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에 올렸던 것에 추가하여 다시 올렸습니다. 아직도 미완이구요, 

1. 신자유주의 비판의 엄밀성에 관하여
2. 신자유주의 이론의 출발
3. 신자유주의 분석 : 고전적 자유주의와 비교를 중심으로
4. 신자유주의의 전개 과정 
5. 신자유주의'만' 문제인가? - 자유주의에 내재한 비극
6. 신자유주의의 대안이냐, 자본주의의 대안이냐
7. 국지적 대안에서 보편의 이념으로

이정도로 목차를 생각 중입니다..만 요새 머리에 책도 안들어오고 글도 안써지고 죽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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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자유주의 비판의 엄밀성에 관하여

플루 격리 동안 진태원이 쓴 미완의 페이퍼를 읽으면서 일군의 '신자유주의 비판'에 대하여 제가 느꼈던 위화감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제가 근무하는 사무실에서는 경향신문을 보고 있었는데, 작년 9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자 마자 경향신문은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을 주제로 몇 주간 상당한 분량의 기획 기사를 내보낸 적이 있습니다. 한겨레21 역시 칼 폴라니 특집 기획을 마련하여 당장이라도 신자유주의의 몰락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이야기한 바가 있구요. 저는 이렇게 성급하게 사태를 진단하고 '신자유주의의 몰락'에 대한 핑크빛 기대를 내세우는 몇몇 언론들과 학자들에 대해서 당혹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는데, 진태원 역시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하면서 페이퍼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진태원은 "그들이 '신자유주의의 종말'이라는 제목으로 기대했던 것은 다만 세계화된 금융 자본주의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양극화를 산출하고, 절반 이상의 노동자들을 비정규직으로 내몰고, 집값 폭등과 사교육 팽창을 낳고, 사회를 온통 경쟁의 소용돌이에 내몰고,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과 조선족에 대한 멸시를 부추기는, 한 마디로 만악의 근원으로서의 신자유주의가 드디어 종말을 고하는구나, 하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라는 표현으로 당시 상황을 정리하고, "그처럼 쉽게 고할 신자유주의라면, 과연 그것이 그 모든 문제들의 원인으로 지목되어야 할 만큼 심각한 문젯거리인가? 라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리고 과연 신자유주의 비판자들이 생각하는 신자유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구요.

저 역시 오래 전부터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대학 새내기 때의 경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사회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막연히 공부를 통해서 사회를 분석하고 무언가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모호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새내기였던 저는 입학 이후 학교에서 뿌려지는 스포츠권의 유인물들과 대자보들을 유심히 살펴보곤 했습니다. 재미있게도 많은 문건들이 '특정 사건'으로 시작하여, 이 사건이 낳을 '파국적인 결과'를 강조하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사건이 벌어질 수 밖에 없는 원인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제시하는, 결국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야 한다!'로 끝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중요한 1)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 와 2)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빠져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 주변 스포츠권 학생들에게 질의응답의 시간을 가지곤 했는데요, 이런저런 대답을 들으면서 느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들의 '신자유주의 비판'이라는 것이 상당히 추상적인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나, 라는 의심이였습니다. 물론 학생들이기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추상성은 비단 학생들 뿐 아니라 여기 저기 '신자유주의 비판'을 기고하는 학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찾아볼 수 있는 문제점이었구요. 

'신자유주의'는 정말로 너무나 여기저기 쓰이고 있는 단어라 이게 정확히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오히려 헷갈리는 상황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 것을 쉽게 정의할 수도 있겠지요. 간단히 말하자면 신자유주의는 '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을 극단적으로 축소해야 한다는 경제 이론'입니다. '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의 축소'란 정책적으로 감세, 공공 예산 축소, 기업 규제 완화, 공기업 민영화, 노동의 유연화 등으로 나타낼 수 있겠구요. 이 것이 사회안전망을 파괴하고 비정규직 문제를 심화시키고 양극화를 불러온다~ 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진행 방향이겠지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흔히 진보 세력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주장을 소환해보겠습니다.

※ IMF 이후 한국에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수용되었다. 특히 광범위한 FTA 협상은 이러한 방향을 구체적으로 선언한 것이며, 이후로 급속하게 추진되고 있는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화는 사회적 안정을 파괴하고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다.

