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써둔 사소한 소설. '속죄' 2006-09-23 16:13:09 
 
병장 이영기 
 http://22.49.3.1/home/?article_srl=9330 

한가로운 하오의 햇살이 질끈 감은 두 눈 위로 흔들렸다. 사내의 눈꺼풀 안을 붉게 물들인 햇빛은 다시금 흩어져 흐르는 강물을 반짝였다. 조심스레 불어온 바람에 임진의 강물이 조금 출렁였다. 너른 강 가운데에 물결 따라, 햇살 따라 흐르는 거룻배에 홀로 앉은 초췌한 복색의 사내는 나른한 오수에 빠져있었다. 부딪혀 오는 강물에 출렁, 거리는 거룻배의 움직임은 도리어 잠을 부르는 자장가와 같았다. 언제까지고 깨지 않을 듯 깊이 잠든 사내는 그러나 왜인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깊은 고뇌와 고통에 시달리고 흩날려 풍화된 얼굴을 하고는. 그러나 그런 사내에는 관심도 주지 않은 채, 늙은 사공은 그저 상앗대를 강바닥에 꽂고 미는 단순한 동작만을 반복할 따름이었다. 무심한 햇살과 무심한 물결과 무심한 사공 가운데에서 고통의 나른함으로 잠든 사내를 흐르는 바람은 지켜보고, 서쪽으로 사라져갔다. 
 이순은 족히 되지 않았을까. 상앗대를 쥔 주름지고 갈라진 사공의 손을 또 다른 바람이 스쳐갔다. 북녘에서 불어오는 삭풍의 새끼리라. 사공은 삭풍을 싫어했다. 차가운 대지의 기운이 섞인 광막풍이 북에서 불어올 때면 사공의 표정은 여지없이 굳어졌다. 곧, 가을이 지나가겠지. 삭풍을 느낀 늙은 사공의 몸짓은 여전히 고요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조금 신경질적으로 바뀌었다. 사공에게서 차가운 쇳내를 맡은 아직 어린 삭풍은 거룻배에서 떨어져 남으로 달아났다. 삭풍이 사라지자 어느새 사공의 상앗질이 다시 차분해졌다. 
 오직 사공과 상앗대만 고요히 저어지며 때로는 흐름에 따라, 간혹은 흐름에 거슬러 거룻배는 나아갔다. 강을 거슬러 물살을 따르지 않을 때면 거룻배가 휘청 흔들렸지만 사내는 그때마다 눈꺼풀만 조금 떨고는 깨어나지 않고 깊이 잠든 채로 물길을 흘러갔다. 
 
 몇 번인가, 귓전을 타고 고요한 소음이 스며들었다. 잠기운에 지친 머리는 그 소음을 아직 자신을 부르는 소리라 알지 못했다.  
 “내리지 않으실 거요?”
 좀 더 명확히 들려온 재촉에 어설피 깃든 잠기운이 설핏 흔들렸다. 잔잔히 흔들리던 배에 따라 어느새 잠이 들었던 건가. 사내는 언제 잠이 든 것인지, 기억하질 못했다. 
 “다 왔소이다. 내리시구려.”
 왠지 불만감이 가득한 듯한 목소리. 무엇이 불만인지 건너는 동안 내내 한마디 말도 없이 마뜩찮은 표정을 짓고 배만 다루더니 아직도 마음이 안 풀린 것일까. 사공은 태어날 적부터 그랬었을 듯한 완고하게 찌푸린 얼굴을 하고는 흔들리는 뱃전 끝이 평지인양 꼿꼿이 서서 이쪽을 바라본다. 
 사공의 어깨 너머로 나루가 보였다. 노인 두엇이 버드나무 아래서 장기를 두다 말고 물끄러미 사내를 보았다. 어디에도 마을도, 집도 보이지 않건만. 사내도 노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날씨가 꽤 쌀쌀해 졌는데도 무얼 기다리느라 강가 나루터까지 나와 있는 것이려나. 
 “........내리지 아니하실 것이면 다시 돌아가오리까?”
 농지거리에 불만이 섞여든 말일 터이나 사내는 예사롭게 넘기지 못했다. 갈등에 잠긴 사내를 다시 못 마땅히 보던 늙은 사공의 입술이 조금 비틀릴 즈음에서야 사내의 입이 열렸다. 
 “그럽시오. 다시 남 쪽 나루로 돌아가 주옵시오.”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을 줄 알았건만. 늙은 사공은 그냥 무심히 사내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무 이유도 묻지 않았다. 아예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돌아서서 뱃꽁지 위에 감긴 새끼줄만 풀어 뱃머리만 남쪽으로 돌렸다. 사공이 남으로 뱃머리를 돌리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둘 사이에선 말이 사라졌다. 나처럼 하릴없는 사람이 평소 많은 건가. 무어, 모를 일이다. 원하는 대로 되었음에도 사내는 왜인지 다시 뜻 모를 갈등에 잠겼다. 자면서도 신산에 젖은 내색을 비추던 사내의 얼굴은 깨어서도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뭐하시오, 내리시지 않고.”
 어느새 황포를 다 갈무리한 사공이 이번엔 사내 앞에 다가와 다시 말을 붙였다. 아니, 말을 붙였다기보다는 던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대답도 듣지 않고 다시 돌아서 버렸으니. 나루에 고물을 향하게 한 사공은 풀쳐낸 새끼의 한 끝을 잡고는 강어귀로 뛰어 내렸다. 사내의 말은 아예 듣지도 않았다는 오불관언한 태도. 오랜 세월 홀로 강 위에서 바람을 견뎌낸 사람다운 완고한 태도라고 해야 할 것이려나..... 
 이런 저런 생각에 사내가 빠져 있는 동안 사공은 하오 내내 물 위를 같이 걸어온 길다란 상앗대를 부여잡아 배 위로 끌어올렸다. 한자, 두자, 석자. 고작해야 열자 남짓할 것 같던 상앗대는 스무 자도 넘게 긴 제 모습을 물 밖으로 드러냈다. 휘청거리는 약한 모습도 물 위로 드러난 부분 뿐, 상앗대는 탄탄하고도 질겨 보이는 젖은 나신을 햇볕 아래 과시했다. 상앗대를 끌어올리는 사공의 걷은 소매로 탄탄한 팔뚝이 검게 드러나 보였다. 
