우리의 분명한 상식적 개념이 제대로 작동하지만, 물체가 빛이 속도나 그에 가까운 빠르기로 움직일 때에는 전혀 소용이 없게 된다.

A. 아인슈타인의 등장

1887년부터 1905년 사이에 마이컬슨과 몰리의 실험결과를 설명하기 위한 여러 차례의 시도가 있던 중 1905년 특허국 서기로 근무하던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은 절대시간을 폐기하기만 하면 에테르라는 개념 자체가 전혀 불필요하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즉 아인슈타인 이전 과학자들은 물질의 입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과 그 입자들이 힘의 작용 아래에서 움직이는 방식을 설명할 수 있다면 물리학이 완성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따라서 모든 것은 힘과 운동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입자 자체, 그리고 입자들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 시공(時空)이라는 무대는 기정 사실로 간주하였고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물음을 제기하지 않았다. 시공은 신에 의해 주어진 것이었다. 만약 자연을 우주의 내용물, 즉 물질을 구성하는 여러 입자들이 배우이고 시간과 공간이 무대인 거대한 우주적 드라마에 비유할 수 있다면 과학자들의 역할이란 전적으로 그 줄거리를 구성하는 일로 제한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과학자들에게 있어서 아인슈타인의 등장은 배역과 무대 사이의 분리가 인위적이었음이 밝혀짐이었다. 시간과 공간 자체도 배역의 일부였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에게 있어서 시간과 공간은 단순히 불변하는 자연의 배경으로 '거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시 변화될 수 있고 물질과 마찬가지로 물리법칙에 따르는 물리적인 대상인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을 물리적 세계의 필수적인 구성요소로서 자연의 핵심이라는 올바른 위치에 복원시킨 것이다.

B. 상대성 이론

1905년에 출판된 소위 특수 상대성 원리 이론은 물체의 운동과 전자기(電磁氣) 교란에서 오는 전파 사이의 갈등을 해소시키려는 시도에서 생겨난 것이다. 1905년 논문의 세부 사항을 여기서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시간과 어떤 관계를 가지며 그 의의는 무엇인지를 알아볼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전기역학 이론 그리고 그 이론에 의해 도출된 빛의 고유한 속도를 버리고 싶지 않았고 따라서 그는 과감한 도약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등속(等速)운동의 상대성과 광속의 불변성을 상대성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이론의 근본원리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요구는 분명 모순적으로 보였다. 만약 운동이 상대적이라면 빛의 펄스는 관찰자의 운동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화하는 속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따라서 빛이 일정한 속도를 가질 수는 없다.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과학의 시초 이래 의문의 여지없이 가정되었던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시간과 공간의 보편성이라는 개념의 포기였다. 이 새로운 상대성이론의 가장 중요한 결론은 뉴튼이 주장했듯이 시간과 공간이 모든 관찰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방식으로 영원히 고정되어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시간과 공간은 어떤 의미에서 유연하며 관찰자의 운동에 따라 늘어나거나 오그라들 수 있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1) 시간의 확장 효과

