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기억 IV
이 글이 어쩌면 저의 전역인사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미리 인사, 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아직 며칠 더 남았다고는 해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래서 저는 이 글을 일단 인삿말 대신으로 할께요. 의례적인 인삿말을 이제 와서 있는 말 없는 말 지어내는 식으로 작문해야 하는 것이라면 어차피 서로가 원하는 바가 아닐테니. 그동안 함께 해온 저와 여러분 우리는 서로 꽤 할 말이 많은 사이였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죠 의례적인 인삿말이란 건 꼭 할 말없는 사이에나 오가는 말 같잖아요. 저는 끝까지 여러분께 정말로 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가렵니다.
138. 소년의 기억 IV
그때 내 인생은 전례 없는 변화의 파고를 향해 돌진해 나아가고 있었다.
남들이 그러하였듯이, 나 역시 짧은 머리에 교복을 입은 학생이었다. 수능은 코앞으로 다가왔고, 나는 영어를 지지리도 못했다. 그리하여 나는, 절실한 마음으로 외국어영역 단과반 수업을 수강하는 한 명의 위태로운 학생이었다.
처음엔 내가 먼저 말을 걸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마 펜을 빌려달라고. 같은 교실에 친구의 친구, 내가 그 이름까지 알고 있고 어쩌면 나의 친구이자 그의 친구인 정XX와 함께 있을 때 몇 마디 나눠본 적도 없지는 않았을, 같은 학교 교복을 입은 동창 녀석도 하나 있었지만 그에게는 말을 걸지 않았다. 친구의 친구란 대개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들이대지 않는 한 어색한 관계로 굳어지기가 쉬운 법이어서, 새삼스럽게 친한 척 하며 펜을 빌려달라고 하기는 아무래도 불편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마 대신 그 아이에게 말을 걸어 펜을 빌렸던 모양이다.
맹세컨대 결코 딴 뜻은 없었다. 그것은 작전이 아니라 정말로 펜을 빌려야만 하는 존재론적 위기 상황이었고, 그리고 설령 한창 혈기왕성할 나이의 남학생이 학원에서 모르는 여자아이에게 펜을 빌리는 데 약간의 호기심이 작용하였다 한들 그게 어디 허물 삼을 일이겠는가. 어쨌든 그렇게 하여 내게 펜을 빌려주었던 그 소녀는,
키는 어림잡아 160~165㎝에 마른 편이었으며 특이하게도 굉장히 과장된 느낌이 들 정도로 커다란 리본으로 머리를 묶고 있었다. 안경을 쓰고 있었는지 안쓰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만약 쓰고 있었다면 아마 뿔테안경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체적으로 꽤 지적인 인상이었기 때문이다. 교실에 다른 여학생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이유는 정말로 그 소녀가 유일한 여학생이었거나, 혹은 가장 예뻤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아주 썩 예쁘다고 말할 수만은 없었지만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아이가 어떻게 해서 내게 말을 걸게 되었는지는 뚜렷하지 않다. 아니, 그보다도 우리는 어느샌가 슬슬 근처에 붙어앉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이 기억나는 이유는 이게 무슨 종합반도 아닌 단과반에서, 필시 처음에는 전혀 모르는 사이임이 분명했을 교실의 한 여학생과 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정XX의 친구 박XX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교실에 도착해서 자리를 잡자 먼저 와서 저만치 앉아있던 그 아이가 은근슬쩍 내 옆으로 옮겨온 적도 한번쯤 있었던 듯도 싶다. 사실은 나도, 앞 문장의 경우는 비교적 초창기의 일이고 거의 그 언저리에 가서 앉았었던 것 같다. 여전히 정XX의 친구 박XX의 시선을 의식한 채 말이다.
어쨌든, 가까이 앉기 시작한 이후의 일인지 혹은 그 일로 가까이 앉게 된 계기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이가 쉬는 시간에 문득 내게 이런 얘기를 걸어왔다. 자신은 현재 여상을 다니고 있는데 대학 진학에 뜻이 있어서 이렇게 학원에 오게 되었다는. 헌데 아무래도 자기 주변에선 정보를 구하기가 마뜩찮으니 인문계생인 내게 앞으로 많이 물어보고 조언을 구하고 싶다는.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는 일인지라 나는 흔쾌히 그러마고 했다. 맹세컨대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다지 딴 뜻이 없었다. 설령 다소간의 딴 뜻이 없잖아 있었다 해도, 한창 혈기왕성할 나이의 남학생이 처음 보는 여학생의 조심스런 청을 들어주는 것이 무슨 허물삼을 일이겠는가.
