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존재의 논리적 증명 불가능성에 대하여 
 병장 이승일 04-14 10:40 | HIT : 256 




 신 존재의 논리적 증명 불가능성에 대하여 


 중세에는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해보려는 시도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 두 가지만 소개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존재론적 증명
 우리는 '완전성' 이라는 개념을 소유하고 있다. 완전한 것이 있든 없든, 그러한 관념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완전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속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속성들은 각각 술어로 대표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술어들 중에는 '존재하다' 라는 술어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어떤 대상이 완전하다면, 그 대상은 논리적으로 모순되지 않는 모든 술어의 주어가 될 수 있어야한다. 때문에 "완전한 것은 존재한다" 라는 명제는 필연적인 참이 된다. 이 완전한 것을 신이라고 부른다면,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반론 : "존재하다" 라는 것은 사물의 속성이 아니며, 따라서 술어가 아니다. 따라서 완전한 것이 존재해야할 필연적인 이유는 발생하지 않는다. 

2) 가능세계 증명
 우리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신을 상상할 수는 있다. 이 상상을 가능세계 개념으로 나타낸다면, "어떤 가능세계에 신이 존재한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즉 현실세계에 신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어떤 가능세계에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신이 '어떠한 가능세계에도 존재할 수 없다' 라고 주장할 수 없다면, 즉 신이 필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는 한, 신은 어떤 가능세계엔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신은 모든 세계의 창조자여야 하기 때문에, 만약 어떤 가능세계에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모든 가능세계에 신이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든 가능세계에서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신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 불가능하다면,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반론 : 신이 모든 세계의 창조자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상된 가능세계 안에서 고려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de re 가능성의 문제이다. 그것을 모든 가능세계의 범위로 넓히는 것은 de re 양상과 de dicto 양상을 혼동한데서 기인한 오류이다. (이 반론을 자세히 설명하려면 양상 논리에 대해 먼저 설명해야하는데, 이 글에서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 그냥 넘어가겠음.)

 이 외에도 최소한 세 가지의 증명이 더 시도되었지만, 모두 강력한 반론에 의해 폐기되었다. 

 나는 이 모든 논리적 증명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음을 귀류법을 통해 밝히려고 한다. 


 먼저 논리적 증명이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논리적 증명이란, 유한개의 문장들로부터 우리가 증명하고자 하는 문장을 도출해내는 일련의 행위를 말한다.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은, "신이 존재한다" 라는 문장을 유한개의 다른 문장들의 집합으로부터 연역해낸다는 것이다. 즉, 유한개(k개라고 하자)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문장집합 Γ 가 있어서, Γ 의 원소가 되는 문장들 γ₁,γ₂,γ₃,γ₄.......γk 사이의 연접(and)에 의해 "신이 존재한다" 라는 문장이 도출된다는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 라는 문장을 τ 라고 표시한다면 신 존재 증명은 형식적으로 다음을 의미한다. 

 Γ = { γ₁,γ₂,γ₃,γ₄.......γk} 일 때, [ γ₁& γ₂& γ₃& γ₄& ... & γk → τ ] 를 만족하는 문장집합 Γ 가 존재한다. 