아인슈타인은 실제로 시간이 탄력성이 있으며 운동에 의해서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는 1941년 시카고 대학의 데이비드 홀(David Hole)과 브루노 로시(Bruno Rosy)에 의해 시간 확장 효과로 실험적으로 확인되었다. 지구에서 150광년 떨어진 독수리 자리에 PSR 1913+16이라는 연성 펄서가 있다. 이 천체는 다 타버린 한 쌍의 응축된 항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항성은 1초에 수차례 자전하며 엄청난 자장(지구 자장의 1조배)으로 인해 발전기와 같은 기능을 한다. 그 자장 속에는 궤도를 벗어난 미전자(미전자, stray electron)들이 엉켜서 거의 광속과 같은 속도로 가속되어 있다. 원궤도 속에 억지로 갇혀 있기 때문에 전자빔은 마치 등대처럼 우주를 쓸고 지나간다. 이 천체에서 방출되는 펄스(pulse, 지속시간이 매우 짧은 전파)는 지구에 도착하여 대기권 상층부의 원자핵과 충돌을 일으켜서 소립자로 지상에 도달한다. 이렇게 생성된 입자들은 대부분 극히 순간적으로 붕괴해 버리지만 그 중에서 오랫동안 살아남는 입자들이 있고 이 입자들을 '뮤온(muon)'이라 부른다. 뮤온은 전자와 흡사하지만 일반적인 물질과는 강한 상호작용을 일으키지 않으며 그 대부분은 지상에까지 도달하고 일부는 지하에까지 내려간다. 뮤온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에 반감기가 약 2 마이크로초에 불과하다. 뮤온은 가장 빠른 속도로 달릴 때는 빛의 속도에까지 도달한다. 그런데 수백만의 1초 동안 빛이 달릴 수 있는 거리는 채 1킬로미터에도 못 미친다. 따라서 약 20킬로미터 상공에서 우주선 효과에 의해 생성된 뮤온들은 지상에까지 도달하기는커녕 지상 근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뮤온들은 지상에서 검출되며 지하에서도 뮤온은 발견된다. 이 모순을 설명하는 열쇠가 바로 시간확장 효과인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시간확장 이론에 따라 뮤온이 빛의 속도와 가까운 속도에 도달하면 그 시간은 고도로 뒤틀리게 된다. 지구에 고정되어 있는 우리들의 준거들에 대해 운동하는 뮤온의 시간은 상당히 늘어나게(약 1천배) 된다. 따라서 고속으로 진행하는 우주선 뮤온은 지구 시간으로 수마이크로초에 붕괴하지 않고 지상까지 도달할 수 있을 만큼 오랫동안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로시와 홀은 뮤온의 속도가 빠를수록 존속시간이 길어진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싶었고 그 결과 느린 속도의 입자들이 빠른 속도의 입자들에 비해 무려 3배나 빨리 붕괴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 실험으로 인해 특수 상대성 이론은 완전히 검증된 것이다. 그리고 1971년 10월 이루어진 실험은 아인슈타인이 공식을 더욱 명확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이 실험은 세인트루이스 워싱턴 대학의 하페일과 리처드 키팅이 세슘 원자시계(주1)를 네 개 빌려서 여객기에 장착하고 처음에는 동쪽으로, 다음에는 서쪽으로 세계를 일주한 것이다. 여객기가 광속의 100만분의 1이하의 속도로 날았기 때문에 실제 여객기의 시간워프는 극히 작으나 원자 시간은 감지해 낼 수 있었다. 동쪽 비행을 마치고 돌아온 네 개의 시계들은 연구소에 놓아둔 표준 원자 시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균 59나노초(1나노초는 10억분의 1초) 늦었고 서쪽으로 비행한 시계들은 평균 273초 빨랐다. 동서 방향 비행이 각기 이런 차이를 빚은 이유는 아인슈타인의 주장대로 지구의 자전으로 인한 시간 확장 효과가 나타난 것이었고 이 효과를 빼자 여객기 운동으로 발생한 시간 확장 효과가 나타났다. 이러한 실험들을 통해 시계가 운동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2) 쌍둥이 효과

시간의 비틀림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인데 한 가지 현상은 '쌍둥이 효과(twins effect)'라고 하는 것이다. 쌍둥이 중의 한 명이 거의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근처의 별에 다녀왔다고 하자. 로켓이 되돌아왔을 때 지구에 남아 있던 그의 쌍동이 형제가 열 살을 더 먹은 것에 비해 그는 한 살 밖에 먹지 않은 것이다. 높은 속도 덕분에 그는 지상에서 10년이 흐르는 동안 1년의 시간 밖에 체험하지 않은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여기에 중력의 효과를 포함시키기 위해 그의 이론을 일반화시켰다. 그 결과 생겨난 일반 상대성이론은 중력을 하나의 힘으로써가 아니라 시공간 기하학의 비틀림에 참여시킨다. 시간은 지구의 중력이 약해진 우주 공간에서 더 빨리 달려간다. 따라서 중력이 강할수록 시간의 구부러짐은 더 심해지는 것이다. 여기서 시간은 단순히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우주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시간은 공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공간이 3차원이라면 4차원은 시간이 한 축으로 차지하는 차원이 되는 것이다. 시간은 이제 신성불가침의 속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조작에 의해 물리적으로 변경 가능한 물리적 과정인 것이다. 이제 과학자들은 보편성이라는 족쇄에서 시간을 해방시켜 관찰자 각자의 시간이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흐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우리는 지금까지의 시간에 대한 몇 가지 가정을 버릴 수 밖에 없다. 첫째는 '지금'이라는 것에 대한 보편적 동의는 가능하지 않다. 쌍둥이 실험에서 로케트에 탄 쌍둥이 형제는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지구에 있는 내 쌍둥이 형제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러나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시간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에 로켓 안에서의 '지금'은 지구에서 판단한 '지금'과는 상당히 다르다. 보편적인 '현재 순간'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일어나고 있는 두 사건 A와 B를 한 사람의 관찰자는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판단하는 반면에, 다른 관찰자는 B가 일어나기 전에 A가 먼저 일어난 것으로 판단할 것이다. 또 다른 관찰자는 B가 먼저 일어난 것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둘째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구분을 파괴한다. "화성에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라는 따위의 질문은 그 별에서 특정한 순간을 지나가면서 같은 순간에 같은 질문을 하는 우주비행사는 화성에서의 다른 순간을 언급한 것이 된다. 우리는 미래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며 아마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추측한다. 그리고 과거는 가버렸으며 기억에 남아 있긴 하지만 되돌이킬 수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과거, 현재, 미래는 똑같이 실제적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과거는 다른 사람에게는 현재이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미래이기 때문이다.


