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장 김범준   2009-09-16 11:22:42, 조회: 185, 추천:4 

1.序

나는 1987년의 6.29선언으로 절차적 민주주의가 성립된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생각한다.
민주사회의 질적 건강함은 그 구성원들의 원망이 민주적 정치체제를 통해 얼마나 건강하고 다양하게 충족되고 있는가 하는 점에서 판단될 수 있을 것이나, 이 점에서 87년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는 비관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은 한국 사회의 계급적 양극화 현상이다.
98년 당시 한국의 지니계수는 0.281이었으나, 2000년에 0.371로, 2005년에는 0.326을 넘어서며 부의 분배가 갈수록 불균등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상위 20%와 하위 20%의 소득격차도 갈수록 심화되어, 96년 기준으로 4.74배이던 것이 2000년에 6.75배가 된다. 재분배의 실패와 함께 93년 자신을 하층이라 판단하던 사람의 숫자가 전체의 37.1%에 불과했던 데 반해, 2000년에 들어 44%가 자신을 경제적으로 하층이라 여기게 된다.

경제적 양극화 현상은 동시에 계급고착화를 불러왔다. 과거 한국에서 일류대는 매우 유효한 계급 상승의 수단이었으나 대학의 덩치가 커지고, 대학인구가 과잉됨으로서 일류대는 더 이상 계급상승을 보장하지 못한다. 때문에 일류대를 대신해 고시라는 수단이 계급상승을 위해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얼마가지 못하고, 현재는 유학을 통한 학위 취득이 교육을 통한 가장 유효한 계급 상승, 유지의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유학을 위해 필요한 교육비를 댈 수 있는 계층은 한정되어 있음으로 과거와 같은 교육을 통한 계급 상승은 힘들어졌고, 결과적으로 계급은 고착되게 된다.

이러한 총체적인 경제적 좌절과 함꼐 한국사회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원망을 이루어주지 못하는 정치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상태에 들어갔다. 투표율이 지속적으로 내려가는 것은 그 불신의 반영이다. 탄핵정국에서 당시 일시적인 반등이 있었지만, 일회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무관심의 광범위한 확산은 민주사회의 건강함을 생각할 때 극히 위험한 현상이다.

허쉬만이 지적한 대로 소비거부는 소비를 이끌어내기 위해 기업을 강력하게 자극할 수 있지만 투표거부는 정치에 대해 거의 아무런 영향력을 이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투표자 등록제도에 대한 간단한 제도적 개선만으로도 투표율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음에도, 양 정당 모두 그에 무관심한 현실이 그를 증명한다.

그럼으로,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정치적 좌절과 그에 이어진 정치적 무관심의 광범위한 확산은 정말로 사회 제도의 개선이 필요한 이들을 정치에 소원하게 만듦으로서 그들의 소외 상태를 한결 가속화하고, 고착화할 우려가 있다.

2001년 고려대의 아세아문제연구소의 조사는 이에 대한 유의미한 증명자료이다. 이 조사는 주관적 계급분류와 투표참여 사이의 높은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당시 스스로를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계층이라 생각하던 이들의 투표율이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8% 이상 높았다. 이 주관성을 객관성으로 바꾸어도 결과는 같았따. 월소득을 기준으로 250만원 이상인 투표자가 200만원 이하의 투표자 보다 10%이상 많았다. 조사결과를 볼  이미 투표 참여자체가 하나의 계급화 현상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6.29선언 당시 우리는 기뻐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꽃피는 것을 기대하기보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다던 영국 언론의 폭언을 보란 듯이 물리치고, 우리는 대한민국에 절차적 민주주의를 성립시켰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는 후퇴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나는 이 문제를 세계 경제 전체의 흐름 가운데서 파악해 보고자 한다.


2.
한국 민주주의를 말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4.19 학생혁명과 6.29 공동선언이다. 이 두 사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한국 민주주의의 성립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먼저 공통점을 살피면 이러하다. 이 두 기념비적인 사건에서 중심세력은 학생이었다. 중산층 지식인 집단이 배후에서 지지했다. 시위의 중심의제는 독재 타도였고, 계급과 자유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정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시위의 양상은 비폭력 학생시위였고, 그를 통해 정권을 붕괴시킴으로써 당시 권위주의 정권의 취약성을 동시에 드러내보였다.

또한 정권붕괴 이후, 정치행위에서 학생과 노동자와 같은 중심세력이 소외됨으로써 운동과 제도권이 분리되어 나갔으며, 운동의 이슈 가운데 보수 계층이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것만 정책으로 전환시켰고, 이를 위해 보수 계층은 반공 헤게모니를 휘두른 것 까지도 같다.

그렇지만 두 사건은 결국 엄연한 차이를 가진다. 그리고 그 차이가 4.19가 다음해 박정희의 쿠데타로 인해 실패로 돌아간 것과 달리 6.29 공동 선언은 일정부분의 후퇴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한국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성립시킬 수 있었던 무척 중요한 힘으로 작동했다.

이는 정권 붕괴 이후, 보수 계층에서 혁명 세력에 대해 체제 위협이라는 반공 헤게모니를 휘둘러 그들의 주도권을 빼앗고, 사회적 이슈를 계급으로 옮겨가지 못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특히 선명하게 드러난다.

가령, 4.19 학생혁명의 경우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이후 운동의 이휴가 남북문제와 계급으로 옮아가려고 했을 때, 운동 자체가 그 지지를 잃어버리는 사태로 이어졌다. 
그러나 6.29선언의 경우는 그와는 달라 학생 계층을 넥타이 부대로 불리는 중산 계층이 지지 했고, 이어 7~8월의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짐으로서 결국 보수 계층 역시 일정부분 양보하지 않을 수 없는 성취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두 사건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는 운동에 대한 시민들의 광범위한 지지가 있었는가, 아닌가 하는 측면이다.

때문에 이상의 대조를 통해, 우리는 흡사한 과정을 거친 두 사건이 결국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은, 그 운동이 얼마나 시민의 이해를 반영할 수 있었으며, 공감을 얻어내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에 기반 함을 파악할 수 있다. 이 운동의 이념과 시민사회의 열망의 일치에 있어 두 사건이 보여주는 차이는, 4.19 당시 한국 사회는 산업화를 거치지 않았고, 87년 당시는 충분한 산업화를, 그 것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성공적인 산업화를 거쳤다는 점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왜냐하면 산업화의 성공적인 수행은 그 사회의 중산계층을 두텁게 하고, 많은 수의 노동자와 농민과 같은 타자화된 계층을 만들어 내게 되는데, 이 때 중산 계층은 일정 수준의 교육을 거치게 됨으로써 그들이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능력을 가지게 되고, 노동자 계층은 중산 계층과의 대비를 통해 상대적 박탈감을 안게 됨으로서 민주화 운동의 지지 세력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60년 4.19 학생혁명 당시에는 이러한 종류의 지지 세력이 한국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87년에는 그간의 결제발달로 인해 이러한 중산 계층과 노동자 계층이 사회 각지에 광범위하게 포진해 있었으며, 당시 그들의 세력과 이념적 불만 역시 한 절정에 다달아 있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한국 민주주의는 독재 정권의 의도치 않은 성공에 일정 부분 기대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박정희 독재 정권의 경제적 성취가 가능했던 배경이 어떤 것이었는지, 다음 글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3.
박정희는 5.16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찬탈했으나 그 기반이 매우 약했다. 특히 정권 초기, 미국의 지지를 얻지 못했던 점은 치명적이었다. 이 점은 61년 당시 홍수에 대해 미 의회가 2천만 달러 상당의 곡물 지원을 하기로 했으나, 박정희 정권이 정당한 절차를 거쳐 정권을 시민에게 이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2년 이상 이를 지연시켰던 점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거기 더해 당시 북한이라는 경쟁 상대 역시 정권 안정에 심각한 장애물이었다. 북한은 반공 헤게모니를 휘두르기 위한 적절한 이유였음으로 정권유지에  유리한 측면이 있긴 했으나, 동시에 당시 북한의 경제 상황은 남한을 압도하는 것으로서, 미국의 충분한 지지를 얻을 수 없었던 박정희 정권 초기에, 북한은 체제의 우위를 주장하기 어려운 남한에게 불안한 경쟁 상대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내외적인 요인으로 인해 박정희 정권은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경제개발에 주력하게 된다. 경제개발을 통해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행히 당시 남한에는 남미와 달리 개혁에 반대할 수 있는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전통적인 지주세력이 소멸한 덕분이다. 그로써 박정희 정권은 남한을 순조롭게 개발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은 농촌사회로부터 농민들의 다수를 도시로 몰아넣어 공업에 충분한 노동자를 투입했고, 농촌의 곡물 가격을 낮은 수준으로 동결시킴으로써 노동자의 임금을 마찬가지로 낮은 수준에 머물게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국가 주도의 근대화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이 야기한 한국 경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재벌'이었다. 국가 주도의 근대화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이 자국 시장을 철저하게 보호했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로,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을 위해 높은 관세로 국내 기업의 상품을 보호했고, 특정기업에 대해 세금을 낮추고 막대한 대출을 해주는 등의 방법을 통해 몇몇 기업을 정권 차원에서 거대하게 성장시켰다. 이를 통해 한국 특유의 경제 시스템인 재벌이 성립되게 된다.

