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버릇 
 
 
 
 
토요일 합천에서 후배가 왔다.
봄에 술집동업을 한다고 잘 다니던 건설 회사를 때려치우고 부산으로 가더니 거의 3달 만에 불쑥 찾아온 것이다 그동안 동업을 하기 위해 구상하던 사업이 엎어 졌다고 한다.
내 진작 그럴 거라 짐작했다. 처음부터 그 동업자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란 사실이 몹시도 마음에 걸리더니 그리고 생면부지의 사람을 둘씩이나 끼고 4명이서 술집을 동업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왜 이 녀석만 모르는지 참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워낙 낙천적인 성격인지라 엎어진 사업에 대한 미련도 많이 식은 듯 해 보였다. 사실 마음 맞는 사람끼리 작은 술집을 해보자는 것은 우리의 로망이었다.
여름밤 밤늦도록 맥주를 마시며 벌써 서로의 포지션 까지 다 정해 놓았고 안주는 무엇으로 할 건지도 다 정해 놓았다. 우리의 로망은 여름한철 화끈하게 장사해서 가을, 겨울, 봄은 놀러 다니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후배도 위로할 겸 정말 오랜만에 술판을 벌이기로 했다. 
초저녁 대형마트에 가서 오징어와 쥐포를 사고 새우도 사고 과일도 사고 수제 소세지도 사고 술도 샀다.
그리고 저녁도 건너뛰고 맥주를 마시면서 불을 지폈다. 
‘오늘 컨셉은 같이 죽는 거다’
‘아 몰라. 내일 집에 가야되는데’
‘일어날 수 있으면 가 보시던지..’

연락이 없던 3달 동안 얼마나 속을 끓였던지 후배는 할 말이 많았다는 듯 사업의 어려움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풀어 놓았다. 
‘근데 영미 술버릇은 고쳤냐?. 너 그 술버릇가지고 장사하면 애로사항 많을텐데?’
‘예? 제가 무슨 술버릇이 있어요. 술 취하면 자는데 나만큼 얌전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
‘얼씨구 얘 좀 봐라. 영주야 네가 좀 읊어줘라’

언젠가 합천에서 술을 먹고 나오는 길이었는데 이 녀석은 초저녁부터 생고기와 곁들여 마신 소주가 과해서 거의 혼절해 있었다. 원래 영미의 술버릇은 숙취성 혼절형으로 술자리에서 자기도 하지만 화장실 간다고 나가서 술집 앞 계단에 앉아서 자기도 하고 집에 간다고 해서 보내놓고 다음날 연락받으면 주로 밖에서 잤다고 얘기를 해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택시를 태워 보내도 중간에 내리기 때문에 안심을 할 수가 없어 따라가서 집안에 들어가는 걸 확인해야 하는데 술 깬다고 공원 벤취에 드러누웠다가 아침에 일어나기도 하고 차에 잠깐 눈 붙인다고 누웠다가 밤새도록 모기에게 뜯기면서 일어나기도 한다. 그나마 적당히 먹은 날은 중간에 깨어나서 무사히 귀가하기도 하지만 노래방에 가서 2시간동안 난리법석을 떨며 시끄럽게 놀다가 이제 집에 가자며 깨우면 왜 금방 가냐며 그때부터 자기도 노래한다고 고집을 부려 사람 속을 썩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날은 또 새로운 행태를 선보여 우리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는데 한참 어두운 시골길을 달리는데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해서 차를 세우고 조금 떨어진 밭으로 들어가는 듯 했는데 갑자기 후다닥하며 얘가 뛰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깜짝 놀라 이름을 부르며 쫓아갔는데 거짓말안하고 칠흙같이 어두운 논길을 2Km가까이 땀을 삐질 거리며 달려 겨우 잡을 수가 있었다. 나중에 차로 끌고 와서 보니 넘어지고 부딪혀서 무릎이 엉망으로 까졌고 우리도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늦은 밤 시골길이었기 망정이지 큰 사고가 날 뻔했던 일로 지금도 우리의 인구에 회자되는 대형사건이었다.

‘이래도 니 술버릇이 얌전하냐?’
‘아이 정말 딱 한번 그런 거 가지고 되게 우려먹네’
‘야야 그때 우리가 얼마나 시껍했으면 너랑 술 안 마신다고 결의까지 했다.’
‘미안해요 진짜. 근데 영주 얘 술버릇도 만만치 않잖아요’
‘어어. 왜 또 나를 걸고 넘어지시나. 내가 뭐. 나만큼 반듯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어 그래 반듯하지. 지나치게 반듯해서 문제지’

영주는 우리가 일명 정의의 사자, 정의 용사라 부르는 형으로 술에 취하면 취할수록 꼿꼿해 지는 형이다. 평소마음에 안 드는 점을 가슴 깊이 담아두었다가 술이 적당히 오르면 일장훈시가 시작되는데 이때 반박을 하거나 짜증을 내면 분위기 험악해지고 아래위가 뒤집힌다. 틀린 말이 아니라 뭐라 할 말은 없지만 나이 먹어 후배에 게 일장연설 듣는 기분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로 모를 일이다. 게다가 조금 더 꼿꼿해지면 이때부터 긴장모드로 들어가게 된다. 맛없는 안주가 나오면 주방장에게 잔소리하고 간혹 분위기보고 합석하자고 덤비는 남자들에게 철퇴를 가하기도 한다. 꼭 뭐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이 연로하신 선배 작업전선에는 무지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으하하 재밌다. 창숙이는 어때?

