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론과 매체론의 함정 - 김예찬 님의 논의를 중심으로 , 박원익



1. <88만원 세대>에 대한 김예찬 씨의 매체론적  진단

  그 동안 김예찬 님이 쓴 텍스트, <우리 세대의 텍스트>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의 글은 언제나 저를 놀라게 하는데요. 이것은 세대론과 매체론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논의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활자매체의 위상이 어떻게 88만원 세대 가운데서 극적으로 변화했는지에 대한 고찰이 담겨 있습니다. 88만원 세대를 고찰할 때 그러한 점이 관건입니다. 이것을 징후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88만원 세대>라는 자기규정 자체를 초래했던 한 권의 책이 어떻게 '오독'되고 있는지, 아니 오히려 전혀 읽히고 있지 않는지를 보면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88만원 세대라는 자의식을 갖게 했던 한 권의 책이 정작 당사자들 가운데 제대로 독해되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는 겁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예찬님의 문제의식은 88만원 세대라는 것이 단순히 특수한 사회경제적 곤궁에 빠져 있는 세대적 계층으로만 봐서는 안된다는 것일 겁니다. 88만원 세대라는 기표에는 이보다 더한 곤궁이 얽혀 있는 것이지요. 사실 88만원 세대가 네트워킹을 통해 성공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환경인 인터넷 매체만 보더라도, 거기서는 이미지와 영상이 활자매체를 압도적으로 구축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횡행하는 댓글문화는 88만원 세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난독증'을 전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글루스나 디씨인사이드만 보더라도, 이곳에서 어떤 성공적인 담론이 만들어질 기대를 아예 버리는 것이 좋다고 해야겠죠.(그러나 저는 책마을에 관해서는 상당히 다르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저는 우리 세대 가운데서 '담론'이 만들어질 수 있는 어떤 맹아를 엿보고 있는 중이라 하겠습니다. 가령 물적 토대만 받쳐준다면, 여기서 논의된 글들을 다듬는다면, 그것은 곧바로 '출판'될만한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봤을 때, 어느 정도 문자의 권위, 혹은 문학청년의 이미지가 통용되던 이전의 세대와 우리의 처지는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어떻게 본다면 우리가 어떤 '담론'(이것을 활자매체를 경유하는 것이지요)을 통해서 단결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일 수 없다는 게 김예찬 씨의 문제의식입니다. 과거의 386세대 같은 경우, 혹은 4.19세대 같은 경우, 리영희 교수의 논문을 읽는다든지 혹은 외국(주로 일본)에서 번역된 해적판 철학책을 읽고서 받은 충격이 그들로 하여금 거리에 나서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정치화할 수 있었던 건 지적 충격을 동반했던 일련의 독서경험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세대담론의 기저에는 바로 그들이 청년 시절에 그들의 삶을 뒤흔들었던 일련의 저자들과 저서들이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것을 기대하는 건 88만원 세대 가운데 무리라는 겁니다. 다시 <88만원 세대>라는 한 권의 저서가 적실한 저널리즘적 통찰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담론적 효과가 자꾸만 엉뚱한 방향으로, 그것도 또 다른 상품화(세대규정은 언제나 상품화 논리의 맹아를 품고 있죠)의 가능성으로만 전용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20's choice라는 프로그램만 봐도, 장기하와 얼굴들 신드롬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 대해 한 가지 의문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말하자면 88만원 세대가 이전과 전혀 다른 미디어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과연 우리들에게 변명거리가 될 수 있을지가 문제입니다. 말하자면, '문학청년'이라는 과거의 이미지 역시도, 대중적이었다기보다는 역시나  '전위'의 이미지에 가까웠습니다. 말하자면 시대정신에 대한 표상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다시 말해 그들은 소수였고, 정말로 치열하게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고민했던 청년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일종의 '표상'으로서만 존재했던 건 아닐까요? 말하자면, 그들이 정말로 일궈낸 담론적 성과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저는 우선 그것에 대해 단죄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더 세미나에 열심히 참석했을까요? 오히려 뒤풀이 자리에 더 많은 사람들이 온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사실이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386세대'니 하는 것들, 혹은 그러한 세대담론에 대해서 과연 그 '성과'가 무엇인지를 되묻고 싶습니다. 우리의 과거 세대가 정말로 우리보다 더 치열하고 정합적인 담론을 생산했는지에 대해 되묻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사례로서 저는 한 때 대중적-정치적 지식인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졌던 유시민의 예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그가 쓴 책들은 나중에 가서 거품이 꺼졌고, 누구 말마따라 그가 쓴 책들은 전혀 새로운 게 담겨져  있지 않은 '석사논문' 수준에 불과하다는 게 분명해보이죠. 그렇다면, 과거의 독서대중들의 역량이나 독해력이나 필력에 관한 객관적 지표에 있어서 우리들이 과거의 세대보다 특별히 더 못났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그들만큼의 담론을 만들어낼 역량이 애초에 '거세'되어 있다는 식으로 사태를 묘사하는 건 과연 온당한 일일까요? 