 왠지 부럽고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것을 사내는 지울 수 없었다. 한갓 뱃사공마저 저리 당당하게 살건만, 나는 왜 이리 고뇌에 잠겨 있는 건가. 문득 사공의 뒤로 동편으로 널리 내달려 펼쳐진 임진강과 언저리 마을들이 한 눈에 들어와 보였다. 너른 강어귀마다 흩어진 언덕배기와 나루터. 아직 낙조가 멀다는 듯 활기차게 움직이는 강변의 사람들. 강, 그리고 강역(江域), 강역(疆域). 
 어디선가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가 아니라 수십, 수백에 달하는 진동으로 달려드는 소리가 사내의 귀를 찢듯이 울렸다. 멀리 눈 닿는 지평 끝에서 이리로 내닫는 기백의 야수들, 쇳내 나도록 날카로운 그들의 이빨이 사내의 눈가를 선연히 비췄다. 온몸이 산산이 발기어질 거대한 돌진 앞에서 사내는 도리어 눈을 감아버렸다. 강철의 몸도 부서질 진동이 두려운 건 아니었다. 사내의 얼굴 위로 선연히 떠오른 것은 오히려 공포가 아닌 고통이었다. 
 버혀진 강역. 그 때, 그 때는, 그랬다. 
 허망한 공상에 잠긴 것도 잠시 뿐, 힘겹게 눈꺼풀을 든 사내의 눈에 다시 임진의 물과 바람이 비췄다. 지축을 울리며 달려오는 그들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십년의 방랑은 기억의 공황을 쉽게 떨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사내의 눈가로 물색 안개가 비췄다. 바람이 이제 아마도 차가워지는 모양이지. 눈가를 세게 문지르며 사내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을 닦아낸 사내의 눈에, 이번엔 상앗대와 노를 배에 다 묶고는 손을 털고 일어서는 사공의 모습이 비쳤다. 늙은 사공은 아무래도 다시 돌아가지 않을 듯했다. 더 이상 사내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아 보였다. 결국 사내가 침묵을 먼저 깨고 사공에게 말을 걸었다. 
 “... 다시.. 돌아간다 하잖았소” 
 배를 묶은 말뚝 앞에 막 일어선 사공이 사내를 응시했다. 무관심한 표정으로, 사공이 말을 이었다. 
 “마음대로 하시구려. 난 오늘 일 접을라오. 밤새 앉아 계시려든 그렇게 하오. 난 상관없으니.”
 무심한 사공의 말에 왠지 벋대고 싶은 홧기가 울컥 솟구쳤다. 퉁명스레 사내가 대꾸했다. 
 “그렇소? 난 그럼 그냥 여기 앉아서 밤을 나겠소.” 
 말을 내뱉은 순간 후회감이 몰려왔다. 철부지처럼 뭐하는 짓인지. 고작 늙은이의 주책일 뿐이지 않은가. 공연히 나이 먹어 말실수나 한 게지.... 사내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니나 다를까 내내 무심한 표정만 짓던 사공이 사내의 말을 듣더니 실쭉해진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돌연 홱 돌아서 뱃전에 얹힌 봇짐을 성큼 메어 챙기는 풍이 정말로 사내를 놓고 내릴 기세다. 이미 내리지 않겠다고 말한 사내는, 당황스런 표정으로 사공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공은 훌쩍 뛰어 포구에 발을 디뎠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사내가 사공에게 소리쳤다. 
 “배 삯을 더 많이 쳐 주겠소. 해도 아직 온전하잖소. 돌아갑시다.”
 그러나 사공은 이미 사내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휘적휘적 길을 짚어나간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젠 할 수 없이 내려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동쪽으로 따라 올라 다시 거룻배를 잡아야 할런지.... 뱃전에 힘없이 걸터앉은 사내는 어찌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앞으로의 행보를 고민하는 찰나에 돌연 사공의 말소리가 들렸다. 
 “호란 끝난지 십년이 지났건만. 정처 없이 떠도는 이들은 여전히 많더이다.”
 늙은 사공은 주름진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노에서는 여전히 삭풍이 불어오건만, 그때나 지금이나 바람 맞길 싫어하는 이들은 여적 제 자릴 찾지 못하는구만.”
 정신이 확 들었다. 내내 고뇌와 번민으로만 채색됐던 사내의 얼굴에 이번엔 당황의 색조가 물들어갔다. 
 사공은 그러나 사내의 반응에는 관심 없다는 듯 무심히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이 마침 요 앞마을에 장시가 서는 날이외다. 내 이리 강 노 쪽에 머물게 될 때면 자주 가는 술막이 하나 있다오. 갈 곳 찾지 못해 방황하는 당신만 괜찮다면 내가 탁주라도 한잔 건넬까 하는데.“ 
 그 말을 끝낸 사공은, 사내야 오건 말건 상관없다는 식으로 다시 젖은 발을 옮겼다. 늙은 사공의 말에 놀란 것인지, 사라지는 사공의 뒷모습만을 멀거니 바라보던 사내는 곧이어 사공의 뒤를 따라 걸음을 나섰다. 

 주막의 방은 좁지만 둘이 밤을 지새우기엔 충분히 안온했다. 서쪽을 향하고 서있는 건너채의 방이라 장지문 너머로 혼모의 늙은 햇살이 누렇게 내비쳤다. 사내의 맞은 편 벽에 기대어 사공은 막걸리 잔을 다시 입에 대었다. 주막에 들자마자 부엌을 부비고 들어간 사공은 꼭 제 것인 양 한 동이의 탁주와 두 개의 사발을 걸머쥐고 방에 돌아왔다. 늙은 사공은 자리를 펴고 앉아서는 사내에게 술을 청하지도 않고 혼자 거듭 사발을 들이켰다. 술을 청한 건 아니었지만, 멋쩍게 된 사내는 벽에 느슨하게 기대여 누운 채로 말없이 닫힌 장지 틈으로 시장을 바라보았다. 
 장돌뱅이가 빠져나간 저녁의 장은, 그러나 조용히 쉬기에는 여전히 소란했다. 장돌림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앉아 하루치 벌이를 깜냥껏 헤아리거나 노냥 술이나 퍼마시며 지새는 주막의 밤은 더욱이 번잡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초저녁임에도 닫힌 문틈 사이로 새어드는 우풍 속에는 장꾼들의 얼큰한 고함과 거나한 탁주에 젖어든 술주정이 흥건히 녹아있었다. 때로는 주정과 폭언에 눈살 찌푸려질 지라도 본연은 흐뭇한 생기와 활력이 저잣거리의 본색이다. 그런 활기찬 소리를 듣는 사내의 얼굴은 그럼에도 여전히 고통스러운 표정 그대로였다. 
