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승인씨'의 글이 아니었던 글을 읽은 '나'
상병 홍명교 2009-08-07 23:29:13, 조회: 116, 추천:2
지승인씨의 인상적인 글을 읽었다. 그 글에는 에너지가 넘친다. 반면 내 글에는 에너지가 없다. 이것이 내가 글쓰기를 주저하고 망설이며, 절망하는 이유이다. 생각해보면 정확히 6년 전 겨울, 그러니까 1학년 시절에 처음 맞이한 총학생회 선거에서 민족주의 ㅈ파들에게 참혹하게 패배한 이후에 절망하는 선배들을 향해 매직을 들어 격정적으로 휘갈겼던 일종의 호소문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있었다. 나는 그 사라진 대자보를 사랑한다. (그 대자보는 오래도록 학생회관 4층 고학번 선배들의 ‘숨겨진 방’ 벽에 붙어있었다.) 나는 한때 그런 글쓰기를 혐오하기도 했었지만, 다시 그것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것은 1차 텍스트가 없는 본질적으로 아스팔트와 눈물, 즐거움, 댄스, 사랑, 질투 따위들로부터 시작된 ‘맨 처음’의 텍스트였다.
이런 방식의 글쓰기를 오랜만에 접한다. 그의 글은 스펙타클, 선택, 자본주의, 예술, 노동, 시각, 발전주의, 소비문화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는만큼 그 사유의 궤적을 따라가다보면 수만가지의 생각들이 절로 생기게 된다.
스펙타클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펙타클성’은 하부구조의 주된 표현양식일 것. 이미 17세기에 네덜란드 헤게모니 시기로 넘어올때 자본주의는 그 고유의 스펙타클을 품기 시작했을 것이다. 드넓은 바다 위의 거대한 상선들, 전투함들, 그리고 식민지 탐험과 식민지에서 발견했다는 그 기괴한 동물들과 토인들의 생김새까지. 이미 그 탄생에서부터 신성성을 사명으로 품고 태어났기에 하나의 스펙타클의 탄생과 죽음은 신성성의 시작과 끝으로 연결된다. 요컨대, 우리가 크고 작은 사건들이나 헤게모니적 시기의 스펙타클을 생각해볼때, 어떤 권력의 종결 이후에는 그것보다 조금 더 늦게 끝맺어지는 스펙타클이 있지 않던가? 스펙타클이 온전히 자본주의의 표면적 양태들과 비견될 순 없을 것이다. 나는 이미 스펙타클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하나는 소비문화의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상품의 스펙타클(풍경)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폭력적 양태의 폭발적 형상으로서의 스펙타클. 둘은 엄연히 다르다. 전자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계속 개인들과 이데올로기에 인입시켜줄 것이고, 후자는 어쩌면 놀랄정도로 파괴적이거나 혁명적인 총체적 국면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나는 아주 종종 ‘스펙타클’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해보곤 하는데, 내가 주로 관심을 갖는 것은 후자의 스펙타클이다. 요컨대 남대문 화재나 국회의사당내의 격투장면들 같은 것. 이들은 상품이 만드는 은밀한 풍경들의 유령스러운 권력과 달리 우리 삶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또는 자기 자신이나 사회에 대한 파괴적이고 자멸적인 욕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어쨌든 우리는 이것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아무래도 전자에 대해 생각하는 건 암만해도 무익하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거부) 자체가 그것에 대해 가장 효과적이고 공격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최선의 전술이다. 그것은 우리들(잠재적 소비자)의 ‘시선들’에 의해 유지되고 자양되는 것이니까.