2. 자크 랑시에르의 사례에 대한 독해  

  저는 한 가지 우회로를 통해 이 질문에 대답해보고 싶습니다. 랑시에르는 최근에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저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80년대 미테랑-사르코지 대선에 관한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이미 일전에 장기집권에 성공했던 사회당 후보 미테랑 대통령은 현학취미가 대단한 노인(?)으로 알려져 있었지요. 지식인들과 교분을 맺고, 본인 자신이 책에 대한 상당한 취미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교양 있는 지혜로운 어른이었던 것이지요. 이에 반해 신자유주의적 개혁우파 진영의 떠오르는 후보였던 시라크는, 미테랑으로 표상되는 옛날의 (철학적-관념적) 프랑스를 일소하고, 역량 있고 변화하는 프랑스의 기치를 내걸고 그와 대권을 다투게 됩니다. 그는 수 많은 공약들을 내세우며 프랑스 사회 전반을 효율적으로 변화시키겠다는 수 많은 신자유주의적 개혁안들을 내놓았고, 그는 다수의 지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때(프랑스의 경제성장이 둔화하기 시작했던 신자유주의적 80년대) 이미 철학과 인문학을 애호하는, 지식인의 나라 '프랑스'에 대한 담론적 표상에 균열이 현실 속에서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새롭게 출간된 어려운 철학책(예를 들어 <감시와 처벌>)에 대해 정치인과 일개 경비 아저씨가 카페에서 즉석토론을 버릴 수 있는 나라 프랑스의 이미지는 이제 옛것의 유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이미 프랑스에서도 매체의 변화가 대두되기 시작했고, 티비와 방송매체가 일전의 정당과 정치조직이 수행했던 공적 역할을 상당수를 대체하기 시작했으며, 사람들이 책 대신 책에 대한 토크쇼를 보기 시작한지 오래라는 것이지요. 즉 과거의 68혁명 때처럼, '담론'이 사람들을 거리로 향하게 한 강렬한 경험들이 불가능해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럼에도 '문자의 권위'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 즉 그것이 '표상'으로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철학을 애호하는 나라 프랑스에 대한 '표상'이, 그 표상을 받쳐주던 실질적 역사적 경험이 일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겁니다. 

  미테랑 후보는 바로 이 점을 역으로 이용했습니다. 그는 곧바로 시라크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안'들이 프랑스의 정체성을 분열시키며, 공화국의 유산 자체를 위협할 것이라는 식으로 응수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수 많은 공약을 내세웠던 시라크와 달리, 자신은 아무런 이렇다 할 공약을 내세우지 않고, 다만 철학적-정치적 사유와 담론들로 대표되는 프랑스 공화국의 지적 유산으로서만 프랑스라는 사회가 유지될 수 있음을 강조했지요. 랑시에르의 표현대로라면, 미테랑 후보는 스스로를 문자(매체)에 대한 해석의 권위자로 스스로를 자처했던 것입니다. 일종의 철인-왕, 현인으로서 말입니다. 다시 말해 사회의 재화의 분배를 둘러싼 갈등의 소음에서, 일련의 '메시지'를 해독해내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Dictator('독재자'로 번역되는 이 말은 원래 '받아 적는 사람'이라는 뜻이지요)로서 스스로를 내세운 겁니다. 미디어가 조직해내는 소란, 현란한 이미지, 이것을 통해 표출되는 사회적 공격성 등등에 위기감을 느낀 프랑스인들은, 곧바로 유권자 대부분에 "친애하는 프랑스인에게"로 시작되는 '편지'를 써 보낸 미테랑을 지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상당수의 바쁜 유권자들이 상당한 장문으로 쓰여진 이 '편지'를 읽어볼 시간이 없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편지가 '부쳐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프랑스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또 다시 미테랑은 연임에 성공했던 것입니다. 

  자크 랑시에르는 이러한 사례를 '의고주의'의 예기치 못한 귀환이라고 부릅니다. 말하자면 상당히 의외라는 것이지요. 나중에 미테랑이 물러나고 시라크가 대통령이 되는 수순을 생각해 봤을 때, 사실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랑시에르의 이 일화는, 활자의 권위나 문자적 담론의 권위가 더 이상 실질적으로 의사소통 수단으로서의 비중 있게 기능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권위가 여전히 '표상'으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요. 미테랑은 이 권위의 표상을 이용하여, 각종 친-신자유주의적 매체의 집중포화에도 불구하고 연임에 성공했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중요한 건 미테랑 대통령이 그의 풍부한 교양과 지혜가 담겨 있는 편지를 부쳤다는 사실 자체였습니다. 그걸 제대로 읽어본 사람이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이 점은 예찬 씨가 <88만원 세대>가 심각하게 오독되고 있다고 진단한 것에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거기에 대해 말들이 많지만 제대로 읽은 사람이 당사자들 가운데서 적지요. 그런데 미테랑 후보자가 지지를 호소했던 편지도 심각하게 '오독'되고 있었던 건 마찬가지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석훈과 박권일 씨는 정치적인 소득을 가지지 못했지만, 미테랑은 바로 그 오독 때문에 정치적으로 성공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 '간극'을 사유해야하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이 '간극' 때문에라도, 저는 작금의 상황이 단순히 문자, 활자 텍스트가 제대로 읽히지 않는다, 혹은 실질적인 의사소통의 비중이 줄었다는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3. 저자의 권위란 무엇인가

