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사회학 2부-당신의 의도성에 대하여
당신의 의도성에 대하여.
안 어렵습니다. 스크롤은 조금 압박이지만
(일종의 애교입니다)
물론 나는 모든 종류의 환원주의-모든 사건의 원인을 특정한 한 가지로 상정하고 현상을 탐구하려는 태도-를 경멸한다. 인간이라는 것이 단순히 사회적 존재인 것도 아니고-그렇기에 사회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단순히 경제적인 존재인 것도 아니며, 심리학적이기만 한 존재도 아니다. 인간의 존재는 다층적이며 그러한 인간의 파악에는 상황에 따라 다른 분석틀이 필요하다. '무서운 것으로부터 쫓겨 도망치다가 양 갈래길을 마주치면, 인간은 보통 왼쪽 길로 도망친다'는 상황을 경제학적 차원이라거나 도덕적 차원에서 설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심리학의 영역에서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경제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분석해 보는 것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실제로 인류 역사상 '안전한 지형'이 개활지 왼쪽에 있어왔다거나 하는 증거가 존재한다면, (좁은 의미에서) 심리학적인 틀로부터 도출해낸 해석보다는 사회학적/지리학적 해석이 더 옳은 해석이 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사랑'이라는 것을 어떤 영적인, 신비로운 차원에서 분석하는 것보다 소위 '사회학적 관점'이라는 곳에서 바라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은 영적이고 신비로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심리학적인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회생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다만 호르몬의 분비'와 관련된 생물학적인 현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시각은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중에 특히 사회학적 관점을 택해보고 싶은 것이다. 나는 그것이 사랑을 더 잘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고 나서야 우리는 더 진지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사랑을 그저 신비화하는 태도로부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오 신비한 사랑이여'라고 중얼거리는 것 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고 있는 동안 우리는 사랑을 통해 해방되고 더욱 유쾌한 삶을 살아가는 가능성을 박탈당하고, 사랑으로부터 억압받는 그런 안타까운 결과로 걸어가게 될 테니까. 신비화는 표현과 마찬가지다. '설명의 끝에서 표현이 시작한다' 설명할 수 있는 걸 신비화하는 것은, 기만이다.
그래서 사회학이다. 결코 여자 친구가 사회학을 전공한다거나, 혹은 내가 학부제의 광풍 속에서 헤매이느라 턱없이 낮은 학점을 받아 사회학과에 떨어지고 교육학과를 가게 되었다는 것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
사회학. 의도성과 상관 없이 어떤 일반적인 사랑의 행위는 사회적인 의미를 생산한다고 나는 지난 글에서 밝혔다. 그렇다. 나는 그 글에서 의도적으로 '의도성'의 이야기를 회피했다. 내면적 원인 혹은 의도에 관한 이야기는 인간 전체에 관한 이야기만큼이나 힘이 드는 것이다. 어떠한 분석틀을 어느 수위까지 사용해야 적절할까. 어쩌면 사회학의 이론들을 한계까지 끌어붙여 볼 수도 있다. 당신의 모든 감정들은 사실 사회의 산물이라고. 하지만 그러한 사회학주의-개인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사회적 실체를 전제하고, 개인의 모든 행위들은 이러한 사회적 실체의 산물이라는, 구조주의 초기 이론과 유사한 그러한 입장-는 분명히 많은 부분들을 탐구해 낼 수 있지만 역시 그러한 입장은 본질적으로 사랑을 '영성에 가득찬 신비한 행위'로 치부해버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나의 입장을 극한으로 끌어가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사회학적으로도 옳지 않은 접근법이니까. 다만 사회학이 적합성을 가질 수 있는 수위까지는 사회학의 분석틀을 사용해 볼 수 있다. 어디까지가 적합한가, 하는 것은 이야기 자체의 적합성에 달린 일이고. 그리고 나는 이번 글에서 할 수 있는 적합선의 선상까지 이 '내면적 의도'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수사를 버린다. 나는 사회학으로 인간 내면의 의도가 100% 설명된다는 입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학은 그것이 언급하는 선 까지 인간의 의도 배후에 존재하는 무엇을 설명할 수 있다는 그러한 입장을 가지는 그런 글이라고 떨리는 칼끝을 겨눠본다.