어떤 사물들에 대해서는 강한 소유욕을 품곤 하는 내 자신을 볼때마다 놀라곤 하는데, 지난 10여년간 부단히 (어머니의)잔소리도 들어보고, 도 닦듯이 정신수양도 해보고, 또는 합리적 소비자로서의 판단과정도 실험해보았지만, 역시 최근의 방법인 ‘외면하기’가 최고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러나 ‘거부’만으론 자유로워지지 않을 것이다. 여러 가지 다른 영역들에서의 또 다른 투쟁‘들’이 겸행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과잉에 의한 폭발적 사건으로서의 스펙타클에 주목해본다. 그것은 항상 헤게모니의 위기시기에, 사람들이 끊임없이 존재론적인 불안감에 시달릴 때 사회적 징후로서 반복하며 등장해왔다. 어떤 스펙타클의 효과가 그 효력을 상실해가고 있을 때 다른 파괴는 필연적으로 다시 발생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존하는 거대한 불안을 누구도 견뎌낼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가짜 남대문이 복구되었고, 용산에서의 참사가 사람들의 뇌리에서 떠나갈 즈음, 여의도에서는 기괴한 패싸움이 발생했고, 그 즈음 그 밖에선 평택의 자동차공장에서의 가장 첨예한, 그러나 패배가 예견된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금 패배를 부인하고 싶어하는 우리들이, 지배세력이든 아니든, 그렇지 않은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수선을 떨고 있다. 누구에게도 불편한 스펙타클이기 때문이다. 손쉽게 내려질 어떤 종류의 판단과 달리 그들은 이런 스펙타클을 원하지 않았다. 오늘날 지배권력은 스스로 그 무엇도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했고, 그저 자신의 시스템을 안정화시키는 과정에 있어서 스스로를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길 원하는 그 당시에는 하나의 대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선 대리자 역할을 떠맡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보다 F***ism적인 스타일을 구사하는 하나의 정치분파에 불과한 그들은 다른 한편에서 형식적 국면상의 조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진보’를 자칭하고 거리를 떠도는 또 다른 정치분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ㅌㅇ전선주의자들이 헛되이 ‘희생’하며 만들어내는 것처럼 그들이 조성하는 ‘연대’의 풍조는 파란만장하고도 찌질한 일대 쇼로 종결되고말 것이다. 따라서 진심으로 권력에 저항하려는 사람들은 이런 쇼에는 초연해져야 하며, 그렇다고 해서 스타일로 거짓 치장된 내용의 진짜 이면조차 외면해선 안 될 것이다. 말하자면 쇼보이들에겐 그것이 쇼무대 위에 걸어놓은 플랜카드 제목에 불과하지만, 우리들의 시선 그 자체를 별 도리 없이 관통하며 관장하는 것을 ‘미디어’에 떠맡긴 우리들로서는 싸움을 보다 더 ‘극심하게’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을 만드는 ‘실재’이니까.
이처럼 스펙타클은 이면을 감추기도 한다. 따라서 스펙타클의 ‘스펙타클성’에 현혹되면 승인씨가 유일하게 믿는 것처럼 보이는 그 “소리없이 글썽이는 작은 것”도 잃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잃었는지도 모른다. 그걸 뻔히 보면서 ‘알고’ 있으면서도 가만히 서있으니까. 대지가 뒤흔들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여러분?
선택
선택이라는 행위 속에 담겨진 불가지론적인 양상과 그 기만성에 대한 폭로를 승인씨가 탁월하게 드러내주었다. 정말이지 선택이란 곧 ‘권리’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 무언가를 고르는 것이 곧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잘못 골라진 서브젝트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내는 환상들을 만든다. 우리가 언제나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유로운 선택은커녕 도리어 억압된 도식 앞에서 주어진 시나리오를 부조리하게 취사-선택하는 자연스러운 이데올로기 인입의 과정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린 모든 것을 부정해야하느냐는 당돌한 질문에 직면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질문 자체를 거부할 수 있다.