  이글루스나 디씨인사이드와 같은 커뮤니티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거기서 상대방을 공격할 때 자주 사용되는 '난독증'이라는 용어(ex"님 난독증 쩌네요")는 우리가 한 마디로 '난독증'의 세대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싸움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 바로 이 인터넷 댓글 싸움에서 인용되는 저자의 권위입니다. 말하자면, 실질적으로 아무도 제대로 읽지 않지만, 그것이 인용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권위를 부여하는 것, 이것은 문자 내지는 활자의 권위가 '표상'으로서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은 80년대 대학가라고 해서 크게 달랐을까요? 우리는 과거의 프랑스에 비해서도 한층 상황이 더 나빴는데, 옛 시대를 풍미했던 문학청년의 존재 역시도 그러한 '표상'으로서 존재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합니다.  

  그리고 간과하지 말아야할 것은 우리가 활자 텍스트에 투자하는 자원이 이전에 비해 늘면 늘지 줄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읽고 사유하는 데 투자해야할 모든 역량을 우리는 이제 예컨대 '수험공부'에 투자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다시 랑시에르가 말한 '감각의 분할'이라는 용어를 다시 꺼내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지적 역량을 가로지르는 어떤 '분할'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쉬는 시간'에 음악 전문 채널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만큼 그러한 활동에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젠가는 그만한 시간의 갑절 이상으로, 책상머리에 앉아서 다시 자기개발서를 들여다봐야 할테니까요.(저만 해도 그러한 죄책감에 언제나 사로잡혀 있습니다) 책상머리에 앉아 있지 않은 시간들은, 가령 팬질이나 디씨질은 '잉여'로 표상되는 실정이지요. 중요한  건 이러한 분할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잉여적인 활동'으로서 책을 읽는다는 것, 혹은 사유를 실천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주변에게 뜨악하게 받아들여지는 게 현실입니다. 우리는 흔히 "쉬는 시간에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라"는 초자아의 압력에 노출되어 있지요. 그럴수록 더욱 디씨질이나, 다른 잉여활동에 매진하는 식의 악순환에 빠져버리게 되지요.... 이때 역시 중요한 건 이러한 쉬는 시간에 철학책을 읽는 무쓸모한 활동이, 영어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는 것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지요. 랑시에르가 기존의 감각적 분할을 재분할하고 가로지른다는 게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지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무쓸모한 활동을 하더라도, 내가 여러분과 그리 다르지 않은 삶의 질을 향유한다는 것,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겠지요.   

  다시 말씀드리자면, 저는 저자의 권위, 혹은 텍스트의 권위, 활자매체가 지닌 아우라를 아무리 부정해봤자, 그것이 '표상'으로서 여전히 남는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문자매체를 독해하는 능력이라는 게 부와 권력을 분배받는 데 있어 여전히 중요한 지표(고시제도나 각종 자격증 시험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라는 것 또한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만일 막연하게 저자가 지닌 부당한 권위를 가열차게 비판한다든지, 아무도 진지하게 책을 읽지 않는 요새 세태를 운명론적으로 서술한다고 해도, 이런 것들이 오히려 앞서 말했듯, 텍스트나 문자매체와 그에 대한 접근능력이 부와 권력 혹은 권위의 독점적 척도로서 받아들여지는 사태는 악화되면 악화되었지, 더 나아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겨냥해야할 사태는 대중문화 속에서 일어나는 매체론적 변화라기보다는, 그러한 매체론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는 궁극적인 텍스트의 권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러한 권위가, 진지한 텍스트가 사라진 요새의 인터넷 공간에서조차 (왜곡된 형태로) 범람하고 있는 사실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권위를 '우리 편'으로 가져오는 것이라는 것을 저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천군만마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요. 저는 가령 고시 수험서의 권위 있는 저자(요새의 정X찬 씨와 같은 자들이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것은 그가 정교수 자리에서 제대로 된 연구논문 하나 내지 않고 고시 수험서만으로 명성과 부를 쌓은 사실을 완벽하게 무시해야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가 쓴 것과 우리가 사유한 텍스트가 같은 '층위'에 놓일 때, 저는 지적평등이 궁극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예찬 씨가 최근에 소개한 '한윤형' 씨 역시, 일반 대중교양서 수준의 독서경함만으로도 어떤 식자들이 해내지 못한 작업을 해내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한윤형이 모종의 '지적평등'을 증명했다면, 그는 궁극적으로 한윤형으로서 자신의 '현존' 자체를 그러한 증명으로서 조직했다고 봐야겠지요. 말하자면 한윤형이라는 존재만으로도 우리는 용기를 얻을 수 있다 하겠습니다. 