60년대 이후 한국의 산업화는 중소기업 위주로 나갔어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과 달리, 그 폐해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에 있어 ' 재벌'위주의 경제정책은 적절한 것이라 평해야한다.
이는 재벌이라는 시스템이 그 다각화된 사업을 통해 대자본이 필요한 사업을 위해 필요한 자금을 다른 사업의 수익으로부터 끌어오기 쉬웠기 때문이다. 남미지역과 달리 원자재가 풍부하지 않은 한국이 수출위주의 경제개발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미 막대한 자본을 가지고 있는 외국의 기업과 경쟁해 이겨야 하는데, 이를 위해 필요한 자본 조달은 재벌이란 시스템 이외에 당시 한국에서 달리 생각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이러한 국내 사정과 정권차원의 필요가 겹쳐 국가 위주의 경제개발 정책을 추진해, 물질적인 부분에서 한정된 것이지만 한국의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당시 국내 사정이 개혁에 적합한 무주공산과 같은 상태였으며, 박정희 정권은 정책 선택이 유효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 내수 시장이 극히 취약했던 당시 한국에서 그와 같은 근대화가 가능했다고 설명할 수 없다. 특히 지금과 달리 당시 한국에서 철저한 보호정책을 펼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 배경과의 연계를 통해서만 올바른 이해에 도달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브레턴우즈 체제로 설명되는 2차 대전 후 세계경제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4.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세계 질서는 재편된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타국이 넘볼 수 없는 헤게모니를 획득한다. 당시 세계 경제는 금본위제를 통해 편성되어 있었는데, 2차 세계 대전을 통해 서유럽 국가들이 보유하고 있던 금 가운데 막대한 양이 미국으로 흘러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 결과 2차대전 종결 당시 미국의 금보유량은 세계의 육할에 달하게 되고, 달러는 다른 어떤 화폐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안정성을 가지게 되는 반면 다른 화폐의 가치는 매우 불안정하게 된다.
금본위제의 경제 체제에서 금을 보유하지 못한 국가의 화폐는 사실상 무가치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1944년에 설립된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기축통화로서 금과 함께 달러가 등극하게 된다. 기존 국가들은 반발했지만 현실적으로 힘이 없었기 때문에 무시되었다. 환율은 35달러당 금 1온스였고, 이 기준을 지키기 위해 회의에서는 IMF와 세계은행, GATT를 함께 설립하기로 결의한다. 이후 이 35달러당 금 1온스의 고정 환율을 통해 운행되어나가는 세계체제를 브레튼우즈 체제라 부르게 된다.

그런데 미국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것 까지는 좋았지만, 당시 세계 자본주의 상황은 매우 위험했다. 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서구 유럽 사회는 줄곧 완전고용 시기가 지속되었고, 그로 인해 노동조합의 힘이 매우 강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전이 끝난 이후 식민국가들이 차례차례 독립해 나가게 된다. 이로서 서유럽의 자본가들은 노동세력에 대해 회유책도, 강압책도 사용하기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된다.

처음에는 이 사황에 무관심하던 미국도 결국 이를 좌시할 수 없게 된다. 서유럽과 근접해 있는 소련을 생각할 때 서유럽에서 좌파세력이 계속적으로 득세하는 것은 자본주의 그 자체의 위기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은 마셜 플랜을 발동한다. 이 계획은 자본주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를 통해 미국의 이득을 취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는 미국이 마셜플랜을 통해 미국 자본을 위한 서유럽 시장을 보호, 확대 하게 되고, 서유럽 좌파 세력을 약화시켜 궁극적으로는 미국 자본가의 지위를 보호하는 것, 또한 이 계획을 통해 유럽 경제를 부흥시킴으로서 미국식 경제체제(포트주의+케인즈주의)를 이식하고 헤게모니를 완전 장악하게 됨을 통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50년대 이후 세계 경제는 장기적인 호황을 맞이하게 된다. 서유럽을 비롯한 일본 등의 자본주의 국가는 미국이라는 시장을 수출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꾀할 수 있게 되었고, 한국 전쟁을 기준으로 본격적인 냉전이 시작되면서 공산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 군사력이 진출한 덕분으로 자국의 군사비를 줄이고 복지에 돌려 자국 노종자 계급의 불만을 무마시킬 수 있었다. 덕분에 이들 국가는 58년(일본은 64년) 경에는 자국 화폐의 교환가치를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된다. 미국 역시 이 관계에서 자국의 군산복합체를 가동시킴으로서 지속적인 발전을 꾀할 수 있었따.

그러나 동북하 지역의 전략에 있어 미국의 계획에는 오산이 있었다. 그들은 일본에게 그 지역의 경제적,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도록 하고, 일본의 헤게모니를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묶어둠으로서 
그 지역 전체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했으나, 차관을 통한 지배로 아시아 지역의 경제 가운데 태반이 일본에 종속되는 것 까지는 성공했으나 2차 대전 당시 일본이 저지른 악행으로 인해 그들이 지역적 정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이 어렵다는게 판명된다. 미국은 중국과 소련에 대항하기 위한 자기 헤게모니 권역에 있는, 일본 외 다른,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진 국가가 필요하게 된다.

60년 당시 아시아의 네마리 용이라 불리우던 신흥공업국의 발전은 이와 같은 사정 가운데 가능 했던 것으로, 미국은 그들 국가에게 일본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관세를 낮춰 미국 시장을 개방하고 자국 시장을 보호하도록 배려해준다. 결국 6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적 도약은 일본을 모델로 한 국가 자본주의라는 선택이 주요했음은 물론이지만 본질적으로 미국의 세계전략 가운데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한국의 민주주의 성립 역시 미국의 세계 전략과 깊은 연관을 가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미국의 헤게모니 장악을 기준으로 한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호황은, 그러나 71년 8월 15일, 미국의 금태환조치 중지발표를 통해 중대한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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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본위제는 자국이 지불한 화폐만큼을 자국 내에 같은 가격의 금을 보유해야한다는 제도이고 금태환조치는 금본위제 하에서 금 1온스당 무조건 35미국달러로 고정한 고정환율제도를 말하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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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971년 8월 15일 미국의 금태환조치 중지발표는 고정환율제를 유지할 수 없었던 탓으로 일어났다. 미국이 60년대 세계 각국이 자국의 화폐가치를 회복한 이후로도 달러 유포를 그칠 수 없었던 때문이다. 당시의 냉전 구도 가운데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은 무리하게 베트남전을 지속했고, 그 결과 엄청난 양의 달러를 유포하게 된다. 여기 더해 제 3세계 가국의 민족의식과 독립의지가 고취되면서 그들 국가의 방위에도 많은 비용이 필요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달러의 과도한 유포는 필연적으로 달러의 가치를 하락시키게 되고, 실제 달러의 가치와 미 정부에서 유지하고 있는 달러 가치와의 차이를 통해 금을 거래함으로써 이득을 취하는 투기 세력이 생겨나게 된다. 이에 대해 미국 정보는 달러의 고정가치를 조정함으로써 브레튼우즈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71년에 들어서 금태환조치는 중단되고 만다.

브레튼우즈 체제, 그러니까 당시 세계 경제 체제 그 자체가 미국의 헤게모니를 기반으로 한 달러 가치의 고정화로 유지되는 것이었기에, 브레튼우즈 체제의 폐지는 그렇지 않아도 저물어가고 있던 미국 헤게모니에 대해 중대한 일격이 되었고, 이는 세계 질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 영향력이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난 것은 세계 경제였다. 그제까지의 호황이 끝나고 장기 불황이 시작된 것이다. 70년 대까지 세계 경제의 청신호는 미국의 헤게모니 장악이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다른 국가들의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 시장의 개방과 원조, 군사적 보조가 각국에게 경제적 여유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복지국가 건설을 가능하도록 했고, 이것이 시민들을 만족시킴으로써 공산화에 대한 정치적 열망을 제거하는데 성공케 했으나, 과도한 달러 지출로 미국의 패권이 흔들리게 됨으로 다른 국가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보조가 어려워지게 된다.

이 패권 유지의 실패는 케인즈주의의 실패와도 같은 맥락으로 이어진다. 케인즈주의는 정부가 경제에 개입해 재정지출을 확대함으로써 경제를 활성화하고, 그 국가에서 생산된 생산물을 모두 소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골자로 삼는데, 고정환율제의 중단과 더불어 초국적 자본을 위한 발판이 마련되고, 정부의 경제 개입은 돈의 가치가 유독적이 된 당시 상황에서 투기 자본의 좋은 먹잇감이 될 수 밖에 없게 됨으로 인해 그것은 스태그플레이션의 악화로 이어질 뿐,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된다.

여기 더해 73년 74년에 석유파동이 일어나게 된다. 석유를 태워 굴러가는 기계나 다름없는 세계 경제에 있어, 이것은 미국 헤게모니의 몰락에 이은 심각한 사태일 수 밖에 없었고, 이러한 상황을 태개할만한 기술적 발전이나 시장의 확대는 이어지지 않아 자본의 이윤율은 저하된다. 장기불황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장기불황에 대해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경제적 흐름이 도래하게 된다.