 한편, [  ] 안에 들어있는 부분을 들여다보면, 좌변이 우변을 함축(entail) 하고 있어야함을 알 수 있다. 의미론적으로 말하면, 우변과 대응하는 사실은 좌변과 대응하는 사실에 포함되어있어야 한다. A→B 이면, B⊆A 인데, 이 때의 포함관계는 각 문장의 외연간의 관계이며, 일반적인 의미론에서 그 외연은 문장에 대응하는 사실이다. 때문에 [  ] 안이 참이 되기 위해서는 τ에 대응하는 사실이 γ₁& γ₂& γ₃& γ₄& ... & γk 에 대응하는 사실의 부분집합이어야 한다. 
 그런데 과연 τ, 즉 "신이 존재한다" 라는 문장에 대응하는 사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물론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일 것이다.(먼산) 그러나 '존재한다' 는 것은 술어가 아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이 표현에 대응하는 사실을 찾을 수는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론을 이용할 수 있다. 
"a 가 존재한다는 것은 문장, Fa를 참으로 만드는 모든 술어들 F₁,F₂,F₃,F₄,Fk ... 에 의해 만들어진 문장 F₁a,F₂a,F₃a,F₄a,Fka ...  에 대응하는 사실들의 연접, 즉 F₁a & F₂a & F₃a & F₄a,Fka & .... 에 대응하는 사실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자면, "카이사르가 존재한다." 라는 문장은,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넜다 & 카이사르는 잘 생겼다 & 카이사르는 부르투스에 의해 살해당했다& ............& ...." 등 '카이사르' 를 변항으로 포함하는 모든 참인 명제함수에 대응하는 사실과 대응한다는 것이다. 이 입장을 받아드린다면, "신은 존재한다" 라는 문장은 '신'을 변수로 갖는 모든 명제함수의 연접에 대응하는 사실과 대응한다. 그런데 신을 변수로 갖는 명제함수의 개수는 무한하다. 신은 무한한 속성을 가져야하며,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신으로 부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을 변수로 갖는 모든 명제함수의 연접을 τ₁& τ₂& τ₃& τ₄&... & τk &......  라고 표시해보자. 그렇다면 위의  [  ] 안의 문장은, 

 γ₁& γ₂& γ₃& γ₄& ... & γk  ⊇  τ₁& τ₂& τ₃& τ₄&... & τk &.....

 과 동치이다. 그런데 쉽게 볼 수 있듯이, ⊇ 기호 우변에 대응하는 사실의 수효는 무한한데 반해, 좌변에 대응하는 사실은 유한하다. 무한한 수효가 유한한 수효의  부분집합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    ]를 만족시키는 문장집합 Γ 는 있을 수 없다. 신 존재의 논리적 증명은 Γ 의 존재를 전제하기 때문에, Γ가 없다면, 신 존재에 대한 논리적 증명도 없다. 그러므로 신의 존재에 대한 논리적 증명은 불가능하다. 

 한편, 불완전성 정리에 의해 논리적으로 증명 불가능한 참인 명제가 반드시 존재해야하므로, 신을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하여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신의 존재 여부는 논리의 영역을 완전히 초월해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이성적 사유에 의해 신의 존재를 확신하거나  존재하지 않음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명백한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다. 




 상병 권오성 
 본문을 
 이러저러해서 카이사르(유물)의 속성은 유한하기 때문에 존재를 증명할 수 있지만 - 1 
 이러저러해서 신의 속성은 무한하기 때문에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 2 
 로 요약해도 될까요? 된다면, 

' 카이사르가 존재한다'는 문장은 '카이사르'를 변항으로 포함하는 모든 참인 명제함수에 대응하는 사실과 대응한다라는 말을 쓰셨는데 비문이라고 생각되고요 원래 말하시려던 내용은 '카이사르가 존재한다는 문장은, 카이사르가 변항인 모든 참의 명제함수가 사실과 하나하나 대응한다는 문장으로 달리 볼 수 있다' 정도로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이 명제는 논리적으로 증명이 가능합니까? 이 '사실'이라는 속성이 과연 유한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무한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여기에서 나의 논점은 그것이 아니라 '유한적인 사실에 대응하는 유한개의 명제를 말하려는 것이었다'라고 혹 반박하실려고 하셨다면, 결국 2의. '무한적인 속성의 신'이라는 것도 '유한적인 경우로 제한한 신'으로 바꿔 생각한다면, 결국 이 명제는 처음부터 논리적인 가정이 잘못 세워진 증명이라고 생각됩니다. 04-14   

 병장 성태식 
 오성//사실은 실재 사물이나 현상과의 대응을 의미합니다. 실재와의 대응 문제를 유한과 무한의 문제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한 사실이라는 속성의 속성문제를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속성은 한 대상이 갖는 특징일 뿐 그 자체로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카이사르의 행적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따라서 유한적입니다. 신이 우리 세계의 무언가에 의해 제한된다면 그도 유한적이지요.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면 그는 이 세계에 의해 제한되지 않으며 무한적이될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그리스-로마신화의 신들이나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처럼 세계의 창조에 관여하기 보다 세계의 건설에 관여하는 신에 대한 문제라면 혹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신'이라는 단어가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에 발생하는 혼동일 뿐입니다. 윗 글의 요지와 전혀 상관 없는 문제이지요. 


