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언어 
 
 
 
 
94. 시의 언어 :

갑자기 이런 뚱딴지같은 글을 쓰고 싶어졌다. 그러니까, 뭐랄까. 시를 쓴답시고 깝죽거린지는 꽤 되었다. 하지만 나는 '왜 시인가?'라는 질문에 과연 해답을 가지고 있었던가. 시와 산문이라는 범주─그걸 단지 형식적인 차이로밖에 구분해낼 수 없다면 어디 가서 똑똑한 척 할 생각일랑은 말아야 한다. 이 무슨 멍청한 짓이란 말인가! 표현의 욕구야 정당하다. 하지만 왜 하필 산문이 아니라, 굳이 시인가? 나는 지금 그 답을 내놓으려 한다.

나는 사실 시중의 문학론에 대해 문외한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결국 몸으로 체득한 벌거숭이의 견해일 뿐이다. 바로 그 점이, 오늘 나의 시도가 오히려 승산이 있는 이유다. 왜냐하면, 내가 시중의 문학 이론을 어중간하게 끌어들여 뭔가 설명해보려 한다면 그건 고작 내가 얼마나 성실한 학생이었냐의 문제로 전락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나한테, 성실이라니. 개, 뿔이다. 오오. 간혹 보면, 내가 비록 성실치는 못하지만 나한테 적합한 어떤 접근 전략을 찾는 데는 제법 안목이 있는 것 같다. 이른바 굼뱅이의 '롤링 어택', 뭐 그런, 약간은 그로테스크한 듯도 한. 흐, 그러니 맛 좀 봐라.

단도직입으로, 우리는 시를 쓸 때에 산문을 쓸 때보다 한 가지를 더 생각한다는 것이다. 바로 '화자' 말이다. 물론 산문에도 1인칭이니 3인칭이니 하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경험상, 그건 별 도움이 안되는 것 같다. 산문을 쓸 때 글쓴이는 언제나 자신이 글에서 객관적인 입장으로─'나는 사실을 말한다!'면서─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즉 해석을 유도하면서 처음부터 그 부분엔 괄호를 쳐놓고 시작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는 다르다. 시에서의 '화자'는 설정의 영역이고, 적극적인 표현의 영역이다. 즉, 시를 쓸 때 작자는 그것이 이미 하나의 가면이라는 것을 직시하고 있다. 그러니 이건 처음부터 설정이다, 가짜다, 라는 전제 하에 쓰이는 시의 언어에는 자신이 직접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 없다. 시는 비유할 뿐이다. 그것은 이것과 저것 사이에 있는 것이라고, 그저 보여주고 드러낼 뿐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해야 한다." 그 위대한 강령이 말할 수 있는 영역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면 그것은 명백한 오독이다. 단지 '띄엄띄엄한' 언어의 성격상 그것들이 언어에 의해 포획될 수 없는 영역에 자리하고 있는 것일 뿐, 분명 정수 1과 2 사이에는 무수한 실수계가 넘실대고 있지 않은가. 비트겐슈타인이 이상 언어를 꿈꾸었다고? 좋다. 하지만 그가 꿈꾼 이상 언어는 결코 딱딱한 논리학적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분명, '사이에 있는 것'을 드러낼 수 있는 언어, 바로 시어였을 것이다. 이제 또 한 가지 사실의 이유가 분명해졌다. 비트겐슈타인은 왜 그를 초대한 비엔나의 논리실증주의자들에게 등을 돌리고 묵묵히 타고르의 시집을 읽고 있었는지, 그 이유가.

혹 이런 반론이 가능할지 모른다. 기교만 잔뜩 부린 허황된 시는 담백한 산문보다 오히려 기만적인 게 아니냐고. 변명하자면, 이 경우는 차라리 '산문화된 시'라고 보는 게 타당할 듯 싶다. (주의 : 산문시를 말하는 게 아님!) 산문의 기만적인 권위가 주어-술어-목적어-보어 따위의 형식적인 문법의 구현을 통해 거짓을 치장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면, 그러한 '산문적인 가치'가 시로 옮아갔을 때 시의 기만은 '시적 문법의 구현'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시는 '문법의 구현'이 아니라 '문법으로부터의 탈주'를 향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곧 기존에 축성된 표상 체계에 대한 반란이기도 하다. 기존의 언어 속에서 중심적으로 의미화되지 못하고 변두리를 맴돌던 것들, 이른바 '표상 속의 소수자'에 대한 발견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시의 정치적 함의까지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누구인가. 어떤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시를 쓰는가. 시인은 왜 피를 흘리는가. 그리고 시는 왜 아름다운가.

시가 구원이 될 수 있을까─내가 태어나던 해 어느 날 기형도의 일기장에는 그런 의문이 적혀있었다. 나는 이제 그 질문에 대해 자신있게 답해줄 수 있다. 시는 구원이 될 수 있다고─시는, 그것을 위한 의지이며 실천이라고. 내가, 시를 쓰겠다고.




2006. 2. 4. 土, 大영일고등당구스쿨 공채 24기 목동의 김프로


*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생각해보니 기형도의 의문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결국 나는 어중간하게 그를 끌여들여선 그의 이름을 팔아 얄팍한 장사를 하려 한 꼴밖에 안되는데, 에라이 모르겠다. 귀찮아, 안해!

 

  
 
 
 
상병 송희석 (2006/02/06 08:54:21)

이글은 분명 저를 위한 글인것 같습니다.(웃음) 
역시 전 시는 포기하고 논설문을 택해야 할것 같습니다!    
 
 
 병장 한상천 (2006/02/06 09:08:14)

언어라는 큰 범주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정말 무섭기도하고, 마음을 전달해주기도 하는 정말 오묘한 묘가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비트겐슈타인이든 소쉬르든 저에게는 진심을 전달하기 위한 일종의 마음의 또다른 이름입니다.    
 