6.
본디 신자유주의란 독일의 오이켄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적 시장경제론을 말하는 것이었으나 70년대 후반 이후 하이예크, 프리드만 등의 이론을 신자유주의라 부르게 된다. 이들 신자유주의 이론은 통화주의, 공급중시, 합리적 기대론, 공공선택이론 등의 많은 학적 파벌을 가지지만 한 가지 강력하게 공통되는 지점을 가지고, 그것으로 인해 이들을 통칭해 신자유주의라 부르게 된다. 그것은 시장의 결점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그로 인해 국가의 개입을 경제 활동에 있어 완전한 악으로 보는 것이다.

이들 이론이 현실영역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를 통해서였다. 우선 대처리즘은 74년 노동장이 승리하고 케인즈 주의를 고수하나 실패, 성장률은 2.2%에 불과하게 되는(이는 당시 EC국가 가운데 최하였다.)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그로 인해 물가는 13%가 상승하고 실업률은 6%에 육박하게 되어, 노동당은 결국 현실적이 낭렵으로 인해 정책을 선회, 임금을 억제한다. 그러나 물가는 지속적으로 상승, 노동자는 분노하게 되어 다음 선거에 보수 세력이 승리하게 된다.  당시 선거에서 승리한 대처를 대표로 내세운 보수세력은 노동조합과 국가가 영국 경제를 몰락시켰다고 주장하고 그를 통해 자국의 정책을 결정한다.

그 정책이란 크게 긴축재정, 민영화, 노동자 공격으로 나뉠 수 있다. 이 가운데 긴축재정은 통화량 줄이기와 정부 지출을 줄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양자 모두 경기를 침체시키게 된다. 대처는 경기 침체를 통해 경쟁력이 없는 기업을 도산시키고 막대한 실업을 발생시킴으로써 노동조합의 몰락을 초래했던 것이다. 이로서 80년대 대처 초기에 167만 명이었던 실업자는 83년이 되어 300만 명으로 늘어난다.

또한 대처는 감세 정책을 취하는데, 이는 투자 계급을 위한 것으로 경기회복을 위한 것이었다. 이 정책을 통해 최상위 계급에 대한 세급이 83%에서 40%로 반 이상 깎이게 되고, 중산층 이하에 대해서는 33%에서 25%로 감소한다. 그러나 간접세와 보험료가 올랐기 때문에 소득 수준이 낮은 계층에 대해 이 감세정책은 도리어 더 큰 부담으로 돌아오게 된다.

민영화란 공기업 민영화를 말하는 것으로 79년 영국 공기업은 전체 기업의 11%정도였으나 대처정보는 이를 경쟁력을 핑계로 매각하고, 동시에 각종 특혜를 약속한다. 이로 인해 영국 공공서비스 산업의 요금은 인상되나 질은 극적으로 저하된다. 이 과정을 통해 79년 206만 명이었떤 공기업 종업원은 89년 당시 84만 명으로 절반 이하로 줄어든다.

마지막으로 영국 정보의 노동자 공격은 84년 탄광노조의 파업을 실패시키는데 성공함으로서 그 의도를 거의 완전히 달성한다. 당시 영국에는 명문화된 노동법은 없었으나 작업장 내부의 관습이 이를 대신하고 있었고, 그 관습을 지탱하는 것은 노동자 세력의 굴강함이었다. 그러나 탄광 노조의 몰락으로 인해 이 구도가 무너져 노동계급은 극격히 약화된다.

이런 과정에서 대처 정보는 노동조합을 정책결정 과정에서 배제시키고, 단체행동권을 비롯한 노조의 활동을 제약, 고용보호에 관련한 법의 폐지와 최저임금을 부분적으로 폐지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실현한 것이다.



7.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시행되어 레이거노믹스라 불리 우는 미국의 신자유주의는 영국의 대처리즘과 대동소이하다.

우선 레이건 행정부 역시 긴축재정을 실시했다. 이 때 주로 축소된 예산은 사회복지 쪽이었다. 이러한 통화긴축은 금리를 인상시켜 중남미 국가를 이자로 인해 파산상태에까지 몰아간다. 하지만 국방비는 도리어 증가했다. 이 복지 예산 삭감은 레이건 이후 행정부에서도 지속적으로 이어져 부시 공화당 정권 말에는 70년대 초의 60%수준에 불과하게 된다.

그리고 레이건은 세금을 줄여 경제 활성화를 도모하는데 그 규모는 1100억 달러에 달한다. 그렇지만 이 감세는 상위 1%의 세금을 14% 줄이나 하위 10%의 세금은 28%를 도리어 증가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감세에 이어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각종 행정 규제를 완화한다. 이는 실효를 거두지만 그 효과는 일시적인 것으로, 기업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이로 인해 중소기업이 도산, 막대한 실업자가 발생하게 된다. 더해서 이렇게 중소기업을 청소하고 난 거대 기업으로 인해 독점이 발생해 고비용 저효율 서비스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레이건 행정부는 노조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81년 항공관제사의 파업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정보는 파업을 일으킨 직원들에게 직장복귀 명령을 내리고 따르지 않은 이들을 모조리 해고한다. 이후 미국 전체의 노동조합은 약화되기 시작하고, 79~82년 사이 미국 실질 평균 임금은 8%가 하락하고 89년까지 미국 노동자의 80%가 임금 삭감을 경험하게 된다. 반면에 미국 고소득층은 호황기 20년 동안 소득의 1%가 증가 되었으나 80년대 들어 4배의 재산 증가를 이루게 된다. 이런 사례에서 보자면 가진 자의 입장에서 국가는 악이긴커녕 불가결한 자본의 파트너로 보인다.

종합적으로 결국 대처리즘도 레이거노믹스도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통해 경제를 회복시키기 보다는 경제적 모순을 심화시켰을 뿐이다. 기대대된 경제적 성장도 뒤메닐과 레비의 분석에 따르면 실패했다. 50~60년대 성장에 비해 이 기간의 성장이 낮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가 이를 변명하기 위해서는 50~60년대의 호황에 주어진 외부조건의 특별함이나 신자유주의 기간 동안 주어진 외부조건의 특별한 단점을 전제해야하나 이 ‘외부’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은 아직 없다. 미국은 레이거노믹스를 통해 일시적인 호황을 누리지만 이는 이면에는 ‘쌍둥이 적자’라고 불리는 막대한 재정적자가 있었던 속빈강정으로, 정책적 실효가 있었던 것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단지 미국이 패권국이기 때문에 그 적자에도 버틸 수 있었다.

또한 두 국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그 실천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적이지 않은 측면을 내보였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표층적으로는 노동조합에 대한 철저한 공격과 노동인구의 국가 간 이동에 대한 통제, 그리고 자본의 이동에 대해 국가가 취하는 편향적 태도를 비교해 볼 때 확연하고, 심층적으로는 ‘민관협력’이라 불리는, ‘위험은 정부가 부담하고, 이익은 사기업이 챙기는’ 구조에서 선명하다.

이는 신자유주의의 이름을 내걸고 이루어지는 세계적 규모의 자본재편이 실질적으로 이루어내는 결과(경제적 모순의 심화, 경제활성화 실패)의 모습들과 더불어, 그 것이 ‘신자유주의’조차 아닌 일종의 세계적 규모의 계급적 프로젝트, 촘스키의 표현을 빌리면 ‘부자들의 사회주의’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는 의혹을 품게 한다. 신자유주의 경제를 가장 주요한 축이 금융경제임을 생각하면 이 의혹은 한층 강화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흐름은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선언과 더불어 한국에서도 거세게 몰아치게 되고, 그들 이론의 무비판적인 수용은 IMF 사태라는 거대한 경제적 위기로 이어지게 된다.



8.
1997년 한국정보의 구제금융 신청은 전 세계에 충격을 준다. 동남아시아 쪽에서의 금융위기가 있긴 했지만 그 여파가 한국에까지 미치리라 생각했던 이들은 거의 없었다. 흔히 IMF사태라 불리는 이 금융위기는 실제로 전후 한국 경제의 가장 큰 위기였다. 여기에 비교할만한 경제적 사건은 정쟁 이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사태에 대한 통속적인 분석은 관료 집단의 무능과 부패가 재벌이란 비효율적인 자본집단의 엮이며 일어나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이지만 이 분석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우선은 당시의 재벌은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것 만큼 무능하지 않았고, 그들과 정부 사이의 유착도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이루어져있던 것은 아니었다. 흔히 이러한 정경유착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대마불사의 논리, 즉 큰 기업은 그 영향력으로 인해 비효율성에도 불구하고 국가에서 억지로 지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만 지난 기업 순위를 살필 때 한국 재벌 기업들의 순위변동과 탄생, 소멸은 그렇게 고착적이지 않고 유동적이었다. 오히려 고착적이 된 것은 IMF이후로 보는 것이 옳다.