 신의 존재 증명에 대한 문제는 이미 결론이 난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많은 종교인들이 이 결론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을까요? 04-14   

 병장 송호근 
 글쎄요. 위에 소개해주신 2가지 증명. 그들은 모두 흑백논리를 적용시키고 있는걸요. 
 그거 하나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이거 아니면 저거. 이런식이라면야... 04-14   

 병장 이승일 
 오성 / 리플의 의미가 명확하게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처음에 문제시하신 저의 표현을 가다듬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겠습니다. "'카이사르가 존재한다'는 문장은 '카이사르'를 변항으로 포함하는 모든 참인 명제함수에 대응하는 사실과 대응한다 " 라는 말은, "카이사르가 존재한다" 는 문장에 대응하는 사실이 다름아니라 카이사를 변항으로 포함하는 모든 참인 명제함수와 대응하는 사실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의미를 잘 못 해석하신 것 같군요. 사실은 무슨 속성이 아닙니다. 두번째 부분에 대해서는 태식씨의 말씀이 정확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태식 / 사실 신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증명하겠다는 종교인들이 아직도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신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증명하겠다는 과학자들은 많아지는 것 같아요. 혹은 신의 비존재를 이성적으로 증명하겠다는 철학자라거나. 04-15 * 

 상병 권오성 
 태식/ 속성은 한 대상이 갖는 특성일 뿐 그 자체로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말은 동의합니다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논리적 증명에서는 그조차도 가정으로 쓰여선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명제대로라면, 처음부터 '신'이라는 단어 자체에 인간에게 허용된 이성으로서는, 과학적인 방법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가 담겨 있으므로, 논리적 증명의 필요성 자체가 사라지는것 아닙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승일/제가 쓴 글이긴 하지만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건 사실인것 같습니다(먼산). 그냥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신 존재의 논리적 증명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논리적 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였는데.. 글솜씨가 부족하다보니 산만한 글이 되어버렸군요. 

 덧붙여, 저는 신의 존재에 대한 완벽한 증명, 혹은 비존재의 증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혹은 한 발 물러나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기에, 그렇기에 종교는 존재한다라고 생각합니다. 

 사족으로, 적어도 제가 본 '소피의 세계'에 의하면 예를 들으셨던 초반부의 두개의 증명중 1번 증명은 중세가 아니라 중세가 끝난 후에, 2번의 증명은 중세 전에 나온 증명으로 보입니다. 04-15   

 병장 이승일 
 오성 / 우선 '신존재 증명'이 나온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몰랐는데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신존재의 논리적 증명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논리적 증명' 을 나름대로 제시했다고 생각하지만 부족한 것은 분명하고, 과연 그조차 제대로 증명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군요. 
 오성씨 말대로 종교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기에, 그리고 비존재를 증명할 수 없기에 존재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예 아무 종교도 필요없었거나, 혹은 철학이나 과학 따위가 신을 발견했겠지요. 만약 어떤 사람이 이 세계의 창조자가 있는지 없는지 , 존재의 근본적인 본질이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그가 아무리 세계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결코 진리를 알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따라서 철학과 과학은 결코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수단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게 아니었다면, 철학과 과학의 목표는 대체 어디에 있었을까요? "목적지에는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그냥 최선을 다해, 가능한 높이 도달하는 것" 이 과연 정말 목표가 될 수 있을까요? . 04-15 * 

 병장 성태식 
 호근 // 논리학에는 '배중율'이라는 규칙에 있습니다. 하나의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이라는 규칙이지요.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하고자 한다면 배중율의 규칙을 따라야 합니다. 따라서 '참 아니면 거짓'이라는 규칙을 적용해야 하지요. '흑백논리'라는 말은 무턱대고 참 아니면 거짓을 가르는 경우를 조금 비하하여 일컫는 말로 생각됩니다. 

