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을 통한 성찰. _눈에서 뇌까지의 과정. 
 
 
 
 
감각. 감정. 그리고 판단의 과정에서 오는 간극에 대하여. 
= 생리-해부학 수업. Part.1 신경생리-해부학 지도. 눈에서 뇌까지.


시작하기에 앞서.

우리는 언제나 보고 듣고 느끼는 생명체이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죽은 존재들과 다른 특징 중에 하나가 바로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감각을 느끼고 감정이 생기고 그 감정을 인지하고 판단하며 행동한다. 

감ː각(感覺)【명사】【~하다|타동사】 
1.  감촉되어 깨달음. 느낌.
¶ 손발의 ∼이 없어지다. 
2.  사물을 느껴서 받아들이는 힘.
¶ 패션 ∼/ ∼이 둔하다/ ∼이 낡았다/ 미적(美的) ∼이 뛰어나다. 
3.  『생』 감각 기관에서 출발하여 대뇌에 이르는 구심(求心) 신경의 작용 과정《시각·청각·미각·압각·온각·촉각·냉각·유기각(有機覺) 따위》

우리의 벗 한컴 사전이 말하는 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내가 말하려는 것도 감각이 무엇이냐? 에 끝내려는 것은 더욱더 아니다. 자. 지금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이 모니터. 당시 사용하고 있는 시각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시각을 ‘사용’하고 있는지 한 번 읽어‘보자.’

감각이란 무엇인가?

시각이라는 것이 있다. 수정체를 통해서 모아진 이 세상의 빛은 망막에 맺히고 그 빛에 따라 화학적인 성분들의 생성과 분해를 통해서 시신경세포에서 자극이 생겨 이 전기적 자극은 구심신경-감각신경의 경로를 통해서 뇌로 가게 된다. 
우리가 말하는 시각이라는 것은 이렇게 뇌에 감각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이 통로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전기적 자극에 의한 이 신경세포들의 흐름은 감각 수용기(resepter)인 눈의 시신경세포에서 시작하여 척수를 거쳐서 뇌로 올라가게 되는데 척수는 커다란 하나의 통로가 아닌 세부화 되어 있는 각 감각과 운동에 따라 상행로와 하행로 나뉘어져있고, 또한 그 감각이 시각. 후각. 촉각 등의 감각의 차이에 따라 달라지고 그 과정이나 좌우의 신경의 교차도 틀리다. 

시각 : 빛의 자극의 감지와 경로에 대하여. 

얘기하고자 하는 시신경의 경우. 눈으로 들어왔던 빛의 자극 자체도 세부화 되어 인식된다. 배경의 윤곽에 대한 전체적인 자극과 물체의 하나하나의 세세한 부분에 대한 자극은 나뉘어 전체적인 윤곽은 신경의 교차 없이 바로 뇌로 올라가 감각으로 받아들여지고 세부적인 모습은 나중에 인식하게 된다. 이 차이가 얼마나 되길래라고 반문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인체에서 있어 이 1/1000초의 차이가 사람의 반응과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 쉽게 미뤄 생각할 부분이 아니다. 
이러한 신경의 교차가 없는 경우. 전체적인 모습을 보지 않고 부분만을 먼저 의식하기 때문에 하나의 점만 보는 현상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의식을 하든 의식을 하지 않듯 언제나 영화와 같은 모습을 좌우의 눈을 통해서 빛을 받으며 24시간-눈을 감는 시간을 제외한- 동안 계속 상영되는 ‘세상’ 이라는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인데. 그 초점이 맞지 않고 뿌옇고 전체 화면이 나오는 것이 아닌 일부분이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 이것은 비단 우리의 상상이 아니라 질병으로써도 이미 존재하고 있다. 즉, 우리가 그저 본다라고 생각하는 이 감각이라는 것은 일련의 과정. 빛의 필요성에서 시작하여 눈이라는 감각기를 통해서 모여져. 시신경을 통해 여러 개의 통로를 통해 뇌에서 인식하게 된다. 이게 바로 시각의 실체이다.