이왕 사회학 어쩌고 하는 바에 대중적인 사회학적 이론의 이야기도 조금 꺼내 보자. 어떤 수염이 덥수룩한 사회학자는-편의상 유태계 독일인 칼 M이라고 해두자-이런 류의 이야기를 했다.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간다고 해서 자신의 머리를 탓할 필요는 절대 없다. 커다란 사상의 부분을 이루는 한 문장을 보고 그것을 바로 이해해버리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이것은 대충 이런 뜻이다 '당신이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무엇이 아닌, 당신이 처한 사회경제적 상황이 당신을 결정한다.' 저 문장은 폴 발레리라는 사람이 이야기한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됩니다' 와는 조금 다른 맥락의 문장이다. 내 생각에, 칼이 이야기한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라는 것은, 당신이 사는 대로 당신이 생각하며 당신의 도덕관을 만든다는 것에 방점을 찍는-윤리학적인-그런 말이라기보단, 당신의 사회경제적 조건이 당신의 사회경제적 의식을 규정하며 당신의 실천을 조직한다는 그런 말이라는 생각이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면 이런 것이다. 책마을의 다수를 이루는 것은 '병장'이다. 당신은 '병장'으로서 일상의 삶을 영위한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들 모두가 '병장'처럼-그러니까, 빠질 때 까지 빠지고 매사가 귀찮고 권위적이며 위계적인-생활하지는 않을 것이다. 병장이라는 당신의 존재가 당신의 '개별적인' 의식을 규정하지는 않는 것이니까. 하지만 당신이 병장이라면 왠만큼 착한 병장이 아니라면 아마 내무실 청소라거나 냉장고 물통 채우기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일이병의 입장에서 당신이 아무리 착해도 당신의 사회적 존재는 압제자일 뿐이다. 그저 '착한 압제자' 정도일까. 당신이 아무리 착하더라도 당신은 조금 무서운 다른 병장들, 내지는 상병들의 일이병에 대한 통제의 은덕을 받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개별적으로 어떠한 의식을 가지고 있어도, 당신의 사회적 의식은 병장의 그것이라거나 뭐 이런 달콤하진 않은 이야기. 그것에 대해서는 당신이 쉽사리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당신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이것은 구조의 문제다. 구조 안에서 당신이 그러한 역할을 부여받는 것이다. 의식이라고 해서 역할과는 다른 어떤 영적인 실체는 아닌 것이다. 그리고 구조 안의 당신이라고 해서 그것이 당신이 아닌 것은 아니다(그래서 당신이 강아지 자손이라고 욕을 할 생각은 없다. 그것이 사회학도의 하해와 같은 넓은 마음씨니까). 그리고 내가 포커싱하고자 하는 것은 당신의 개별적인 의도성이 아니라, 그렇고 그런 나를 포함한 당신들의 이야기다. 그다지 달콤하지는 않은. 그리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이런 달콤하진 않은 이야기다. 비록 사랑은 달콤한 것이어야 하겠지만 '그릇된 달콤함'이어서는 안되는 것이니까.
자. 당신은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근대적인 민족 국가-이는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인 대한민국에서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다(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당신은 아마 '민주 의식'에 대해 어느 정도의 의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자신의 능력을 도야하여 직업을 구하고, 그러한 직업을 통하여 먹고 살며 적당한 애국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을 '적극적'으로 지향하지는 않더라도 많은 부분에서 동의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스스로를 아마 '인간'이라고 생각하기도 할 것이고. 그런데, 그러한 당신의 생각의 근원은 무엇인가? 당신은 왜 민주주의가 옳다고 생각하는가(나도 옳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왜 돈을 벌려고 하는가(나도 벌고 싶다). 어쩌면 당신은 한 번도 적극적으로 왜 민주주의가 옳은지, 혹은 왜 돈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만큼 그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가치인 것이니 그러한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왜 그것이 당신에게 그만큼 당연한 그런 가치인가. 간단하다. 