 승일씨는 신 존재의 논리적 증명이 불가능한 이유를 논리적으로 밝혔습니다. 그 행동의 의미는 신의 존재에 대한 논리적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것일 뿐입니다. 논리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니 당연히 참 아니면 거짓이라는 규칙을 적용해야 하고, 흑백논리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지요. 

 부가적으로 흑백논리가 항상 좋은 것이 아니며 모순역시 항상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극단적인 생각도 좋을 수 있지요. 프랑스 대혁명은 극단적인 정신의 산물인데 그 극단이 없었으면 현대적 민주주의는 탄생하기 어려웠겠지요. 물론 극단적인것은 일반적인 경우에 좋지 않으며 모순된 발언 역시 일반적인 경우에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극단과 모순, 흑백논리가 왜 이 경우에 좋지 않은지는 따로 밝혀주어야 하지요. 

 아주 짧고 강하게 말하자면, '흑백논리는 옳지않다.'라는 말 역시 흑백논리의 일종입니다. 그래서 너무 어려워요. (엉엉) 

 오성 // 글쎄요... 신을 그렇게 정의하더라도 이 정도 논의까지는 가능할 듯 합니다. -> 우리가 무한한 신을 알 수는 없기에 신의 세부적인 모습은 밝힐 수 없다. 그러나 그 형체를 흐릿하게나마 볼 수는 있다. 
 글쎄요. 승일씨의 주장대로라면 그것조차 불가능하겠지요. 

 승일 // 철학과 과학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수단이 못되지요. (뭐. 저는 '그딴거 존재하지 않아! 엉엉엉' 이러는 입장이기는 합니다만....) 뭐랄까요. '진리의 탐구'라는 목적 자체를 포기하는게 오히려 옳지 않을까요. 종교적 문제야 그렇다 치더라도 인간적 문제에서는 우리가 같이 살아가는게 당면한 과제니까요. 
( 역시나 은근한 견제 (웃음)) 04-16   

 병장 배진호 
 핫 갑자기 드는 생각이지만.. 감정이라는 측면도 논리와는 어쩌면 무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논리적이어야만 하지만 감정이라는 것이 들어가게 되면.. 가끔은 이성을 상실하고 
 하지 말아야하고 하지 않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지만 하게 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04-16   

 상병 권오성 
 승일,태식/ 철학계에서는 소크라테스 시절보다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적층된 현대의 철학이 예전의 그것보다 더 진리에 다가갔다고 동의한다고 합니다. 이거다! 하는 명확한 것은 나오지 않지만(혹은 나올 수 없지만) 분명 진리라는 녀석에 조금은 다가갔다고 생각되는 사유의 부산물에 대한 뿌듯함, 사유과정 자체에서 느껴지는 짜릿함, 바로 그런 것 때문에 철학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의외의, 의외로운 재미가 있다' 이 한마디면 될 것 같습니다 04-16   

 병장 이승일 
 오성 / 철학계가 철학이 발전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겠죠. (웃음) 04-16 * 

 상병 권오성 
 승일/ 아.. 저 같은 경우는 철학을 접하기 전까지는, 수백년전의 철학이든 현재의 철학이든 발전 정도의 잣대는 댈 수 없는 것이다고 생각했거든요.... 저만 그랬던 건가(땀) 04-16   

 병장 이승일 
 오성 / 발전을 했건, 퇴보를 했건 둘 중 하나이겠죠. 그러나 우리가 그걸 알 수 없더라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닐 겁니다. 만약 <모나리자> 의 원본이 소실되어서 여러 화가들이 유추와 상상을 통해 그것을 복원하려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들은 수많은 카피를 만들어 내겠지요. 시대가 지나면서 카피의 양상도 유행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들 모두는 원본과 완전히 다르진 않겠죠. 대강 비슷비슷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사본들만을 서로 비교해서는, 결코 어떤 것이 원본에 더 가까운지 알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시대가 흐르면서 과연 자신들의 작업이 발전하고 있는건지, 퇴보하고 있는건지도 역시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가장 최근의 작업은 가장 최초의 작업보다 원본에 더 가까이 있던지, 더 멀리 있던지 둘 중 하나이겠지요. 우리가 영영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