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가 대상에 처음 부여될 때,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들이 있다. 고전(古典)이 그 한 예인데, 고전이란 그저 옛날에 쓰여 진 책을 말하는 걸까? 화석 이외의 오래된 돌이 지질학적 가치 이상을 갖지 못하듯 그저 오래되기만 한 책에는 이 꼬리표를 붙일 수 없다. 화석을 발굴하듯 후대의 사람들이 그 책을 책장 깊숙한 곳에서 끄집어냈기 때문에 이 책을 오래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오랫동안 읽혀온 책이라면 그저 오래되었다고 말하기 보다는 오랫동안'살아남았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고전은 읽을 때마다 색다른 느낌을 주는데, 이는 독자가 읽을 수 있을 만큼만 읽히면서 마치 독자와 함께 성장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전'이라는 말에는 책에 대한 인간의 경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문화가 밈meme에 의해 전승되고 발전해 왔다면 고전은 문화의 바이블일 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책의 주인공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2천년도 전 그 첫 장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그는 살아있을 때는 알렉산더의 스승으로, 죽은 뒤에는 아랍의 수학, 기하학, 동물학뿐만 아니라 이슬람 계율에까지 영향을 주었고 중세 신학의 이론적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는 정도의 이야기는 교과서에도 나온다.
그것도 모자라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경제도 이야기했단다. 대체로 옛날 학자들은 오지랖이 넓은 편이다. "아니, 철학 교과서에나 나오던 아리스토텔레스가 경제를 말했다고?" 그런 순수한 호기심에서 이 책을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넣은…건 아니었다. 도저히 물리를 공부할 수 없겠다는 좌절감에 인문계로 진로를 바꿨지만, 그래도 인문학을 공부할 사람이라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갑자기 내 맘을 엄습한 의무감과, 한편으로는 기껏해야 고등학교 일학년이-매달 용돈으로 게임잡지나 사보던 내 주제에-어떻게 아리스토텔레스'님'을 원전으로 이해할 수 있겠냐는 공포감의 절충이 이 책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클릭 한 번에 계산을 끝내고 책을 받아 집 책장에 박아 넣었던 게 2001년 어느 날이었고, 책장에서 이 책을 꺼내든 게 2007년 1월이니, 대충 잡아 6년은 묵힌 셈이다. 고전을 대하는 내 태도가 참으로 경건했음은 이미 그 숙성기간이 말해주었다. 이제야 책을 펼칠 마음의 준비가 된 셈이지.
칼 폴라니에 의하면, 현대적인 '시장경제'의 원류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가 이 내용으로 쓴 책의 제목은 "Aristotle Discovers the Economy" 이다. 제목에서부터 뭔가 느껴지지 않는가!)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장을 발견했다면 그 시절에도 시장Market place이 존재했다는 말이다. 또한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살고 있던 고대 그리스에서 시장이 최초로 형성되었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수메르나 이집트, 아시리아 등 당시 번성하던 주요 도시 및 국가에 시장은 없었고 가장 번영했던 고대 페르시아에서도 장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니, 이 말은 거의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고대 그리스인은 민주주의를 만들고도 모자라 시장까지 만든 것이다. (대단하다고 생각할 것까진 없다. 우린 인터넷 민주주의는 못 만들었지만 온라인 세상에 게임 아이템 시장을 만들었으니까 이 친구들 업적의 반 정도는 따라잡은 셈…일까?)
고대 그리스인이 민주주의를 만들고 시장까지 만들었다는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가'경제'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음을 의미한다. 요즘 사람들이라면 '민주주의와 시장'이라는 조합이 뭐가 어떠냐는 물음이 당연히 나올 것이다. 너무 익숙하니까.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눈에는 그 조합이 이질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왜?
우선 시장이 왜 만들어졌는지 살펴보자. 흥미로운 건, 그 당시에도 시장은 민주주의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당시 아테네 최고의 부자였던 정적(政敵) 키몬이 돈과 파티로 사람들을 매수하며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넓혀가자, 민주정을 수립하려던 페리클레스(이 이름이 낯이 익다면, 중학교 때 공부 좀 하신 분일 겁니다.)가 내놓은 대항책이 시장이었다. 우선 그는 시민(물론 성인 남성이고, 대개는 가족과 노예를 먹여 살려야 했던 가장이었다.)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거쳐야 하는 공직을 유급제로 만들었고, 급료를 이용해 필요한 물품을 구할 수 있도록 시장을 만들었다. 이를테면 '사람들의 재산으로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자'는 것이다.