상병 정성근 
  사실 책을 읽거나 사유를 실천한다는 행위가 잉여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자체가 비극이지요. 영어 단어 하나를 더 외우면 우리의 자아를 성장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가? 라는 질문이 자동적으로 나와야겠지만 그건 차지하고. 
앞으로 우리가 이뤄나가야 할 궁극적인 목표가 지적평등이라면, 결국 권위가 배제된 상태에서 우리의 텍스트와 기존의 권위를 가진 텍스트(뭐 예시로 있군요. 고시 수험서의 권위 있는 저자)가 동일한 잣대 위에서 평가받아야 한다고 보는데, 글쎄요. 참으로 길고도 어려운 여정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지않을 수 없군요. 일단 고정된 인식(우리의 텍스트에 대해 저것은 무슨 듣보잡이냐 이런식의)부터 파괴하는 것이 우선되야 하지 않을까요? 


상병 박원익 
  글쎄요, 제가 '권위'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했는지에 대해서는 과거에 제가 쓴 글을 참조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저는 권위를 '배제'하거나, 권위를 파괴하거나, 그런 식의 선전을 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지적 평등이라는 게, 궁극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면, 문자가 지닌 권위(미테랑 대통령이 극적으로 이용했던 바로 그것)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한에서만 가능한 것이지요. 


일병 지승인 
  원익님,잘읽었어요. 여태까지 쭉 글을 읽어오면서도 아무말도 할 수 없었던 건 그만큼 제 독해력의 부재-난독증 덕분인가요 허허허. 그렇다기 보다는, 아무래도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맥락적인 부분들이 적었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의 탓으로 돌려보고 싶군요. 
권위에 대해서는 앞서 책마을에서도 많은 글들이 쏟아졌지만, 저는 이제 어느정도 스스로의 방향성을 잡았고 그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결국 '권위'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권위에 넙죽 엎드려서는 아이고 하나님 할게 아니라, 그 권위만큼의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역량을 함께 키워나가자는 거죠. 그 '간극'을 좁히고자 발버둥치는 건 권위가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권위'들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때문에 중요한건 현시점에 텍스트가 얼마나 오독되고 있느냐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 오독으로 시작해서(끌어들여서) 권위로 다가가는 과정. 
때문에 현재의 책마을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저는 매일매일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군요. 게다가 왠지 점점 친절해지는 원익님의 글까지. 다만 제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그게 아직은 고민이되네요. 과연, 우리가 얼마나 간극을 좁혀나갈지 궁금! 


상병 박원익 
  참, 제가 머리에 총을 맞았는지, 시라크를 사르코지로 지금까지 써 왔는데요, 미테랑하고 사르코지는 다들 알다시피 대선에서 맞붙은 적은 없습니다! 본문 수정했고, 이상한 점 있으면 바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지승인/'난독증'이라는 건, 제 생각에는 역량의 문제라기보다는 일종의 사회심리적 장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웃음.
병장 이 원 
  원익/ 사회심리적 장애, 대략 동감해요. 난독증이라는거, 사실 글은 잘 읽히거든요. 
어쩌면 많은 공황상태가 나타난것도, 우연이 아니라는이야기겟죠. 후후 
이겨가야겟죠. 후후 지금 사회는 그야말로 '무법천지'니까요. 하하 
더욱더 텍스트를 읽고, 권위에 파묻히는것보다는, 그 권위를 뚫고가서, 
더 나은 텍스트의 생산과, 높은 정신문화를 이뤄가자!라고 생각해 봤네요. 
생각할 거리를 주셔서 감사하네요. 허허 
(이미 난독증'쩌는'답글인지도 모르겟지만...껄껄) 


상병 정성근 
  흐음 사회심리적 장애라면, 결국 난독증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내용을 부정한다는 뜻이 되겠군요.(머엉) 
텍스트를 바로 세우는 건 어쩌면 지금 세상에 대두되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데 있어 일종의 기치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를 통해 길을 잃고 있는 사람들을 결집하면 결국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겠지요. 


