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신자유주의는 나쁘다, 그러나 참여 민주주의는 '더' 나쁘다!
병장 박원익 [Homepage] 2009-11-13 02:43:34, 조회: 41, 추천:0
아래에 철학 이야기와, 괴수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말을 하자면,
나 역시 '재미 없는' 글은 정말 읽기 싫다. 재미 없는데다가 어렵기까지 한 글을 도대체 누가 읽겠는가?
그런 대표적인 저자를 하나 꼽아 보자면, 누구보다 '한나 아렌트'이다.
최근 칸트 정치철학에 대해 글을 올린 김에 그녀가 쓴 <칸트의 정치철학 강의>를 읽어보았지만, 정말이지 읽는 내내 불쾌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일단 그녀가 칸트에게 있어 상대적으로 덜 부각된 정치철학을 추켜세우며, 칸트의 정치철학적 논문들이 기록되기 이전에 수행된 '비판작업'을 깍아내리는 것부터가 불쾌하다. 다시 말해 그녀는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 나오는) 실천철학은 놀라울 정도의 그의 정치철학적 사유와 무관하다"고 말하는데, 이는 내 입장에서도 전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인데다가, 칸트 자신에게 있어서도 대단히 모욕적인 발언이기도 하다.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등장하는 '판단력' 개념이 칸트가 젊은시절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정치철학적 기획에 더 잇닿아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판단력'이란 어떤 사물의 미추를 판단하거나, 자연의 산물(아주 일상적인 예를 들어 들판의 풀과 꽃)의 존재이유에 대한 판단하면서, 판단대상이 되는 특수자를 보편개념에 포섭하는 인식행위이다. 이것은 물론 도덕적 판단이나 과학적 판단과 달리, 판단대상과 그것을 포섭하는 개념(미추, 목적론적 개념 등등)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인 연관도 없다. 즉 어떤 사물의 미추를 판단하거나, 그것이 존재하는 목적이나 이유에 대한 해명(왜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등등은 누구에게 강요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것은 실천적이지도 않으며 또한 인식적인 강제력을 발휘하지도 않은, 순수하게 관조적인 행위이다.
그런데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판단력' 행위에 정치적 행위의 가능성을 정초하려 했다. 판단력은 개별자를 보편자 속으로 흡수하거나 재단하지 않고, 개별자 그 자체로 존중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것은 각자의 개별적 삶 다수가 공존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아렌트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이 이러한 연유에서 실천/순수 이성비판과 완전히 다르다는 주장을 펼치는데, 그 이유는 고작 '진리'라는 단어가 판단력 비판에 얼마 안 나오지 않는다는 것과, 그것이 보편적 관심사를 배제했다는 추측성 논거 뿐이다. 얼마나 피상적인가!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는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을 읽다 보면 매우 자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복수의 상이한 판단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순수이성비판>에서도 주어져 있다. 칸트의 비판철학은 무엇보다, 내면화될 수 없는 타자를 염두에 둔 철학이다. 그것은 단지 '물자체'라는 인식론적인 용어로 말해졌을 뿐이다. <판단력 비판>의 문제의식은 처음부터 주어져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칸트의 만년에 쓰여진 정치철학적 논문들을 읽으면 그 논의들이 '실천이성적' 관심과 무관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도대체 어디서 칸트가 정치철학적 사유를 취미판단의 한 부류로 격하시키는가? 그런데 아렌트는 정치적 판단을 '취미판단'의 영역에 한정시킴으로써, 그러한 정치적 판단이 자유롭게 수행되는 공론영역을 이론적으로 구성하려 했다. 이와 더불어 아렌트는 정치의 가능성이 다수의 행위자들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존중하는 그러한 '공적공간'의 존립에 달려 있다고 역설한다. 거기에는 어떤 '전체주의적(?)'인 보편적 관심사도 배제된 채, 각각의 완전히는 정당화될 수 없는 '판단'들이 공존하는 일종의 사회적 '살롱'을 이룬 곳이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을 집필하면서, 그러한 점을 강조하며 단지 유일한 특권적인 (인식적/실천적) 주관성만을 강조하는 이전에 집필된 비판서들과 단절했다는 것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정치적인 행위와 언어는 실천적 진리나 인식적 진리는 담지하지 않는다. 정치는 오로지, 서로에게 환원될 수 없는 복수의 주관들이 어우러져 '취미판단'을 내리는 바로 이러한 공간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는 아렌트에 맞서 정치적 판단이란 '진리'와 무관치 않으며, 그것은 취미판단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을 역설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아렌트의 견해는 정확히 쁘띠 부르주아들의 환상을 대변한다. 아렌트 자신은 이러한 공적 공간을 존중하라고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은 단지 반성적인 취미영역으로만 한정하면서 그것을 결정적으로 '거세'시켜버렸다. 그녀는 정치적 영역에서 모든 보편적인 진리주장을 배제했으며 심지어 경제적인 문제들이 공적공간의 관심사를 점유하는 것에 반대했지만, 우리는 정작 그렇게 말하면서도 '실제로' 공적 담론을 무력화시키는 건 아렌트와 같은 '참여 민주주의적' 사상가들이라고 주장해야만 한다. 왜 그런가?