 그날도 이리 소잡했더니. 이리도 소란한 날이면 생각지 않으려 해도 그때 그날의 기억은 스스로 떠올랐다. 용천에서 의주를 향하는 대로 언저리의 고갯마루에서 그들 열한명은 땀에 젖은 얼굴과 지저분한 옷차림으로 그리도 흥분해 있었다. 이미 무너진 흙더미를 성벽이라 믿고 한 치 한 푼이라도 더 솟은 흙더미를 망루라 여겨야할 만큼 괴락한 칠곡보 위에서 그들은 다가오는 죽음과 공포를 넘어선 열정으로, 분노로, 절망으로 함께했다. 십년을 맞아온 바람에도 흩어 떠나지 않는 고통의 기억. 반드시 올 것이지만 언제 올지 모르기에 더욱 공포였던 요퇴의 철기, 지평선 저 너머서 다가올 약속된 죽음을 서약하고 그들은 그렇게 그곳에 있었다. 
 “술 안 좋아하시오?”
 정적을 깨고 사공의 말이 방안에 울렸다.
 “맘 편히 들라고 통째 집어왔건만. 싫은 거요, 눈치를 보는거요.” 
 빈정이는 듯한 말이 끝나더니, 늙은 사공은 이번엔 보다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이 주막 탁주가 특히 맛있다오.”
 “그렇소?”
 사내가 말을 받았다. 
 “음. 저승사자 받은 늙은이가 사자한테 막잔은 끝내자면서 건넨다고까지 하더니.”
 그 말과 함께 사공은 입끝에 슬쩍 미소를 걸쳤다. 홀로 반 넘어 술동이를 비우더니 조금 취한 것일까. 
 “아무리 저승이 코앞이더라도 이 맛이라면 한 잔 해야겠지. 드셔보소..”
 그 말과 함께 사공은 다시 사발을 푹, 동이에 담가 술을 퍼내 마셨다. 시원스러운 사공의 주도를 보던 사내도 한참 전부터 쉬고 있던 사발을 들어 술을 한잔 들이키며 생각을 이었다. 
 확정된 죽음은 사람을 삐뚤어지게, 왜곡되게 만든다. 수년 간 그리도 가까이 지내던 그들의 관계도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쉽게 틀어지고 다툼을 낳았다. 너의 활을 만졌다고, 나의 칼집을 건들고 지나갔다고, 혹은 말을 걸었다고.... 칠곡보에 그저 머무는 이레 동안 그들은 그리도 부스러지고, 어긋나가기만 했었다. 번갈아 망루에 올라 남녘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다가올 죽음을 헤아렸다. 봉화를 올린 그 순간 아마 그들은 엇갈려 조여오는 철쇄의 틈새에 바스러져 죽으리라. 팽팽한 활줄보다 더 극한까지 차오른 긴장감의 홍수 속에서 처음의 각오와 의지는 슬며시 흐려져 갔다. 북에서 밀려오는 얼음 같은 바람을 등으로 맞고 내리치는 눈발을 가릴 것 없는 맨 바닥에 누워 맞으면서 비참해졌고 모든 게 흐려져만 갔다. 거듭 각오를 분노로 되새기고 다잡아도 피로와 허기로 흐려진 눈은 트이지 않았다. 죽음을 각오했으나 죽음은 감당하기 너무 거대했다. 
 “술 맛 어떠오. 술 한 모금 못하고 달포는 방랑한 사람 같으오만. 잘못 보았소?”
 고개를 든 사내는 사공을 한 번 흘깃 바라보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쓴 웃음을 지으며 사발을 집어든 사내는 동이에 푹 담가 술을 떠내었다. 길게 한 모금, 술을 머금으며 사내가 답했다. 
 “아니, 고맙구려. 요 근래 술이 그리도 그리웠는데. 노인장 말대로 정말로 좋구려.”
 그러고는 다시 사발을 들어 술을 마셨다. 말을 들은 사공이 다시 슬쩍, 웃음을 걸쳤다. 거듭 사발을 들어 길게 한 사발, 마시는 모습이 우스워 보였을 테지. 사발, 다시 한 사발의 술이 뱃속에 들어갈 때마다 느껴지는 찌르르한 저림과 차가운 막걸리 한 사발만큼의 해갈이 그토록 그리웠던 그동안이었다. 다시 사발을 비워낸 사내는 사공을 보며 마주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본 사공은 그러나 다시 굳은 얼굴로 막걸리를 한 사발, 퍼냈다. 
 “바람이 불어오는 게 겨울이 되려나 보오.” 
 “그렇구려. 추워지겠소.” 
 “마자수 강 너머는 더 추울 게요.”
 "그렇겠지요." 
 그러고는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사내도, 사공도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졌다. 마루로 전해진 은은한 진동에 흔들린 사발이 술동이 안에서 시리도록 맑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장지 밖으로 비쳐오던 누런 황혼의 흔적도 거진 사라져 어둠이 밝혀왔다. 고래고래 떠들던 주정뱅이도, 쌈지를 풀어 돈을 세던 장돌림도 각자의 짐을 챙겨 슬슬 방으로 들어갔다. 아귀나 야차 가운데 한 토막 같은 그들이라도 시간에 맞춰 다음 장으로 꼬박 세워 길을 걸으려면 잠시 눈을 붙여야할 터였다. 장내가 고요해진 것을 느낀 사내는 장지를 열었다. 차가운 저녁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아직은 이를 터인데, 마당 안쪽에 싸락눈이 조금 깔려있었다. 어느새 내린 것일까. 이미 그친 것일까. 화악 하고 다시 밀려온 공기의 흐름에 사내는 가볍게 턱을 쓰다듬었다. 사내는, 추위가 정말 싫었다. 
 바람결에 얼굴로 달라붙는 흙먼지는 그들이 누운 맨 흙바닥만큼 차가웠었다. 허물어진 흙벽은 북에서 내려오는 삭풍을 막아주지 않았다. 간간히 섞어 내리는 눈은 그저 그곳에서 기다려야하는 그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그나마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었다. 