병장 이기범 
  원익씨가 생각하는 권위의 개념을 다시한번 느껴보기 위해 옛글부터 주욱 읽고 왔습니다. 무언가 딱 부러지게 말할 순 없지만 그래도 어렴풋 하게 나마 느껴지는 울림이 가슴을 두근대게 하는군요. 요즘 책마을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서, 그리고 몃몃 분들의 권위가 느껴지는 글들을 보면서 이 모습을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사회에 적용시켜 본다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들 스스로 그런 권위자가 되어야 겠지요. 
우리가 과거보다 특별히 더 못낫다기 보다는, 예전보다 그것을 훼방하는 방해세력(각종 매체라고 할까요)이 많다고 할까요. 그로 인해 더 이상 텍스트가 가지는 효력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생각에 대해 원익씨는 그것은 예전에도 지금 상황과 많은 차이가 없었다. 가령 예전에도 그것은 대중적이라기 보다는 전위로서의 성격이 강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사례로 제시되는 프랑스의 이야기. 물론 그 사례가 우리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다면 우리도 그 간극을 사유해야 겠지요. 아니 적용이 되고 안되고를 떠나서 이미 그 사유 자체는 상당히 중요한 일로 보여집니다. 다만 문제는 방법입니다. 미테랑 후보가 대중들에게 편지를 보낸 것과 대응할 수 있는 어떤 '행동'을 우리는 고민해 보아야 할 것 같은데요. 그 방법적인 측면에서, 1차적인 텍스트에 우리가 목을 매달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찬씨도 텍스트의 효력에 대해서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만, 현재 사회의 모습으로는 분명 텍스트가 과거보다 그 접근성의 부분(스크롤의 압박)에서 많이 떨어져 보이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조금 더 친숙한 매개체로서의 접근을 시도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상병 박원익 
  이원/하하 난독증이라뇨, 그런 당치도 않은... 
정성근/가령 저는 '난독증'이라는 말을 통해 이X루스나 디씨라는 매체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겁니다. 뭐랄까 거긴 멀쩡한 사람들도 난독증으로 수렴하는 어떤 분위기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물론 거기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이기범/맞는 말씀입니다. 사실 저는 두 가지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데, 하나는 방금 양제열님의 글에서 제안되었고, 이미 댓글로서 호응이 뒤따른 생활공동체와 같은 실질적인 실천적 대안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학부생들이 텍스트를 생산해내고 독해해내는 지식-공동체 내지는 지식 꼬뮨과 같은 것입니다. '행동'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 두 대안이 접합되는 지점에서 그 행동이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학부생들이 정치화되는 동시에 자신만의 담론과 사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그 사회는 필연적으로 커다란 변동을 겪지 않을 수 없지요. 저는 그게 68혁X과 일본 전공투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68의 경우는 학부생들이 조직한 각종 세미나라든지, 학회들이 기존의 지식권력을 전복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맡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공투의 경우, 그들 특유의 고준담론에 매몰되어 고립되어 각개격파당하고 말았죠.... 


병장 정근영 
  오오 
인상깊은 글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책마을에 관해서는 상당히 다르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저는 우리 세대 가운데서 '담론'이 만들어질 수 있는 어떤 맹아를 엿보고 있는 중이라 하겠습니다. 가령 물적 토대만 받쳐준다면, 여기서 논의된 글들을 다듬는다면, 그것은 곧바로 '출판'될만한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지나가는듯이 괄호안에 넣으셨지만, 오히려 이 문장이 원익씨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스스로 1차 텍스트를 생산해서, 아직도 '표상'으로서의 권위를 유지하고 있는 언어와 활자의 권위자가 되자!' 


병장 윤정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석훈과 박권일 씨는 정치적인 소득을 가지지 못했지만, 미테랑은 바로 그 오독 때문에 정치적으로 성공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 '간극'을 사유해야하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크앙. 저는 역시 원익님이 지젝의 관점을 수용하고 계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이런 걸 '시차적 관점'이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미테랑의 사례는 88만원 세대의 독해에 관한 저의 무지한 생각을 다시금 일깨우게 하네요. 잘 읽었어요.(난독했는지도 모르지만. 크크) 
여하건 저는, 텍스트의 '권위'와 '독해'사이의 간극, - 우리가 어떤 저자의 권위적 명제를 동반한 모종의 선언을 읽을 때처럼 - 을 약간 확장(변형)시킨다면, 그 권위를 되찾을 방안을 찾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설명하자면, 간극이라는 것은 결국 보편적 해석의 지배를 '거의' 받지 않는 공간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사유함을 통해 우리에게로의 의미의 지평을 확대시킬 수 있다는 것이지요. 상징계로서의 인식을 실재계로서의 인식으로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너무 오바하는 감이 있지만) 물론,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그것이 '개인적인(주관적) 사유를 통해서는' 상징계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의도하던 간에, 어떤 욕망을 그 속에 무의식적으로 내재시키던 간에, 그것의 '의미'는 이미 처음에 벌어진 '간극'속의 그 의미가 아니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된 의미가 모여 어떤 변증법적 '결과물'을 만들어낼 때, 우리는 그 속에서 지금과는 다른 색다른 '테제'를 발견해낼 지도 모릅니다. 
부연하자면, 결국 우리가 텍스트의 권위와 독해의 과정속에서 해결해나가야 할 간극이라는 <공간>을 사유하는 것은, 결론적으로 간극의 벌어진 틈을 비집고 들어가, 그 속에서 사회정치적 생채기를 발견하고, 그 상처의 치료를 위해 발벗고 나설 '이유'를 만들어주는 중요한 시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하여 그 이유는 우리가 현상을 설명하는 무기로써 우리만의 ‘1차 문헌’의 텍스트적 권위를 찾아가는 중요한 활로가 되지 않을까요? 