또한 당시 기업들의 순이익이 매출에 비할 때 적었다는 것이 그들의 비효율성의 증거로 지적되기로 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순이익이 적었던 것은 많은 부분 이자를 갚기 위한 것이었고, 그 이자는 다시 당시 한국의 많은 저축자들에게 돌아가고 있었던 것으로 소비자와 노동자와 기업 사이의 일종의 선순환적 구조가 이루어져 있었다. 도리어 현 포스코의 경우처럼 순이익이 높더라도 그 이익의 대부분이 배당금이란 형식을 통해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국가나 시민의 입장으로 보았을 때는 문제시 되어야 할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과잉투자에 대한 지적이 있다. 당시에 과잉 투자라 불릴만한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한국 기업이 직면한 상황을 생각할 때 그 것은 무능이나 비효율의 증거가 될 수 없다. 세계시장을 무대로 활동하기 위해 한국 기업은 공격적인 시장 개척과 한국 시장 수비에 동시에 나설 필요가 있었고, 그들 작업은 대자본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과잉투자는 여기서 발생했다. 때문에 이는 당지 실패한 투자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

그렇다면 당시 한국의 위기는 어떻게 해서 발생했는가? 이는 단적으로 말해 ‘이행실패’였다. 박정희의 죽음 이후 한국자본은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롭게 시장활동을 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그것을 실천하게 되는데, 수십년의 과정을 걸쳐 이에 국가가 동조해 나서며 시장 활동을 자유주의적으로 풀어주는 방향으로 시책이 짜여지게 된다. IMF사태는 이러한 국가 주도의 경제활동에서 기업 중심의 경제활동으로의 이행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사태였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금융 자유화와 그 운영의 부실함이었다. 

결국, 여기서의 ‘이행실패’란 ‘발전국가’에서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이 실패한 과정을 통한 것이었음을 말한다.



9.
정책차원에서 발전국가를 해체하고, 이어진 제도적 결과의 가장 큰 공백, 그리고 실패는 금융자유화와 부실운영이었다. 당시까지 한국 경제의 특징 중 하나는 금융부분의 상대적인 저발전이었다. 이것은 거대프로젝트에 대해 대출을 궁극적으로 결정한 것이 금융기관이 아닌 국가였고, 그 결과 금융기관의 위기관리 능력은 총체적으로 매우 낮았다. 이는 대맥락에서 국가가 산업을 관리하던 시절에는 아무런 문제거리가 아니었으나 한국 자본이 내외적인 압력으로 시장개방(발전국가의 해체)를 취하는 과정에서, 특히 1990년대 초까지 지속되던 ‘순서와 속도’를 감안하던 조치들이 김영삼 정부에 들어 과도한 자유화를 실행함으로써 치명적인 단점이 된다.

김영삼 정부의 금융정책은 금융자유화 5개년 계획을 말하는데, 이는 단적으로 말해 잘못 설계되었고, 올바로 관리되지 않았다. 이 프로그램의 첫 번째 결함은 많은 금융업체에게 허가를 내어주는 것이 경쟁을 통해 효율성을 증대시킬 것이란 착각 위에 성립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결과는 개방된 금융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든 취약한 상업은행과 종합금융회사의 증가였다. 이로 인해 한국에 들어온 외국계 금융기관의 인수합병에 대항할 수 없었고, 결국 위기 이후에는 금융자유화 이전 수준(1985년)으로 금융기관의 수가 줄어들게 된다.

또 다른 문제는 김영삼 정부가 금융자유화를 금융부분에 있어 국가의 완전 철수와 동일 시 한 데 있다. 금융기관 설립 허가를 남발한데 대비하여, 이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온다. 경험미숙으로 경쟁압력에 시달리던 금융기관들은 과도한 위험을 떠맡았게 된다. 실제로 IMF 이전 전全 종금사의 차입은 200억 달러, 그 중에 단기 부채가 64%를 차지했고, 대출은 85%가 장기 대출로서 만기구조가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전혀 몰랐거나 알고 있으면서 무시했다. 이 위기는 금융기관을 감독하던 기관이 국영은행을 관리하는 재정경제원과 상업은행을 관리하는 한국은행으로 나뉘어 파벌을 형성, 대치함으로서 심화된다. 이로 인해 두 집단은 정보를 공유한다는 기본적인 작업조차 하지 않았고, 금융기관은 그 대립을 이요해 총부채를 줄여 보고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은 자본계정의 개방이었고, 이로 인해 국내 금융위기는 통화위기로 전환, 우리가 아는 IMF사태가 된다. 86년까지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리던 정부는 외환관리법을 통해 엄격히 외환을 통제하게 되지만 86년에서 89년까지 대규모 흑자가 발생하여 이 체계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게 되고, 90년대에는 흑자는 사라지나 자본유입이 증가해 결국 1995년에는 그 체계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동시에 한국 경제에 대한 총체적인 신뢰도의 상승으로 한국 금융기관은 외환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부담스럽게 여긴다. 이에 추가된 것이 미국의 압력으로 1992년 3월 양자회담에서 미국의 금융개방 압력은 절정에 달한다. 1993년 금융자유화 프로그램은 이 회담의 결과였다.

결국 IMF는 신자유주의 원칙을 지나칠 정도로 순진하게 받아들여 경쟁의 힘을 신뢰함으로써, 금융시장에 대한 참여를 증가시키고, 감독을 줄인 틈을 초국적 금융자본이 침입해 자유로이 투기활동을 함으로서 초래된 비극이었다. 이러한 이행 실패는, 비록 김영삼 정부가 당시 한국이 처해있던 내외적인 압력으로 인해 발전국가 시스템을 해체하고, 세계적 조류였던 신자유주의에 합류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점을 감안하더라도 심각할 정도의 것이었다. 이 지점에서 한국 경제는 최악의 방식으로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에 통합되어 천만 실업시대를 맞이하고, 그로인해 한국 민주주의 자체의 파괴를 초래하게 된다.



10.
1989년 이후 소련에 페레스토레이카의 바람이 불게 되면서 자본주의의 승리는 부동의 것이 된 것으로 보였다. 이후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아무런 장해 없이 전세계에 광범위하게 확산된다. 과거 근대화라는 명제가 그러했든, 전 세계의 개발도상국들은 자유주의 시장경제에 편입되는 것을 생존의 문제로 여기게 되었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세계은행과 IMF에서 많은 돈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에게 국내 경제정책을 맡기게 된다. 90년대가 되면 많은 탈사회주의 국가들 역시 같은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들 국가에서 필연적으로 이는 부의 편중을 가속화 시킨다.
그것도 극단적으로.

문제는 자본주의의 승리는 명목상이나마 민주주의의 승리와 함께 한다는 것이다. 자유경제체제를 받아들이는 나라는 필수적으로 민주주의를 받아들여야 했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시장경제의 발달을 통해 등장했으나, 대의제 민주주의는 동사에 자본주주의 성장을 위한 가장 중요한 발판이기도 하다. 서방의 경제논리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상호강화한다는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로서 2000년에 이르러 120국 전세계 63%의 인구가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 살게 되었다. 하지만 극단적인 부의 편중이라는 자본주의적 현상이 민주주의라는 정치 시스템과 결합되어 나타난 것은 많은 국가에 있어 분노한 민족주의라는 모습이다. 그들 국가에서 돈을 버는 것은, 그것도 엄청나게 버는 것은 그 땅에서 살지 않던, 그 땅과 무관하던, 그들과 무관하던 자들이었다. 부유함이 성공의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 정치적 다수집단의 좌절은 필연적이었다.

민주주의라는 정체제제에서 이러한 좌절은 곧장 정치적인 힘으로 뒤바뀔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1990년 이후 전세계에는 복수심에 불타는 민족주의적 슬로건이 울려 퍼진다.
"짐바브웨를 짐바브웨 사람들에게",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을 위한 우즈베키스탄",
"후투족에게 권력을!",
"세르비아 사람들을 위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적 정책을 거부하는 정치인들은 곧장 배신자가 된다. 이 가운데 '백래쉬(backlash)'는 불가피하다. 백래쉬는 세 가지 형태를 띄게 되는데, 첫째는 시장점유 소수집단의 부를 표적으로 하는 것.
둘째는 시장점유 소수집단에 의한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것.
셋째는 민족말살과 그 외 다른 형태의 다수집단을 지지하는 민족적 폭력이다.
단언해서, 시장점유 소수집단을 지닌 대부분의 국가에서 자유시장과 미주주의라는 조합은 평화와 번영이 아닌 민족적 갈등의 표면화와 재산몰수, 독재, 대량학살을 초래했다. 서구 이외의 국가에서, 세계화의 진정한 모습은 이런 것이었다.