 마실 물도 부족해 씻지도 못한 나날 속에서, 그들은 칼과 활을 계속 갈고 벼렸다. 숫돌이 닳도록 갈고 가져온 기름이 떨어질 때까지 닦았다. 흙과 기름에 절어 얼굴은 시커멓게 변했고 그들의 마음도 어둠에 잠겨갔다. 겨우 사흘 치 챙겨온 건량은 애저녁에 바닥났다. 그러나 고라니가 숙영지 바로 옆을 지날 때에도 그들은 창을 빼들지 않았다. 죽으러 온 것이다. 그렇게 되뇌었다. 섬전같이 빠르고 벼락같이 날카로워 화살도 피하고 수백을 능히 물리친다는 팔기(八旗)의 소문을 힘겹게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활은 오랑캐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든 것이다. 다시 다짐했다. 수백의 기병 앞에 그들의 무기가 너무도 초라하다는 불안감도 애써 접었다. 그들의 칼은 그들의 마지막 마음 둘 곳이었다. 그렇게 되새겼다. 
 오로지 남으로 뻗은 길만 바라봤다. 간혹 날이 맑은 날이면 칠곡보 서편으로 압록강도 내다보였지만 그들은 끝까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오로지 남으로 뻗은 길만 바라봤기에. 
 사흘째 낮부터는 수마가 몰려들었다. 둘씩 조를 지어 잠을 자기 시작했다. 닷새째 저녁부터는 배고픔이 밀려왔다. 저항할 수 없는 물결 앞에서 그들은 오직 인내할 따름이었다. 동료의 배에서 울리는 소리에 눈을 흘기고 한마디씩 불평을 토로했다. 그러나 자신의 배에서도 똑같은 소리가 나고 있다는 건 모두 애써 무시했다. 지나치게 일찍 왔다는 후회는 하지 않았다. 우리가 있어 중군이 대비한다는 각오와 복수심만 되새겼다. 오랑캐에 부모를, 자식을, 형제를 잃은 그들이었기에. 죽기 참 힘들다는 농담이 흘러나왔다. 언제고 웃음을 잃지 않던, 의주부 영내에서 가장 젊었던 현호는 그러나 동료들 틈에서 은은히 배어나오는 살기에 곧 입을 다물었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그들은 점차 더 예리하게 벼려진 한 자루 칼날이 되어갔다. 그때 그들은 그렇게 칠곡보에서의 이레를 보냈다. 

 “사공 일을 하다보면 소문에 좀 빠른 법이라오.”
 어느새 새로 한 동이의 술을 가져온 사공은 한 사발의 술을 숨쉬듯 마신 다음 다시 말했다. 사내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오가는 이를 많이 보지 않겠소. 이렇게 객이랑 같이 머무는 일도 많을 터이고.” 
 “아니, 손은 바람일 뿐이지. 같이 머물 일은 그리 많지 않다오."
 사내는 말없이 다시 한 사발, 술을 떠내어 입으로 가져갔다. 사내를 물끄러미 보던 사공이 다시 말을 이었다. 
 “마자수 너머에서 임 장군께서 청과 이토록 싸우고 계신다 하더이다.”
 “...........”
 사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공이 술동이와 같이 집어온 보시기에는 김치에 부추전 한 장이 소복하게 올려있었다. 보시기 가득 담긴 김치를 뒤적이며 사공이 다시 말했다. 
 “십년이 지났구려.” 
 “............”
 찬바람이 계속 열린 문으로 들어왔다. 얼굴과는 달리 별로 주름지지 않은 탄탄한 손을 든 사공은 장지를 닫아걸었다. 사내는 여전히 묵묵히 고개 숙이고 대답하지 않았다. 번뇌에, 고통에 찬 얼굴로. 그러나 사공은 괘념치 않고 계속 말했다. 
 “내가 사는 아랫마을에선 아직도 끌려간 딸을 그리는 노인네 부부가 있다오. 그 이엄댁은 장성한 아들 셋이 죄 그때 난중에 죽었다오. 난리가 끝난지 십년이 지났건만, 그 이들에겐 지난 일이 아닌게요.” 
 “그랬구려.” 
 “그렇다오. 요동에는 아직도 임경업 장군이 오랑캐를 휘몰아치고, 나루터에선 지금껏 딸이, 아들이 돌아오지 않을지 아침마다 나오는 노인네들이 있다오.”
 “.......................”
 “오랑캐가 내달린 길목이던 이곳 언저리는 젊은 아이들의 씨가 말랐소. 쉰, 예순 먹은 노인네들이 소를 끌고 밭을 매는 걸 보면 목이 멘다오. 그나마 요 1, 2년 새 삼남에서 사람들이 올라와서, 그나마 살만해졌소. 그 전까지 이곳은, 지옥도 그 자체였다오.”
 말을 잇던 사공은 그새 목이 마른 듯 다시 한 모금 들이켰다. 사공의 주름진 얼굴에도 고통과 고뇌의 빛이 떠올랐다. 닮아져버린 듯한 두 사람은 처음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사공이 말했다. 
 “그런거요.”
 다시 한 모금. 
 “그런 거외다.” 
 이번엔 한 사발 모두 단숨에 들이켰다. 사내도 같이 한 모금 들이켰다. 텁텁하게 목을 메는 막걸리가 도리어 개운했다. 
 “그런 모습을 십년을 옆에서 보면서, 오가는 사람들의 비애와 회한을 보면서, 가슴에 피맺혀 흐르는 눈물에 내 가슴에도 피멍이 풀릴 날이 없었다오.”
 “.............”
 “그날 이후로 사람들 가슴엔 모두 구멍이 뚫린 것 같다오.”
 “이해하오. 그 고통을.”
 “그런 얼굴이오. 당신의 걸메진 겨리도 남 못잖게 굵고 무겁겠구려.” 
 “..................”
 “그런 얼굴을 한 사람은 영락없이 호란 중에 무언가 잃은 이였지.”
 “................”
 “당신에게도 지난 일이 아닌가보구려.”
 사공은 할 말을 다한 듯 느슨하게 풀린 표정으로 벽에 기대어 사발을 들어올렸다. 어지간한 장정도 이미 곤드레가 될 주량이었건만, 사공은 아직 취기를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많아진 말과 다시 바닥을 드러낸 동이만이 사공이 마신 주량의 깊이를 보일 따름이었다. 아마도 늙은 저 이의 마음에 들어박힌 분노의 말뚝만큼의 깊이이겠거니, 하고 사내는 생각했다. 