병장 김태완 
  책마을 시즌 2가 생각났습니다. 텍스트의 위대함을 굳건하게 믿고 있는 자들. '텍스트 포스'가 풍겨져 나오는군요. 
그런데 의문드는 점이 있습니다. 원익님께서는 텍스트를 안읽는 현상이 텍스트를 많이 다뤄보고 안보고의 차이에서 나오는 역량차이 혹은 텍스트에서 뿜어져나오는 권위에 눌리는 듯한 느낌 때문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심리적 장애 때문이라 진단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현시대의 글을 읽지 않는 수많은 청년들에게 심리적 장애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자칫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진짜 어려워서 혹은 배경지식이 부족해서 못읽는 사람도 많습니다. 사실 저도 어려워서 독해가 잘 안된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변명하지 말고 읽어라. 그리고 독해해 내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와 같이 사유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예전의 사례를 예시로 드시며 텍스트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표상이 될 수 있다고 하셨는데, 편지공략과 같은 사례는 극히 드문 경우인 것 같습니다. 그러한 사례는 선거에 무관심한 우리 20대에게 해당이 되지 않다고 봅니다. 또한 이는 잠시 텍스트가 매체의 허를 찌른 것 뿐이지 텍스트가 아직 표상으로서의 권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즉, 텍스트가 아직 매체에게 뒤쳐지지 않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 하기에 근거가 빈약하지 않나 싶다는 겁니다. 
전 확실히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대처해 나가는 것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텍스트는 확실히 영상에 비해 권위를 잃었습니다. 시대정신의 표상으로써는 텍스트가 더 우월할 수 있습니다. 변화를 꿈꾸는 소수자들은 텍스트를 선호시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현시대의 흐름 위에서 표류하는 사람들에게 텍스트는 더이상 표상이 되지 않습니다. 텍스트는 이제 표상으로서 권위적으로 다가오기 보다는 어렵고 꺼려지고 불편한 느낌으로서 권위적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여전히 지난 텍스트의 광명한 시절에 대한 집착을 끊지 못하는 듯한 태도(수많은 청년들에게 심리적 장애가 있다는 식의)들은 이제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병장 김예찬 
  제가 의심하게 되는 것은, 과연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프랑스와 같이 '권위 있는 텍스트를 존중하는 지적 유산'의 영향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원익님 말씀대로 활자 텍스트 자체는 한국에서 어떤 '성공'의 수단으로 여겨졌고, 그만큼 존중되어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어느 정도 미심쩍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게 (물론 이러한 생각이 세대론이라는 함정에 빠진 결과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80년대와 00년대 사이에서 '텍스트를 대하는 태도'가 변하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권위라는 것은 단지 '문화', 혹은 '스타일'에 그치게 된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잔류물'이 되어버린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원익님이 저보다 훨씬 잘 이해하고 있으리라고 믿지만, 저는 '근대 문학의 종언'이라는 것은 한국에서 그러한 의미에서 적용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젠가 홍명교님이 '청산주의자'들, '90년대 중반에 쏟아져나온 유수한 R출신 작가들'을 이야기했었죠. 이들이야 말로 문학에서 "'낭만적 아이러니'에서 '아이러니'가 빠지고 낭만적만 남게" 만들어버린 주역이겠죠. 그리고 이러한 청산주의자들은 '문학'에만 그쳤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른바 '학계' 역시 마찬가지로 '시대를 이론으로 극복하려던 시도'에서 어떤 '역사성'이 무화되고 이론만 남은 상황이구요. 더 나쁜 건 90년대의 '대중 문화 풍조' - 이를테면 서태지와 아이들과 X 세대 담론, 혹은 90년대 말 홍대 인디 문화에서 '뭔가' 해보려고 했던 사람들이라든지, 소싯적 변희재의 <스타 비평>이라든지 - 가 실질적인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고 오히려 이러한 '권위 -> 스타일'을 전반적으로 조장한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만.. 
원익님이 책마을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는지 아직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설령 우리의 글들이 '출판' 된다고 하여도 그 것이 어떤 울림을 가져올수 있을지는 조금 비관적으로 생각하게 되는데요, 이를테면 한윤형의 책이 '안팔리는' 현상이나, 김규항이나 고종석 같은 나름 '권위(?) 있는' 저자들의 책도 1000부에 못미치는 것을 보면서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상병 정성근 
  결국 의견은 (텍스트의)권위를 회복하고 그 권위를 찾아오는 것과 권위의 상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권위를 찾아야 하는 것으로 나눠지는 느낌이군요. 
확실히 이제 자신의 취미에 "진지하게" 독서를 써 넣는 사람은 매우 적어보입니다. 텍스트가 그 권위를 예전보다 상실했다는 점도 부인 할 수 없구요.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은 미디어가 떠들어대는 "텍스트의 종언" 같은 건 이르다고 봅니다. 문자의 힘이 남아있는 한 텍스트는 아직 살아있으니까요. 예찬씨가 말한 대로 문화, 스타일에 그치는 권위라면 "나는 ○○한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아 내 인생이 바뀌었다." 라는 사례같은 건 나오지 않겠지요. 그러나 분명히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아 현실에 적용하는 일련의 사이클은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안팔리는' 혹은 '1000부에 못미치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단 한 명의 독자라도 (우리의 텍스트로 말미암아)공명을 일으키게 할 수 있는가?" 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병장 김지호 
  하나만 더 볼게요. 
우리 세대는 컴퓨터가 아마 일찍 시작하신 분은 도스부터 하셨겠지만, 어쨌건 텍스트 중심이었던 도스에서 그래픽 중심의 윈도우로 넘어왔습니다. 그때부터 컴퓨터 하면 그래픽 중심의 것으로 많이들 인식합니다. (실제로 지금도 그렇게 보입니다) 
컴퓨터가 시대의 한 흐름을 장식하고 있다 해도 과한 표현이 아닐 지금, 텍스트보다 당연히 시인성 좋고 이해하기 쉬운 그래픽이 대세가 된 것은 당연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다보니 그래픽을 사람들이 더 즐기게 되고, 자연스럽게 텍스트는 묻히고 묻히게 됩니다. 더 즐거운 거, 더 쉬운 거를 추구하다 보니 활자만 주루룩 주루룩 적혀 있는 텍스트를 이용해서 사고를 하고 그 문화를 만들어 나가려는 것은 자꾸 뒤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란 것은 원익님뿐만이 아니라 많은 여기 계시는 분들께서 지적을 하셨습니다. 점점 가벼움을 추구해 나가는 현 세태, 하지만 그 가벼움이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없는 부분은 묵직한(?) 텍스트가 들어가 줘야만 합니다. 
미래사회를 지식정보화사회라고들 표현하지요. 어쩌면 그래픽 세대에서 텍스트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가 지식정보화사회에서 살아 남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물론 그래픽+텍스트겠지요. 그래픽만으로도 힘들고, 텍스트만으론 또 시대를 좇을 수 없을 테니까요. 