시각 : 뇌에서의 자극의 인지와 판단에 대하여. 
뇌에서 그 자극이 갔다하여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전기적 자극은 뇌에서도 시신경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부분에 이르러서야 그 자극을 제대로 인식하게 된다. Brodmann은 대뇌의 기능적 차이와 세포의 구조적 차이 등을 고려하여 대뇌피질을 47개영역, 대뇌수질은 5개영역으로 구분하여 총 52개 영역으로 나누고 번호를 사용하였다. 시각은 Brodmann번호는 17.18.19번 영역에 있으며 후두엽의(뒷머리) 측두변의(양옆) 영역에 있다. 17영역은 1차 시각영역으로 후두엽 내측부(안쪽)에 있으며 망막에 일어난 흥분의 간뇌의 외측슬상체에 거쳐 입사되는 부위로 물체의 색과 크기, 모양 및 움직임 등을 인지한다. 18,19영역은 시각연합영역으로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는 것을 이해하고 기억하는데 관여한다. 
그런데 이러한 감각으로의 시각적 자극 외에도 우리가 ‘본다’는 행위에 대한 것은 이러한 감각의 자극만으로 의식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데 있다. ‘적절한’ 빛의 자극을 조절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각 : 빛의 조절 기전(매카니즘) 

안구의 수정체에 들어오는 빛의 양은 홍체와 동공에 의해서 조절된다. 즉, 빛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에 대한 문제인 것만이 아닌 움직임에 의한 것. 즉, 운동의 영역도 동시에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왜 빛의 양을 조절해야 하는냐 하는 것은 우리가 사진을 찍을 때 보면 잘 알 수 있다. 사진기를 태양을 향한 체 찍어본 적이 있는가? 또는 밝은 오전에 찻장을 향해 찍은 사진들을 보면 너무 눈부신 태양의 빛에 의해서 사진이 새하얗게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강한 빛의 자극은 수정체를 통해서 그 양이 조절되지 않은 체 들어가게 되면 그 자극이 너무 심해 망막에 맺힌 빛의 자극에 의한 화학성분들의 분해가 너무 심각해져 자극이전에 이미 시신경에 극심한 자극을 주고 자신이 얻고자 하는 빛의 윤곽과 세세한 모습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반대로 빛이 없는 어둠의 경우는 최대한 빛이 양을 조금이라도 더 받기위하여 최대한 홍체가 줄어들고 말 그대로 ‘자동’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것은 바로 자율신경계인 ‘교감, 부교감 신경’이 조절하게 된다. 빛의 양의 조절은 이러한 흥분과 진정에 의하여 조절되며. 색깔을 결정하는 것은 안구 안에 빛을 받는 화학 물질(rhodopsin 또는 시자홍 visual purple)에 의한 것이기에 안경이나 현미경이 발달한다하여도 고칠 수 없는 하나의 ‘생태적 성질’이다. 

자 이제 이런 상상을 해보자. 우리가 바라보는 이 모습들을 만약 빛의 자극에 강하고 더욱더 가시광선에 더 민감한 존재가 바라본 것이라면. 더 나아가 오감전체에 민감한. 개의 후각과 매의 시각과 토끼의 청각 등 말 그대로의 오감전체가 ‘동물적인 감각’을 가졌다면 그것에 대한 우리들의 감정의 변화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로인한 세상을 바라보는 모습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옆집 강아지 ‘바둑이’가 생각하는 세상의 모습과 그로인한 자신이 선택한 행동과 인간의 인식과 행동이 같지 않은 이유는 이렇듯. 감각에서 오는 간극의 차이는 아닐 런지.

보는 것의 한계에 대하여. 

