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견설 2006-09-23 00:20:33 
 
병장 이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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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저 새 불쌍하지 않습니까?' 




물기가 묻어나오는 후임의 목소리. 무슨 새를 말이지? 




'죽어가는 것 같습니다. 저런, 가엾어라.' 


말을 마치자 마자 후임은 자신이 가리킨 쪽으로 다가갔다. 대본 앞에 가로누워 가쁜 호흡에 제 몸을 들썩이는 검게탄 그 물체는, 아마도 까치, 라는 새이리라. 질병인지 노화로 인한 죽음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마지막 호흡을 다하려는 듯 가쁘게 온몸을 꿈틀대었다. 쇠파리들만이 기쁨을 향락했고, 새는 저항하지 않았다. 




'이 자식들 이거, 더럽게.' 




후임은 손을 휘휘 내저어 파리를 내어 쫓았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파리들은 고대하던 만찬장에서, 그렇게 내쫓겼다. 서너번의 손짓만으로 그는 파리를 모두 내어 쫓았다. 어쩌면, 이미 파리들의 만찬이 거기서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이거, 묻어줘야겠습니다.' 

'그러려면 그래라.' 




그는 새를 조심스레 들어서 햇볕이 드는 풀 위에 얹었다. 자신이 들고 있는 종이와 나뭇가지 몇개로 그림자까지 만들어준 그는, 손을 씻고 우리와 식사를 함께 나눴다. 식사 중 우리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식사는 맛있었고 할 말은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새는 힘겨운 그 호흡마저 하지 않고 있었다. 새는 죽었고 파리들은 까맣게 붙어 만찬을 즐기는 중이었다. 후임은 분노했다. 




'파리들 이거,' 


나서려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후임이 돌아보았다. 고개를 저었다. 




'파리도 살아야지. 다 같은 아이들이잖아.' 




후임은 팔을 내렸다. 이해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는 도리어 분노했으리라. 




'그럼 묻어주겠습니다.' 




내 허락을 기다릴 새도 없이 그는 새에게로 다가갔다. 군화와 손으로 가볍게 땅을 파고, 그는 그 안에 새를 묻었다. 구태여 파리를 쫓지 않았던 것은 아마 선임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새를 묻는 동안 기다렸을 뿐. 나는 모른다. 그의 행동이 진정 사랑이었는지를. 그렇기에 그를 제지하지도, 격려하지도 못했다. 그는 새를 사랑했는가. 




새는 무엇을 바랬을까. 그는 묻히는 것을 바랬는가. 묻히길 원했던가. 그저 그 새는 격렬히 생의 마지막을 태웠고, 그뿐이었다. 죽은 대상을 묻거나 불태우는 것은 사랑인가. 그저 죽은 주검을 못견디어 치워버리는 행위는 혹여 아니던가. 사랑인가, 외면인가. 나는 모른다. 그저 대상을 그 자체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사랑인가. 




포유류, 조류, 털달린 그들에게 우리는 애정을 보낸다. 털과 피부를 가진 그들을 편애하고, 보다 더 사랑한다. 지렁이를 사랑하는 이는 드물다. 왜? 왜. 닮은 대상에 대한 애정은, 피붙이에 대한 사랑의 왜곡이라, 혹은 파악된 대상에 대한 친근함이라 변명할 수 있을 지언정 변명의 수준을 넘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대상이 없어야 하지 않은가. 파리도 생명이다. 그들도 치열하게 그들의 생을 살고 있지 않은가. 내가 사랑하는 새가, 내가 사랑할 파리와 소통하고 교환하는 것을 거부할 이유가 내게 있던가. 부당하게 패를 가르고 선을 긋는 행위에 사랑이 존재할 수 있는가. 또다른 증오와, 다른 모습의 외면만이 사랑이라 이름짓는 것은 아닌가. 알지 못한다. 




애초에, 개체로서 혹은 존재로서 이 땅에 모든 것들을 우리는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랑할 것이라면. 고무패드와 경제학개론과 서류철과 고양이의 차이는 무엇이던가. 생과 물의 차이는 무엇인가. 생명의 정의를 확고히 내릴 수 없다면 생물에 대한 편애 역시 부당하다. 사랑은 대상이 한정없어야 하지 않던가. 모든 것, 모든 상태에 대한 사랑을. 선을 긋지 않는, 편견과 기만에 빠지지 않은 사랑이어야 사랑이 아니던가. 나를 버리고 대상을 보는 것이 곧 사랑일 수 있지 않던가. 




허나 나는 모른다. 고무 패드의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내가 사랑할 하나의 개체인지를. 경제학의 몇 페이지까지가, 혹은 종이의 어떤 부분이 내가 사랑할 한 대상인지를. 모른다. 혹여 그들은 애초에 그런 자의적 단위로서 스스로를 구분짓지 않을런지 모른다. 땅에 닿은 내 군화가 어디까지 군화인지 모르듯이, 나는 그들을 대상짓지 않고 사랑해야할 것이다. 무언가를 사랑한다고 말하려면. 어디까지가 그인지 모르고, 내가 사랑하는 그 무언가가 어디부터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고로 결국 이 세상 모두를 나는 사랑해야한다. 내가 무언가를 사랑한다고 말하려면. 나를 버려야 한다. 세상을 사랑하려면, 나는 없다. 




그러나 나는 그러하지 못한다. 사랑하지 못하고 오늘 밤에도 나는 이불을 고문하고 베게를 짓밟으리라. 어쩌면 나는 키보드를 애무하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생각할 수 없기에 그 간극을 나는 메우지 못한다. 그래서 후임의 행동을 나는 제지하지 못했다. 그저 지극히 사랑하지 못할 때 그렇게 마음 가는 대상만에게 우선 사랑을 주는 행위를 거부할 이유 역시 나는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어쩌면 나보다 더 사랑에 찬 인간이리라. 그래도 나는 모른다. 그 파리들을 쫓아냈어야 하는 이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