소위 말하는 '신자유주의적' 조류가 대두된 이후로,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경향에 저항하는 정치철학자로 각광을 받았다. 아렌트가 정당하게 지적했듯, 원래 정치적인 것은, '계산'될 수 있는 것에 의해 자동적으로 도출되거나 추론될 수 있는 것과 무관하다. 단지 이익과 비용에 대한 계산을 통해 정치적 결정이 내려진다면, 그것은 복수의 주관들의 '강제될 수 없는' 개개의 '판단'들을 폭력적으로 제거하고 틀지우는 짓이 될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는 사회경제적 재편과정, 노동시장의 재구성, 금융시장의 급속한 개방, 복지영역의 축소 등이 아무런 공론화 과정 없이 진행되는 것을 '반정치적'인, 고유한 정치적 영역을 제거하는 시도들로 비판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정치행위는 계산될 수 있는 편익과 기회비용만을 유일한 정치적 동기로서 고려한다. 한나 아렌트는 그러한 '계산성'을 정치적 영역에서 거부하며, 심미적 취미판단들을 내리는 복수의 주관들이 공존하는 정치적 장을 긍정한다.
그럼에도 한나 아렌트는 바로 그러한 '계산될 수 없는' 정치적 영역의 다양성과 복수성을 '다시 계산'하는 데, 그것을 새롭게 쟁점화하며 새로운 진리의 이름으로 틀짓는 데에, 정치적 행위의 가능성이 걸려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않는가? 이것은 우리가 단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조류에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아렌트주의 사상가들이 생각할 수 있는 건 단지 그 수준뿐이다) 이상의 정치적 행위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물론 정치적인 문제를 경제적인 심급으로 환원하려는 신자유주의적 조류는 나쁘다. 그것은 정치적인 공론과정을 생략한 채 의사결정을 순전히 편익-비용 계산과정으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스탈린 식 전체주의도 나쁘다. 어쨌든 그것은 전체주의적이니까. 그러나 한나 아렌트와 같은 자유주의적 사상가들은, 그리고 그녀가 대변하는 '참여 민주주의'적 이상은 '더 나쁘다.' 왜냐하면 그들이 신자유주의적 조류와 광기 어린 독재자들에 맞서, 공론공간을 방어하겠다는 바로 그 제스처를 통해 그들은 공론공간 그 자체의 고유한 성격을 희생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아렌트와 같은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의사결정 과정이 경제적 효율성이라는 일의적 척도에 의해 움직여진다 하더라도, 전체주의 정권 하에서 모든 판단들이 일당독재나 일인독재로 귀결될 때조차도, 그것들이 '공론공간'의 논의를 거쳤다는 '외양'을 유지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경우에도 공론공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어쨌든 '외양'을 유지하며 되살아난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과 같은 역설, 즉 스탈린 시대의 우스꽝스러운 표현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은, "압도적인 다수의 찬성표에 의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습니다"에서 드러나는 단락을 함축한다. 안건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면, 나머지 반대표를 던진 소수는 어디로 갔는가? 스탈린이 대답하기를, 그러한 반대행위는 만장일치를 이룬 보편성에서 스스로를 배제하는 행위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뒤틀린 논리 속에서, 하나의 유에 속한 부분을 다시 그 유에 완전히 겹쳐버리는 불법적 단락으로 도약한다. 요컨대 공론공간은 바로 그러한 비약적인 '틀짓기'를 필연적으로 내포한다. 공론공간이 바로 그러한 뒤틀림, 도약, 간극이 내포한 '적대'antaonism를 이루지 않는다면, 그것은 '살롱'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작금의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세력이 시민사회에서 공론공간을 축출했다는 통상적인 비난(얼마 전만 해도 이러한 비난들이 얼마나 많이 한나 아렌트를 참조했는지!)은 요점을 상실한다. 어떻게 본다면 이들 신자유주의자들은 공론공간을 축출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야말로 오히려 유일하게 공론공간에 적법한 정치적 행위를 펼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이야말로 자신들이 요구하는 특수한 논리, 정체성, 주장(경제적 편익계산을 유일한 적법한 정치적 동기로 간주하라!)