자 눈을 감았다고 상상해 보자. 우리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감각 중 시각을 잃어버렸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시각을 잃은 그런 존재였다면. 과연 우리는 지금 생각하는 세상 그대로를 인식할 수 있을까? 
불교에는 공(空)사상 이라는 말이 있다. 「중생 제법(衆生諸法)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임시 화합하여 된 것이므로 불변의 실체가 없음.」이라는 말로. 중생은 인간을 말하며, 제법이란 우주 사이에 있는 유형·무형의 모든 사물. 즉, 만물을 의미한다. 
사람은 이 세상에 있어 누군가와 인연을 맺고, 관계를 가지며 살아가는 존재이고 그렇지 않고 혼자 존재할 때는 그 실체가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 공사상을 설명할 때도 위와 비슷한 행위를 함으로써 세상의 실체에 대하여 생각해 보곤한다. 자. 테이블 위에 물잔이 올려있다고 하자. 당신은 그 잔을 바라보고 있다. 자. 이제 눈을 감았다고 상상해 보자. 당신이 ‘보는’ 이 세상에 잔은 존재하는가? 다시 눈을 뜨자. 여전히 잔은 당신 앞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정말 그 잔은 존재하는 것일까?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그 잔은 존재하는 그 무엇이 되지 못한다. 당신이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본다면 눈을 감아 눈 앞에 있지만 보이지 않는 잔이 된다면 그 잔은 더 이상 당신과 함께 ‘존재’하는 잔이 되지 못한다. 그것의 존재는 ‘무’-‘공‘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언어로써 소통하려 한다. 말과 글로써 얘기하려 하고 눈으로 인식하고 그 것을 받아들인다. (음성으로서의 언어도 존재하지만 여기서는 글로써의 언어만을 생각해 보았다.) 보지 않고 인식한다는 것은 ‘바라보는’ 세상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다. 시간이 흘러 텔레파시나 염력에 의한 메시지 전달이 가능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우리는 저 산 너머에 있는 소나무를 직접 가서 만져보지 않아도. 냄새를 맡지 않아도. 솔잎추출액을 마시지 않아도. 바람결에 흔들리는 솔잎 부딪치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것이 소나무임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눈을 감는다면. 내 앞이 산이 있는지 그 산 너머에 소나무가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오감 중 가장 멀리 인식할 수 있으며 오랜 시간동안 지식 습득의 방법으로 ‘글’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시각의 도움 때문이었다. 

이렇게 시각에 많은 의존을 하는 인간이. 이 순간 시각이 없어진다며?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극단적인 사상을 하지 않더라도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색맹인 ‘개’와 같은 시각을 가졌다면. 아니면. 어류와 같은 시각의 퇴화를 가지고 인류가 발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가시광선의 분광현상이 있는지 조차 몰랐을 것이며 물체가 윤곽을 가지고 있고 결정을 가졌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저 ‘덩어리’로의 물체. 그것만을 인식하며 살아가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2006년 이 세상은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그래. 이처럼 생물은 그저 자신이 볼 수 있는 것만을 본다고 인식할 뿐이다. 인간은 보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있다고 ‘믿음’으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보이지 않는 것은 감각의 범위를 넘어선 ‘정신’의 영역으로 넘어가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시각이 가진 특성이며, 한계점이다. 시각은 ‘보기만’할 뿐인 것이다. 이 세상에 빛이 없다면 사라질 그런 감각이. 시각이다. 

시각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말. 

우리는 지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하여. 당신은 글을 읽기 위하여. 우리는 ‘글’을 빛의 반사에 의해서 자극받고, 눈에서 그 빛을 받아드리고 여러 경로를 통해 뇌에서 인식을 한다. 그 뇌라는 것은 그 글에 대한 형태를 보고 글로서 인식하고 해석하며, 그 의미에 대하여 기억했던 내용을 불러들인다. 

자. 그렇다면 그 글이라는 것이 이렇게 복잡하게 인지되고 판단이 되는데, 모두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뜻으로 이해 할 수 있을까? 뭐 이거. 시각과 글에 대한  뚱딴지같은 이야기를, 생리-해부학적으로 접근해 보려는 이 노력이 그저 말장난처럼 보인다면. 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 또한 보는 사람의 판단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이미 눈을 다쳐서, 신경의 문제로, 뇌에 손상을 받아서 시각을 제대로 인지 못해 이 세상을 우리와는 ‘다르게’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만일 이러한 ‘차이’가 신경회로와 뇌에까지 미쳐있으며 이로 인해 사람이 시각에 대한 경로와 인지가 달라진다면. 우리는 똑같은 것을 보고 똑같은 것을 판단한다는 생각은. ‘오산’이 되어버린다. 우리가 해부학 책에서 보는 그림들은 그저 ‘표본’의 모습으로 그저 수치를 만들기 위함의 평균일 뿐 모든 사람이 그 속도와 인지능력이 같을 수는 없다.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다르듯 우리의 ‘시각의 감각. 감정. 그리고 판단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하고자 하는 말이 이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이 다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한 그루의 나무를 바라보았을 때 보는 부분이 다 다르고, 보고 느끼는 부분이 다 다르고 나무를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이 다 다르다. 그리고 그 나무를 통해서 ‘기억’하게 될. 앞으로 나무를 바라볼 때 떠오를 생각들도 다르게 될 것이다. 어떤 일에 있어서 기준을 마련하고 일원화 되는 것도 중요하다. 답에 대한 질문을 만들어 빠른 처리를 하는 것도 이 시대에 필요 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가 지금 바라보는 이 세상도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내가 보는 세상이 과연 이 모습일까. 저 하늘을 나는 새가 바라보는 세상과 땅 밑을 기어다니는 개미가 바라보는 세상이 같을까? 우리는 너무 ‘나’의 기준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려 하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감각에 의한 감정과 인지, 판단에 대한 인간의 ‘다양성’이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가진 숙명임을 인정해야 한다.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하여 자신을 남과 다른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아닌. 다르지만 같은. 같지만 다른 우리들의 ‘시각’의 차이를 인정한다면 어떤 일에 있어 논의를 하는데. 좋은 마음가짐이 되지 않을까? 

