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권'과 '학생회'의 이율배반-김예찬님에 답하여 , 박원익>
1. 발리바르의 메타-권리로서의 '시민권'
김예찬님은 다음과 같이 반문하셨습니다.
"음, 아래 글을 '권리 투쟁'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저는 '사민주의'라는 단어에 대한 오랜 비웃음을 떠올릴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봤을 때 게슴츠레님(저자의 아이덴티티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냥 작성자를 닉네임으로 부르겠습니다)의 <스포츠권의 부활을 위한 제언>은, 어떤 기회주의적 처사라기보다는, 다른 무언가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임이 보였습니다. 제가 게슴츠레님이 단순히 '권리투쟁'으로 학생운동의 외연을 축소시켰다는 듯이, 조금 단정적으로 말한 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게슴츠레님 글의 전반적인 논조가 발리바르가 말한(맞나요?) '권리'에 대한 '권리'로서 '시민권'을, 말하자면 학생사회 수준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발리바르가 강조한 '시민권' 개념은 우리가 흔히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시민권'과 어떻게 다르던가요? 말하자면 '시민권'은 학생의 이런 저런 일상적인 경험 속에서, 책임의 대가나 능력의 대가로 주어지는 '권리'(학점은 어떤 기준으로 분배할 것인가, 등록금이 아깝지 않은 교내 복지를 구현해야한다 기타 등등)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메타-권리' 즉 학생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동등한 권리의 주체로 인정받아야한다는 원칙으로서 관철되는 권리입니다. 가령, 어떤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시민권이 부여되는 게 아니라, 그가 단지 그 시민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그에게 투표권 및 제반 권리가 부여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발리바르는 가령 유럽의 이주노동자들에게도 무조건적인 동등한 시민적 권리가 급진적으로 요구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아무튼 이러한 메타권리로서의 시민권 개념을 어떻게 학내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발리바르가 '시민권'의 외연을 이주노동자들에게 적용해야한다고 말하듯, '학생권'의 외연을 청소 용역업체 계약직원이나, 김예찬님이 탁월하게 지적한 외국인 학생 등과 같은 소수자에게도 확장해야겠지요. 게다가 게슴츠레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저는 거기에 대해서 상당히 동감하는 편입니다. 게슴츠레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내가 스포츠의 부활을 위해 제언하고 싶은 것은 대학 내 멤버쉽, 일종의 '시민권'을 정식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중략)...
학생회를 대외적 저항성이 아니라 학생으로서 시민권을 제도적으로 마련하는 것으로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학교 역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는 생활 공간이라는 점에서 사회적 생존에 필요한 다양한 요구들이 상존한다. 자치활동을 할 공간을 얻지 못한 동아리나 소모임, 보다 전문적인 전공 수업이나 세미나를 진행하고 싶은 학부생, 알바에 바빠 공부할 시간이 없는 대학원생, 생활비에 고민하는 자취생 등등. 이런 '대학'이란 작은 사회에 특수한 필요들을 중심으로 일종의 사회적 시민권을 정식화할 필요가 있다."
2. 발리바르주의자들의 학생회?
그런데 단지 논의에서 빠져 있는 어떤 사각지대를 아무래도 넘어가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령 발리바르가 말한 메타-권리, 학생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권리의 주체로 인정받을 권리, 이것은 도대체 어떤 기반에서 성립하는 것일까요. 그러니까 무한퇴행의 역설을 감수하고서라도 감히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역시 그 사회의 보편적인 수준에서 정립된 '정의감' 없이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운동권에 대한 적극적인 반발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 정의와 일련의 운동권 학생들이 맺는 관계에 대한 거부감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애초에 학생사회에서뿐만 아니라, 시민사회 수준에서도 메타-권리로서 '시민권'이라는 개념이 굉장히 생소하다는 곤궁을 받아들여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권리에는 책임이 따른다, 혹은 권리는 그 사람이 건실한 생활인만이 주체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라는 퇴행적 부르주아적 윤리의식이 여전히 전면적인 반면, 거기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다면, 학생사회에서 '시민권' 개념을 제출하고서 그것을 실천한다고 해도, 결국은 기존의 비슷한 스포츠권들과 다를 게 없어지겠지요. 