승인씨는 알튀세의 <?자본?을 읽자>의 문구를 인용한 것을 보고 재인용하여 발췌했는데, 이에 대한 해석은 부분적으로만 맞는 말이다. 알튀세는 단순히 ‘인간’, ‘휴머니즘’적 발현에 의해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런 요지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시혜적 시선이 담긴 지식인적 윤리학에 불과할 것이다. 노동이 가치있다는 말은 사실상 동어반복적 언명이지만, 노동력의 가치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회피할 수 없는 심급의 문제를 담고 있다. 요컨대, 그것은 ‘잉여가치’의 문제이다. 바로 그 잉여가치가 자본이 스스로의 동력으로 삼는 에너지가 된다는 핵심을 경유할 뿐만 아니라, 바로 이 잉여들이 엄밀히 승인씨가 지속적으로 언급하는 상품들과 상품성의 “스펙타클의 본질적 운동 그 자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막씨 이후의 수많은 오해들이 누적되면서 어느 한 순간(아마도 그것은 레밍 사후라고 보여지지만!) 경과하기 시작한 이 문제를 우리들은 아주 오랫동안 모른 체 하고 지나갈 수 있었던지! (물론 벤야민이 ‘과거’에 대한 탁월한 사유들로 이룩해놓은, 그러나 놀랄정도로 감쪽같이 감춰진 성과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이것은 승인씨가 쉽사리 인상비평식으로 말하는 것처럼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에 대한 ‘부정’으로 수렴되어선 안 된다. 68년 이전부터 오랫동안 막-문화이론과 현대철학은 이것, 중층 결정된 모순들의 최종 심급으로서의 경제심급에 대해 사실상 외면함으로써 대처해왔다. 알튀세에 대한 수다한 비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마치 다시금 경제주의적 경향으로 돌연 회귀하는 것인마냥!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회귀가 아니다. 레밍말기의 NEP라는 시도는 (무수히 네오막수이스트들과 몇몇 ‘제 뜨로*키안’들로부터 ‘실패’로 폄하되고마는!) ‘이미’ 레밍으로부터 파국이 예측되던 혁명러시아의 상황이라는 정세적 조건에서의 청년막수라는 철학적으로 새로운 발견에서 비롯된 도전이었던 것이라는 것이다. 그 이후에 모든 본질적인 요소들이 제거된 스탈린적 시도들로서 모든 것을 평가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반복하자면, 지젝이 <시차적 관점> 후반부에서 (한 달 전에 입실했었던 보름여간 읽었던 이 괴물 같은 책은 800페이지가 넘는다.) 지속적으로 언급하는, 경제 심급의 문제가 중요하며 이에 대해 회피하거나 외면하는 오늘날의 모든 철학자들이 ‘시차적인 간극’과 경제 심급의 문제를 외면함으로써 발생하는 어떤 고착하는 지점들이 철학적 난제들을 더 극심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는 바로 이것을 철학적 관제 안에 환기시키고자 하는 의지였던 것이다. 지젝은 이런 지점에서의 발리바르의 해법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이런 면모에서 드러나는 그의 맑-스러움이란.
하지만 승인씨가 스펙타클의 운동성에 대해 언급하며 묘사하는 말들은 진정 절묘한 묘사라고 느껴진다.
“인간활동 속에 유동상태로 존재하던 모든것을 흡수하여 그것들을 산 가치로 부정하는 정식화에 의해 배타적 가치가 된 응결상태의 사물들로 장악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스펙타클의 본질적 운동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숙적인 상품을 인지하게 된다. 상품은 어떻게하면 자신이 첫 눈에 평범하고도 명백한 것으로 보일지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실은 이와 반대로 그것은 너무나 복잡하며 형이상학적인 모호함으로 가득 차 있다.”
소비문화와 욕망, 그리고 예술
오늘날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억압되어있는 심리적 욕구들은 ‘마케팅’을 위한 그것에 다름 아닌 것처럼 취급받고 있다. 요컨대, 일전에 내가 경영학과생이었을때, <현대기업경영>이라는 필수수업에서 가장 먼저 들은 이야기는 인간들의 ‘욕구’이다. 인간들의 욕구는 필연적으로 도저에 깔린 것이기에 그것은 오늘날 상품판매와 마케팅의 주요한 근거가 된다고. 인간들의 욕구가 있기에 상품이 존재한다고. 정말 그 선행구조가 맞는지에 대해 의심해보지 않는 한, 우리는 그를 믿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 창출된 소비문화는 바로 문화비평,문화이론의 핵심적인 근거였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영역이 모조리 이것에 소급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승인씨는 논리적 측면에서는 그렇게 독해할 수밖에 없도록 글을 썼다.)
예술은 소비문화의 ‘치장들’과는 다르다. 소비문화와 상품광고가 적극적으로 ‘예술’이라는 양식을 빌어오고 있다는 근거 하나로 그것을 예술로 치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장에 종속된 예술가는 본질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이는 자본에 종속된 예술가가 필연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숙명이다. 그/녀가 진정 작가이거나 장인이라면 그/녀는 끊임없이 존재론적 질문 앞에서 고뇌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예술가의 숙명이기에 외면하고 회피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성’에 대한 비판으로 예술가를 비판할 순 없다. 아니, 무의미하다.
