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에서 끄적된 습작 소설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습작입니다. 라고 해봐야 이거 합쳐서 여섯 편 정도 썼군요. 그중 네 편은 창비신인상 응모해서 그냥 즐. 당했습니다. 이건 문예지에 응모하기에는 분량이 너무 적네요. 다시 써야지 다시 써야지 강박만 가지고 있다가 결국 다시 못 쓰고 그냥 집에 갈 것 같습니다. 미련 없이, 그저 군에서 재밌게 끄적였던 소설로 삶에 남겨두어야지요. 이제는 지나간 일들에 say goodbye. 지친 일상의 보물들에 goodb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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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에 날아온. 봄




봄, 이었다.

선선하고 적당히 맑은 그런, 봄 치고는 나쁘지 않은 날씨였다. 황사도 없고, 조울증에 비견될 일교차도 없다. 목을 갉아먹는 건조함도 부재중이다. 가을이었다면 적당한 정도의 그런 날씨. 겨울치고는 따뜻하고 여름치고는 시원한. 그런 봄날을 나는 네 살 어린 여자 후배와 함께 여의도를 걷고 있었다. 라고 해도 그다지 로맨틱할 것은 없다. 가로등의 불빛에 홍염마냥 춤추며 떨어지는 벚꽃에도 불구하고, 한강 위로 찬란하게 비치는 새까만 우주에도 불구하고. 미지근한 열기와 시원한 바람이 동시에 존재하는 유쾌한 대기에도 불구하고.

오늘, 외계인들이 여의도에 침공했고, 지구방위군은 그들과 한차례 전투를 진행했다. 언제나처럼 양측에서는 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했다. 그리고 우리로 말할 것 같으면 인간으로 위장한 외계 신문사-물론, 어디까지나 지구의 입장에서 외계이며 나나 그녀의 입장에서는 '우리'겠으나, 지구의 언어로 기록되는 기록이기에 '외계'라는 표현은 앞으로도 사용될 것이다-의 기자였다. 나는 약 2년 전에, 그리고 그녀는 두 달 전에 지구에 파견되었다. 100년이 넘게 계속되는 인류와 외계인의 전쟁에 나는 끼어든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내기 기자였고, 그녀는 그런 나보다 더 신참인 그런 존재였다. 그리고 우리는 하루 종일 벌어진 대격전을 취재했다. 격전은 외계인의 후퇴로 끝났고, 우리는 조금 전까지 카메라로 위장한 광학 기구를 통해 전황의 자료를 긁어모으고, 노트북으로 위장한 통신 기구로 그러한 자료들을 본성으로 전송했다. 일이 다 끝났다. 전사자들의 시체는 모두 수습되었다. 한 톨의 피비린내도 느껴지지 않는다. 바람은 시원하게 불고, 벚꽃은 떨어진다. 바람과 벚꽃 사이로 흐르는 신선한 공기. 나른한 따뜻함.

"이제 가자. 나 졸립다"

취재에는 진력이 났다. 취재 뿐이랴. 모든 일은 연애와 비슷한 흥미 주기를 가진다. 1년 이상 같은 일을 하고 있자면 결국 진력이 나고 만다. 귀찮고. 졸립다. 일전에 다니던 전우주적 규모의 유통회사도 그런 이유로 그만두었다. 이는 결국 전 우주를 관통하는 유일한 법칙이며, 어떤 혹성도 이에 대하여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전쟁을 벌였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적어도 우주 언론의 역사에는 그렇다. 마찬가지로 1년 이상 계속되는 전쟁은 극히 드물다.

"그럴까요. 선배. 어디로 가죠 그럼?"
"집에 가서 쉬어야지. 아니. 아니다. 술이나 마시자"

쉬는 대신 술을 먹는 것. 지구의 기자나 내 혹성의 기자나 다른 은하계의 어떤 기자나 가지고 있는 습성. 역시 전우주적이다.

"선배 졸립다면서. 그냥 집에서 쉬면 안되요? 나도 피곤한데..."

하지만 처음부터 쉽게 적응할 수는 없는 그런 습성이다. 하지만 할 수 없다.

"모르겠다. 잠깐. 나 담배 다 떨어졌다."

후배를 데리고 편의점에 들어가 필립 모리스를 한 갑 샀다. 허어. 이거 절판되었을텐데. 그녀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주고, 나는 KGB레몬 한 병을 집어들었다. 고민하다가, 카프리 한 병을 더 집어들었다. 피곤한 건 사실이지만 잘 수 있는 시간이 오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 아직 여덟 시도 채 되지 않았으니까.

"그나저나 어떻게 집에 가지. 나 버스 모르는데"
"나도 몰라요. 아니 2년이나 되었다면서, 교통편도 몰라요?"
"삼십 년은 족히 산 것 같은데, 아직도 사는 법을 모르겠어. 똑같은 거지"

멍하니.

"걸어가면 되지 않을까. 대충 길은 아는데."