물론 김예찬 님이나 게슴츠레님이나 그러한 사정은 모르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그런 '발리바르'적인 '메타권리'로서의 '시민권'을 정식화해야할 "최소한의 공적 공간으로서 학생회"에 대해서, 게슴츠레님은 동시에 어떤 권리에 대한 '책임자'의 역할을 요청한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고대공감대가 주장했던 것과 매우 유사하게도, 예컨대 '복지'에 대해 책임을 지는 '관리자'로서의 역할이 부여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권리-책임'이라는 관념, 혹은 권리에는 응당 책임이 따른다는 부르주아적 관념에 한 발 양보한 것으로, 정작 게슴츠레님이 준거하고 있는 시민권 개념에 정면으로 충돌되지는 않은가요? 말하자면 메타-시민권 개념이 그대로 적용된다면 학생사회의 구성원들이, 그들이 학생사회 내에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부여되는 '권리'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도 상응하지 않습니다. 가령 이것은, 이주노동자가 그 나라에 거주하고 노동하고 생활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그들에게도 투표권 및 제반 시민권이 부여되어야 한다는 발리바르의 제스처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부조화'는 게슴츠레님의 글이 구성하고 있는 이율배반에서 초래된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게슴츠레님은 발리바르적 '시민권' 개념을 동시에 '제도'의 수준에서 사고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시민권을 '경영'하는 어떤 제도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이미 등록금이라든지 학내복지라든지 하는 시민권의 제반 요소들에 대한 '공약'을 가지고 있는, 학생회 선거에서 경쟁하는 일반 운동단체들과 다를 바가 없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건 다들 아시겠지만 학생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주어져야 할 '시민권'이란 '약속'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전제'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선거 때마다 가령 등록금이나 학내복지에 관해 많은 공약을 내세우는 것을 압니다. 그것을 내세우는 측에서의 진정성을 의심할수만은 없지만, 그러나 '공약'으로서 혹은 '누군가 약속하고 책임져야 할' 차원에서 시민권(학내복지, 등록금문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등록금이라든지, 학생복지라든지 하는 권리들이 메타-권리로서, 다시 말해 시민권으로서 정식화되기 위해서라면 저는 그것이 '자치'의 수준에서, 그것이 요구되기 이전에 요구된 권리가 이미 어떤 형태로든 '증명'되어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중요한 건 평등을 어떤 '약속'의 지평 속에 두는 게 아니라, 그러한 평등 전제를 지금-여기서 증명하는 것이라는 자크 랑시에르의 테제는 우리 학생사회에서도 충분히 경험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게슴츠레님은 학생회를 그러한 증명이 이뤄지는 '자치'의 수준에서 사고하기보다는, 오히려 학생들의 권리를 대리해서 '요구'하는 에이전트agent의 형태로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게슴츠레님이 적실하게 들여온 '시민권' 개념과 충돌하는 것이지요. 저는 '자치'의 수준에서 이미 증명된 '시민권' 혹은 '평등전제'라는 것이, 학생회라는 기존의 제도적 장치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제도 외부에 있는 어떤 것, 가령 책마을에서 이미 제안된 '공동생활전선'에서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주거생활조차 자치의 수준에서 공유하고 있는 이들 집단에게서, 등록금 요구는 단순히 '약속'의 차원에 머무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히 공허한 말장난만은 아닌 것이지요.
3. 학생들의 무관심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마지막으로, 김예찬님은 여전히 <스포츠권의 종언>의 가장 주요한 증거가 '학생들의 무관심'이라는 점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김예찬님은 이 '무관심'의 배후에 어떤 '관심사'가 전제되어 있는지를 지적하셨습니다. 저도 이 점을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제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보건대 투표권 문제 - 본관 점거 - 출교 처분까지 이르는 사건의 흐름 속에서 '일반 학생들'이 취하고 있던 포지션은 단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학교 이미지'를 최우선에 둔다는 것이었죠."
학생들의 정치적 '무관심'의 기저에는 '학교 이미지'라는 뭔지 모를 사물Thing에 대한 상상적인 동일시가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탁월한 지적이지만 저는 게슴츠레님과 김예찬님이 그러한 상상적인 동일시에, 또한 '상상적으로 경쟁'하려는 층위에서 문제에 접근하려고 하는 게 아닌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교 이미지' 운운하는 것은 물론 가령 K대라는 학벌에 비춰 자신의 나르시즘적 자아상을 구성해내는 것이지요. 자기 거울을 보며 자뻑에 빠져 있는 애들이 문제라면(이런 사람들은 정말 어디에든지 널려있죠), 그런 애들에게 새로운 거울을 제공해준다고 해서, 그들이 과연 새롭게 재구성된 학생회 활동에 다시 참여할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애초에 그런 애들이 널려고, 그런 애들을 아직은(!) 제거(!)할 수 없다는 상황의 곤궁을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예찬님이 왜 학생들의 '무관심'에 그토록 절망하는지 저는 아직 이해하기 힘듭니다.