을 곧바로 전사회적 보편성과 일치시키려는 불가능한 '유토피아적' 기획을 추구하는 세력이지 않은가? 그들은 과거에 ㅈ파들의 차지했던 고유한 급진주의적 정치적 공간을, 그들 스스로가 점유하고 있지 않은가? 왜 우리는 우리의 영토를 그들에게 손쉽게 내주게 되었는가? 이 물음만이 우리가 표면적으로 '부드럽고' '다원주의적'이고 '관용적'인 급진주의적 민주주의적 수사를 거부해야하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김예찬님은 발리바르를 다룬 자신의 페이퍼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신자유주의는 이처럼 참을 수 없는 상황에 맞서 '다른 세계'에 관한 이념을 제시하고 이를 위해 저항하는 것 자체를 극히 곤란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적 기획이기도 합니다. 신자유주의는 개인과 집단들의 행동 - '폭력'도 포함해서 - 이 '이익'이라는 유일무이한 기준에 따라 측정되는 사회적 조건을 창출함으로써, 봉기라는 관념은 말할 것도 없고, 갈등이라는 것 자체를 무력화시킬 뿐 더러, 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오늘날 '파업' 기사가 뜰 때 마다 '국익 손실'이 자동적으로 따라 붙는 신문 기사들을 생각할 수 있겠죠. 심지어 '파업' 까지 가지 않더라도, 일단 '노조' 자체에 경기를 일으키는 경제신문들이란! 이처럼 사회적, 정치적 적대를 무력화시키는 것을 핵심 목표로 삼고 있고, 이를 다양한 ('정치'를 통해 구성된 국가가 아닌, 국가에 의한 '관리'의) 수단들을 통해 물질적으로 뒷받침한다는 사실은, 신자유주의가 왜 근대 정치 자체를 파괴하는 것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글내생각] 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철학 中-
물론 발리바르를 따라 정당하게 우리는 신자유주의적인 기획이 전통적인 근대정치 자체를 파괴했다고 수긍할 수 있지만, 이러한 비판은 또한 역으로 맑시즘이 (정치적 공론과정을 생산력이나 생산관계에 대한 사회적 조정과정으로, 표준적이고 몰개성적인 조작과정으로 전락시켰다는 혐의를 두며) 전통적인 근대정치 자체를 파괴했다고 비난한 한나 아렌트의 (잘못된) 비판을 또 다른 형태로 '반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후자의 주장이 근본적으로 잘못된만큼, 전자의 경우(발리바르의 세계화 비판)도 가장 중요한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민주적인 정치적 공론공간을 급진적인 형태로 유지하는 데 가장 기여하는 세력은, 바로 그러한 세계화 담론을 옹호하는 신자유주의 세력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주장해야 마땅하다. 동일한 페이퍼에서도 예찬님은 신자유주의적 개혁과정이 결코 국가영역의 축소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단지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영역을 바꾸는 것일 뿐임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그들은 단지 국가의 역할과 개입영역을 새롭게 재정의하고 확장시킬 뿐만 아니라, 공론공간의 성격자체도 새롭게 재구성했음을 정당하게 지적해야만 한다. 오히려 '공론공간'이란 바로 소수세력이 아무런 매개 없이 자신을 보편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미친 내기 속에서만, 바로 그러한 내기에 의해 재구성된 긴장과 적대에 의해서만 자신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론공간은 그것을 불법적으로 점유한 헤게모니적 세력에 '의해서만' 활성화된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한 '헤게모니 투쟁이론'이란 정확히 그러한 '적대'와 '단락'으로 점철된 '공론공간'을 바라보는 '막시스트다운' 관점이다. 우리가 직시해야할 것은, 오늘날 '헤게모니 투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공적공간을 전유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성격으로서 '공론공간'을 실제로 '유지'하는 세력이 신자유주의-세계화 진영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현상에 맞서, 공론공간을 전유하고 있는 불법적인 '헤게모니'를 빼버리려 노력한다면, 우리가 잃는 건 단지 헤게모니적 지배가 아니라, 공론공간 그 자체가 될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막시즘이 공론공간에 대한 관점을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은 그러므로 '오도적'이다. 단지 막시스트들이 공론공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아렌트식) 자유주의적 그것과 다를 뿐이다.