이는 근대국가의 구조상 필연적인 일이다. 근대국가는 기본적으로 네이션-스테이트-자본에라는 구조로 형성되어있다.(에외적인 국가는 있다.) 이들 근대국가 각 영역은 고유의 논리를 지니고, 그것들이 상호작용하면서 근대국가라는 총체적 정치집단을 유지한다. 여기서 자본제는 기업으로 대표되는 시장의 논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스테이트는 정체제제 전반을 대표하는 것으로, 세금을 거부고, 그것을 분배하는 작업을 통해 부의 불균등을 해소해 정치적 혼란을 조정한다. 자본제로 인한 불평등이 계급의 문제로 귀착되는 것을 막아내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재분배작업은 완전하지 않다. 이때 '네이션', 즉 민족이 등장한다. 민족이란 개념을 통해 어느 정도의 불평등을 국가와 민족이란 환상적 이념을 통해 용해시킴으로써 그러한 갈등을 다시 해소하려 한다. 이는 매우 강력한 체계다. 그렇지만, 이러한 균형체계도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강하다면 불안정을 피할 수 없다. 위 사례는 근대국가가 '네이션'의 측면에서 작동할 수 없거나 최악의 방식으로 작동한 국가들의 예다. 이것은 IMF 이후 무비판적으로 세계화의 흐름에 동조하고 있는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처해있는 위기의 모습을 바라보는데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11.
지난 화의 이야기로 드러났듯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상호 조화되는 개념이 아니다. 도리어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현대 민주주의는 내부에 폭탄을 품고 있다고 보는 쪽이 더 진실에 가깝다. 이는 현대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정체체제이기 때문이다. 현대 민주주의에 적용되는 자유주의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논해질 수 있다.

첫 번째는 이념적 자유주의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성립시키기 위해서, 동시에 민주주의를 제한하기 위해서 필요했다. 민주주의란 다수의 지배를 말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말을 바꾸면 다수의 횡포가 가능해진다. 민주적인 원리에 따라 다수가 소수를 모두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압류, 분배하는 것은 정당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보할 수 없는 개인의 권리를 설정하는게 필요했다. 그것을 위한 이념으로서 근대국가는 자유주의 이념을 도입하게 된다. 실제적으로 이 이념에 국가에 반영된 형태가 '헌법'이고, 통치원리가 '합헌주의' 혹은 '법치주의'라 불리는 법에 의한 지배이다. 모든 개인은 다수의 판단이 아닌 법에 의해만 억압받을 수 있다. 다만, 법은 다수에 의해 제정된다는 구조다.

두 번째는 경제적 자유주의다. 이 경제적 자유주의를 다른 이름으로 바꿀 때, '바존주의'가 된다. 경제적 자유주의가 근대국가의 주된 원리가 된 것은 근대국가의 탄생과정을 살펴보아도 필연적이다. 부르주아의 경제해방에 대한 열망이 중세를 폐기하고 근대의 문을 여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이 원리는 동시에 이념적 자유주의를 요청하게 되는 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좀 더 직관적인 표현으로 바꿀 시, '약육강식'이 되기 때문이다. 근대국가는 자본주의라는 경제 시스템을 통해 움직이고, 이 시스템을 경쟁을 기본으로 한다. 경쟁은 승자와 패자를 선명하게 나누고 이익을 독식 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승자는 언제나 소수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다수가 지배하는 체제고, 다수의 패배자는 소수의 승리자를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을 통해 정당하게 권자에서 내던질 힘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자유주의 이념이 민주주의에 도입되는 것은 꼭 필요했다.

상술한 내용에서 추리할 수 있듯이, 현대 민주주의가 품고 있는 폭탄이란 다름 아닌 민주주의의 원리와 자유주의의 원리가 필연적으로 충돌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시장과 민주주의의 충돌이라 말해도 상관없겠다. 복지국가는 '위험한 패배자'들이 정체세력화 하지 않도록 막기 위해, 즉 , 폭탄이 터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필요했다. 보수 정치인 비스마르크가 복지 개념을 국가에 도입한 최초의 정치인인 것은 때문에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폭탄의 존재는 현대 민주주의의 구조에 있어 핵심이며, 사실상 해결 불가능한 딜레마다. 갈등 자체가 없어질 수 는 없다. 갈등 자체가 없어질 수는 없다. 가능한 것은 양자 사이의 균형을 잘 잡아 최대한 안정 상태를 유지하는 것 정도다. 이 안정 상태 유지의 핵심은 중간 계급이 되도록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부의 분배 상태가 되도록 평등해야 한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그러한 불평등이 '민족' 혹은 '국가' 개념과 결합할 때, 지난 사설에서 이야기된 국가들에 일어났던 것과 같은 철저하고 폭력적인 타자배제의 시스템이 작동하게 된다. 

이 때 민주주의는 '지옥'의 다른 이름이 된다.

때문에 IMF 이후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는 한국에서, IMF 이후 경제부분에 부여된 지나친 자유가 역설적으로 폭력적인 타자에 대한 억압으로 귀결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바로 현재 한국 민주주의가 처해있는 위기의 문제이며, 이에 대한 장래의 전망이 지극히 어둡기에, 민주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는 실패했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2.
여기까지 나는 45년 이후의 자본주의와 한국 민주주의의 진행 과정, 그리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상관관계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들 이야기가 종국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간단하다. 민주주의의 성숙, 혹은 발전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은 정치적으로 안정된 국가의 중산층 확대에 기반 한다는 말이다. 그들은 성찰을 위한 '여유'-돈, 시간, 문화 어떤 다른 말로도 대치가 가능한-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이야기를 바꾸면 양극화가 심화되어 중산층의 몰락이 심해진다면 민주주의 자체가 몰락하고, 그 결과 참혹한 세계가 성립될 거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 참혹한 세계의 이름은 '파시즘'이다.

사실 파시즘이란 개념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다. 파시즘에 대한 긴 시간의 여구에도 불구하고 합의된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파시즘에서 일관된 정치 원리를 찾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이런 위험을 딛고서 파시즘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철저한 타자의 체계다. 그것은 칼 슈미트가 일찍이 주장했던 '적과 동지의 구분'이라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극단까지 확장해 실천한다. 
파시즘은 '우리'와 '너희'를 구분해 우리를 주장하고 너희를 불길하게 바라본다. 그 세계에서 초대받지 않은 모든 외지인은 공포스런 '적'이 된다. 거기서 소수는 모든 것을 다수에게 양보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그들은 언제나 '동지'에서 '적'이 되어 척결의 대상이 된다.

파시즘의 최대 지지세력은 역설적이게도 그 사회의 '약자'다. 인간은 진실의 세계에 살지 않고, 현실의 세계에 산다. 현실의 세계에 산다는 것은 그가 바라보고 인식되는 세계의 모습은 해석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현상이라도 바라보는 사람의 숫자만큼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에 있어 인간이 보이는 경향성은 언제나 '이기'적이다.
현상을 해석함에 있어 확고한 정의관을 기준에 세우기보다 자기의 편리함과 이해관계를 우선시하고 그것에 정의로움을 덮어씌우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 이 해석의 이기적 경향을 극복하는 것은 지극히 힘든 일이다. 장기간의 교육을 거친다고 해도, 세계에 대한 자신의 인식에 대해 비판적 성찰 능력을 갖추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특히 약자의 입장에 있는 이들, 삶에 허덕이는 이들이 차분하게 사안을 보민하며 자신에게 드러나는 세계의 모습, 즉 현실의 진실성을 검토해 봄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기 쉬운 일이다. 그러한 성찰은 언제나 많은 시간과, 여러 개념적 도구를 활용한 정신적 노동을 요구한다. 그래서 '약자'에게 세계는 피상적 인식에 기초한 신비적이고 압도적인 것의 압박이고, 공포와 무력감의 대상으로 나타날 뿐, 반성의 대상이 되기 어렵고, 여기서 기대되는 것은 '구원'이지 진취적 개선이 아니다.

그래서 인간이 진실이 아니라 현실의 세계에 산다면, 그리고 다수인 '약자'의 현실에 대한 가치판단의 기초가 되는 것이 피상적 체험에 비롯한 무력과 공포, 그리고 '언어'라면, 강자의 입장에서 민주주의는 아주 수월한 통치의 도구로 전락 할 가능성이 있다. 즉, 강자는 사회의 주류담론 일반을 조종(지배)함으로써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춰진 현실을 만들어내 그것을 다수의 현실로 바꾸어 낼 수 있다. 이 현실의 구성과 전파, 다시 말해 '헤게모니'의 장악을 위해 가장 간단한 방법론은 사회의 약자들이 겪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 '희생양'을 내세우고 그것들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그럴듯한 언어를 사회 전체의 것으로 전파하는 것이다. 이 때 가장 좋은 '희생양'은 약자들의 삶 가운데 피상적이지만 직접적으로 체험되는 그들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외부인이다.
그것은 가령 외국인 노동자이고, 가령 외국이며, 가령 여성이고, 가령 외국의 자본이며, 가령 소수 민족이다.

