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의 종말 
 일병 정영목 05-27 22:26 | HIT :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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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새 개인 위키에 담을 글을 쓰느라 '이곳에 올릴만한' 신선한 글을 마련하기가 힘드네요. 그래서 한동안은, 사회에 있을 때 윤문했던 글들을 하나씩 올려볼까 합니다. 엔트로피는 이미 책마을에 괜찮은 글이 있는 듯 하니 생략합니다.

== 소유에서 접속으로 ==

 흔히 미래를 정보화 시대라는 용어로 표현하지만 이는 산업 시대를 인쇄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처럼 협소한 정의입니다. 그보다는 접속의 시대라고 부르는게 적합합니다. 

 접속 중심의 구도에서 기업의 성공은 시장에서 그때 그때 팔아치우는 물건의 양보다는 고객과 장기적 유대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산업 시대에는 소비자에게 상품을 팔면서 무료 애프터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요즘은 애프터서비스를 통해 고객과 장기적 관계를 맺겠다는 계산으로 상품을 아예 공짜로 제공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죠. 소비자의 의식도 소유에서 접속으로 서서히 기울 것입니다. 값싼 내구재는 여전히 시장에서 거래되겠지만 가전 제품이라든지 자동차나 집 같은 고가품은 공급자에 의해 소비자에게 단기 대여, 임대, 회원제 같은 서비스 계약의 형태로 제공될 것입니다. 

 판매자와 구매자로서 시장에서 재산을 교환하던 근대 경제의 기본 구도를 포기한다는 것은 재산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천만의 말씀이죠. 재산은 엄존합니다. 하지만 재산이 시장에서 교환되는 빈도는 크게 줄어들 것입니다. 새로운 경제에서 재산을 장악한 공급자는 재산을 빌려주거나 사용료를 물립니다. 근대 경제의 중요한 특성이었던 판매자와 구매자의 재산 교환은 네트워크 관계로 이루어지는 서버와 클라이언트의 단기 접속으로 바뀝니다. 시장은 여전히 살아남겠지만 사회에서 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줄어들 것입니다. 

 네트워크 경제에서 기업은 물적 재산이건 지적 재산이건 교환하기 보다는 접속하는 쪽을 택합니다. 물적 자본의 소유권이 한 때는 산업 사회의 근간이었지만 이제는 점점 주변적 지위로 밀려날 것입니다. 기업은 물적 자본을 자산이 아닌 단순한 경상비로 취급하게 됩니다. 반면 지적 자본은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부는 이제 물적 자본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부는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력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지적 자본을 절대로 팔지 않고 단단히 거머쥔 채 제한적으로 임대하거나 사용권을 빌려줍니다.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면 확확 바뀌는 세상에서 물건을 대량으로 소유한다는 것은 시대에 뒤진 생각입니다. 가진다, 보유한다, 축적한다는 생각이 금과옥조로 떠받들어졌고, 사유 재산이 인간을 재는 잣대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소유의 의미가 퇴색하게 되면 인간 본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오히려 그것이 더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이는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인간형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높습니다.{AGOACSKO} 

 그리고 앞으로 각광 받을 사업은 예전처럼 상품과 서비스를 파는 사업이 아니라 다양하고 광범위한 문화적 체험을 파는 사업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접속의 개념과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요리사는 음식점을 통하여 자신이 만든 요리를 파는 것이 아니라 맛이라는 인간 고유의 영역에 잠시 접속할 수 있는 경험을 파는 것입니다. 그 요리의 역사, 의미가 첨가되면 더욱 좋겠죠. 날마다 갖가지 음식으로 회원제 점심 파티를 운영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패스트푸드를 팔 때에도 단순히 빨리 먹기 위한 음식을 파는게 아니라 그 음식을 먹는 사람에게 '음식 먹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 잠시 속하는 경험을 파는 것이 중요합니다(현재의 패스트푸드는 그런 의미와는 거리가 멉니다만). 

 사랑도 접속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너는 내 것, 나는 네 것."이라는 말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곤 합니다. 서로를 소유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제는 "네가 나라는 존재를 경험할 수 있도록 잠시 권한을 준다. 그 대신 나에게 사랑을 달라(물론 돈도 포함해서)."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결코 팔지 않습니다. 이것이 아직은 무정하고 사랑을 모르는 이들의 이야기로 치부되기 쉽지만, 이미 우리들도 실제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결혼이라는 개념부터가 계약의 의미를 담고 있죠. 결혼이 과연 소유의 의미일까요, 임대의 의미일까요? 그건 해석하기 나름입니다. 

 산업 생산에서 문화 생산으로 탈바꿈하면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노동 의식이 유희 의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노동을 상품화하는 것이 산업 시대의 특징이었다면, 접속의 시대에는 놀이의 상품화가 그 특징입니다. 이는 사실 우려할 만한 현상입니다. 문화 자본주의는 인류가 수천 년 동안 발전시켜 온 문화적 다양성을 샅샅이 발굴하여 상품화 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과정에서 문화적 다양성은 소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치 자연을 이용하여 생산력을 극대화 시킨 산업 시대가 자연을 피폐하게 만든 것처럼 말이죠. 즉, 우리는 이러한 시대 흐름을 미리 읽고 문화적 다양성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이는 생물 다양성을 지키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일입니다. 