저 멀리 보이는 몇 개의 다리 중 하나를 골라 건넌다. 그리고 표지판을 찾아 걷다 보면 언젠가는 집에 닿는다. 언젠가 그런 식으로 가 보았기에 나는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걸어 나가면 온세상 어린이들......이건 좀 아니겠지만.

걷기에 그리 나쁘지 않은 날씨다. 하루 종일 전투의 취재에 시달렸다고는 해도 오늘은 봄이니까. 황사도 없고, 건조함도 없고, 조울증마냥 심각한 일교차도 없는 그런 봄 답지 않은, 봄치고는 나쁘지 않은 날씨니까. 벚꽃은 홍염처럼 흩날리고, 강물은 우주처럼 빛나고. 옆에는 네 살 어린 여자 후배가 있고. 주머니에는 절판된 필립 모리스가 열 아홉 개피 있다. 가방에는 맥주 한 병. 미지근한 바람이 우리를 감싼다. 그 정도라면 걸어도 나쁠 것은 없다. 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세 시간 쯤 걸어야 하겠지만. 아니, 한 시간만에 길을 제대로 찾아 집에 도착하는 것이 더 운이 없는 편일지도 모르겠다.

"저기 보이는 다리 중 하나를 골라서 건너면 OK. 그리고 '마포'라는 표지판을 찾아 헤매이면 되는거지"
"아. 네"

그렇게 하여 우리는 걷게 되었다. 한강의 흐름을 따라 진행되는 로맨틱한 데이트. 라기보단 나는 KGB레몬을 마시고 후배는 아이스크림을 마시며 아침부터 계속된 일과에 지친 몸을 흐느적. 바람도 흐느적. 멀리 보이는 다리도 흐느적. 다리가, 보기보다 가깝지 않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이내 내 다리도 흐느적. 그렇게 나와 그녀는 겨우 다리에 도착하였다.

"다리가, 굉장히 예쁘네요"

응. 하고 건조하게 대답하기가 조금 민망할 정도로 감동한 얼굴로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잠깐 생각하다가 결국

"집에 가면 술이고 뭐고 피곤해서 바로 뻗어버릴 텐데. 너도 가면서 뭐 좀 마시자"

따위의 청유형 대답을 하고 말았다. 100점 만점에 마이너스 10점. 차암 자알 했어요. 다리 입구의 난간에 기댄 채 담배를 한 대 꺼낸다. 이로써 남은 담배는 18개피. 불행인지 다행인지 후배는 나의 말을 못 들은 것 같은 표정으로 멍하니 다리를 바라보고 있다. 다리.

예쁘다.

적당한 조명으로 반짝이며 하늘과 강 사이 허공에 떠 있는 다리는 아름다웠다. 은은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느낌의 거대한 석재 구조물. 직선으로 느껴지지 않는 묘한 직선의 미학. 분명히, 아름답다. 저녁이라 그런 걸까. 태양 아래, 차를 타고 지나치던 달궈진 시멘트 덩어리는 그렇지 않았는데. 밤이, 빛나지 않는 것은 적당히 숨기곤 하는 그런 밤이 아름다운 것일까. 다리. 이곳과 저곳을 잇는 다리. 형편없다. 이곳과 저곳이 이어지지 않으면 전쟁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편에 서서 멀거니 저 편을 응시하고서 저 편을 제멋대로 상상하면 아름답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다. 부딪힐 일도 없다. 굳이 다리 따위가 서 있어서 홀로 아름다울 것은 없다. 다리가 없으면 내가 서 있는 곳 빼고는 모두 아름다울 텐데. 내가 서 있는 곳은 글쎄. 할 수 없는 일이다. 어쨌거나.

다리가 없으면 오늘 같은 전쟁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습게도. 행성간의 다리 덕에 나는 내가 사는 곳을 도망쳐 나왔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눈 앞에만 해도 다리가 세 개다. 그러니까 그게...

그래요, 라는 그녀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그래요. 다리는 예쁘지요. 라기보다는 역시 술을 마실 심산인가. 뒤를 돌아보니 지나온 편의점은 이미 지나치게 멀다. 다행히 눈 앞 가까운 곳에 편의점이 보이기에, 여전히 멍한 눈으로 다리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세워 둔 채 나는 맥주를 한 캔 사왔다. 슬금슬금 뒤로 돌아가서, 통통한 그녀의 뺨에 맥주캔을 살짝 대어주었다. 소스라치는 녀석.

"다리 같은 걸 만드는 친구들은 머리가 좀 어떻게 된 게 아닐까"

재훈. 29세. 출생 행성 불분명. 무안한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 특기. 따위의 것이 적혀 있는 신분증이 눈앞을 춤춘다. 하지만 진심이다. 역시 다리 같은 걸 만드는 친구들은 머리가 좀 어떻게 된 것이다. 행성간의 다리를 연구하는 차원공학도나, 한강에 다리를 놓기 위한 연구를 하는 토목공학도나 머저리라고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면 이만, 가볼까. 이미 앞장 서서 걷고 있는 그녀를 따라.