주1) 세슘 원자 시계는 원자시계 중 하나로서 전세계의 '표준시계'를 만드는데 기준이 되는 시계(독일에 있는 세슘 시계가 가장 정확)이다. 이 시계에 의하면 1초는 세슘원자의 9,192,631,770회의 충돌을 뜻한다. 

40.6.1.24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12-10
10:28:01 



병장 김예찬 
48.9.2.115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절대적이거나 보편적인 것은 '없다'는 거대한 충격을 가져온 사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2009-08-26
14:47:18




상병 진수유 
40.6.1.143   오타가 많았네요. 아시다시피 이제 여기에 양자역학까지 가세하면.. 정말 겉잡을 수 없어지죠. 2009-08-27
17:09:40




상병 홍령건 
26.5.2.222   아인슈타인 정말 천재인것 같아요 저런걸 어떻게 생각하지? 음 단순한 행정학도에게는 물리학이란 정말 오묘하고도 난해한 학문이군요. 사회구조 모델 분석보다. 2009-08-27
20:39:01




일병 심현주 
26.1.1.139   '뮤온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에 반감기가 약 2 마이크로초에 불과하다.' 
라는 문장이 두번 나온 것 같아요. 
그나저나 인정하기싫지만 아인슈타인은 뛰어난 인간이었네요. 일단 상대성 이론만으로도 끄응. 2009-08-27
21:34:35




상병 진수유 
40.6.1.143   정정 감사드립니다. 쿤이 말했듯이 과학혁명이란 갈릴레오, 뉴튼, 아인슈타인 뭐 이런 굵직한 인간들에 의한 완전한 패러다임 변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맞는듯 합니다. 인류 역사의 천재들이죠. 2009-08-27
21:58:29




병장 김예찬 
48.9.2.115   신기한건 유독 '천재들'이 한 시대에 몰려서 태어나서 서로 상보적으로 작용하여 이런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끌어낸다는 사실 같습니다. '세계 물리학 대회' 라는 유명한 짤방이 생각나네요. 2009-08-28
08:56:28




상병 진수유 
40.6.1.143   1. 패러다임 전환이 가능하기 위한 과정이 다수에 의해 다소 필연적으로 진행되어 있었고 
2. 그것의 막바지에 드러나는 사람들은 동시대에 쉽게 '천재들'의 반열에 들 수 있으나 
3. 결정적인 4번 타자는 결국 다른 '천재들'과도 구별되는 한 명의 '천재'? 
4. 그 '천재'에 의해 '천재들'이 정말 '천재들'이 되고, 
5. 새롭게 등장한 패러다임이 다시 일반화 되면서 또다른 패러다임의 준비가 진행되고.. 

천재는 어째서 천재인 걸까요. 지난 번 읽었던 A.L.바라바시의 <링크>가 어렴풋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천재 없는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정말 죠커에 의해 고담시가 의미를 얻게 되는 것인지. 2009-08-28
11:04:13




상병 진수유 
40.6.1.143   한 가지 덧붙이자면, 상대성 이론을 이해할 때 중요한 두 가지 생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등속 운동의 상대성과 광속의 불변성입니다. 아인슈타인이 (본인 스스로는 굉장히 견디기 힘든 시간들이었다고 회상하는) 김나지움에서 수학할 때 이런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만약 내가 거울을 든 채로 빛의 속도로 우주를 날고 있다면, 과연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저는 이러한 문제 설정이 한 인간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상당한 충격을 받습니다. 오늘날 희대의 천재 과학자로 여겨지는 아인슈타인이 바로 어린 시절 어쩌면 단순한 호기심에서 발생한 이 질문 하나로부터 만들어 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빛의 속도로 운동하는 물체가 거울을 보기 위해서는, 자신으로부터 반사된 빛이 그만의 속도로 다시 거울에서 반사되어야만이 거울에 비친 상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따르면 이 질문의 답은, '그렇다' 입니다. 각각 등속 운동을 하는 개별자가 상대성을 지니면서 동시에 광속만은 유일하게 불변한다는 묘한 모순을 타개한 지점에서 시간과 공간의 새로운 정의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우주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2009-08-28
11:25:14




상병 정성근 
24.49.1.109   흐음. 절대시간이 없으며 시간도 '변할 수 있다' 라는 건 블랙홀이란 존재가 증명합지요. 
중력이 무한대에 가까워지면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까지도 왜곡합니다. 결론적으로 블랙홀 내에서는 보편적인 물리법칙이 말소된다고 보면 됩니다. 

뮤온을 보니 '광속의 벽'이란 개념도 떠오르는군요. 우리의 관점에서 빛의 속도란 벽은 넘을 수 있을 것 같으나 실제로 빛의 속도를 초월하는 순간 오히려 빛의 속도를 넘기 이전의 상태가 더 빠른 상태로 보인다는 것이죠. 결국 현대 과학은 어쩌면 인간의 관념의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인간의 기준에서 보는 과학이 되는 걸지도... 2009-09-02
03:3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