'약자'는 피상적 체험 가운데 그들에게 피해를 입었고, 강자가 구성한 현실은 그들의 고통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제시한다.(강자의 책임은 제시되지 않거나 거짓으로 포장되어 민족과 국가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제시된다. ─즉, 자신들을 '메시아'로 치장한다.) 개념적 도구의 취득은 물론, 인식을 반성할 정신적 노동을 보장하지 못하는 생계의 문제에 처한 약자들이 인간 인식의 (공포와 무력감에 물든) 이기적 경향성과 함께하여 그러한 구성된 현실로 세계를 인식할 때, 지극히 합법적인 과정을 거쳐 완성된 민주주의를 일거에 파시즘의 우파 독재체제로 전락시킬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은 이러한 메커니즘에 알몸으로 노출되어 있는 국가 중 하나이다. 
앞선 글에서 설명했듯이, 한국의 정체체제가 신자유주의라는 특정한 경제시스템에 완전히 복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13.
그렇다면,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양극화를 이루는지 조금 더 상세하게 살펴보자.

명백하게도, 자유는 언제나 강자의 자유다. 체격도, 속도도, 훈련기간도 전현 다른 두 사람이, '자유롭게' 싸운다면 크고, 빠르고, 오래 훈련한 이가 그렇지 못한 이를 이기는 것은 필연이다. 더구나 자본의 세계에서, 승리는 단순한 승리가 아니다. 그것은 승자가 패자의 시신을 잡아먹고 자신의 덩치를 키우는 과정과도 연결된다. 그래서 자본의 탄생과 선장은 고름과 오물을 뚝뚝 흘리는 흡혈귀의 형상과 언제나 닮았다.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자유의 이념을 극단화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문에 이 흐름이 민주주의와 적대되는 양극화를 만들어내느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신자유주의라는 흐름에 최적화된 자본의 양상인 국제금융자본이다. 이들은 투자지역에 심각한 사태를 초래하기 쉽다. 금융자본에 있어 투자지역의 성장은 전혀 달갑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투자지역의 성장으로 인한 투자증대는 노동력과 원자재의 수요증가로 물가를 상승시키게 된다. 하지만 금융자본은 물가상승이 일어나면 직접적으로 그들의 이익에 손해를 보게 된다. 물가가 상승하는 만큼 그들의 투자이익(이자)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투기자본(중에서도 핫머니)의 속성상 그들이 투자하는 자본의 유동은 단기적이고 빠르다. 
즉, 장기투자에 무관심하다.

그래서 막대한 국제금유자본이 들어선 지역의 지역기업은 적대적 합병인수(M&A)를 막기 위해 투자를 줄여 그들의 공격에 대비하게 되고, 이는 고용불안을 부르게 된다. 고용불안은 곧장 시민들의 저축증대와 소비감소로 이어지는데, 이러한 일련의 흐름이 결국 도달하는지점은 저성장이다. 저성장의 논리적 귀결은 또한 결국 양극화다.

때문에 신자유주의적 개혁은 사실상 그 어떤 국가에서도 발전이라 할 만한 것을 이루지 못했다. 한국은 전형적인 사례의 하나다. 한국의 진보 경제학자들 가운데는 97년 이전 30~40년간 재벌의 과잉투자가 위기를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 신자유주의는 이런 맥락에서 투자를 억제함으로 한국 경제에 긍정적이었다고 말하나, 과잉투자는 그 투자로 인한 생산물이 소비가 되지 않아 경제가 침체될 때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다. 하지만 한국은 97년 이전 공황이다 할 만한 것을 겪지 않았고, 꾸준한 성장을 해왔다.

도리어 국제금융자본이야 말로 97년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93년, 금융자본이 한국에 들어오게 됨으로써, 과거 은행이자로 상당부분 빠져 시민의 소득증대에 큰 몫을 했던 기업의 이익은 주주자본의로의 전환과 함께 투자에 들어가기보다 주주들을 위한 배당금으로 돌아섰고, 이는 이자로 나가던 이익의 상당부분을 외국인 고소득자에게 돌아가도록 했다. 이러한 투자억제는 직접적인 내수침체의 원인이 되었고, 이 흐름에 수반되어 국내기업의 부채규모는 외국인 직접투자가 허용된 93년 이후 급증해 93년 400억 달러 수준이던 외채는 98년 1500억 달러까지 치솟는다. 따지고 보자면 97년 무렵, 한국에는 과잉투자라 할만한 현상이 짤막하게 있었는데, 이는 93년의 정책시행의 결과라 보아 무방하다. 실제로 97년의 금융위기를 겪지 않은 아시아 국가로는 중국과 대만이 있는데, 그들은 금융자유화를 하지 않았다...



14.
한국이 겪었던 것처럼, 신자유주의 가운데서도 금융자유화가 초래하는 위기의 정도는 세계적이며, 동시에 파국적이다. 이는 시공간의 압축이 있기 전부터도 이미 예견되어 있던 사태였다. 
가령 케인즈는 투기 자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 자본과 유가증권의 자유로운 움직임은 반드시 통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요술양탄자(기업)의 속도(목표)를 끊임없이 혼란시킬 것이다. 그리고 이 움직임은 모든 정상적인 사업을 혼란에 빠트리는 효과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적대적 합병을 피하기 위해 충반한 자금을 모으느라 투자에 자금을 돌리지 않는 경우가 케인즈가 예견한 사태에 대한 가장 직관적인 예시다. 그렇지 않은 기업도 투자자들에게 잘 보이고 기업평가를 올리기 위해 그 실질적인 효과가 무관하게 일단 다운사이징을 함으로서 많은 이들의 삶을 처참한 지경으로 몰아가곤 한다.

그렇다면 금융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어떻게 이렇게 강령하고도 파국적인 힘을 발휘 할 수 있느 것일까? 우선 소개하고 싶은 것은 악셀로드의 실험이다. 이 실험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미시간 대학의 교수인 악렐로드는 죄수의 딜레마를 응용한 토너먼트 게임을 개최한다. 거기서 플레이어는 특정한 규칙에 따른 전략 프로그램을 설정해 자신의 세력에게 실행하도록 할 수 있다. 기본적인 규칙은 상대에 대해 배신, 협동의 두 카드만을 설정할 수 있고, 대전 기록은 모두 기록된다. 협동하는데 배신하는 것이 가장 점수가 높았고, 서로 협동하는 것이 그 다음, 서로 배신 하는 것은 약간의 마이너스를 받았고, 배신당하는 것이 가장 마이너스가 컸다.

이 토너먼트의 결과는 흥미롭다. 승리자는 거의 언제나 "팃 폴탯(TIT for TAT)'이라는 전략이었다. 우둔하고 확실한 이 전략은 '배신당하지 않는 한 배신하지 않는다.'는 전략이다. 상대가 먼저 배신하지 않는 한 이 전술은 끝없이 협력하고, 한 번 배신당하면 배신한 자에 대해 한 번 배신한다. 이 외에 배신을 기본으로 하는 전략은 거의 설사 우세를 차지하더라도 곧 그들끼리의 대결로 인해 공멸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여럿이지만, 이는 향후 다루기로 한다. 지금 이야기에 연관해서 이끌어내야 하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배신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배신하지 않아야 하고, 그리고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상대의 배신을 '응징'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간략화하자면, 지금 금융자본이 지니고 있는 막대한 힘은 그들의 전횡에 대해 대부분의 국가가 응징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데서 비롯하고 있다.

20세기 말부터 21세기 초에 이르러 시공간의 압축이 일어난 탓으로 믿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자본이 자유롭고 가볍게 이동하고 있고, 신자유주의라는 흐름으로 인해 시장의 문은 개방되어 이들 자본은 투기를 목적으로 세계의 각지를 노린다. 투자대상이 되어 있는 특정한 국가가 이들에 대해 제제를 가하고자 한다면 그들은 다른 투자처를 노리고 언제든지 쉽사리 떠나버릴 수 있게 되었고, 투자되었던 막대한 자본이 회수되면서 그 국가나 지역의 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될 것임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덕분에 투기 자본에 대한 개별 국가의 대응은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만일 방법이 있었다고 한다면, 말레이시아처럼 IMF의 간악한─그래, 차라리 나는 간악한이라는 표현을 쓰겠다─ 조언에 따른 금융시장 개방을 하지 않는 것이었지만, 한국처럼 내수시장이 작고 경제의 많은 부분을 외부에 기대는 국가로서는 이 역시 힘든 형편이었따. 그렇게 할 경우, 더 큰 것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 경제시스템을 좀 더 약자에 우호적이고 안정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국제금융시장의 방만함을 우선적으로 제제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비참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대통령의 발언처럼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라는 말을 단지 긍정하고, 이 파괴적인 세계화를 운명처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시민들이 이 파국의 끝에 깊은 상처를 입고 민족주의 정치가의 품으로 몰려갈 것을 기다려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아탁'이라는 단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탁'(attac─Assoiciation pour une Taxation des Transactions Financieres pour l'aide aux Citoyens)은 '시민지원을 위한 금융거래의 과세연합'을 의미한다.



15.
1998년, 프랑스의 시사지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가 '시장을 무장해제하자!'라는 타이틀의 사설을 게재한다. 이 사설의 내용은 간단하다. 그것은 아시사의 금융위기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무소불위하면서 사회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국제 금융시장의 힘을 비판하고, 막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이 글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시민지원을 위한 토빈세 과세연합이라는 새로운 NGO를 설립하는 것이 왜 말이 안 된단 말인가? 노동조합과 수많은 사회, 문화, 환경 단체들과 협력하여 이 단체는 최종적으로 토빈세를 도입하도록 정부에 압력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보편적인 연대의 이름으로."