더불어 저는 학생들의 무관심 속에 어떤 적극적인 '관심' 혹은 '의지'가 표명되는지를 해명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예찬님이 말씀하신대로 출교사태가 진행됨에 따라, 학생들의 관심은 점차 '무관심'으로 수렴했지만, 최초에 본관점거 사태에 대한 뜨거운(?) 반응 역시 간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무관심한' 일반 학생들이 분개했던 것은, 그들이 학교와 맺고 있던 상상적 관계에 농성학생들이 상처를 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바로 그 이유 때문에라도, 더 이상 저들의 '상상적 정의감'과 경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요. 저들이 '우리에게' 무관심하다면, 역으로 우리 역시 그들에게 무관심으로 대답하면 되는 일입니다. 그것이 가령 '시민권'의 문제에 있어서 전혀 중요한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병장 김예찬
네, 게슴츠레의 아이디어 자체가 발리바르를 빌린 것이죠. 굳이 이야기하자면 발리바르와 가라타니 고진 사이라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원익님의 제안은 고진과 바디우의 사이의 어디쯤이 아닌가 싶은데, 그렇다고 한다면 원익님과 게슴츠레의 차이점은 어소시에이션에 대한 '탈중심화하는 중심(원익)'이냐, 아니면 '중심의 탈중심화(게슴츠레)'냐에 걸리는 것 같습니다. 나중에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한번 이야기를 해볼 수 있다면 좋겠군요.
발리바르 자신도 '제도적' 부분에 대한 의혹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 같습니다. (덧붙히자면, 발리바르에 대해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사민주의와 다를 것이 무엇이냐?"라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게슴츠레에 대한 원익님의 의문(학생회가 '자치'가 아닌, '에이전트'의 형태로 생각하는 것은 '시민권' 개념과 충돌하는 것이 아닌가?) 자체는 어쩌면 발리바르 본인이 가지고 있는 이율배반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이를테면 공화주의적 가치를 옹호하며 '시민들은 국가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반면에 '제도 는 민주주의 자체를 가능케 하는 경계로 작용한다'라고 말하는 것들이 그런 모순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종의 제도적 틀 자체는 '거부할 수 없는/혹은 거부하면 안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고진 역시 선거 - 추첨에 관한 정치적 기술들을 도입하여 어떤 '중심'을 만들어놓아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어필하면서 수단으로서 어떤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지요.
원익님의 생각을 정리해보자면, '시민권(평등전제)'는 내부(학생회)가 아닌 외부(이를테면 공동생활전선)에서 시작해야 하고, 그 것은 기존의 조직과는 전혀 다른, 자유로운 개인(에고이스트/'탈중심')의 어소시에이션(중심)이 되어야한다는 것 같습니다. 게슴츠레 같은 경우는 학생의 자율적 기구로 성립된 학생회(중심)라는 유산을 '점거'하고, 이 것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으로 '학내 시민권의 재구성'과 '어소시에이션(탈중심)'을 지원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구요. 제 입장에서 원익님의 제안은 좀 관념적인 부분이 있지 않나 싶은 것이, 이 어소시에이션의 역량을 학내 정치에 한정되지 않을 것이라면 결국엔 학내 문제들을 담당할 수 있는 무언가 - 저는 그 부분에서 학생회의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 가 필요하지 않겠느냐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것은 고정된 권력 체계가 형성되지 않을, 제도와 조직이 되어야겠죠.
3번 같은 경우는 어찌보면 얼마 전 '우리 세대와 텍스트'라는 글을 두고 이야기를 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 된 것 같군요. 흐흐. '텍스트'에 '정의'를 대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사정상 여기에 대해서는 나가서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네요..
상병 박원익
넵, 예찬님이 말씀하신 그런 쟁점이 거론瑛만 해서요... 저도 좀더 생각을 정리한 다음에 일관된 글을 올려야겠군요. 더불어 발리바르에 대해 공부를 하고요.
예찬님이 게슴츠레님을 옹호하는 부분을 보면, 오히려 제가 아니라 게슴츠레님이 '진정한 고진주의자'의 면모를 띠는 것 같군요. 사실 권위적인 '중심'이 있어서는 안되지만, 역으로 중심이 없으면 현실적인 어떤 운동도 유지되지 못한다는 '이율배반'을 강조한 사람이 고진이니까요. 그렇다면 쟁점은 '학생회'라는 제도가 그러한 중심이 될 수 있겠냐는 겁니다. 그리고 저는 그 점에서 게슴츠레님과 대립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의혹을 가진 부분은, 여전히 학생회를 '학생사회 시민권'의 '경영자', 내지는 '책임자'로 보는 시각입니다. 과거에 CF에 나왔던, "누구야, 당신의 능력을 보여줘!"라는 구호를 그대로 적용하면, "학생회, 당신의 능력을 보여줘!"가 될텐데, 사실 학생회에 그런 걸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거죠. 게슴츠레님은 권리에도 책임이 따른다는 다소 퇴행적인 관념에 양보하려는 유혹에 휩쓸린 것 같은데, 설사 그 책임이 가령 CEO와 같은 '책임'이라 하더라도 학생회에는 그런 게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앞으로 다가올 A생회는 다른 학생회 후보 선본들과 상상적으로 경쟁하는 처지가 되어야겠지요. 중요한 건, 누가 더 학생들의 책임자로 적격인가?라는 경쟁의 틀 자체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학생회가 시민권을 학교측에 요구하는 제도적인 중심이라면, 저는 그 학생회가 시민권에 대한 '책임'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준거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다른 모든 것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이 결락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상병 박원익
덧붙여 학생회가 '선거'를 통해 선출된 집단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합니다. 다시 말해, 학생회가 결코 가라타니 고진이 말씀하신 '비어 있는 중심'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학생-시민권'의 주창자Adcvocate로서 학생회는 그것이 가진, 능력이나 자격과 책임을 통해 그 '캐릭터'가 규정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순수한 익명의 대표로서 누가 그 학생회를 구성하든 정말 상관 없는 것이지요.