그래. 이 글도 내가 의도하는 바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우리가 인식하는 이 ‘시각’이라는 감각과 뇌가 가진 차이가. 그리고 나의 글 솜씨가 이런 글을 만들어 냈는 것을. 그저 열심히 더욱더 ‘소통’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수밖에는.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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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너스 Page.
필요에 의한 보충 설명과 더 하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 신경과 세포의 ‘전기신호’란 무엇일까?

- 안정막 전압.

쉬고 있는 뉴런(신경세포)에 세포막을 기준으로 세포내액과 세포외액에 미소전극(microelectrode)을 접촉시키면. 둘의 차이에는 전류는 흐르지 않지만 전기적인 대립 상태. 즉, 차이를 보인다. 즉, 분극(polarization)을 이루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운동과 감각에 관여하는 신경섬유과 근육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그 범위는 -외부에 대하여 내부는 음성- -90mV~-70mV이며. 이 같은 분극현상은 Na+ 과 K+을 능동적으로 이동시키는 기전(Na+-K+ pump)이 세포막에 있기 때문이다. 

-  활동막전압

이제 세포에 전기적 성질이 있다는 것을 얼추 알게 되면. 세포막에 자극이 왔을 때. 세포가 어떻게 반응을 하는지 알아봐야 할 것이다. 쉬고 있는 신경섬유의 한 부분에 알맞은 자극 전류를 가하면 안정막 전압에 변동이 온다. 이러한 일련의 전압의 변화를 활동전압(action potential)이라고 하며. 이러한 자극에 의한 전기적 변동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기신호’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전압의 변화는 가시전압-지나가기-탈분극-재분극의 과정을 거치며 전기신호를 만들게 되고, 이러한 전기적 신호는 신경섬유를 통해서 신경흥분이 전도되는데 이 신경흥분이 바로 실무율을 따른다는 말이다.

실무율에 대하여.
[“자극 감지에 있어서 인간은 역치 이상의 자극에 대해서만 감지하는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 그것은 역치 이상의 자국에만 반응하는 세포들의 조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능 또한 그런 식으로 2진법 위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 김청하 상병님의 글. 「기계가 생각할 수 있을까?」내용 중 
윗 글에 대한 답변과 함께.]

실무율(all or none principle)란?

『 단일 신경섬유가 자극의 강도에 다라 최고의 흥분을 하지 않든지 하는 현상. 즉, 자극의 강도를 서서히 높여서 어느 한계의 자극강도에 도달하면 그 신경섬유는 비로소 흥분하게 된다. 이 역치자극보다 매우 강력한 자극을 주더라도 발생되는 활동전압의 모습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다. 』라는 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생리학 서적에서의 실무율의 정의다.
이 말만은 들으면 우리의 감각은 Yes / No 의 2분법적인 시스템으로 감각을 수용하는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가? 우리의 감각의 기준이. 느낀다 / 느끼지 못한다로 이루어진것일까?

실무율은 단일 신경세포 즉, 하나의 신경세포를 보았을 때만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신경섬유는 신경간-뭉치를 이루는데 일반적으로 신경간에 역치상 자극을 준 후에 얻은 황동전압은 실무율을 따르지 않으며, 자극의 크기에 따라서는 가시전압의 진폭이 어느 정도까지 점차적으로 커지며, 황동전압의 기간도 길어지고. 그 정점(peak)도 여러 개가 나타난다. 이것을 복합 활동전압한다. 그렇다면 계속 언급되는 활동전압이란 무엇일까? 