상병 박원익 
  윤정기/또 한 분의 진지한 지젝 독자를 만나게 되었군요(웃음), 사실 지젝을 의식한 건 아니지만 지젝에 대한 논의는 (사용된 개념들이 과연 적실했는지에 대한 몇 가지 유보조항을 달자면) 저도 대부분 동의합니다. 사실 텍스트가 실제로 수용되고 있는 현실과, 그 텍스트가 여전히 가지고 있는 권위 간의 '간극' 속에서 유지되고 있는 긴장을 파고드는 게 관건이겠지요. 이 점에 관해서, 저는 예찬 씨의 비관론을 전혀 공유하고 있지 않다고 해야겠습니다. 

김태완/확실히 인정할 건 인정하고 넘어가자는 데 저도 동의합니다. 요새 책을 다들 안 읽는 건 사실이지요. 김태완 님은 저에게 '실증적'인 근거를 제시할 걸 요구했는데, 이는 사실 저에게 매우 뼈 아픈 지적입니다. 하지만, 저에게 중요한 건 텍스트가 수용기반이 허물어진 제반 현상에 대한 명징한 '반례'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표상으로서 텍스트의 권위가 남아 있다는 몇 가지 애매한 '징후'들입니다. 우리는 앞서 텍스트의 위기에 대한 것에 이런 저런, 그것도 매우 완벽한 사회학적 지식을 획득했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이 믿음에 역행하는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말씀하셨듯이 미테랑의 사례가 특수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면, 우리들이 얻을 수 있는 '일반적 사례'는 대체 어디 있을까요? 저는 여러분에게 희망을 가질 걸 강권하는 게 아니라, 좀 더 철저하게 절망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입니다. 오히려 더 나쁜 소식은 텍스트가 몰락하고 새 시대가 와야할 것 같은데, 그런 것이 도래하기는커녕 오히려 텍스트의 권위가 음화된 모습으로 다시 회귀하고 있다는 것이죠. '의고주의의 귀환'이라는 게 바로 그런 것이지요. 
심리장애라는 표현이 불쾌했다면 사죄드립니다. 하지만 제가 의도했던 건, 상당수가 지적 장애를 앓고 있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정 반대이지요. 말하자면 텍스트에 대한 역량에 있어서 그렇게 딸리지 않으면서, 스스로에게 모욕감을 주는 걸 즐긴달까요? 