그래 좋다, 나도 처음부터 끝까지 추호의 흐트러짐도 없이 결백했다고만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나도 점점 그 아이를 의식하면서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따라서 출석률은 100%였고) 내게 조언을 구하는 그 아이의 문제로 나 역시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친구들은 대개 잘해 보라는 유의 답변을 돌려주었지만 신중한 조언이라기보단 그저 의례적인 말들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다. 아니, 그것이 진정으로 내 입장과 상황을 고려해 신중하게 던져준 조언이었을지라도, 당사자인 나만큼 신중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나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내가 찾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차차 이 묘한 기류의 윤곽은 분명해져갔다. 그 아이는 내게 입시 정보, 즉 인문계생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어떤 공부 방법이라든지 혹은 진로 및 학과 선택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딱히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이메일을, 가르쳐준 주소─핸드폰 번호는 가르쳐주지 않았었거나, 혹은 그 아이 입장에서도 차마 전화까지 하기에는 쑥스러웠는지 모른다─로 이메일을 보내왔는데 그 내용 역시 실무적이라기보다는 친목적이었다. 그러던 중 수능은 점점 다가왔다.
아마 수능 전 마지막 수업이 있던 날이었을 것이다. 수업을 마치고 계단을 내려가던 나는 문득 교실에 필통을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복도와 계단의 불은 꺼져 있었고, 다시 필통을 챙기러 돌아갔다 나오자 함께 수업을 듣던 학생들도 다 내려가고 난 후였다. 아니, 한 명 남아 있었다. 오직 초록빛 비상등만이 아슬아슬하게 계단의 형채를 비추는 어둠 속에서. 그 아이가 서 있었다.
5층 정도 되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서로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내일모레 수능을 보는 수험생들끼리 으레 할 법한, 시험 잘 보라는 유의 뭐 그런 뻔한 얘기들을 나눴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 일 없이 헤어졌다. 다만 시험 끝나고 연락하자는 말과 함께.
나는 연락하지 않았다. 그 아이의 조심스러운 이메일에도 답장하지 않았다. 그 아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혹은 마음에는 들지만 용기가 없어서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다. 나는 합격증을 받아드는 그 순간까지 다른 어떤 것도 손에 쥘 수가 없었다. 내 머릿속에서는 단 한 가지 생각 밖에 수행해내지 못했다. 나는 내 삶 속에 철저하게 갇힌 채, 그 너머의 어떠한 것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땐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내 인생은 그 이후로도 쭉 같은 식이었다. 삶은 지리멸렬했다.
나는 내가 어떻게 손쓸 수 없는 거대한 일들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기력했다. 그래서 체념하고, 다만 그것들이 시간이 지나서 저절로 해결되고 나면 내게도 다른 삶이 펼쳐질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내 삶이 지금과 달라지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나의 적극적인 개입과 노력에 의해서만 쟁취될 수 있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아무리 이 세계가 불가항력적인 것일지라도, 나는 부딪쳐야만 한다. 왜냐하면 오직 그것만이 내 삶의 유일한 변화의 가능성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다시 거대한 변화의 문턱에 서 있다. 곧 온 세계가 변한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는 나의 것이 아닌 세계의 것이기에, 따라서 내게는 불가항력적이다. 그래도, 한번 해보는 거다. 이 하나의 각오를 얻는 데 25년이 걸렸다. 두 번 실패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모든 준비가 끝났다. 앞으로, 8일 남았다.
2006. 8. 1. 火, 자랑스러운 大영일고등당구스쿨 공채 24기 목동의 김프로.
저의 군생활이 전반적으로 이랬다 저랬다는 말은 못하겠지만 책마을과 여러분이 제 군생활의 활력이었다는 사실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자, 그럼 밖에서 뵙겠습니다. 당연히 Never Say Good-Bye이구요. 그럼, 안녕히.
충 성 !
상병 이희웅 (20060802 035143)
음...
좋은 전역인사()입니다...
하지만 아쉬운 소녀군요...
친구한명을 잃어버리셨군요....
아니면 더 큰걸...
허나...
다시 시작하시려는 분께 희망을 드리고 싶군요...
지금다시 이메일을....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웃음_)
병장 노지훈 (20060802 035505)
야근 서고 계시는 군요. 조회수 0.
잘 읽었습니다. 정말
병장 박형주 (20060802 055121)
어머 스물다섯이었어요
병장 김강록 (20060802 062909)
오타입니다. 열일곱인데 그만.
병장 고계영 (20060802 070219)
가시는 군요. 다들. 흠. 회원특집만을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잘 읽었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상병 이영준 (20060802 073142)
수고하셨어요. 지금까지 올려주신 칼럼 잘 읽었답니다.
같은 목동에 사니 언젠가 지나칠지도 모르겠네요.
혹은, 이미 지나쳤을지도...
축하드립니다.
병장 이정수 (20060802 080925)
스물다섯이었구나.