당신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고, 대한민국에 적응해서-군대에 올 정도라면 당신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한민국에 잘 적응하고 있는 그런 친구들이다-살아왔으니까. 아마 당신은 스스로 '나는 사회에 조종당하지 않아. 나는 내 의지로 이러저러한 삶을 선택했어'라고 이야기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조선 시대에 과거에 붙어 관직에 나가려던 친구'들'도, 중세 시대 마녀들을 불태우던 이단 심문관'들'도 그런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물론 당연히 아무도 사회에 의해 조종당하지 않는다. '조종'이라는 어휘가 당신의 귀에 거슬리는가? 미안하지만 나는 달콤한 언어보다는 정확한 언어를 사랑한다. 하지만 당신의 여러 행위들, 혹은 사고들의 원인이 되는 그런 내적인 의도성의 배후에는 촘촘히 짜여진 사회의 관계들이 숨막히는 밀도로 존재한다. 왜 당신은 굳이 '사랑'해야 하는가. 사랑은 영성적으로 본질적인 것이었는가? 당신이 지금 생각하는 '낭만적 / 일부일처적 이성관계'가 기원 전에, 아니 조선 시대에, 아니 개화기에 존재했었나? 그때는 인류의 영성이 발전하지 않은 시기였기에 그런 마음을 가지고 그런 사랑을 한 것에 불과한 것인가? 오해가 약간 생길 지도 모르는 예시를 들은 것 같아 미안하지만,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사랑의 '형태 및 행위'가 아닌, 그 사랑을 가져오는 내면적인 의도다(형태 및 행위, 실천에 대해서는 지난 글에서 충분히 밝혔다고 생각한다). 조선 시대에 첩을 들이던 양반들도 그 나름의 가치관 안에서는 순수한 감정과 온갖 고뇌를 가지고 첩을 맞았을 거다. 당신이 어떤 여자를 사랑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그런 고민을. 물론 아주 지당하게 그들은 사회에 의해 조종당한 것이 아니다.
당신의 내면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순수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그리고 그것은 '쉽게 드러날 정도'로 굉장히 추잡한 무엇도 아니다.
순수한 사랑을 그렇게 바라볼 필요는 없다고 누군가가 이야기한 것 같은데, 사회학 용어 사전에 '순수'라는 어휘는 존재하지 않는다. 맨눈으로 유리창을 바라보면 유리는 아주 말끔하다. 그러나 현미경을 가지고 유리를 관찰하면, 파리 다리에 난 털이 틈새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울퉁불퉁한 것이 유리다. 당신의 분석틀에서 잡아내지 못하는 것이라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당신의 의도 배후에 존재하는 것이 손쉽게 잡아내기 힘든 무엇이라고 해서, 당신이 그것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존재는 존재다. 사회학 용어 사전에는 '추잡'이라는 어휘도 없을 거다. 사회는 현상이고, 실재다. 자. 내가 돈을 벌고 싶다. 내가 예쁜 여자를 사귀고 싶다. 순수할 것도 추잡할 것도 없다. 다만, 고민해 볼 수 있다. 왜 나는 예쁜 여자를 사랑하고 싶을까. 고민해보자. 이러한 고민에서 여러 사회적 관계들이 분석될 수도 있을 것이고, 심리학적인 모종의 근원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들을 긍정할 수 있으면 예쁜 여자를 찾아 떠나자. 그러한 것들이 부정된다면, 다시 한번 고민해보자. 그래도 좋을 수 있다. 또 정말로,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데 하필이면 그 여자가 예쁠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외모가 중요하지 않은 사회라면 예쁜 여자를 사랑하든 아니든 별다른 사회적 의미를 만들지 않을텐데. 그러면 굳이 '예쁘다'라는 의미가 사라지겠지만. 아무튼 이렇게 한계에 이르른다.
자. 이것이 당신의 한계이며, 세상의 본질이다. 당신은 조종당하고 있다.
이제 타개 난국이다. 새로울 것도 없이 미친듯이 반복되는 지저분한 당신의 세계에 '아싸라비라' 긍정하고 당신의 의미가 부여된 당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니체주의자가 되든지, 한계에 육신으로 부대끼며 어디 한번 해보자 하는 실존주의자가 되든지, 결국 문제는 구조에 있다고 고민하고 구조를 파고들며 구조를 베어내는 낫을 든 사회학주의자가 되든지, 영성의 문제에 매사를 환원하고 종교를 가지던지, 아니면 그래도 나는 할 수 없어, 하고 그냥 살아가던지. 그리고 이 글에선 전혀 그 암시가 되어 있지 않은 새로운 입장을 고민해 보던지. 마음대로. As you wish. Whatever, nevermind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떠한 입장을 가진다고 해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입장으로 실천한다고 해도, 실천은 실제를 바꿔내는 일이니까. 당신 마음대로 하자. 뭘 하든 그리고 잘 제대로 해 보자. 그러면 세상은 어찌되었건 지금보단 나아질 지도 모를 테니까.