 방 한 켠에서 온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게으른 주모가 때 이른 추위에 놀라 뒤늦게야 불을 땐 탓이리라. 점차 따뜻한 기운이 방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하루 동안의 긴 여정으로 피로했던 사내의 몸이 삐걱이며 휴식을 앙망하는 외침이 들리는 듯 했다. 하지만 사내는 끝내 몸을 누이지 않았다. 쉬기는커녕 사내는 감은 눈을 뜨고 장지를 다시 열었다. 더운 방 공기 속으로 서늘한 저녁 공기가 스며들었다. 깊이 숨을 들이쉬며, 사내는 밤의 향기를 맡았다. 밤바람을 따라 하늘에선 다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까보다 굵어진 눈발에 마당은 금세 희끗하게 덮이기 시작했다. 그나마 몇 남았던 장꾼들은 눈발을 피해 방 안으로 올라섰다. 마당 한 편에서 웅크리고 졸던 누렁이도 머리 위로 쌓이는 눈발이 시린지 고개를 불쑥 일어나 마루 밑으로 숨었다. 눈발은 금방 거세어져 갔다. 
 흩날리는 눈발 아래 그토록 추웠던 그 날, 비보를 접했었다. 전령을 건네자마자 가슴을 내리치고 머리를 땅에 찧으며 자학하는 선전관을 막으려 애를 쓰며 그들은 눈에서 흐르는 하염없이 흘리는 눈물을 막지 못했다. 온 피가 쏠려 터질듯한 장군의 얼굴을 보며 솟구치는 울분을 털지 못해 거꾸러졌다. 상감이, 상감께서, 어찌 오랑캐에 절을 한단 말인가. 그토록 많은 산하의 백성이 마을을 잃고 목숨마저 앗기었단 말인가. 갈 곳 몰라 몰아치는 분노로 장군은 말했다. 친다. 오랑캐를 친다. 우리 강역이 피눈물 흘리며 복수하라 한다. 쳐야만 한다. 선진으로 삼전도에서 출발한 요퇴와 삼백의 철기가 있다고 알려온 건 이미 기진해 쓰러졌던 선전관이었다. 우리의 아들들, 조선의 오누이들을 수백이나 데리고 청으로 돌아가는 오랑캐들이 있다고 피를 토하는 울분으로 알려왔다. 장군. 장군. 그들을 구해주소서. 능욕당하고 노예로 팔릴 운명에서 우리의 백성들을 구해주소서. 장군이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외다. 의주부의, 그리고 백마산성의 모든 이들이 선전관과 같이 앙청했다. 장군이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외다. 네들이 죽느네라. 삿기치는 진눈깨비 속에서 장군의 눈에도 물이 맺히고 그들의 눈에도 물이 흘렀다. 죽어도 좋소이다, 복수를 하옵소서. 오랑캐 황제에게 혈육을 잃는 슬픔을 알려주소서. 전투를 막으러 온 선전관의 비통한 부름 속에서 복수를 갈구하는 부하들의 통한의 고간을 받으며 장군은 그저 하염없이 눈을 감았다. 네들은 죽는다. 죽어도 좋소이다. 터져 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죽어도, 좋소이다. 차갑게 내리는 눈발을 맞으며 그때 그렇게 모두 부복하고 눈물을 흘렸다. 
 눈발이 내리치던 어느 봄 날, 장군의 명에 따라 칠곡보로 열한명의 자원자가 달려 나간 것은 그 직후였다. 
 “눈이 내리는 구려.”
 “그렇구려.” 
 사내는 장지문 밖을 계속 내다보며 말했다. 다시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쉬익 하며 바람 빠지는 듯한 거센 소리가 들려왔다. 취기가 오른 사공이 배를 풀어헤치고 아랫목에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사공이 마시던 사발도 바닥에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었다. 붉게 상기된 코끝에 물방울이 맺혔다. 깊고 크게 내쉬는 호흡에 따라 물방울은 흔들렸다. 목에서 쇳소리가 나는 것이 너무 취한 모양이었다. 사내는 동창 아래 개켜진 이불을 폈다. 펼쳐진 이불 가운데 군데군데 구멍이 뚫리고 헤진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모두 펼친 이불을 네 단으로 접어 헤진 부분을 가린 사내는 사공의 배 위에 가볍게 덮었다. 머리가 아찔해졌다. 따뜻한 훈기에 술기운이 화악하고 도는 느낌이었다. 지펴오는 술기운을 따라 억눌러온 고통이 되살아났다. 머리를 가볍게 짚고 문질렀다. 아팠다. 사내는 움켜쥔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세게 내리쳤다. 아팠다. 눈앞에 물방울이 맺혔다. 아파서 그런 것이다. 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하고 또 말했다. 십년동안 되뇌었듯이 그렇게. 
 장지문 너머로는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치고는 대설이 될 듯한 기세로 계속 눈발이 굵어졌다. 사내는 댓돌에 올린 신을 다시 갖춰 신고 마당으로 나와 섰다. 이슥 깊어진 밤인데, 하늘은 도리어 붉고 희었다. 하늘을 바라보는 사내의 얼굴 위로 눈이 떨어져 녹아 흘렀다. 그렇게 젖은 얼굴을 사내는 씻어내지 않았다. 눈을 피해 다시 방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저 달아나면 될 일이었다. 단지 봉화를 피우고 곧바로 달아나면 임무는 다한 것이었다. 그저 전초였으니까. 하지만 아무도, 달아날 준비는 하지 않았다. 극한에 몰린 뱀처럼 독을 품고 웅크리고 있었다. 하나라도, 자기 손으로 적의 멱을 따낸다는 각오로 기다렸다. 친지의 생명을 걷은 오랑캐의 배를 가른다는 일념으로 기다렸다. 
 모든 게 이레째까지였다. 
 나흘이면 올 거라던 적은 여드레째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압록강에서 한강까지 한나절에 내달렸다는 오랑캐는 출발한지 열흘도 더 넘어서도 오질 않았다. 분노는 풀어졌고 각오는 휘지비지하게 풀어졌다. 지쳤다. 점점 자는 시간이 길어졌다. 주린 배와 타는 목으로는 더 이상 밤을 지샐 수 없었다. 
 창을 쓰는 현호가 결국 허방을 놓아 고라니를 잡았다. 고기를 썰고 피를 나눠 마셨다. 가죽을 덮었다. 하급이긴 해도 군관인데다가 나이도 가장 많은 명보가 직접 고기를 익혔다. 배불리 먹고 갈증을 달랬다. 포만한 배를 두드리며 오랜만에 그들은 편히 잘 수 있었다. 쌓인 피로와 긴장도 풀어졌다. 잠에서 깨어난 그들은 다시 모두 함께 밤을 샐 수 없었다. 아무리 치떠도 떨어지는 눈꺼풀을 막을 수 없었다. 그저 돌아가며 남쪽을, 지쳐가는 서로를 감시할 수밖에 없었다. 