이 글은 엄청난 호응을 얻는다. 오천통이 넘는 독자 편지가 날아들었고, 편집진은 두 손 놓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1998년 6월 3일 파리에서 아탁이 결성된다.

토빈세란 미국의 경제학자 제임스 토빈에 1978년에 주장한 세금을 말한다. 이것은 장기투자 자금에 대해서는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단기성 투기 자금에 대해 세금을 부과함으로서 파괴적인 자본유동을 억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연구에 따르면 토빈세가 세계적으로 도입될 경우 1400억 달러의 세금을 거둘 수 있게 되며, 그것을 통해 세계의 수많은 비참 중 많은 부분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아탁의 기본적인 목표는 각국이 이 토빈세를 받아들이도록 광대한 세계적 규모의 연대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때때로 비현실적이라 비판되는 이 운동은 그러한 아우성에도 무관하게 성과를 내고 있다. 최초로 캐나다에서 토빈세를 도입한데 이어, 2001년 11월 19일 프랑스 의회는 토빈세 도입에 찬성했고, 2004년에는 벨이에에서도 이를 도입한다. 지금은 유럽연합 차원에서 토빈세를 도입하는 것이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다. 갈 길은 여전히 멀지만, 조롱되던 것처럼 불가능이 아님을, 그들은 여실히 보여준고 있다.

하지만 아탁의 목표는 그 이상이다. 진정하고 거대한 연대를 위해 아탁은 단순한 시민연합을 넘어선 거대한 문화, 교육운동의 주체가 되었다. 그것은 거대한 규모의 스터디 클럽이며, 문화운동이며, 시위대이자 정치집단이다.

자신을 둘러싼 시스템을 이해해야만 대처 방안을 찾을 수 있으며, 자신이 처한 현실에 어떤 감정을 담아야 올바른 것인지 알 수 있기에 그들은 경제적 문맹 퇴치에 열중한다. 무지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으며, 심지어 악이다. 그 이해가 분노나 슬픔과 같은 감정적 뜨거움이 될 때 실천으로 옮아갈 수 있기에 그들은 그들의 운동과 관련된 각종 문화행사를 주관한다. 이 문제에 대한 세계적인 감정적 공감의 띠가 더 넓고 굳건해 지도록. 그리하여 아탁은 모든 이들에게 이 연대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익에 관련된)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프랑스의 로베스피에르 거리에 있는 아탁 포스터는 이 운동의 성격을 완벽하게 설명한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그렇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정치적 무기력과 혐오, 그리고 경제적 무지에 잠식된 티티테이먼트의 디스토피아는, 그리하여 결국 파시즘의 공포가 이면에 도사리는 신화적 세계는 거절 가능하다. 그러하기에 지금 이 세계를 거부한다. 
아탁은 다른 세계를 위한 작은 고리의 이름이다. 
이 고리에 아탁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아탁이란 하나의 상징이다. 중요한 것은 이 상징이 의미하는 기의記意, 결국 '연대'다..
이 세계는 단순하다. 전 세계의 하위 80%가 단결한 세계다. 그들은 거대자본의 폭력을 잃을 것이고, 민주화와 민주주의가 일치하는 다른 세계를 얻을 것이다.


16.
다시 악셀로드의 실험으로 돌아간다. 전술前述했듯이, 이 실험에서 승리자는 팃폴탯이었다. 상위 점수 군이 팃폴탯이 아닌 경우에도 그것은 반드시 배신과 협력을 조합해 사용하는 전략을 사용한다. 무조건 o를 내는 비둘기파는 어느 경우에나 승리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이 비둘기파의 패배를 간단히 고찰하고자 한다.

논리적으로 비둘기파는 전체로 보았을 때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할 수 있다. 그들은 모두 협력하고, 그 협력은 다른 어떤 선택보다 전체적으로 많은 점수를 벌어준다. 
한데 왜 그들은 패배하는가?
문제는 그들이 적에게 극히 취약하다는 점이다. 비둘기파는 우선적으로 배반하는 매파와 만났을 때 아무런 대처 수단이 없다. 그들은 그저 착취의 대상이 된다. 덕분에 매파는 끝없이 몸집을 불릴 수 있다. 이는 비둘기파의 전략이 매우 불안정하다는 의미다. 배신과 변화에 대처할 방안이 없는 그들은 사소한 변화로 인해서도 쉽게 무너진다.

이는 직관적으로 당연한 결과다. 한데 왜 비둘기파의 패배를 우리는 새삼 고찰해야 하는가. 아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연대가 결국 비둘기파의 그것과 같이 문이다.

기억하자.
비둘기파는 응징의 수단이 없기에 매우 불안정하다.

아탁이라는 이름으로 추구되는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전세계 노동자들의 연대다. 전세계 노동자들이 협력카드를 내어 놓아야 한다는 거소가 같은 의미다. 이 연대는 자발적이며, 연대에 대한 거절이나 배신에 현실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은 없다. 그들이 이 연대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논리적인 기대는 이 연대가 그들에게 현실적인 이익으로 돌아갈 것이란 점이 먹혀 들어갔을 때뿐이다. 하지만 이념이 아닌 이익이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최선의 카드일 경우, 이 연대에 대한 전망은 비둘기파의 미래와 같이 지극히 어둡다. 

우선, 최초 연대의 성립이라는 것부터도 크게 어렵다. 현재 세계는 국가 간의 경제력 차이가 너무 크고, 그로 인한 노동자들의 소득 수준이 너무 차이가 난다. 미국과 같은 제 1세계와 가나와 같은 제 3세계 노동자들의 소득은 같은 노동자란 입장에 있다고 해도 절대적 수준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며, 이 엄청난 차이로 인해 제 3세계 노동자들은 제 1세계 노동자가 되기 위해 끝없이 이주하고자 하며, 이에 대해 제 1세계 노동자들은 드물지 않게 증오로 응답한다.(그 궁극적인 결과는 파시즘이다.)

여기서 더해서 세계화는 그 실체가 어떠하든, 논리적으로 제 1세계와 제 3세계 노동자들을 평등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1세계의 인건비가 비쌈으로 인해 산업은 보다 싼 지역으로 이동하고, 그로 인해 2, 3세계 노동자들의 벌이는 1세계 노동자들의 상황이 나빠질수록 좋아지게 된다. 제 3세계 노동자가 1세계 노동자의 연대에 대해 응할 이유가 없다. 이러한 논리구조 아래서 세계화는 도리어 그들에게 구원자의 모습으로  조차 비춰질 수 있다. 만에 하나 이 연대에 성공했다고 해도, 그 연대를 유지해 나간다는 것은 연대를 이루는 것 이상으로 어렵다. 이때부터는 정말로 전세계 노동자들이 비둘기파의 전략을 철저히 준수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느 지역의 노동자들이 이 연대를 깨고 자본을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즉, 매파의 전략을 취한다면─ 그 자본은 일시적으로 그 지역 노동자들에게 엄청난 이득을 안겨 줄 수가 있다. 그리고 다른 지역의 노동자들은 이들을 즉각적으로 제재 할 방법이 없다. 가능한 방법은 그 지역의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이나 관세운동과 같은 것이지만, 이것들의 효과는 즉각적이지 않다. 여기서 더해 노동운동에 대해 필연적으로 적대적일 자본운동의 전략적인 도움으로 배신자들의 그것을 어느 정도 상쇄해 내는 것 역시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다른 연대들이 꿋꿋하게 유지되리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옆의 저들은 배신으로 막대한 이득을 보았고, 보고 있으며, 그 배신에 이어 먼저 배신할수록 큰 이익이 약속되어 있는데 더해, 그 배신은 전체의 이름으로 '익명'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경우 연대에 대한 충성을 기대하는 것은, 제재수단이 없다면 수백 이상의 주체적 개체가 모인 집단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최초의 배신이 발생한 이후, 배신은 연속해서 일어나 연대를 도미노처럼 무너뜨릴 것이다.

심지어 그러한 배신은 배신에 대한 대응이라는 점에서 정의로운 행동이라는 '명분'마저 가질 수 있따. 즉, 그것은 배신이라기보다 '팃폴탯'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 연대에 대해 팃폴탯조차 용납할 수 없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연대를 파멸로 이끈다.

이미 우리는 그러한 사례를 알고 있따. 19세기 미국에서는 기업의 권한을 제한했지만 뉴저지가 연방정보의 방침을 무시했고, 기업이 뉴저지로 이동하자 뉴욕도 따라서 폐지, 결국 전 주에서 연방정부의 방침을 폐기하고, 지금에 이르게 된다. 배신이 어떻게 오염을 부르는가에 대한 선명한 실례다.