그런데 그녀는 도대체, 길을 알고 가는 걸까. 이 근처에 보이는 다리만 세 개. 그리고 조금 멀리 두 개 더. 그 중 한 개는 이계의 심연으로, 한 개는 고향 행성으로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뚜벅 뚜벅, 아까 내가 기댔던 다리 위를 걸어나간다. 걷는다. 맥주캔을 따고. 마시고. 걷는다. 나도 따라. 다 마신 KGB레몬 병을 다리 아래로 강물로 집어던지고. 가방에서 카프리 한 병을 꺼내고. 돌려 따고. 마신다. 그렇게 걷는다. 조금 짙어진 어둠. 조금 짙어진 다리 아래, 우주. 미지근한 공기가 이제는 선선함에 가까워졌다. 다리 끝에 이르면 추워지겠지. 봄이니까.

자동차의 빠른 속도가 만들어내는 적당히 기분좋은 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다리를 걷다가 그녀가 말했다.

"나는 바닷가에서 태어났어요"

응?

"내가 태어난 곳은, 온통 바닷가 뿐이었어요. 행성 전체가 해안이였다구요, 선배.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아.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사는 혹성에는 편의점밖에 없었으니까. 우주의 사람들은 대체로 이상한 곳에서 태어난다. 태어날 수 있는 평범한 곳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지구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그것도 제법 붉어진 얼굴로. 굳이 난간에 기댈 필요도 별로 없을 텐데.

"그래서 다리가 그렇게 예쁜 거에요. 어린 시절. 친구들과 바닷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면서 항상 궁금했어요. 저 크다란 물덩어리 건너에는 무엇이 있는지. 거기에도 다리 같은 게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그런 거 말이에요. 그러면 바다 건너도 구경해 볼 수 있었을텐데. 저 바다 멀리 예쁜 파란 나라를."

결론은 간단하다. 이 친구, 술이 약하다. 캔맥주를 반정도 마시고도 취하는 신비한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다.

"거기에도 다리가 있었으면 기자 따위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텐데. 바다밖에 없었어요. 온통"

그런가. 차라리 다리 따위가 없었더라면 나는 보다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그저 적당히 불평 불만을 내뿜으며 편의점 행성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갔을 텐데. 멀리 보이는 저 별들은 아직도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저 멀리만 보이던 지구도 충분히 아름다웠을 테고. 아름다운 섬광이 춤을 추는 그런 종류의 전쟁도. 사랑도. 모두. 하지만 취한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역시 귀찮다. 이미 20대 후반, 다리가 없건 있건 중요하지 않다. 전쟁은 벌어졌고, 취재를 하고, 사랑은 작년에 끝이 나고, 아직도 지구 취재 임기는 많이 남아 있고, 후배가 오고. 다리가 없건 있건.

"사진이라도 찍어 봐. 다리가 그렇게 예쁘면. 책이라도 내 보는 거야. 도시 서울에만 40개가 넘는 다리가 있다고 어디선가 얼핏 들었어. 40개의 다리를 모두 건너고, 40개의 다리의 영상을 담고, 40개의 다리가 바람에 스치며 연주하는 음악을 녹음하고."

한참을 걸어가다 잠시 멈춰 서, 강 아래를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다리 아래를 흐르는 강이 아름답다. 어째서 강물은 낮이나 밤이나 이해할 수 없는 색으로 흐르는 걸까. 어쨌거나 나는 그런 강 위에 있으니 별다른 문제는 없다.

"와. 정말 그래 볼까요. 다음 번엔 어디부터 하지. 어느 다리가 예쁠까. 여기도 너무 예쁜데."

취한 친구에게 이런 종류의 암시를 던지는 건 좋지 못하다. 이미 그녀는 카메라로 위장된 영상 장비를 꺼내들었다.

"한강대교, 가 참 아름답지. 작년의 내 아지트가 그 근방에 있었는데. 굉장히 아름다워. 근데 너 여기 단기 파견 아니냐"

"에이 선배. 연장하든지 하죠."

나도 취한 걸까. 내친 김에 다음에 한번 같이 가 보자는 이야기까지 했다. 다리가 있건 없건 상관 없는 나이니까. 어이없이 저알콜 드링크 두 병에 취할 수도 있는 나이. 다리 하나를 건너는 일에도 다리가 후들거리려고 하는 그런 나이.

무슨 상관인가. 뒤로 돌아 건너온 다리의 입구를 바라본다. 짙게 깔린 어둠. 반짝거리는 가로등 아래 점멸하는 풍경들. 깜빡이며 강변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들. 무언가 떨어지고 있다는 건 착시 현상일까. 이 정도 거리에서 벚꽃의 꽃잎 같은 것이 보일 리는 없다. 조금 전까지 내가 있던 곳이 저 곳인데. 낮 동안 내내 저 곳에서는 전쟁이 벌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다. 그리고 지금은 여러 연인들이 그 곳을 걸어간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러리라는 확신이 든다. 다리.

역시 다리 같은 건, 없는 것이 좋다. 이어짐은 필요치 않다. 멀리 바라보는 것으로 세상은 충분히 아름답다. 싸울 일도, 사랑할 일도 없이.

때로 가까운 곳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름다운 사람도 있지만.
일테면, 그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