 휴식이 늘자 생각이 많아졌다. 언제까지 기다려야할까. 다른 지역에서 노략질이라도 하는 거 아닌가. 다른 길로 간 것은 아닐까. 선전관이 잘못 말한 건 아니려나. 혹시 여기 오기 전에 의병들이 들고 일어나 처리한 건 아닐까. 마자수가 넓어서 두만강으로 간 것일지도 몰라. 입 밖에 대놓고 말을 하진 않았지만 서로의 마음속에 의혹이 피어났다. 고통과 시련 속에 생활하면서 도리어 죽음에 대한 공포도 자라났다. 언제까지? 마음속에 키워온 분노와 복수심은 같은 크기의 추가 되어 고통의 늪으로 그들을 끌고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주체할 수 없었다. 
 “웃방 손님이시쥬?” 
 기분 좋은 찬 바람 사이로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사내는 놀라 뒤를 돌아봤다. 비쩍 마른 여인네의 모습이 낮에 봤던 주모였다. 피곤에 젖은 얼굴의 주모가 다시 말했다. 
 “먼 길 하셨나봐, 이 동니 사람 아니죠?” 
 “그렇소.” 
 갈 곳 모르는 분노는 자신을 찔러댄다. 차라리 그때 요퇴가 나타났다면. 그런 때늦은 기대를 품어본 게 몇 번이던가. 철기의 물결이 아직 푸르게 날이 서있던 그때에 그들을 휩쓸어냈다면. 십년간 방황하며 후회해도 회한은 가슴을 찔렀다. 
 “워메, 딱 맞았네. 어쩐지 냄새가 다르더니. 아재비가 울 술막 문간을 넘어서자마자 알았다우. 내가 워낙 그런 걸 잘 맡어. 타향 사람은 냄새가 다른 거 아시우?”
 “몰랐구려.”
 “사공 아재랑은 아는 사이요?”
 “오늘 만났다오.”
 “그렇고마. 하긴 그 아재 강 건너 동니에 산 10년 동안 친구라고 누구 데려오는 걸 한번도 못봤수.”
 “.......” 
 “죄를 씻는다던가.. 외톨이로 살아야할 한이 많은 아재구나, 그냥 그리 여겼지비.”
 “.......”
 아마 사공도 사내처럼 업을 이고 살아가는 이려니. 사내는 그렇게 생각했다. 같이 업을 지고 걸어가는 이이니 나를 알아본 게지. 문득 사내는 오만했던, 하지만 한가득히 주름을 짊어진 사공의 얼굴을 떠올렸다.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나저나 이 늦은 저녁에 안주무시고 뭐하시우? 피곤하잖우?”
 “밤새우기에는 이골이 나서. 괜찮소.”
 바람막이 없는 노지에서 이레간의 밤새움은 급격한 피로와 고통을 초래했다. 찌들은 악취와 피고름내가 칠곡보를 진동했다. 하지만 지치고 피로한 그들은 맡지도 못했다. 고요한 지옥이었다. 장승처럼 그저 하염없이 바라볼 뿐인 시간이었다. 
 현호의 실언 이후 오래도록 지속된 침묵을 깨고 명보가 말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는가.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기력이 너무 없어지지 않았는가. 짐승이라도 잡아먹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 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명보도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러다 금구를 범할까 두려웠으니까. 하지만 이미 말해버린 것과 다름없었다. 훌쩍, 훌쩍. 울음소리가 들렸다. 현호였다. 현호가 울었다. 남에게 들릴까 두려워 입을 막고 눈을 씻으며 울고 있었다. 현호를 외면하고 모두, 못 본 척 돌아섰다. 목이 마른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리도 목이 메어올 리가 없으니까. 누군가 현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함께 울먹이면서. 누군가가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의 임무는 그저 봉화를 피우는 것만이야. 아무도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낫살도 들어 뵈는데 무슨 영광을 볼라구 이리 돌아 댕기슈? 가족은 뭐하우?”
 “없소.”
 “가족이 없을 수가 있나 그래?”
 “그렇다오.” 
 낯선 여인의 관심이 귀찮다는 듯, 사내는 말을 짧게 끊었다. 눈치를 못 챘는지, 주모는 여전히 무언가 궁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데런. 난리 때 일 치르셨나 보구만. 쯧쯧. 안되셨수. 우리 작은 애도 난리통에 떠나 보냈다우. 내가 그 맘 알지, 내가 정말 그 맘 알아.” 
 “.................”
 사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을 긍정으로 오해한 주모는 계속 말을 이었다. 
 “사는 집이 어디시유?”
 집은 없었다. 
 “없소.”
 “그럼 고향은 원래 어디유?”
 고향도 없었다. 
 “없다오.”
 “데런. 고향이 없다는 게 말이나 되나.”
 “..........”
 사내는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리가 끝날 무렵, 사내는 떠돌기 시작했다. 평안도, 황해도 할 것 없이 마을은 한 줌 재로 변했고 농토는 숲이 되어 버렸다. 젊은 남자는 젊은 여자만큼 보기 힘들었다. 늘어난 건 무덤밖에 없었다. 여기저기 배고픔에 주린 애들이 길거리에 나 앉아 울고 낮에도 야수가 마을에 뛰어들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조선이 저항하지도 못할 속도로 청의 팔기병들이 치고 내려간 덕에 도리어 산골이나 길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들은 그나마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곳에도 젊은이들은 없었다. 사내는 의주를 향한 길목에서 바라본 공녀들의 기나긴 행렬을 기억했다. 피눈물 흘리며 행렬을 지켜보던 장군을 추억했다. 온통 벗기운 채로 나무에 묶여 죽은 여인들의 시신에 경악했던 안주 근방의 산은 계속 회고됐다. 깊고 깊은 절벽 아래 가득히 메워진 시신의 산과 피의 강이 솟아난 사리원의 악몽은 사내의 뇌리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난리 후 조선 땅에 유일하게 늘어난 것이라는 무덤의 떼 옆에서 무릎 꿇었던 그날도 계속 떠올랐다. 이미 말라붙은 사내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롯한 악의에 의해 부서지고 망가진 나라였다. 가도 가도 끝없는 파괴와 학살의 흔적이었다. 고통의 기억이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사내는 고통 속으로 침잠해갔다. 