오늘날 예술이 자본에 종속되어있다는 말도 현상에 대한 해설에 앞선 상황설명은 될 수 있을지언정, 그 자체로 비판의 근거가 될 순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술이 자본에 종속되어선 안된다고 영감님처럼 말하는 것과 다름없는데, 사실상 그 말은 동어반복이기 때문이다. 앤디 워홀의 수프 통조림 그림을 온전히 “전통의 소비문화로의 이행의 징후”라고만 평가할 순 없다. 이미 그런 해석을 내리는 그 순간, 앤디 워홀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며, 차라리 앤디 워홀이 만들어낸 예술사의 긍정적 후과들마저 무너뜨리는 규정이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정당한 예술비평은 그 뒤의 숨겨진 이면에 대해 말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1) 요컨대 앤디 워홀은 예술적 전통의 불립성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오늘날까지도 자기만은 소비문화에 종속되지 않는 ‘순수한’ 예술을 하고 있다고 ‘믿고있는’(믿고 싶어하는) 여러 고귀한 예술가들이 만드는 항상 “신선하다”고 평론가들로부터 평가받으나 사실 그렇지만은 않은 작품들 역시 어떤 면에서 ‘고급’한 소비문화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닐까?
2) 아니, 어쩌면 일찍이 SOMA에 설치된 뒤샹의 변기가 파격적인 방식으로 선보였던 바, 경향으로서의 예술시대는 이제 완전히 끝났다, 고 말하려는 것은 아닐까?
3) 또는, 컨베이어벨트의 대량 생산 시스템에 의해 무수히 양산되는 상품들의 시대인 오늘날의 자본주의 시대에서 그 ‘대량’의 ‘상품’들에 의해서 ‘기계적으로’ 직조되는 상품-풍경들의 시각적 가치에 대해서라면?
4) 그와 반대로, 요컨대 앤디 워홀이라는 세계 미술계의 ‘스타’와 그 선정적인 작품들, 그리고 화려한 삶들 이면에 감추어진 어떤 필연성 따위들에 대한 것 --- 작품 안에서 상품과 똑같이 그려진 그것이 수십년, 아니 불과 수년이 지난 후에 쓸모없는 것으로 추락하고마는 그 쇠퇴하는 사물의 고유함과 닮은 앤디 워홀 자신의 추락에 대한 예견이라면?
따라서 예술이나 예술가가 자본주의 인상 비평의 한낮 도구로 소급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이는 스스로를 함정에 빠뜨린다. 우리 모두가 착각했었던 것이 있다면, 예술은 단 한번도 시장이 추구하는 가치에 강력한 반기를 들었던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이 오늘날에 와서 지난날의 영예를 배반해버린 비겁자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당한 ‘비난’이다. 예술은 아무것도 추구한 적 없었다. 예술의 자장 안에 머물렀던 무수한 작가들이 본질적 고뇌 속에서 탈출하고자 시도했던 반항들이 예술의 한 흐름을 만들었던 것뿐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예술은 모든 것이 될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예술은 언제나 다른 모든 것보다 한 발자국 앞서서 체제의 변혁을 선취해왔다. 이것은 낙관주의가 아니라, 예술의 궤적에 대한 묘사 그 자체이다. 표현주의자들이 이미 기괴한 표정의 얼굴들, 음울하고 톤 다운된 색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진 날카로운 선들을 통해 분열적인 자아를 드러내고자 했을 땐 당대 독일 사회가 품고 있던 전반적으로 사회적으로 음울하며 탈출구 없는 통로들이 반영된, 그리고 동시에 나치즘의 폭압을 예견/경고한 것이었다면,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취리히와 소호거리에서 퍼포먼스를 벌이는 행위들을 통해 예술적 전통의 파괴를 주창하고 나섰던 것은 그것을 통해 현대예술의 도래와 모더니즘의 변주와 포스트모더니즘 도래를 체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을 폭로할것!