-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는 주장입니다. 저 역시 대략적으로 공감하는 주장이구요. 그러나 여기서 좀 애매하게 지나가는 부분이 있는데, 이러한 주장에서는 마치 한국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선택했다, 라는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신자유주의가 정책적인 선택 대안 중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는 이야기지요. 마치 정부가 케인즈주의, 개발주의, 사민주의, 신자유주의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는데, 하필 신자유주의를 선택했다! 라는 아쉬움이 묻어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결정적으로 빗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사실 신자유주의란 '전세계적인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이지, 일국이 채택하고 말고 할 수 있는 정책적 대안 중 하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서 신자유주의에 대해 '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을 극단적으로 축소해야 한다는 경제 이론'이라고 간단히 정의를 내린 바 있는데, 이 것은 그저 '간단한 정의'일 뿐이죠. 다르게 정의하자면, 신자유주의는 '전세계적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역사와 반복>을 참조하자면, 신자유주의는 19세기 제국주의의 반복입니다. 자본의 반복강박적 성격에 의하여 세계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단계로 진입할 수 밖에 없는 '구조'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만약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이탈하겠다고 선언하지 않는 이상, 일국적으로 신자유주의를 선택하고 말고 결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를 수용하거나 거부한다는 것은, 마치 하나의 정책적 대안을 선택하거나 거부하는 문제와는 전혀 다른 층위에 있는 것입니다.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특정 정부를 정치적으로 비판할 때 뭉뚱그려서 '신자유주의를 수용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때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죠. 이 것은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 신자유주의의 대안이 무엇인지 고민할 때 전혀 도움이 안되는 태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요? 그리고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라고 말할 때, 그 구체적인 태도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2. 신자유주의 이론의 출발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기원은 20세기 전반, 파시즘의 발흥에 공포를 느낀 일군의 극단적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네트워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전적으로 '경제적 기획'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기획'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죠. 20세기 초 비엔나의 오스트리아 경제학파, 1930년대 런던 경제대학, 런던 애덤스미스 연구소를 필두로하는 런던 학파, 프라이부르크의 발터 오이켄, 프란츠 뵘의 질서 경제학파, 시카고 정치경제학파 등이 그 네트워크의 일원이였습니다. 다른 곳은 저도 잘 알지 못하고, 특기할만한 곳은 비엔나 오스트리아 경제학파와 미국 시카고 경제학파가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오스트리아 경제학파의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는 이 네트워크의 중심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위에서 언급한 런던경제대학, 시카고 대학,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등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거점들에서 골고루 교수 생활을 했죠. 1947년, 스위스에서 출범한 '몽 페를랭 협회'는 신자유주의 네트워크의 대표적인 조직이라 할 수 있겠는데, 하이에크는 몽 페를랭 협회의 지도자로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대부 역할을 맡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사적 소유권을 기반으로 사회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목적에 따라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문명 발전의 동력이라고 보았고, 이 것은 시장이라는 사회제도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또, (이 점이야말로 놓치고 갈 수가 없는 부분입니다만,) 그러므로 정부는 자신이 가진 권력, 통제력의 영역에 제한을 두고 '민주적'으로, '한정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져야 합니다. 계획경제는 시장 경제의 복잡성을 컨트롤 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시장 발전의 장애물이 된다고 주장했던 것이죠. 신자유주의자들의 '자유민주주의'는 결국 시장 발전이라는 목표에 부수적인 수단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하이에크의 정치경제철학을 바탕으로 한 시카고 정치경제학파는 2차 대전 이후 미국 헤게모니 시기에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로 활약하게 됩니다. 밀턴 프리드먼, 조지 스티글러, 제임스 부캐넌, 게리 베커, 로버트 루카스 등 쟁쟁한 경제학자들이 포진해 있었죠. 이들은 공통적으로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경쟁적 행위'를 강조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각각 다양한 작업으로 경제학의 패러다임을 바꿔낸 이들의 이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인플레이션에 대한 통화 분석 - 프리드먼
2) 합리적 기대이론 - 루카스
3) 공급편향 경제이론  - 아서 래퍼
4) 공공선택이론 - 뷰캐넌/툴러

뭐 이 이론들이 무엇인지 깔끔하게 설명하는 것은 경제학도 분들에게 맞기도록 하겠구요,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론적 작업이 결국 인플레이션과 경제 침체가 정부의 개입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정부 개입을 축소해라! 라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점이겠지요. 


3. 신자유주의 분석 : 고전적 자유주의와 비교를 중심으로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신자유주의가 고전적 자유주의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미셸 푸코가 1978-1979년 콜레쥬 드 프랑스에서 했던 강의록인 <생명 정치의 탄생>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푸코는 이 책에서 질서 자유주의 학파와 시카고 학파의 이론과 개념을 분석하며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작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푸코는 일단 '경제 활동'을 두고 신자유주의와 자유주의의 차이점을 논합니다. 애덤 스미스의 고전적 자유주의는 경제활동에 있어서 '교환'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때, 스미스의 '교환'이 단순하게 오늘날 말하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상품 교환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아야합니다. 이미 제가 몇차례 언급했듯이, 스미스의 '교환'은 근대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자연적인, 본성적인 '교환'입니다. 이때 교환이 이루어지는 시장은 사회적 영역과 맞물린, 자연적인 체계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시장은 국가, 사회와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환 양식'으로 연결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자유주의는 경제 활동의 중심을 '경쟁'에 둡니다. 고전적 자유주의에서는 교환이라는 것이 자연적인 것이였다고 본다면, 신자유주의에서는 이러한 자연적 경향을 부정하고, 시장에 대한 국가의 독점과 개입에 맞서 '인위적 관계'로의 교환을 보호하고 확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사실 그들이 대외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의 최소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작동하기 위한 조건, 곧 경쟁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을 보호하는데 국가가 개입하는 것을 정치적 목표로 합니다. 고전적 자유주의에서는 자연적인 것으로 이루어져야할 교환을, 신자유주의에서는 정책적으로, 인위적으로 확대하고 있는 것이죠.

이처럼 경제 활동의 기본이 교환에서 경쟁으로 바뀌면서, 그리고 경제 활동이 자연적인 것에서 인위적인 것으로 재정의 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그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결혼과 범죄, 아이 양육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모두 경제적 비용 계산의 대상으로 변하고, 경제 활동으로 평가됩니다 경제는 이제 국가/사회/시장의 독립된 영역이 아니라, 인간이 활동하는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 주체는 '기업가'로 변하고, 인간의 활동은 '인간 자본'의 관점에서 재정의 됩니다. 인간 삶의 모든 행동들이 투자와 소득의 비용으로 계산되는 것이죠.

푸코는 이러한 신자유주의를 '통치 없는 통치'라는 통치성으로 이해합니다. 신자유주의의 자장 아래서 신자유주의의 신민/주체들은 모든 행동을 스스로 선택할 자유가 있지만, 이 자유는 내재적으로 '비용 계산'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작용되는 거짓 자유입니다. 형식적 자유를 부여 받고 자신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활동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신자유주의의 신민/주체들은 질병, 실업, 빈곤 등을 마주쳤을 때 국가나 사회에 그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개인=기업가가 투자를 잘못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