그러니까. 결국 다시 사회학 만세다. 이거 아무래도 사회학 만세 3부작 같은 걸 쓰게 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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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베버 따라하기의 일환으로 사족 하나. 굳이 '사랑'의 문제를 제시했지만 그것은 그저 예시일 뿐. 보다 넓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굳이 '외모'를 집어냈지만 그것은 '능력'으로 대체되어도 좋고 성격으로 대체되어도 좋고. 아무래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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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둘. 혹시 사회학 전공하는 사람 없나요? 있으면 낭패.
병장 김강록 (2006/03/30 13:44:08)
이 사람, 발동 걸렸네.
병장 김대현 (2006/03/30 13:56:12)
이 글에 딸릴 희석님의 리플이 기대됩니다.
상병 안대섭 (2006/03/30 14:02:03)
으악 다 읽고나니 조회수 0. 선댓글 후감상 할것을! 두근두근.
한 10부까지 쓰시길 기대합니다.
요즘 책읽기가 벽에 부딪히는건 아닌가 싶었는데 이거 덩달아 탄력받네요.
상병 송희석 (2006/03/30 14:03:12)
대현/ 준비중인데, 그말을 들으니 갑자기 맥빠집니다.(웃음)
상병 송희석 (2006/03/30 14:16:02)
준비에 앞서 먼저 영준님께 양해를 구하며 잘 이해가 안되는부분을 질문드립니다.
1. 어떤 것이든 환원주의를 하는것이 '꼭' 나쁜것은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는지?
2. 사람의 내면의도는 결국 사회가 '조정'할수 있기 때문에 순수한 의도는 불가능하다! 라고 말씀하시는건지?
3. 마지막으로 타개난국이 결국은 뭘하든 '조정'당하는것은 알고 실천하면 결국 바뀔것이다! 라고 주장하시는건지?
답변 부탁드립니다. - 혹시나 오해할까봐 알려드리는데, 정말 이해가 잘 안되서 물어봅니다.
병장 이상준 (2006/03/30 14:23:26)
영준님이 글을 이렇게도 쓰시는군요. 이런 내용을 담은 책이 있다면 당장 사서 보고 싶을 정도인데요.
병장 주영준 (2006/03/30 15:40:51)
에에. 희석/
1. 윽. 희석씨의 질문이 잘 이해가 안 됩니다. 환원주의에 대한 입장을 묻는 것이라면, 본문 앞부분에 밝힌 정도입니다. 상식 선보다 래디컬할 것도, 반대의 것도 없는 수준의 입장, 이 제 입장입니다. (물론 중립적 입장보다는 약간 더 거대설화적이고 경제환원론적인 입장에 치우쳐 있기는 하지만요)
2. 모든 의도는 순수한 의도가 아니기에(부분 부정이 아니라 전체 부정입니다), 순수한 의도/추잡한 의도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전 글과 이 글, 그리고 저의 기본 입장입니다.
3. 허원영적 레토릭에 가깝달까요. 알고 실천함, 은 변혁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인 것은 확실합니다.
상준 / 글에 따라 스타일을 바꾸는 것을 즐기는 편이에요. 그리고 혹 이러한 부분들에 관심이 있으시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수준'의 사회학 개론서나 여성학 개론서를 추천할께요. 으음. 정확한 책 제목은.......[먼산] 조만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병장 김동환 (2006/03/30 15:41:10)
스피디한 문체를 따라 일독을 무사히 끝낸 지금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의외로)무척 친절하시다는 생각.
연재물의 형식이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
친절한 영준씨가 간단한 사회학칼럼을 계속 연재해주면 꽤 많은 사람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즐거워하겠다는 생각.
생각해보니까 실천은 실제를 바꿔내는 일이니까. 영준씨또한 미괄식 글을 맺으며
뭘 하든 그리고 잘 제대로 해 보자고 했으니까..뭐. 영준씨 또한 연재에 긍정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오호라. 여러분. 제 논법에 오류 있습니까?(먼산)
상병 최태욱 (2006/03/30 16:09:09)
잘 읽었습니다.(웃음)
동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사회학 칼럼을 연재하신다면
애독하도록 하겠습니다!(압박 압박)
상병 송희석 (2006/03/30 18:46:29)
영준/ 제가 글을 잘 이해 못했나봐요!