프랑스가 토빈세를 도입했다. 벨기에도 토빈세를 도입했다. 유럽 연합이 장래 도입할지도 모르며, 이것은 더 펴져나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토빈세를 도입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상대적 우위 덕분이다. 그들은 토빈세 정책을 취해도 자본이 극격히 탈출할 정도로 하찮은 시장이 아니다. 도리어 그것을 감수하고서도 자본이 몰려들 정도로 매력적인 시장이다. 그러나 세계화가 지속된다면 그들이 지닌 상대적 우위는 세계화의 논리에 의해 점차 상쇄될 것이고, 결국 그들은 토빈세를 중단해야 할 것이다. 
19세기 미국에서 그러했듯이.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패배할 테니까.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하지만 다른 세계를 위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그리고 그 다른 세계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우리가 그 세계를 지켜나갈 수 있을까에 대한 전망은 희미하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반세계화에 협력하는 것이 최선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아주 긴 시선으로 보았을 때, 그것이 모두가 가장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자기의 이름으로 자신이 생각해,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조차 10년 후 미래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드물다. 
자신의 이름을 걸지 않고 행동해, 모두가 함께 책임져야하는 사안에 대해 100년을 바라보며 판단해 주길 기대하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소득 천달러 국가의 노동자가 4만 달러 국가의 노동자의 호소에 공감하고 꿋꿋하게 연대할 수 있을까? 
결국 대부분의 사람은 '내'가 더 행복하기를 바란다. 범위를 넓혀도 그건 '우리'다.
'모두'가 아니다.
그런데도 이 아득한 연대에서 아무런 배신도 발생하지 않고 전세계적인 연대를 성립시켜 지켜나가는 것이 가능할까? 비둘기파는 착취자가 경쟁자로 참여한 게임에서 결코 승리할 수가 없는데도?

여기서 우리가 우리의 연대를 위해, 그 연대를 통해 이루어질 다른 세계를 위해 진정으로 대결해야 하는 것은 국가도 자본도 아닌 우리들 자신일지도 모른다.



17.
글을 마치며.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따. 지금도 우리는 그들이 이루어낸 많은 것들을 품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유산들 가운데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그들이 남긴 한 편의 신화다. 점토판에 남아 우리에게 전해진 '길가메시 서사시'는 인간 삶이 품는 참혹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고통스러운 글이다.

힘 있는 길가메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자를 쳐 죽이고, 마음에 드는 여자를 강간하는 악당이었따. 그는 힘으로 지상에 빛나는 제국을 세웠고, 아무도 그것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그러나 지상의 모든 권세를 누리던 그도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었고, 죽음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던 그의 여정은 시두리의 노래로, 긍정하는 죽음으로서 귀결될 뿐이었다.
시두리의 노래는 다음과 같다.


'길가메시여 어디로 급히 가려 하십니까?
당신은 생명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들이 인간을 만들 때 인간에게 죽음도 함께 붙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생명만은 그들이 보살피도록 남겨두었습니다.
길가메시여 당신에게 충고를 드리죠.
좋은 음식으로 배를 채우십시오.
낮으로 밤으로 춤추며 즐기십시오.
틀暉 옷을 입고, 물로 목욕하며 당신 손을 잡아줄 어린 자식을 낳고, 아내를 당신 품 안에 꼭 안아 주십시오.
왜냐하면 이것 또한 인간의 운명이니까요.'



수메르는 참혹한 환경 위에 성립한 문명이었다. 그들의 대지는 비옥했고, 그들의 사는 곳은 뚫려 있었기에 힘 있고 욕심 있는 자들은 그곳을 얻기 위해 언제나 쳐들어와 싸웠다. 피가 마르지 않는 대지였다. 그들의 신화가 허망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마도 그들이 살아야 했던 시절과 환경에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신화를 '적었'고, 신화를 '남겼'다.

21세기가 되었다.
20세기를 돌이켜 보며 많은 이들이 이제 '이념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한다.
이념은 정말 끝난 것인가. 
이념은 끝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줄 '타자他者'를 잃어버렸을 뿐인 게 아닌다.
차이를 드러내줄 타자가 없어진 이념의 속에서 이념이 보이지 않기에 이념이 사라졌다고 말하고 있을 뿐은 아닌가.

이걸로 비겁한 글은 줄이겠다.
21세기는 착한 사람이 행복한 세상이 되기를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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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 끝났습니다. 타자는 이만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그럼...


은 페이크지요. 
과거 타자打者가 안녕전화에서 하던걸 그대로 썼습니다.

'죽음은 언제 찾아 올지 모르는 불청객. 우리는 태어남으로서 그 불청객의 초청인사를 받은거지!'

새벽의 사수 라이온의 말 일부와 글의 내용이 겹치는 부분이 있군요 음.....
아 중간에 길가메시를 보면서 
아... 하신분은 하급, 
금삐까....하셨던 분은 중급, 
방심왕 자식....하신분은 상급입니다.(무슨 뜻인지 모르겠죠?)

그럼 '라노베의 모든 것' 연재로 돌아오겠습니다.
Adios...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10-18 14:05)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10-01-27
11:24:18 



상병 정인환 
  내용이 너무많아 다는 못봐 1.에 대해 간단히 이의를 제기합니다. 
민주주의라 함은 국민이 곧 주권이며 그 주권을 토대로 국민을 위한 정치로 알고있습니다. 
헌데 민주주의와 범준씨의 말처럼 지니계수를 토대로한 양극화 현상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나 의문입니다. 
'양극화'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계화, 정보화, 다원화, 개인주의의 물결에 의해 소수의 권력 및 부의 흐름의 
독점화를 초래하고 이를 통해 '양극화'는 전세계적으로 순식간에 뻗어나갔습니다. 
이는 민주주의 정치가 꽤 오랜시간 지속되온 미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론에서 밝히신 민주주의가 질적으로 나빠졌다 함은 이러한 파생된 현상이라기 보다는 
민주주의의 근간인 정당의 역할이 어떠했는지, (투표율만 보는 것 보다도) 시민들의 정치참여의식과 정치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알아봐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현재보여지는 것들은 민주주의의 비관적인 면모라가 아닌 
시대의 변화에 따른 현상으로 받아들여야하지 않을까요 2009-09-16
13:26:21
  



병장 김범준 
  정인환//그에 대한 근거로 전 '2001년 고려대의 아세아문제연구소의 조사는 이에 대한 유의미한 증명자료이다'를 말했습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발생, 진행, 부패를 단적으로 압축한게 한국의 역사이기 때문에 이 또한 유의미한 자료로 쓰일 수 있다고 봅니다. 

또한 예시로 들지는 않았지만 일본 내무성 선거담당 위원회나 미국 상하원 통계에서도 비슷한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2009-09-16
14:48:49
  



상병 박원익 
  추천했습니다. 뽑아서 감사히 읽어보겠습니다. 2009-09-17
09:50:21
  



병장 김태완 
  '그냥 최초의 인간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욕망과 배신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거지 뭐.'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게 더 낫겠습니다. 이상적인 세상을 향유하고픈 꿈을 꾸고 사는 것보다 현실의 부조리를 조금씩 타계해 가며 더 이상적인 세상에 가까워 질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아탁'은 참으로 혁명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비록 그 여파가 전세계까지 미치지 못하더라도, 어느 나라의 배신을 맛보더라도 그들의 현실 안주적이 아닌 진보적 행동은 추앙받아 마땅합니다. 그 어디가 배신을 하겠습니까. 그들 나름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으니 배신을 하면 질타를 받고 소외될 것이 뻔한것을. 저도 피라미드 형태를 띤 되물림식의 계층적 사회가 그리 탐탁치 않습니다. 아탁을 개인적으로 응원하는 바입니다. 

연대의 형성이 우리 세대 고유의 본성과 미각성 상태 때문이란 것에 저도 공감합니다. 뭐 때문이다는 것보다 일단 나를 돌아보아야겠지요. 'X묻은 X이 겨묻은 X을 욕한다.'는 말이 문득 떠오르는군요. 저 자신도 요즘 많이 각성하고 있으며 수치를 느끼고 있습니다. 정말 말로만 떠들기 싫은데 말이죠. 

끝문단에 결국은 인생무상으로 가는가 싶더니 신화창출과 21세기는 착한 사람이 행복한 세상이 되기를 바랄뿐이다로 결론을 내리셨군요. 오랜만의 무라카미 하루키인가 했습니다. 근시안적이고 이기적이 아닌 원시안적이고 이타적인 자세로 만민과 후세를 위해인가요. '불청객의 초청인사를 언제 받을지 몰라도 지금 이순간 열의를 불태우자!'이든 '내 가족, 우리 지구의 착한 사람들을 위해 싸우자!'이든 평화를 위해 싸워야 함은 불변의 진리인 것 같습니다. 

저도 추천하나 꾹 누르고 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2009-09-17
11:40:08
  



상병 양제열 
  어마한 양의 텍스트를 꾸준히 생산하신 열정에 박수를! 짝짝짝. 이런 텍스트를 볼 때마다 책 주문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웃음) 2009-09-17
19:17:42
  



상병 양제열 
  아 깜빡했네요. 가지로- 2009-09-17
20:10:32
  



병장 윤정기 
  잘 읽었습니다. 

가지로- 2009-09-23
09:27:50
  



상병 김 건 
  가지로- 입니다. 2009-10-01
09:51:22
  



병장 김형태 
  이미 가지로 왔지만 가지로- 2009-10-19
16:0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