따라서 관건은, 어떻게 하면 점차 멸종위기에 처해가는 공론공간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느냐가 아니라, 공론공간을 고유한 방식으로 '헤게모니화'하여 찬탈한 세력으로부터 어떻게 그것을 재찬탈하느냐가 문제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소극적이고 수세적인 방식으로, 신자유주의적 조류에 대해 그것이 반-정치적이며 반성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방식으로 비난할 것이 아니라, 정확히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그러니까 그들과 동일한 적대성을 가지고서 공론공간을 '헤게모니화'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렇다면 한나 아렌트의 오류는 어디에 있는가? 이 모든 오판들은, 그녀가 정치적 경험을 '현상학적' 방식으로 바라보는 데서 징후적으로 응축되어 있지 않은가? 그녀가 만년에 칸트의 판단력 비판 독해로 돌아가면서, 그녀는 젊은 시절에 정치적인 삶을 일상적 경제행위와 대립되는 (마치 그리스 아테네의 아고라에서 보여졌던 영웅적인 웅변과 행위들처럼) 실천적 활력으로 간주했던 것과 달리, 다시 그것을 '관조적인 삶'의 영역으로 후퇴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렌트 자신은, 아무래도 공론공간에서 더 이상의 유의미한 정치적 '행위'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단지 어떻게 발화되도 좋은 형식적인 관조적 취미판단에 지나지 않은가 하는 회의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녀가 젊은 시절부터 정치적 사유 과정에서 스스로 분절하고 이론적으로 세공하려 했던 '공론공간'에 본질적인 것(적대)을 제외시켜버렸기에 도달한 난국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녀는 정치적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 현상학적 분석틀에만 의존했다. 현상학이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의미체험을 붙잡으려는 부르주아적 자의식의 발현이다. 요컨대 그녀는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행위란 무엇인가' '노동이란 무엇인가' '작업이란 무엇인가'라는 등등 인간의 삶의 제 측면들을 어떻게 의식의 흐름 속에서 '체험하는지'를 분석함으로써, 정치적 행위의 가능성을 정초하려 시도했다. 이것은 애초부터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기획이며, 막시스트들의 방법과 그 본질에서부터 다르다. 공론공간을 처음부터 오염시켰던 바로 그 적대성은 현상학적 반성을 통해서는 절대 그 본성이 인지될 수 없다. 정치적 현상을 이렇듯 현상학적으로 반성한다는 행위 자체는, 결국 그것을 수동적인 의미체험의 영역으로 격하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오늘날 대개 정치적 주체들이란 대개 그러한 '현상학적'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지 의심해볼 노릇이다. 한나 아렌트가 이론적 모델로 삼은, 현상학은 바로 그러한, 나름 교양 있고 타인에게 간섭받지 않으려 하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외부세계의 진리성에도 별 관심이 없는 소시민들의 소심한 심성을 이론적으로 보편화하는 장치에 불과하지 않은가?
바로 그러한 그들이 위협적인 것으로 인지하는, 신자유주의적 폭력과 전체주의의 위협에 맞서려는 결의는 얼마나 진정성이 있겠는가? 오늘날 아렌트의 후예들(참여 민주주의라는 이름 하에 지나간 세월을 추억하는 자들)에 대해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져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