'민주주의 아테네'에서도, 지도부는 '제비뽑기'로 선출되었고, 그들에게 민주주의란 투표가 아니라 제비뽑기였다는 고진의 지적을 기억해 봅시다. 우리가 추구하는 급진민주적인 학생회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시민권에의 익명의 옹호자로서 '학생회'이지, 어떤 일정한 학생들의 의사를 대표하는 책임자-관리자로서의 학생회일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형태의 학생회든 간에 결국 일정 임기를 마치면 '선거'라는 수단을 통해, 자신이 '능력'과 '자격'을 갖춘 대표자로서 내세우지 않을 수 없는데, 이건 게슴츠레님이 말씀하신 학생회의 형태와 달라질 수 밖에 없을 겁니다. 결국은 학생회라는 제도에 안주할 게 아니라, 학생회를 둘러싼 정치적 틀 자체를 다시 짜야하지 않을까요?
병장 이기범
'정치적 계파의 연장선'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그것도 우리가 꼭 논의해보아야 할 주제가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병장 김예찬
음, 아래 글을 '권리 투쟁'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저는 '사민주의'라는 단어에 대한 오랜 비웃음을 떠올릴 수 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원익님 만큼은 아니더라도 보건대 투표권 문제와 본관 점거, 그리고 출교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들에 대하여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데, 그러나 제가 가장 충격 받았던 것은 주변 학생들의 '무관심'이었거든요. '검은 옷'들이 과연 원익님 말처럼 지지 여론을 받았나, 라는 것에 대해 전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 놈이나 저 놈이나 왜이렇게 깝치고 다니는건가?"라는게 정확한 반응이었던 것 같구요. 여기에 빠진 또 한가지의 사례를 들어볼까요?
출교 이후에 원익님이 말씀하신대로 '일상인의 상식적 정의'를 표방하는 '삼보일배'가 등장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정확히 어떤 맥락에서 이들이 등장했고, 또 이 들이 사실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는 떠오르지 않습니다만, 적어도 이들이 출교 사태를 두고 벌어진 학교와 학생 스포츠권, 그리고 비권.. 들 사이의 갈등 해소를 촉구하며 삼보일배를 했던 것은 확실히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반응은 '전혀' 없었죠. 이들이야 말로 일반적인 학생들의 어떤 '상식적 정의'를 대변할 만한 주의주장에 가장 가까웠습니다만.. 이들 역시 '깝 노노'라는 무심한 반응을 받았을 뿐입니다.
출교에 대한 여론 역시 찬반이 격렬하진 않았어요. 반대 쪽은 감상적인 수준에서, 처분이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니냐, 는 정도였고, 찬성 쪽도 쉽게 휘발 되어버릴 잠깐의 분노가 있었을 뿐, 그 후로 양 측 모두 출교 처분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를, 망각의 시간을 보냈죠.
제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보건대 투표권 문제 - 본관 점거 - 출교 처분까지 이르는 사건의 흐름 속에서 '일반 학생들'이 취하고 있던 포지션은 단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학교 이미지'를 최우선에 둔다는 것이었죠. 통합 이전의 보건대 학생들에게 투표권을 준다고? 아니, 걔네는 고대생도 아닌 것들인데 고대생 취급해주면 학교 이미지가 어떻게 되는거임? 뭐? 스포츠권 놈들이 본관을 점거하고 교직원을 감금했다고? 아니, 학교 이미지 안좋아지게 무슨 짓한거야? 뭐? 퇴학보다 심하다는 출교 처분? 학교가 미친거 아니야? 학생들을 이렇게 함부로 다루면 학교 이미지 어쩌려고...
저는 '학교 이미지'라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고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감상적인 판단을 내리는 반응들을 보면서, 학내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 이미지'라는 상상적인 것을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느냐, 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營윱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