[나는 '사랑'이라는 것을 어떤 영적인, 신비로운 차원에서 분석하는 것보다 소위 '사회학적 관점'이라는 곳에서 바라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은 영적이고 신비로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심리학적인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회생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다만 호르몬의 분비'와 관련된 생물학적인 현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시각은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중에 특히 사회학적 관점을 택해보고 싶은 것이다. 나는 그것이 사랑을 더 잘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요부분에서 저는 환원주의가 필요하다 라고 해석을 했거든요! 왜냐하면 일단 사랑이라는 추상적 의미를 여러가지로 해석할수 있지만 나는 사회학도이므로 사회학적으로 해석을 하겠다 라는 환원주의 아닌 환원주의로 보여졌답니다. 물론 저만의 독해능력이기 때문에, 분명 틀릴수 있으므로, 틀렸다고 생각하고, 일단 저의 견해를 말씀드려보겠습니다. 그전에 길이 길어져 다음답글로 남겨보겠습니다.
상병 송희석 (2006/03/30 19:20:28)
영준// 일단 저역시 환원주의를 경멸합니다. 이것은 이미 영준님께서 첫단락에서 이미 설명한 부분이므로 넘어가고, 영준님이 말씀하신 두 번째 단락중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경제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분석해 보는 것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라는 의미에 대한 해석은 조금 의아해 집니다. 결국 그것또한 스스로 해석을 국한시켜버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랑’을 사회학적 관점으로 바라보는것이 결코 나쁘지는 않습니다. 심리학적이나, 인문학적이나, 생물학적이든 간에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새로운 시각이 나올수는 있습니다. 그 시각으로 인해 다른 학문과는 다른 새로운 무한계에 도전할수 있습니다. 허나 여기서 영준님은 사회학적 해석의 ‘한계’를 언급하셨습니다. 적합성을 가질수 있는 수위까지는 사회학적 분석으로 접근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과연 그럴 필요가 있는지 전 되묻고 싶습니다. 오히려 수위가 정해져 있는 부분이라면 결국 ‘한계’가 있는 법이고, 그 ‘한계’를 가진 것으로 해석을 한다면 해석역시 ‘한계점’이라는것에 부딪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제아무리 칼을 내밀어도목끝까지 갈수없는 짧은 단검이 된다고 판단합니다.
조금 깊은 논의를 하자면, 영준님이 언급한,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라는 문장은 저같은 녀석이 해석하기에 “제아무리 우리가 이성적인 판단을 해도 ‘존재’앞에서는 이성적인 판단을 못한다.”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걸 좀 비꼬자면,“너가 말하는 말이나 혹은 글들은 이미 이즘앞에서 무의미하다.”라고 말할수도 있답니다.
결국 구조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 물론 이것도 저의 독해능력으로 생긴 느낌입니다. 이걸 예로드신 병장과 군대 구조라는 틀속에 빠져 결국 어떠한 행동을 하든 병장은 병장이다! 라고 주장하시는듯 보이지만, 이것또한 위에서 언급한 명제수준이라 생각합니다. 일단 저의 기본적인 명제 - 의식이 존재를 규정한다. 단, 의식을 강하게 내비치기 힘든 존재도 있다. 내비치든 안내비치든 의식으로 존재를 규정하는것은 결국 개인 자유이다! - 바탕으로 의식자체는 자유로와서, 이미 존재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아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강하게 옳고-그름을 따질만한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용기!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조정’당하고 있다고 착각을 할수도 있답니다.
자! 이제 사랑으로 넘어가서, 내가 저 여자를 왜 사랑하나? 라고 물을때, 이미 우리는 의식적으로 대답할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 넌 가슴이 커!, 넌 키가 커!, 넌 예뻐!, 넌 귀여워!, 넌 내말 잘들어!, 넌 날 화나게 해!등등 - 말하지 못하고 결국 “그냥 사랑하니까!”라는 단순한 표현만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것도 결국 ‘한계’는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다양하게 자신의 마음을 계속적으로 추궁해야 합니다. 추궁해서 나온 ‘양심’을 가지고 개개인이 용기를 갖고 ‘실천’한다면 그 실천이 이제 ‘실제’가 될수 있기 때문이죠!
오늘 여기까지 저의 견해를 마치겠습니다. 영준님! 정말 잘 읽었습니다. 제글은 영준님만을 위한 글이기 때문에 꽤 어렵게 쓰여졌거나, 굉장히 쉽게 쓰여질수 있습니다. 뭐 판단은 영준님이 하시는거고!(웃음)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상병 조주현 (2006/03/30 20:26:36)
제게 꼭 필요한 그것이로군요.