이 자리에 없는 창숙이를 들먹여서 조금 미안하지만 이 친구 포스가 또 만만치 않다. 체육대를 졸업해서 골격 구조로만 보면 남자 부럽지 않고 섬진강을 거뜬히 도하하고 가야산이나 황매산을 동네 뒷산 오르듯이 날아다니며 얼마 전에는 전국 여자 씨름대회에서 2등을 했다. 1등을 못한 이유는 절대로 실력이나 체력이 딸려서가 아니라 전날 저녁 상한 고기를 먹고 식중독을 만나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리느라 다리에 힘이 빠져서 이다. 그때 우리는 난생 처음 씨름판으로 응원을 갔었다. 어렸을 때는 나무 작대기 하나들고 산속으로 뱀을 잡으러 다니거나 칡을 캐다 장이 서는 날 돈으로 바꿔 과자를 사 먹기도 했던 그런 친구다.

‘말도 마세요 얘는 진짜 조심해야 돼 얘 땜에 경찰서에 간 게 몇 번이야. 얘가 평소 잘해서 지역유지라 그렇지 안 그럼 벌써 별 몇 개 달고 벌금 꽤나 물었을 꺼 예요’

이 증상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뺑소니차에 치어 돌아가시고 사립학교에 체육교사로 들어가기로 했다가 기부금으로 2천만원을 달라고 하는 바람에 단칼에 거절한 뒤 생긴 술버릇이다. 주로 공권력에 도전하는 형으로 술이 꽤 취하면 길가에 일렬로 주차된 경찰 자동차 지붕 위를 기어 올라가서 구르는데 차 찌그러질까봐 전전긍긍하다 간신히 끌어내리면 길가에 파출소 앞에 놓인 간판을 발로차서 당직 중이던 경찰이 뛰어나오고 파출소 안에서도 한참 후배인 이파리 하나에게 일장 연설을 하다가 강제 귀가조치 당하기도 한다. 좁은 동네라 모두 얼굴도 알고 사연도 알기 망정이지 참 낭패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창숙이가 없는 자리에서 사회가 아까운 인재하나 잃었다고 얘기를 하기도 하지만 이 녀석의 가슴에 응어리진 것이 하루 빨리 풀리기를 바란다.

‘아 술 버릇하면 최후배를 빼놓을 수 없겠다.
최후배의 이름은 최 영미로 이 영미와 헤깔리기 때문에 우리가 최후배라 부르기로 한 것이다. 이 친구는 얌전해 보이는 얼굴에 소심형으로 큰 술버릇은 없는데 맥주 두병에도 필름이 끊긴다는 데 문제가 있다. 골치 아픈점은 꼭 필름이 끊긴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려는 집요한 형으로 주변사람들 증언을 참고해서 기억을 재편집해야 하기 때문에 가끔 우리가 장난으로 하지도 않은 일을 일러줘서 쓸데없는 죄책감으로 시달리기도 한다. 그러다 평소 싫어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도 있다고 놀리기도 하는데 전문가 의견은 간이 알콜 해독작용을 하는 효소를 전혀 배출을 못 하거나 알콜 중독 초기 증상일수도 있다고 한다. 

‘선배는 어떤지 아세요?’
‘나? 난 술버릇 없다.’
‘에이... 왜 이러실까’

나도 술버릇이 있다.
처음에 그건 술버릇이 아니라고 인정하지 않았지만 결국 술버릇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나의 주량이 어디쯤인지는 알고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그 주량을 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다. 소주 세잔 이상, 맥주 한 병, 소맥 폭탄주 1잔이 넘으면 이 술버릇이 시작된다.
이때는 안면근육 부분마비증세로 나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웃게 되는 미소 속에 비친 그대 형으로 특별한 이유 없이 실실 쪼개게 되는데 큰소리로 웃기보다 주로 입 꼬리가 올라가는 형으로 알코올기가 허파로 들어가서 생기는 현상이다 문제는 상대방이 여자이면 짜증을 내고 남자일 경우는 이 여자 나에게 관심 있구나 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끔 헤픈 스타일로 변한다는 것이다. 결코 본의는 아니다. 지금은 무척 조심하기도 하고 또 남자들과 술을 마시는 일이 드물어 졌지만 소시적에 이 술버릇 때문에 이상한 인간관계 형성한 적도 몇 번 있다. 내가 저를 좋아하는 줄 알고 후배에게 다음날 심각하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고 이상한 선배하나에게 나도 너 좋아한다는 고백을 들은 적도 있고 남자친구와 술좌석에서 동석했다가 대판 싸운 적도 있다. 그렇지만 정말정말 본의가 아니었다고 이 자리를 빌어 말씀드리고 싶다. 그러게 술 취해서 하는 말은 본심이 아니란 말이 있지 않나. 그렇지만 나를 잘 아는 후배들은 조금만 먹고도 그렇게 행복해하는 내가 귀업다고도 한다.(헤헤)