병장 주영준 (20060802 083146)
설마 김강록에게 이런 로맨스가 있었을 줄. 꺽이십 김강록에게.
병장 조주현 (20060802 090809)
25년밖에 안걸리다니,
제가 그때 강록씨같은 각오가 설 수 있었으면 합니다.
상병 김현동 (20060802 092703)
그걸 아셔야 해요. 처음으로 고백하는 건데, 저는 책마을에서 김강록씨 글을 제일 좋아했어요.
(짐짓 엔싱크의 앵앵거리는 목소리가 아닌, 먼데이키즈의 진지한 목소리로)
바이 바이 바이.
병장 강경태 (20060802 133925)
축하드려요. 정말 수고하셨습니다.(음지의 빠돌이)
병장 박종민 (20060802 135704)
...... 삶이 지금과 달라지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나의 적극적인 개입과 노력에 의해서만 쟁취될 수 있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아무리 이 세계가 불가항력적인 것일지라도, 나는 부딪쳐야만 한다. 왜냐하면 오직 그것만이 내 삶의 유일한 변화의 가능성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아아, 대박.
저도 고백합니다.
강록씨의 강철같은 발랄함 뒤에 숨어있는,
그 치열한 고민과 방황을 사랑했습니다.
사실은 저도 이 빡세고, 고되고, 슬프고, 우울한 생(生)이라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힘내며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
까닭없이 질투나고 부러운, 이 미천한 존재하나 감당 못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마지막까지 깨침을 주고 가셔서 감사합니다.
답은 삽질인거죠. 그렇죠
오늘 처음 책을 펴 읽은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가 생각나네요.
[ 인생의 의의를 묻는 자는 그것을 절대 알 수 없고,
그것을 묻지 않는 자는 그 대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
25년이 걸린 그 각오, 언제까지나 충만하기를 빌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병장 박종민 (20060802 141243)
그나저나,
오타입니다. 열일곱인데 그만.
이거 너무 오랫만에 만나는 강록씨 레파토리군요.(웃음)
상병 최태욱 (20060802 152522)
아- 정말, 진짜, 너무 아쉽네요.
그동안 강록씨 글 너무 잘 읽었어요.
수고하셨어요.
병장 김희곤 (20060802 155458)
역시나 김프로!
커밍아웃이 아깝지 않은 분이죠.
사랑해요. 꺄야~~~~
병장 안대섭 (20060802 155718)
하지만 김프로가 사랑하는건 바로 이 몸이라는 사실.
병장 송희석 (20060802 161519)
저거 6편이면 나머지 1~5편은 어딨는거죠
상병 김현동 (20060802 162409)
......있더라도 1, 2, 3만 있을 것 같은데.
병장 주영준 (20060802 163216)
송희석은 김형진 어워드를 노린다.
병장 송희석 (20060802 171207)
아. 저거 4군. 잘못봤다. 흐흐.
병장 김강록 (20060802 173029)
우선, 저는 엄밀하게 말해서 아직 만 23세에 불과합니다. 사사오입에 의거하여 갓 스물을 넘긴 20대 극초반에 해당하지요.
그리고, '소년의 기억' 시리즈는 가령 근래에 재탕해먹은 '만두집 그녀'에서 회고하는 그 시가 바로 '소년의 기억 Ⅲ─부제 옥천만두 그녀'가 되는 뭐 그런 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만두집 그녀'는 '소년의 기억 Ⅲ'의 산문 버전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병장 손동철 (20060804 051008)
가나요 나보다 먼저 아. 내가 처음 볼 때는 일병이었는데. 이놈의 공군 복무기간이란. 그때 강록 씨의 글을 읽으며 불만이 많았습니다. 이거 좀 거만한데. 도대체 당구 얘기는 왜 자꾸 하는거지. 그런데 잘 쓴단 말야. 아우 나는 뭐한 거지. 시간이 흐르면서 익숙해져가고 인정하게 됐습니다. 뭐든지 시간이 흘러야죠. 세상에 대한 강록 씨의 투지는 저의 그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근래 니체주의자로서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전에는 안 보이던 새로운 인물들이 보였습니다. 창세기의 야곱(이스라엘)과 출애굽기의 파라오입니다. 다른 작품들에서도 발견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와 시지프스도 있고 베르세르크의 가츠도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불가항력에 반항하는 자들입니다. 당신의 말대로 세계는 허술해서 한 인간을 끝까지 파멸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어서 나가십시오. 목표는 다르겠지만 나도 곧 출전하겠습니다
병장 박세원 (20060804 081141)
멋져요..브라보~
상병 조성범 (20060804 181225)
영일이라니, 이런이런.
만 23세면 1999년도 입학 저랑 동기인듯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