 사내는 갈 곳이 없었다. 머무를 곳도 없었다. 돌아가서도 안 되고 머물러서도 안됐다. 서북도의 모든 곳은 칼날이 되어 사내의 상처를 후벼댔기에. 그저 떠돌 뿐. 길이 집이고 가는 곳이 고향인 생활. 구걸은 하지 않았다. 비럭질만은 할 수 없다는 자존심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부질없이 살아남은 주제에, 동정으로 명을 이어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 사내를 가로 막았기에. 날품을 팔고 짐을 옮겼다. 가진 짐을 하나씩 팔았다. 단련해둔 육체 덕에, 노역도 할만했다. 젊은 사람이 부족해져, 일거리도 충분했다. 노자 벌이엔 모자람이 없었다. 우스웠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난리 덕으로 먹고 사는 것이. 그렇게 번 끼니는 먹어도 배부르지 않았다. 객점의 따뜻한 온기는 가시가 되어 사내를 찔렀다. 시체를 뜯어 연명하고 시신을 태워 온기를 쬐는 게다, 사내는 그렇게 눈물 흘렸다. 
 일부러 서북을 나섰다. 삼남의 길은 낯설고 외로웠다. 전화를 덜 입은 삼남의 길 위에서 사내는 떠돌았다. 사라지지 않는 기억에 사내는 몸서리쳤다. 사내를 괴롭힌 차가운 북풍도, 무덤 떼도 삼남에도 그대로 있었다. 편히 머물 수 있는 곳은 아마도 조선 천지에 없었다. 외로움만이 마음의 병으로 울부짖는 사내의 마지막 보루였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마음껏 울고 아파하며 사내는 십년을 주유했다. 결코 서북도로도, 경기로도 올라가지 않았다. 홀로 맞는 바람 속에서만 조금이나마 절망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 바람을 맞으며 흐른 십년이었다. 
 기억의 갈피 속에서 헤매느라 사내는 주모의 말을 흘렸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뭐라고 하시었소? 아, 미안하오. 다시 말해줄 수 있겠소?”
 “에구. 그 소식을 못 들었나요? 임 장군님이 명나라에서도 장군이 돼서 오랑캐 놈들하고 싸우고 있답디다. 시상에나, 정말 못 들으셨수?” 
 “아, 그렇구려. 지금 처음 들었소.”
 못 들었을 리가 없다. 
 “오랑캐 놈들에게 당한 걸 생각하면 십년이 지났는데도 여적 눈물이 난다우. 그 악다귀같은 놈들이, 사람 새끼 같지도 않은 그 놈들이 그....”
 주모는 옷고름을 들어 눈을 닦았다. 아마도 떠나간 작은 아들의 생각이 난 듯했다. 오십이 넘어 육십 줄을 바라보는 늙은 여인의 눈물을 보면서 사내는 여전히 떨리는 가슴을 느꼈다. 
 “임 장군님이 있으니 난 정말 살맛이 난다우. 원수를 갚아주신다니 얼마나 고마우.”
 주모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사내는 위로할 수 없었다. 
 “난리 때 장군님이 오랑캐를 박살을 냈다는 얘길 들었을 때 어찌나 기쁘던지, 말할 수가 없더만요.”
 “..................”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장군님이 어찌나 고맙던지... 그 놈들이 애초에 들어올 때 임 장군님이 물리쳐줬으면 오죽 좋았을까...”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도 여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거듭 새어나왔다. 지난 십년의 세월에도 삭혀지지 않는 슬픔일 터였다. 사내도 그 마음을 너무도 잘 알았다. 
 “군졸들도 정말 고생이 많았을 게지.... 그 먼 타지에서 여적 싸우고 계시다니 장군님도 오죽이나 외로울까... 나랏님이 왜 장군님한티 도움을 안주는지 당췌 모르겠수... 도움 줄 사람만 좀 있어도 이렇게 맘이 애롭진 않을 터인데...”
 그렇게 주모는 계속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눈은 이제 완연한 함박눈으로 변했다. 마당 곳곳에, 지붕 처처에 눈이 쌓였다. 사내의 머리에도, 얼굴에도 눈이 쌓이고, 녹아 흘렀다. 얼굴에도 눈물이 흘렀다. 

 열이튿날, 해가 질 무렵에 더 가까운 낮의 어느 시간. 그들은 타성으로 더러는 앉아서, 더러는 누워서 남쪽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현호는 바위 틈새에 들어가 세 마리째 잡은 고라니의 고기를 굽고 있었다. 불길에 솟은 티끌이 눈에 들어갔는지, 흘리는 눈물을 닦는 모습을 명보는 지켜보았다. 남 쪽 멀리에서는 흙먼지가 솟았다. 남쪽을 보던 명보는 요의를 느끼고 흙벽 아래로 내려섰다. 
 너무나 기다렸기에 도리어 알아채지 못하는 일은 흔히 있는 법이다. 적의 도래를 알아챈 것은 이미 흙먼지가 한참 가까워진 뒤였다. 거의 동시에, 열한명이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널려둔 무기, 손질 중이던 창칼을 집어 들었다. 흙담 위에 대궁을 올렸다.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 창을 꼬나 잡고 웅크리고 앉았다. 바쁘게 싸울 준비를 하는 통에 봉화는 도리어 늦게 올렸다. 부싯깃에 화도를 내리치는 소리가 뒤늦게야 들렸다. 멀리서 철기병이 나타났다. 삼백기가 아니라 천은 넘어보였다. 천천히 걸으며 칠곡보를 향해 다가왔다. 요퇴는 칠곡보를 알지 못한다. 칠곡보 위의 열한명은 어깨를 긴장시켰다. 활시위가 팽팽히 당겨졌다. 활대가 부러질 듯 휘어졌다. 쏘시개에 불이 붙어 화악하는 소리가 들렸다. 관솔에서 연기가 뿜어 올랐다. 뭉클거리며 회백색 연기가 솟아올랐다. 멀리 등 뒤에서 우는 살이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임무는 다 했어, 다 한거야. 하늘을 찢으며 날아오르는 효시의 울음을 듣고 누군가 그렇게 절규했다. 