‘근데 진짜 싫은 유형이 뭔지 알아요?’
“뭔데?‘
‘왜 있잖아요 180도 달라지는 심봉사 눈뜨는 형. 평소 때는 얌전한 척하다가 나이트만 가면 옷 벗어던지고 노래방에서 지가 무슨 이효리 라고 탁자위에서 기어 다니며 갖은 요사를 다 떠는 형이요. 그러다 평소 때는 조신한척 아우 재수 없어요’
‘아이구 우는 얘들은 어떻구. 무슨 상가집 아르바이생이냐 왜 그렇게 청승스럽게 우는지. 왜 우냐고 물어보면 이유도 없어요 어떤 때는 옆에 있는 사람이 죽었다고 하다가 또 지가 죽었다고 하다가 집에 강아지가 죽었다고 하다가 10년 전에 죽은 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하다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만들고 있어요..
‘진짜 캡은 뭔지 아냐?’
‘뭔데요?’
‘리플레이형!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악! 머리 쥐나요 고만 하세요’

술자리에서 술주정 심한 사람 뒤치닥거리만 한다면 또 얼마나 짜증이 날까. 
그런데 좋은 술버릇이란 무엇일까. 

TV에서 중계해주는 월드컵을 보며 웃고 떠들었다. 늙었다고 구박하던 지단이 동생이란 사실에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베컴 팬과 오웬 팬이 한판 붙고 실력이야 어떻든 억세게 운 좋은 안정환이 나오면 마음이 놓인다는 이야기도 하고 포르투칼이 20년 만에 16강에 오른 얘기도 하고 토고응원단이 불법체류 할까봐 입국거부를 했다는 독일을 비난도 했다가 올림픽 때 선수촌에서 사라졌던 나라 얘기도 하면서 지금 그 사람들 어떻게 됐을까 쓸데없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상병 박진욱 (2006/06/20 11:38:57)

선리플 후감상. 

... 이지만 지단이 동생이신가요 (덜덜)    
 
 
병장 이인권 (2006/06/20 11:42:37)

지단의 누나... 털썩...    
 
 
병장 김영갑 (2006/06/20 11:45:27)

술버릇이라...참 즐거우면서도 끔찍한 이야기인듯..    
 
 
병장 정치훈 (2006/06/20 11:56:31)

악! 안읽으려고 했는데 제목만 보고 들어와버렸다.    
 
 
병장 고계영 (2006/06/20 12:58:14)

갑자기 술이 먹고 싶어지네요..흠. 좋은 글 감사합니다. 지단 누님이시라.. 흠.    
 
 
병장 한상원 (2006/06/20 13:02:37)

하지연-하지단 남매인가요-(퍽퍽퍽퍽) ...죄송합니다.(꾸벅) 
늘 그렇지만 잘 읽었어요. 저는 '그때 그때 달라요 형인거 같아요. 큭큭    
 
 
 병장 김동환 (2006/06/20 13:31:14)

저도 아무데서나 자는데. 깊이.(땀)    
 
 
상병 조주현 (2006/06/20 16:03:33)

합천?! 럴수가    
 
 
상병 이영준 (2006/06/20 16:06:03)

저는 아무데서나는 안자고. 일단 최대한 빨리 집으로(혹은 숙면을 취할 수 있는 곳으로) 갑니다. 
그전에, 전화기를 붙들고 이곳, 저곳에 전화를 하지요.    
 
 
병장 이은호 (2006/06/20 20:47:24)

놀라움 입니다.    
 
 
병장 박시용 (2006/06/21 08:30:29)

지..지단.. 털썩..    
 
 
병장 차준호 (2006/06/21 09:07:46)

실없이 웃는건 저와 비슷하군요. 
주변분들에게 어떻게 오해를 사셨을지 무척 동감입니다.(웃음) 
저는 그뿐아니라 술에 몸을 맡기게 되면 평소엔 쓰지도 않는 영어로 말한답니다. 
물론.. 
말도 안되는 영어라 창피하기만 하군요.(웃음)    
 
 
병장 백현기 (2006/06/21 15:50:41)

지단 머... 그래봐야 30대 초반인걸..    
 
 
일병 김태균 (2006/06/21 19:03:58)

지단의 재발견    
 
 
상병 이벌찬 (2006/06/22 04:40:06)

발견발견..발견..(메아리)    
 
 
 상병 김용현 (2006/06/22 07:43:43)

저는 헐크가 된다는..(땀) 
'나를 화나게 하지 않는게 좋을껄?'    
 
 
상병 이준요한 (2006/06/23 09:08:18)

수작이십니다    
 
 
병장 이동일 (2006/06/27 16:50:38)

지이다안~    
 
 
상병 이두한 (2006/06/27 23:56:33)

술버릇이 무서운것이죠..    
 
 
병장 이종환 (2006/06/28 16:03:36)

재미있네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