 
상병 김강록 (2006/02/07 09:35:50)

기형도가 '시가 구원이 될 수 있을까'라고 물음표를 던졌다는 얘기는, 문장 앞에 (이 시대에도)라는 말이 빠져있어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문득 빠진 부분이 생각나더라구요. 즉, 시가 구원이 될 수 있다는 걸 기형도가 몰랐던 게 아니에요. 시는 구원이 될 수도 있는데, 우리 시대의 시는 어찌도 이렇게 타락해버렸는가, 하는 외침이었죠. 그렇게 따지면 위에서 저는 순진한 소리만 쭉 늘어놓은 셈이 되는 거구요. (흑) 

다시 말해, 저는 시적 언어가 어떠한 함의를 가지고 있는지만 밝혀내면 그 이후는 저절로 해결되는 여백으로 남겨두었던 건데, 기형도는 시를 아는 것(知)와 그것을 행하는 것(行)을 구분해서 생각했던 거 같네요. 이를테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하의 차이라고나 할까. (제기랄, 이 구태의연함으로의 회귀란!) 

전혀 아닐 것 같지만 문제는 앞선 논의에서의 연장선상으로 돌아갑니다. "아는 것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라는, 몇 천 년 전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이어져내려온 묵은 숙제로. 그건 절망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그 수천년의 세월 동안 무엇을 해결한 걸까요. 인류의 사상은, 철학은 항상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해왔지만 오히려 계속해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어오기만 한 건 아닐까, 하는 문제 제기를 한 것이 바로 비트겐슈타인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문제가 언어의 잘못된 사용에서부터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언어에는 그것을 적용시킬 수 있는 한계 영역이 있는데, 사람들은 곧잘 그 선을 넘어버린다는 거죠. 지구상에서 회자되는 대부분의 형이상학적 관념들이 그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언어의 잘못된 사용을 밝혀내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마치 소크라테스가 '무지'에서만 벗어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믿었듯이 말이에요. 

이번 논의를 지켜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중간에 냅다 끼어들어서 제가 하고자 했던 역할 역시도 비트겐슈타인의 지침을 받들어 '언어의 문제'를 해소하는 것이었습니다. 답글로 쓴 「희석님께 : '도덕적 책임'과 '불편한 의식」이 바로 그것인데, 나중에 따로 고백했지만 이 글을 통해 감.히. 제.가.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믿었던 것은 딴 게 아니라, 제가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지지하고 이번에 그의 지침을 썩 잘 수행해낸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과연 그 결과가 성공적이었는지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전체적인 논의의 흐름상 제가 딱히 크게 기여한 거 같지는 않으니까요. 저는 지금 자꾸만 제가 너무 순진한 게 아니었냐는 생각이 듭니다. '알아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이 있는데. 그건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일텐데. 어쩌면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저의 이해가 한동안 지나치게 협소해져있었던 건 아닌가 해요.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의 진정한 의도는, 우리가 수렁처럼 빠져있는 형이상학적 담론의 대부분을 '말할 수 없는 것들'이라며 부정하고서 이제 비로소 정신을 차린 우리의 관심을 삶의 영역으로, 즉 형이하학적인 실천의 영역으로 돌리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문제는 실천, 그것의 첫 발자욱을 어떻게 내딛냐일텐데요. 저 나름대로는 카드 청구서의 송혜교를 오려내어 세절의 위기에서 구해내었다!면서 이것이 내 실천의 방식이오, 하고 떠들어댔지만, 그런 식으로 당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일들은 따지고 보면 얼마 없어요. 언제나 한 발짝을 내딛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만만찮은 대가가 따릅니다. 

그래서, 사방팔방 죄다 가로막히고 팔다리마저 잘린 채, "도대체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란 말이냐!"라고 절규하는 순간 떠오른 답이 바로 시였습니다. 니들이 아무리 날 방해해도, 나는, 시를 쓰겠다구요. 그러고보니 비트겐슈타인도 철학이란 언어의 잘못된 사용을 밝혀내는 '활동'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병장 육이은 (2006/02/07 09:53:28)

비트겐슈타인은 철학 개론서들에서 이름만 들어본 게 전부인듯하네요. 강록님 덕분에 관심이 가는데, 뭐, 추천해주실만한 책이라도 있는지.    
 
 
상병 김강록 (2006/02/07 09:56:48)

이은 / 「비트겐슈타인」, 박병철, 누구나철학총서    
 
 
상병 송희석 (2006/02/07 10:39:04)

강록님/ 단순히 시의 언어라는 칼럼만 보고는 저는 정확히 무슨말씀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머지 코멘트를 보고 확실하게 이해한것 같습니다. 
강록님이 갑자기 부러워지는지 모르겠네요. 저도 시를 쓰고 싶지만 
.... 

아! 저는 분명 '시'를 쓸 자격도 없는것 같습니다!(웃음)    
 
 
병장 김태경 (2006/02/09 12:26:59)

제게 비트겐슈타인은 쥐스킨트가 깊이에의 강요에서 언급한 바로 그 '깊이있는'것의 대표격이자 비아냥거리였는데 강록님 덕분에 좀 더 알게된것 같네요. 
시라고는 고등학교때 수능공부 이후로 전혀 접하지도 않고 살았던 공돌이에게 시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만드시네요. 흐음. 고등학교때는 시인이었던 학원 선생님 덕분인지 시도 꽤나 좋아했는데 말이죠. 휴우.    
 
 
상병 노지훈 (2006/02/10 08:22:22)

시를 쓸 자격이 있을 때까지 시를 쓰는 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