 대부분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뒤돌아보지도 않고 뛰었다. 터질 듯한 심장의 박동을, 미친 듯이 내달려 돌부리에 채이고 찢어진 발의 아픔을 느낄 틈도 없었다. 그저 뛰었다. 의주부를 향해 오로지 뛰었다. 뒤에선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차근차근 걸어오던 소리가 이젠 내달아오는 소리로 바뀌었다. 그제야 봉화를 본 모양이었다. 탕탕탕하고 활대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피잉하고 화살이 나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비명소리가 들렸다. 귀를 막고 계속 뛰었다. 가치작거리는 전통을 풀어 내 던졌다. 활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이미 보이지도 않았다. 절그럭거리며 다리에 걸리는 칼도 버렸다. 천둥처럼 가까이서 발굽소리가 들렸다. 착각이라고, 공포라고 진정할 시간도 없었다. 괴성이 들렸다. 아아아아 하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좌우를 살폈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 괴성이 지금까지 자신의 목에서 새어나오고 있는 소리임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한참을 더 내달린 뒤였다. 천지를 울리고 산을 깨는 거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폭발음이 들렸다.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속 뛰었다. 쇳소리도 들렸다. 고함과 비명이 들렸다. 결코 뒤를 보지 못했다. 털썩, 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뒤돌아 볼 수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 혼자만 뛰어온 것이다. 신호를 올렸으니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해봤다. 결코 칠곡보를 되돌아보지 않았다. 볼 수 없었다. 말발굽 소리가 다시 들렸다. 천천히 걷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었다. 그 순간을 위해 그들은 열이틀을 지옥과 같은 시간 속에서 보내야 했다. 명보는 울음을 터뜨렸다. 장군이 이끄는 본군이 청 황제의 조카 요퇴를 버히고 팔기병 삼백을 격멸하여 그들이 끌고 가던 우리 백성들 수백을 구해냈다는 이야기를 명보는 정주에서 들을 수 있었다. 어디에도 칠곡보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아무도 열한 명의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한번 터진 눈물은 끝나지 않고 계속 흘렀다. 명보는 떨리는 주모의 등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눈이 많이 내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명보는 뒤로 돌아섰다. 어느새 마당 위로 소복이 새로 쌓인 눈 위로 첫 발자욱이 길게 남았다. 대문 밖에 걸린 등롱의 붉은 빛이 푸른 빛 눈 위에 흔들렸다. 북풍이 불었다. 
 늙은 사공은 여전히 배를 드러내고 자고 있었다. 어느새 덮어준 이불은 옆에 구겨져 밀려 있었다. 명보는 사공의 배에 남은 흉터를 보았다. 깊게 할퀴어진 자상의 흉터였다. 옆에 구겨진 이불을 다시 잘 편 명보는 사공의 배에 이불을 덮어 주었다. 
 사공은 곧바로 다시 이불을 걷어냈다. 사공이 명보의 눈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소?”
 “당신이 나가고 곧 깼다오.” 
 사공은 헝클어진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고는 자리에 앉아 명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명보는 사공의 충혈된 눈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명보가 사공에게 물었다. 
 “술독은 괜찮소? 많이 자셨소.”
 “기어코 마자수를 넘을 생각이오?”
 “..............”
 급작스런 사공의 질문에 명보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느냐 묻지도 않았다. 명보는 그저 말없이 압록강만 생각했다. 이제는 넘어야할 그 강을. 사공이 말했다. 
 “죽지 않은 것은 죄가 아니오."
 "죄일 수도 있지요.“ 
 "살아서 헌신하는 것이 속죄일 거요..“ 
 “난 큰 죄인이오.”
 “나도 죄인이었소. 죽어야할 때 죽지 못한.”
 “..................”
 둘 사이에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문 밖으로 눈 내리는 소리가 부드럽게 들렸다. 사공이 다시 말했다. 
 “죄인이던 나도 이렇게 살고 있소. 살린 목숨 뜻있게 쓰는 것도 바른 것이 아니겠소.”
 “살아선 안 될 몸이라오.”
 “살아선 안 될 사람이 어디 있소.”
 “난 속죄를 해야만 하오. 죽을 자리를 찾기 위해 살았다오.”
 “꼭 마자수 너머 임 장군께 가야만 속죄가 아니지 않소.”
 “이미 한 번 때를 놓쳐 10년을 후회했다오.”
 “............”
 “이번엔 영원히 후회할거요.”
 “............”
 사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명보도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 명보는 조용히 장지문 건너 하늘을 바라보았다. 물끄러미 명보만 바라보던 사공도 따라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는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붉게 물든 밤하늘에서 시리도록 하얀 눈이 계속 내렸다. 추위와 주림에 떨던 십년 전 그날의 하늘도 지금처럼 붉었다. 명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공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효홍의 첫 햇살이 한 가닥 동창을 비췄다. 밤새 내리던 눈도 잦아들었다. 명보는 벽에 기대 잠든 사공을 바라보았다. 사공의 주름 사이에 깊이 스며있는 고뇌와 시름을 읽었다. 전후의 고통과 시련을 자기처럼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 짊어진 고통의 나날은 그대로 이마에 앉아 주름이 되었다. 걷어 차버린 이불을 다시 덮어주지 않았다. 그저 먼저 간 사람들을 슬퍼하는 사공의 괴로움을 느꼈다. 스물은 더 늙어보이는 사공의 주름진 얼굴을 더 이상 지켜보지 못했다. 고개를 돌렸다. 얼굴 곳곳에 배어 있는 고통의 흔적에서 눈을 돌렸다. 가슴을 쓸어 내렸다. 마자수라는 옛 이름으로만 압록을 부르던 고집 세던 아이의 눈물을 너무도 지쳐버린 그 얼굴에서 읽었다. 
 명보는 객잔의 대문을 소리 없이 밀었다. 아무도 깨어있지 않았다. 밤새 눈바람에 시달린 등롱도 차갑게 식은 채 잠들어 있었다. 아무도 깨지 않은 새벽의 동녘이 보랏빛에 물들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길 위로 새파랗게 눈이 쌓였다. 잠시 제자리에 서서 방향을 가늠한 명보는 북쪽을 향해 걸어갔다. 눈 위로 첫 발자국이 뚜렷이 새겨졌다. 어느새 길게 멀어진 발자국 위로 눈이 덮였다. 오랑캐와 싸우고 있다는 임경업 장군을 따라서. 그렇게 명보는 지평선 밖으로 사라져갔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발에 발자국도, 슬픔도 모두 덮여 사라져갔다. 
 벽에 기댄 채로, 사공의 눈에선 말없이 눈물이 흘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 밖에는 하염없이 눈이 내렸다. 온 세상을 덮어버릴 것처럼. 

 현호야, 이 난리가 끝나면 무얼 할 것이더냐?
 업을 이고 나르고 싶사옵니다. 세상에 업이 남질 않도록, 세상에 한이 없도록 제가 다 나르고 싶사옵니다. 
 눈이 내리는 구나. 
 나리, 눈이 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