여기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학생이 있습니다.
다음 수업을 기다리는 학생이 말이죠.
…교육학과시잖아요…히죽
병장 주영준 (2006/03/31 08:07:55)
희석 / 어떠한 현상 배후에 존재하는 동인을 찾으려는 모든 시도를 환원주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테면 '너가 이러이렇게 하는 이유는 이러저러한 (복잡다양한 관점과 논리의 이유) 때문이야' 라고 하는 것은 환원주의가 되지 못하죠. 환원주의는 본문 첫 문장에서 밝힌 대로 '모든 사건의 원인을 특정한 한 가지로 상정하고 현상을 탐구하려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어떤 행동을 100% 경제학적 관점에서 해석하려고 한다거나 심리학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환원주의가 되는 것이죠. 그런 차원에서 제 입장이 '사회학적 환원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읽히는 것은, 조금 무리한 읽힘이 아닐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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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이파리에 대한 답은 조금 있다가
병장 주영준 (2006/03/31 15:40:20)
희석 2 / 한계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기존의 사랑논의가 사랑의 '신비함'을 강조하는 편향으로 지나치게 흘러가는 데 대한 반편향적인 차원에서 제시한 이야기이자, 사회학적인 기본 관점을 지지하는 차원에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물론 어떤 분파의 사회학은 환원주의적 시각을 굉장히 강조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사회학이라고 해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그보다 좀더 넓은 차원에서(사회학주의의 사회학이 아닌, 일반적인 용어에서의 사회학) '한계'를 이야기한 것이구요. 만학의 제왕이라는 사회학의 오만한 성격과 관련된 강조이기도 합니다. (나, 사회학은 한계를 인정한다. 우헤헤. 왜냐면 나는 그런 한계선들의 교차로 이루어진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입니다)
그리고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의 의미는 본문에서도 밝혔듯이 그 문장이 존재하는 맥락-독일계 유태인 칼 M의 사회학 전반-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굳이 예를 들 필요가 없었던 발레리의 유사한 문장을 끄집어낸 것도 이러한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구요. 이 부분에서 희석씨의 다른 해석-오해, 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이 존재한 것 같습니다. 저는 이로부터 의식이 존재에 선행하는 상황을 미래에 올 무엇으로 상정하지도 않습니다. 의식이 존재에 선행해야 하는데, 실제로 현재의 우리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전락(이든 기투성, 이든 필연의 왕국이든)'상황에 있는 것이다, 식의 어느 정도의 당위와 주장을 담은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 상황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 글은 의식으로 존재를 밝혀보아야 한다는 방향으로 진행되구요. 용기를 통한 헤겔적 반전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칼M식의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의 왕국으로'의 이행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상병 송희석 (2006/03/31 15:41:35)
영준/ 멋진 답글입니다. 역시나 또한번 한수 배우고 갑니다. 일단 사회학 - 솔직히 전 기든슨이 누구인지 정도만 알정도 수준 - 을 깊게 공부해야 할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글을 읽을때 독해력이 딸려서 대화가 제대로 못나눈것 같습니다. 일단 독해력부터 공부좀 하고 난후, 추후에 시간이 나면 술한잔 하면서 - 물론 술은 제가 삽니다. - 대화를 하길 원하는 바입니다.(아 왜 내일 못나오시는건지 심히 안타까움을 금치 못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제가 한수 가르쳐줄 날을 기다리며, 글을 마칩니다.(음하하하하!)
병장 정치훈 (2006/04/30 11:51:48)
주영준병장님의 편협한 시각에 치중하지 않고 문제를 보는 관점, 그러면서도 적절한 배율의 현미경을 대는 세심함, 사회학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 자신과 대중을 일체화 시키는 문체와 사랑에 빠질 것 같네요.
병장 주영준 (2006/04/30 15:06:13)
치훈씨에게 무엇보다 감사하는 건, 개인적으로 3부작 중 가장 심혈을 기울여 썼고 가장 잘 썼다고 스스로 평가한 2부에 좋은 평가를 내려 주셨다는 겁니다. 이런, 다른 두 글에 대해 달아주신 이파리에 성심껏 답변하는 것 밖에는 그에 대한 보답을 할 수 있는 길이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