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길-반쪽을 기다리며 (병장 한상원/050812)
예전과 거의 유사한 글이고, 제 문제의식도 크게 변한바가 없는지라 미흡했다고 생각한 부분을 약간만 수정해서 올립니다.
여전히 성실할 수 있을지 두렵습니다.
그래도 이쁘게 봐주세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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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개>
시작하는 일의 어려움
어떤 글이든 글의 서두를 쓰는 일이란 참 어렵습니다. 고등학교 때 어느 수업시간에서 글의 서두에는 이러이러한 내용이 들어가야 된다고 배웠고, 이후 중간고사 오지선다형의 답안지에는 쉽게 쉽게 답을 골라내곤 했었는데, 직접 써내려가야 하는 글의 서두에서는 그 답이라는 녀석이 쉬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특히, 이런 글처럼 특정의 목적과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는 글은 더욱 어려운 것 같네요. 혼자 뱉어 내는 넋두리와는 달리 나름의 책임을 의식하면서 쓰기 마련이니까요.
과거
대학을 들어갔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머리를 지끈지끈하게 합니다. 과반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그 곳에서 운동이라는 것을 만났었고,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리저리 많이 다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이야기를 하는, 하나의 주제 아래 저마다의 주장을 하던 집회의 격정을 들었고, 난쏘공의 배경을 연상시키던 철거촌의 외로운 탑에서 시린 밤을 지새며 빛나는 새벽별을 보았습니다. 대학이라는 젊음과 유희, 지성과 야만이 공존하던 공간에서 수시로 변화하는 찬성과 반대, 중도와 양극단이 거칠게 맞부딪치는 모습을 보며 저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과연 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이죠.
고등학교의 틀을 벗고 비로소 마주했던 사람과 세상이 보여준 무수한 입장과 생각 속에서 저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만나는 사람은 저마다 그 가치관에 근거한 세상을 보여주고, 자신이 지지하는 텍스트를 권하고, 옳다고 믿는 실천들을 내가 같이 꾸려나가길 바랬습니다.
저는 반발심을 느꼈습니다. 내가 무지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들의 견해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낯선 것에 대한 자연스런 거부감으로 반박하는 것도 싫었습니다.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기보다는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스스로 마련하지 못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한국의 근대화에 대해 무지한 이에게 근대화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글을 던져주고 근대화를 말하라고 하면, 대개 근대화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게 될 것 입니다. 박정희 씨를 찬사하는 글만 읽고 자란 사람에게는 박정희 기념관을 왜 반대하는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사건은 하나지만, 판단은 다양했습니다. 선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여러 갈래의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선택해 걷느냐의 문제처럼 보였습니다. 다양한 관점들은 그 다양함으로 인해 결국 커다란 범주의 옳고 그름을 잠식해갔습니다. 하지만 나만의 진리는 명확해야만 했습니다. 데카르트의 명제처럼 사유는 곧 나의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의문이 들었습니다.
‘세상을 어떻게 보고,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내가 세상에 제시할 수 있는 유효한 정답은 무얼까.’
현재, 가까운 미래- 반쪽을 기다리며
나의 진리를 어떻게 만들어갈까. 내 삶과 가치관의 방향은 어떻게 정해가야 할 것인지의 문제가 저의 가장 큰 화두가 되었습니다. 무지로 인해 중요한 것들을 지나치는 안타까움, 낯설어 거부해야 했던 사람들과의 대화들, 이제 저의 화두는 “소통”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혼자 품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주고 받음으로써, 웅크리고 고여서 고약한 냄새를 퍼뜨리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는 상큼함을 지니고 싶었습니다. 저의 소통은 그런 의미입니다.
사랑은 하나였지만 연인은 두 가지 기억을 가집니다. 소통의 의미는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받아들이는 지금의 나와의 상호 작용입니다. 연인은 사랑이라는 소통의 또 다른 이름으로 하나가 되곤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생각하며 사랑이 깊어지는 것처럼, 세상에 대한 나의 관심은 세상과 나를 사랑에 빠지게 해줄거라 믿습니다. 그렇게 소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세상 어딘가에 나의 반쪽이 있다고 믿으며 외로운 남녀는 오늘밤에도 그 반쪽을 그리워하며 자신을 가꾸어갑니다. 반쪽 앞에 당당해 지고 싶으니까요.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쓰게 될 글은 아마 소통을 위한 저의 준비과정에서 나오는 미완의 생각일 듯 합니다. 세상에 뿌려져 있는 갖은 생각들과 사건들, 사람들이 품은 진리 속으로 들어가 소통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전을 종종 읽습니다. 고전을 읽으면서 지난 역사와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의 생각과 소통하려 합니다. 역사의 물결은 과거와 미래에도 단절이 아니라 연속의 매듭으로 묶여 흐르듯, 과거의 고전은 고전으로서 오늘과 대화를 합니다. 혼탁하고 해체된 담론들을 격파해가며 내 안에서 변증법적 종합을 이루어내는 길을 위해서는 때론 근본을 거쳐가는 에두르는 길을 택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위태위태한 줄을 타는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는 중심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 중심이 고전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오늘의 인간으로서 오늘날의 많은 사건들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많은 사람들의 진리와 가치관, 살아가는 모습들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제가 걷는 길은 계속 소통을 준비하는 길이 될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언젠가 찾아올 반쪽을 기다리듯이요.
그렇다고 전문적으로 고명한 학자들의 이름을 나열해가면서 명언들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할 역량도 없을 뿐더러, 누구나 사용할 수 있고 이해하기 쉬운 언어를 통해서만이 폭넓고 건강한 대화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반쪽을 기다리며 준비한 몇몇의 생각들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에세이일수도 있겠고, 막연한 소개글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부족함에 편협할수도 어이없는 이야기를 해버릴지도 모르지만, 저 혼자만의 세계를 벗어나 여러분의 세계와 가까이 가려는 어이없는 욕심으로 써보겠습니다.
여전히 무지하고 부족한 저이지만, 제가 겁 없이 던져 펼치는 저의 세계가 여러분 저마다의 소중한 세계와 만나 소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괜히 거창한 것 같아 무섭긴하네요. 성실할 수 있을지. 윽.
일병 박민수 (2005-08-13 13:33:30)
상원님의 글에는 담담하면서도 따뜻한 기운이 느껴져요. 다른 이들과의 소통을 위해 조심스럽게 다가가려는 모습인양. 기다리고 있는 모습인양. 도무지 거부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글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언젠가 저 또한 함께 소통할 수 있길. 멋져요.
병장 김석윤 (2006/03/24 15:06:25)
뒤늦은 댓글이지만 상원씨의 얼개에 감동먹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