새만금, 쌍용, 용산의 파괴적 스펙타클이 흘러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우리가 동시에 물고늘어져야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경제의 심급이다. 상부구조와 ‘경제’를 동시에 다루는 것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 그것을 회피하는 것이 세련된 것으로 치장되었던 과오가 오늘날의 저항이데올로기에 무수한 오류를 낳아왔다. 요컨대, 민영화나 집단해고라는 사회적 문제를 환기시키고 예로 들 때 인상비평의 한계 안에 머물러있는 것은 지극히 한계적이다. 신자유주의 금융화가 양산하는 ‘금융자본’의 버블현상과 이것이 90년대의 호황을 거쳐 종국에 부동산 폭락이라는 파국적 결과를 맞이한 끝에 오늘날 국가기구들에 의해 어떤 조치들이 취해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밝혀내야 한다는 것이다. 욕망 운운, 스펙타클 운운하는 것 역시 모든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우연적 도래 이후의 네 번째 헤게모니로서의 미 헤게모니 체제 하에서 신자유주의 개혁들이 어떻게 진행되었고, 그것들이 한국땅에 왔을때 민영화(사유화)나 대량해고, 노동유연화(불안정노동) 같은 조치들이 단행되고, 그로 인해 어떤 양상들이 펼쳐지고 있는지, 동시에 말하도록 하자. 그리고 그것에 연계된 오늘날 한국에 사는 사람들의 불안과 상실, 공포, 욕망, 대중문화들에 대한 맥락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적어도 이토록 사회적인 현안들에 대해 언급할 때에는 말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할때 정말 두려움을 느낀다. 지승인씨는 정말 용감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배제하지 않는 언어적 습관들이기
그런데 자연을 강간한다는 것은 대체 무슨 말인가. 강박적인 도덕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남성들이 특히나 진지한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더욱, 단어 선택에 유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으로부터 무수한 오해를 받아온 라캉. 그 라캉의 전도사인 슬라보예 지젝은 자본주의 사회의 여성 억압이나 페미니즘이라는 주제에 대해 언급할 때 부단히 차분하며 진정성있는 자세로 그것에 대해 논한다. 그는 구태여 생겨날 오해의 소지들에 대해 차근차근 언급하며 오늘날 가부장제나 자본주의 사회가 만드는 여성 억압에 대해 지극한 말투로 전제한 가운데, 라캉의 ‘표현들’이 불러일으켜온 오해들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해나간다. 기이하게도 나는 이 부분에서도 지젝에 대해 감탄했는데, 내가 만난 라캉주의자 중 (실제 아는 사람들도 있고, 교수들, 친구들, 지젝처럼 어떤 책의 저자들도 있었다.) 가장 사려깊은 사람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페미니스트보다 더 철저한 원칙을 지닌 ‘여성주의자’였다. 결코, 소수자로서의 여성이 느끼는 억압의 실재를 알 수 없는 남성에겐 이런 자세가 필요하며, 특히나 문자나 구술의 영역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번번이 승인씨의 본문이나 댓글에서 드러나는 ‘강간’이라는 단어는 애초에 독자 중 여성을 배제하는 말이지 않은가. 만일 누군지 모를 익명의 여성이 이 글을 읽는다면 그녀는 기분좋게, 신선한 기분으로 그 글을 읽다가도 바로 ‘그 부분’(강간이라는 단어가 표기된 그 부분!)에 다다랐을때 말도 못할 소외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녀로 하여금 ‘남성적-언어’ 안에 내재된 여성배제적인 단서를 드러나게 하여, 마치 이 자본주의와 현대에 대한 거대하고 총체적인 텍스트가 본디 남성들만의 것인 것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심어줄 것이다. 이는 불필요한 오해도, 잘못된 편견도 아니며,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다. 우리는 충분히 다른 단어와 문구로도 충분히 신랄하게 표현할 수 있으며,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연을 강간한다.”는 언명 안에는 숨겨진 ‘모성으로서의 자연’을 응시하는 남성적 시선도 느껴진다. 현대철학에서 존재하는 갖가지 경향들 중 오늘날 파괴되어가는 환경에 대한 본질적 대안인 것처럼 왕왕 이야기되는 도덕주의적 환경보호론/환경회귀론은 자연을 절대적이고 모성적인 무엇으로 바라봄으로써 동어반복적인 후술만 남기고 있진 않은가? 이것 역시 결국에는 자연을 오직 응시의 ‘대상’으로서만 바라보는 욕망의 시선이 아니겠는가. 응시의 대상이 된 ‘자연’은 더 이상 그 자체로서의 자연이 아닌 대상, 도구로서의 풍경과 다름없어진다. 애초에 자연은 우리가 돌아갈 곳도, 모성의 품도, 성심성의껏 보호해야할 무엇도 아닌, 그 자체로서 홀연히 스스로 존재하는 무엇인 것일 뿐이다.