 소유에서 접속으로 이동하는 거대한 조류 앞에서 사람들은 사회 계약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 있고 시장에서 교환할 수 있는 사유 재산의 관념이 산업 시대의 근간이었음을 잊지 마세요. 시장에서 재산을 거래한다는 발상을 버리는 것, 인간 관계의 구조적 틀에서 일어나는 개념 상의 변화를 소유에서 접속으로 밀고 간다는 것은, 마치 지금으로부터 5백여 년 전 영국에서 토지와 노동을 재산 관계의 틀 속으로 사유화하려는 인클로저 운동이 벌어졌을 때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납득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AGOACSKO} 

 이렇듯 문화 영역이 상업 영역에 흡수되어가는 상황에서 과연 문명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음식점의 예처럼 우리의 문화가 보다 풍요로워질 것이라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사랑의 예처럼 우리가 선뜻 동의하기 힘든 부분도 있습니다. 접속의 시대는 "타인과 맺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 관계를 과연 어떤 방향으로 재설정하고 싶어하는가?"라는 근본적 물음으로 우리를 내몰 것입니다(사랑의 영역에서는 보노보처럼 자유로운 성행위로 사회 평화를 추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언제나 그랬듯, 변화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결정될 것입니다. 

== 참고 문헌 ==

* AGOACSKO -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 지음. 소유의 종말. 민음사. 5. 2001.  


 상병 김현진 
 잘 읽었습니다. 문화 다양성을 지켜야 한다는 점은 특히 공감합니다. 

" 소유에서 접속으로"는 결국 부의 편중이 극심해졌음을 나타내는 현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넘쳐나는 자본에 비해 대중들의 구매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나타난 건 아닐까요. 소비자 입장에서도 소유의 비용보다는 접속의 비용이 적게 들고(물론 접속의 시간이 길어지면 더 비용이 들지도 모르지만, 이것도 의도한 거겠죠. 온라인 게임 두 달 하면 패키지 게임 하나 값이 나오는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접속비용을 지불하는 사람들의 양이 늘어나 그만큼의 이득을 얻을 수 있잖아요. 거기다 정보의 전산화로 대량 접속도 가능해졌으니 환경도 좋습니다.(보안의 문제는 일단 제쳐둡시다) 

 그리고 질문 하나- 
 현대판 인클로저 운동으로 '카피레프트'를 들 수 있겠습니다만, 이에 대해선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궁금하군요. 05-28   

 일병 정영목 
 전 오히려 '카피라이트'를 인클로저 운동으로 보고 있습니다. 인간의 무형 자산을 저작권이라는 형태로 구획을 나누어 사유화 하니까요. 카피레프트는 그 담을 허물어야 한다는 입장이니 '디클로저' 운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05-29   

 일병 정영목 
 말씀하신대로 '부의 편중'이 '접속의 시대'를 이끄는 '원인'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제러미는 '결과'라는 관점에 중점을 두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접속이라는 트렌드는 너무 빨리 바뀌는 세상에 대응하기 위한 '유연성' 확보 차원에서 나온 것이니까요. 

 몇 가지 예가 있군요. 아웃소싱 또한 접속의 한 형태인데, 이를 부의 편중이 부른 결과라고는 보기 힘듭니다. 오히려 그건 공급자가 생존을 위해서 취하는 몸부림이죠.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사랑을 더 많이 가지고 있어서 접속의 형태로 바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소유'를 하면 '변화'가 힘들기 때문에 소유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흐름의 해악을 논해봅시다. 아웃소싱이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사용자 측의 편법으로 전락한지는 이미 오래입니다. 그 결과로 '부의 편중'이 심해지겠죠. 사랑도 마찬가지. 사랑의 영역에서, 변화를 위해 소유를 포기한다는 것 자체가 상대보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상대는 상대대로 자기는 자기대로 각자의 사랑은 각자 안으로만 '편중'되는 것이죠. 

 단점만 보면 좀 껄끄러운 변화입니다. 하지만, 공유라던가 문화의 중요성이 부각된다는 측면에서는 괜찮은 변화이기도 하죠. 미리 알고 대처한다면 희망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05-29   

 상병 김현진 
.. 저도 부의 편중이 현상(그러니까 결과)로써 일어난 거라고 말한 거랍니다(....) 

 카피라이트를 인클로저 운동으로 보신다 함은 즉 무형적 자산이 특정인이 아닌 '인간 전체'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관점을 바탕으로, 인간 전체가 공유해야 할 지식을 특정인이 사유화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인가요? 다시 읽어보니 맞는 것 같네요. 05-29   

 일병 정영목 
" 넘쳐나는 자본에 비해 대중들의 구매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나타난 건 아닐까요." 

 위 대목에서 의도를 헷갈렸습니다. (땀) 

 아, 그리고 카피레프트를 인클로저 운동으로 보신 이유를 소개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05-30   

 상병 김현진 
 잘못 봤기 때문이지요. 하하하. 
 왜 난 인클로저 운동과 그 뭐더라, 산업화 시대 시작할 때 자동화 기계에 반대한 노동자들의 운동 있죠? 그거랑 헷갈렸어요(...) 

 다만 '권위에의 저항'이라는 측면에서는 인클로저 운동과 그 뭐시기 운동(...), 그리고 카피레프트는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인클로저 운동은 왠지 아닐 것 같기도 하고. 여기서 급질문. 인클로저 운동의 주축이 누구였나요? 05-30   

 일병 정영목 
 러다이트 운동입니다. 사실, 제러미 리프킨은 자본가들로부터 Neo-Ludditist라고 비난받곤 한답니다. 그리 달가운 칭호는 아니지요. 

 그리고, 인클로저 운동의 주축은 자본가들이었습니다. 본래 중세 유럽 사회는 그 누구도 땅을 '소유'했다고 할 수 없는 시기였는데, 산업 혁명으로 인해 신흥 자본가들이 권력을 얻자 불안한 영주들은 농지에서 농노들을 내쫓고 양을 방목했지요. 사실 그 땅은 '사회 계약'상 영주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아니었지만, 국왕이 이를 묵인하고 관련 법령까지 공포하자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습니다. 

 인클로저 운동은 '권력의 폭력'이라고 봐야 합니다. 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