공직자들에게 급료를 지급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폴리스를 위해 '봉사하는' 개념에서 급료를 받기 위한 '돈벌이 수단'으로 정치가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더불어 수요와 사용량이 늘어나기 시작한 화폐는 기존 농업이 주가 되었던 폴리스의 경제적 기반을 뒤흔들었다. 토지가 갖고 있던 경제적 가치를 화폐가 대신하면서 돈벌이에 연연하는 풍토가 만연하게 되고, 이후 외부의 침략 때문에 흩어져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아테네 성 안으로 들어와 살면서 화폐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커지게 된다. 폴리스가 추구해야 했던 행복한 삶-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집단적 좋음"에 따라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한 발현하는 것-이 물질적 욕망의 추구로 변질되었고, 결정적으로 자급자족이 불가능해지면서 사람들이 생계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배부르고 등 따셔야" 사람들은 공동체를 의식하기 시작한다. 돈은 토지처럼 항상 가질 수 없기 때문에, 항시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공동체의 구성원이란 그저 살기 위한 경쟁의 무대이고, 공동체 내에서의 활동은 오로지 돈벌이로 치환된다. 지금 들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돈이 곧 사람이다"라는 말은 이 때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처럼 타락해가는 폴리스Polis를 회복하기 위해 본래 폴리스가 갖고 있었던 공동체정신을 회복하자는, 이른바 원리주의자였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시장은 비록 민주적인 폴리스를 확립하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동시에 바로 그 폴리스를 무너뜨린 재앙의 시작이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대안을 제시했는가?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는 과거로의 회귀를 추구하던 일종의 원리주의자였고, 해답 또한 과거의 유산에서 찾으려 했다. 그 해답은, 지금의 우리가 들으면 깜짝 놀랄 일이지만, 바로 "선물"이었다. 과거 폴리스는 자급자족이 가능한 사회체제를 갖고 있었고, 경제활동은 선물을 통해 이루어졌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준다. 그리고 그걸 받은 사람은 이후에 자신의 물품을 제공한다. 이것은 물물교환과는 다르다. 선물에는 물물교환이라는 행위가 가진 즉결성-상대가 내가 준 물건에 상응하는 것을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망설임과,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등에 의한-과 반드시 그 대가를 바라는 태도, 교환가치를 평가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보이지 않는다. 시장이 탄생하기 전 그리스인들은 선물을 주고받는 호혜적인 행위를 통해 필요한 물건을 얻을 수 있었음은 물론, 공동체 안의 유대감을 강화하며 미래의 위협에 대비할 수 있었다.
선물로 경제체제를 유지한다? 몇 번을 되뇌어 보아도 재미있는 말이다. 물론 마르크스가 평가했던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경제체제를 분석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자신의 형이상학적 지식을 활용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발견한 선구적인 이론도 등장한다. 이 글에선 주제에 좀 어긋난 것 같아서 쓸 수 없었다) 대안을 제시하는 데에는 실패했을 지도 모른다. 이 책에 매혹된 내가 봐도 선물로, 혹은 비슷한 개념의 제도로 현재의 경제 규모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호혜성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체제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과 인간에겐 그런 호혜성을 기반으로 한 경제체제가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은 몇 가지 시사점을 준다.
첫째. 우리가 '절대적'이라 믿고 있던 시장을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과, 둘째. 경제는 경제 단독으로 논할 수 없으며, 사회 속에서 분석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경제만으로는 사회를 설명할 수 없다. 지금의 경제학이 가정하는 '경제인' 개념과는 다르게 인간은 희소성만을 추구하지도 않으며 경제적인 효율성을 행위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지도 않는다. 돈을 추구하는 현상이 돈이 가진 교환가치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사회가 돈을 많이 가진 자에게 부여하는 권력을 획득하기 위함이기도 한 것처럼, 그것이 절대 효율적인 행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반환하는 포장마차 할머니가 존재하고 그 행위가 박수를 받는 것처럼 인간과 사회는 수요-공급 곡선과 공식들로 '과학화'하기에는 무한한 외적 변수를 갖고 있다.
오히려 '수요와 공급과 가격의 이름으로' 경제학을 과학화(종교화?)하려는 시도의 끝에는 그 절대성을 확립하려는 경제학자들의 신념과 자본주의 경제체제 위에 서 있는 자본가들의 욕망이 숨어 있다. 경제인은 인간에 대한 정확한 묘사라기보다는 그들이 바라는(혹은 믿는) 인간의 형태이다. 본래 근대 종교와 제도에 얽매여있던 개인을 해방하는 '이상형'으로 등장한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가 오늘날 개인의 목줄을 잡고 "인간성을 버려라"고 협박하는 광경은 도그마Dogma의 폐해를 그대로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책을 빌려 경제를 말한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을 빌어 현대 경제학을 비판한다. 진정 잘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 없는 자유는 방종으로 전락할 뿐이며, 그동안 경제학은 자신들의 성채를 쌓느라 진정한 행복을 왜곡시켜 왔다고. 그렇게, 두 개의 입은 2천 년 이상의 시차를 극복하고 하나의 말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