언어가 모두를 포용할 순 없다. 말하자면, 모두의 입장에서 뱉어지는 언어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가 익숙한 누군가를 배제하는 언어가 되어서는 안되겠다. 그럼 그만큼의 친구, 그만큼의 독자, 토론을 나눌 사람들을 잃는 것이니. 아마도 나의 부족한 사유를 채워줄 K는 ‘그녀’일 것이다. 그녀는 여성-배제적이며 가부장적인 어떤 색깔이 강하게 남아있는 내 글을 보다가 불편한 기분을 감출 수 없어 이내 씁쓸하게 시선을 거둘 수밖에 없었던 'K'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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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8-24
16:59:33
병장 양동훈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건 또 언제 다 먹죠. 와작와작.
아. 씹고는 있는데 단물은 그냥 줄줄 흐르는 느낌이네요.
달콤한 사과를 씹고 있는데, 뭔가 단 맛은 느껴 지는데, 왜 단물이 가슴속으로 흘러 들어오지 않고 줄줄 새고 있는 걸까요.
이건 아마 그저,
제가 지금 무척 졸립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이 글은 원래 '지금의 저'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글이기 때문일까요.
아. 일요일날 다시 먹어봐야지. 2009-08-07
23:38:41
병장 이재익
재밌네요..재밌는데 이해를 못하니 참 뭐라해야할지..
결국은 자본주의시대니까 그 안에서 이것저것 다 신경쓰고 숨겨진 이면도 보면서 뭐 하나 말할 때 모두가 차이없이 받아들이게 말해보자로 이해되니...부족한 제 지식이 안타깝네요
딴건 실력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처음 언급된 총학선거가 인상깊네요.. 2009-08-08
01:22:49
병장 이 원
결국 하나 쓰셨군요. 후후
근데요, 쉬운듯 어려우니 더욱 약오르네요 허허
머리 맑을때 다시 읽을래요. 후후 2009-08-08
01:36:17
병장 김예찬
그 숨겨진 방이라면 예전 수배 붙은 학생들이 숨어있었다는 전설의 그 방인가요?! 아무튼 생각을 차차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009-08-08
10:09:19
상병 홍명교
학관 안에 숨겨진 방은 여러개가 있으니까요. 그 방들의 존재 자체로 얼마나 많은 갈등들이 생겼던지.. 2009-08-08
18:17:15
상병 홍명교
다시 보니 이거 뭐 오타도 많고, 불친절한데다 오만한 구석이 있는 글이네요.
그 불친절한 구석들은 모두 저의 공안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오니, 수정은 못하겠고 너그러이 이해하며, 스킵해주세요. 2009-08-08
18:27:22
상병 박원익
글에 대한 언급들은 아직 없군요...
"그러나 이것은 승인씨가 쉽사리 인상비평식으로 말하는 것처럼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에 대한 ‘부정’으로 수렴되어선 안 된다. 68년 이전부터 오랫동안 막-문화이론과 현대철학은 이것, 중층 결정된 모순들의 최종 심급으로서의 경제심급에 대해 사실상 외면함으로써 대처해왔다. 알튀세에 대한 수다한 비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마치 다시금 경제주의적 경향으로 돌연 회귀하는 것인마냥! 말이다."
이러한 발언에 저는 열렬한 박수를 보내며, 명교 님이 지젝을 읽으며 고민한 부분들을 서술한 이 글은, 사실의 아직 제 맹아적인 단계의 모든 고민들을 이미 선취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명교님의 결정적인 요점은, 자본주의의 현혹적인 외관, 즉 '스펙타클'에 대한 인상비평에만 집중하다보면, 어느새 그러한 저항의 양상 자체가 '스펙타클화'될 수 있다는 것이며,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다시 본래의 막씨의 경제적 심급에서의 본연의 저항을 정식화(혹은 사유)해야만 한다는 긴급한 요청입니다. 명교 씨의 글은 결코 오만한 것도, 그리고 읽어내기 어려운 것도 아니지요. 이것을 캐치하지 못한다면 독자인 저로서도 불행한 일입니다.
다만,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스펙타클'(소비문화적 스펙타클이 아닌)로 언급하는 것들이 정말로 '스펙타클'에 불과한 것인지는 조금 논의의 여지가 있지요. 2009-08-09
02:47:03
상병 박원익
뿐만 아니라, "욕망 운운, 스펙타클 운운하는 것 역시 모든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이 강력한 한 마디가, 다른 아닌 20대의 입에서 '공식적으로' 튀어나올 때, 그것이 우리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선언이 될 때, 저는 그것이 하나의 사건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