그런데... 

단일 역치하 자극. 즉, 역치 이하의 자극을 주어도 ‘빨리 여러 번 반복’하게 되면 신경 흥분을 유발시킬 수 있다는데 있다. 즉, 신경이 흥분을 하고 난 후 부분적으로 신경이 흥분되어 있을 때. 역치이하의 자극이라도 조건-빨리, 여러번, 반복-을 성립하면 신경의 흥분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러한 현상을 자극의 가중(summation)이라 한다.

신경섬유의 종류와 이동속도

  신경섬유에는 A, B(절전 자율신경계), C(절후 자율신경, 교감신경, 반사반응)섬유라는 종류가 있으며. A섬유는 각각 그 기능에 따라 α(체성,운동), β(촉각, 압각), γ(근방추), δ(통각, 온각)의 네 가지 신경섬유로 나뉜다. 각각의 신경섬유들은 섬유의 직경과 전도속도도 다 다를 뿐만 아니라. 다음 흥분으로 이어지는 시간 즉, 불응기-휴식시간도 모두 달라서 만약 동시에 흥분을 한다하여도 중추신경에 도달하는 시간은 각각 달라진다. 또한 신경섬유는 다양한 이유로 흥분전도를 상실할 수 가 있는데 이러한 차단원인에 대한 감수성이 신경섬유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국소마취제에 가장 민감하게 상실되는 섬유는 C-B-A순이며. 산소결핍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순서는 B-A-C이다. 
즉, 신경섬유라 하여 모두 똑같은 속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즉, 하나의 단일한 신경섬유로 모든 자극을 받을 수 없으며 그 자극의 속도는 각각 다르다. 
* 병장 김동환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8-03 13:05) 

  
 
 
 
상병 이훈재 (2006/07/25 17:24:54)

전지현의 검 중이라 일단 선리플 후감상 
그리고 <가지로!> 
안 읽어봐도 가지로 할 수 있어요-    
 
 
병장 송희석 (2006/07/25 19:54:35)

<가지로!> 
세상에. 이런 지식을 머리속에 있다는것이 부럽군요. 저런분야는 아무리 머리속에 집어넣으려고 해도 안들어오던데. 흑. 잘 읽었지만 좌절하고 갑니다.    
 
 
병장 고계영 (2006/07/25 20:09:55)

훈재/ 안 읽고 가지로는 오바! 입니다. 말이 내글내생각이지 '설명문'이라구요. 나중에 감상하고 후회하지 마시길.. 아직 할 말이 얼마나 많은데... 

희석/ 저는 희석님이 아니라서?! 이 글 전체의 지식이 머리 속에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교수님들도 책 펴놓고 강의하는 마당에 말이죠. 그저 제가 배워서 생각했던 틀에 용어나 단위를 첨가 시킨 것 뿐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내용만 적었다면.. 아마. "무슨 소리 하러는 거야?" 하셨을 것입니다. 

청하님은 어디 가신 것입니까~~ 내가 이 글을 쓴 이유가 누구 때문인데~!!!!    
 
 
상병 박이문 (2006/07/26 08:28:01)

어쩌면 가장 어려운 문제인지도 모르겠군요. 
우리가 지각하고 있지 않을 때 세상은 존재하는가?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을 듯 ...    
 
 
병장 송희석 (2006/07/26 09:45:01)

이문/ 그와 관련한 서적으로 데까르트 선생이 쓴 '방법서설'이란 책을 추천하는 바입니다.    
 
 
상병 김청하 (2006/07/26 12:20:57)

여기 있습니다. 아 잠깐 떴을때 잽싸게 카피해뒀어야하는데 이거 계속 안 들어와지다가 이제야 들어왔군요. 단어들이 조금 어렵긴 합니다만, 여러모로 좋은 정보가 될 것 같습니다. 이런 글은 <가지로> 보내서 두고두고 읽고 싶네요.   
 
 
 병장 박진우 (2006/08/03 12:43:49)

<가지로> 

이걸 왜 안보내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