김예찬/예찬님의 입장에서 한윤형이 '안팔리는' 것을 보고 걱정이 된다면, 저는 오히려 한윤형이 안팔리는 게 그렇게 엄청난 위기인지에 대해 사실 의아스럽습니다. 저는 오히려 '안 팔리는 것'에서 위기를 찾는 것이야말로 위기의 본질을 축소하는 거라는 측면에서,한국문학의 위기를 그것이 '안팔리는' 것에서 찾곤 하는 조영일 씨에 대해 줄곧 의문점을 가져왔지요. 하긴 그러다가도 그는 어떤 면에서 특정 작품이 '너무나 잘 팔리는' 것에서 또한 위기를 찾는 쪽으로 급선회하기도 하죠. 
예찬님이 말씀하셨다시피, 80년대의 텍스트에 대한 태도가 지금의 태도와 엄청난 차이가 있다면, 저는 오히려 텍스트가 실제로 독해되고 생산되는 양상(하부구조)과 그것이 지닌 권위에 대한 표상(상부구조) 사이의 간극이 더 넓혀졌다는 것에서 그 차이를 찾고 싶습니다. 평소에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이지만, 언젠가 스포츠맨 출신이었던 전도사님이 철학에 관심 있다고 한 저에게 대뜸 "대학생 때 칸트와 헤겔 정도는 읽어두는 게 기본 아니겠니?"라고 반문하신 겁니다. 여기에 저는 큰 충격을 받았는데, 그의 지적 포부와 역량에 충격을 받은 게 아니라, 그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 헤겔과 칸트의 번역이 얼마나 변변치 않았는지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그가 내뱉은 언설에서 형언할 수 없는 이물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그때와 사정이 다르다면, 나아진 점은, 제대로 된 번역이 이제서야 나온다는 점과, 나빠진 점은 책을 직접 사서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다소 줄었다는 점 정도이지요. 
만약 텍스트의 위기라는 게 있었다면, 저는 그것이 80년대 또한 관통하고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좋았던 옛 시절에 대한 향수를 처음부터 버려야합니다. 자본론의 예를 들자면, 그건 초판 인쇄 직후부터 절판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세계를 뒤흔든 이 책은 19세기 후반 유럽 출판계에서 어떤 위상이었습니까? 파리 코뮨 때, 읽힐 법도 했떤 콩사탕 선언은 실제로는 아예 읽혀지지도 않지 않았습니까? 

마지막으로, 저는 여기서 잣대의 비일관성을 지적하고 싶은데, 만약 새로운 매체환경 속에서 촉발된 텍스트의 위기가 출판상의 위기로 발현된다고 말할 때, 문제되는 건 그것이 기존에 통용되던 텍스트의 가치를 급진적으로 폐기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텍스트(출판물)의 위기를 지나치게 텍스트-활자 중심적인 잣대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부터, 여러분들이 저에게 '텍스트의 시대는 끝났다' '어서 그것을 인정하라'고 강변하면 안되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라캉의 '세미나'와 '에크리'는 푸코나 들뢰즈 같은 흥행 철학자들에 비하면, 얼마나 팔렸던가요? 자크 알랭 밀레는 나중에 서문에 대놓고 그의 책이 '읽히지 않기' 위해 쓰여졌다고 선언을 합니다. 오히려 출판물이 팔리지 않을 때야말로, 그처럼 '읽히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고 선언하는 용기 있는 작가와 사상가들이 더 필요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병장 김태완 
  원익님은 소수정예를 필요로 하시고 갈망하시는군요. 그리고 그들의 사상이나 세계관들은 다수에게 전파가 되지 않아도 크게 상관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구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우리 청년들이 그 많은 사상가들의 여러 생각들을 일일이 다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100명중 한명이 라캉의 책을 읽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저 그러한 세계를 사유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뭉쳐서 토의하고 고민하면 될 것을 말이죠. 그리고 지호님의 말씀처럼 경쟁사회에서 텍스트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가 지식정보화사회에서 살아 남을 전망이 크니 다른 사람이 책을 읽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나만 잘하고 나만 성공해서 살아남으면 되는 건죠 뭐. 
현 시대를 향유하는 20대들은 전체적으로 8~90년대의 20대보다 쾌락적이고 심플한 것을 추구합니다. 책을 보며 사유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 보다 영상을 보며 그저 즐기며 시간 보내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다보면 모르는 새에 점점 20대가 기득권 층에게 밀리고 억압받습니다. 취업란에 허덕이는 많은 실업청년들의 모습은 차후 저녁먹고 나서의 내 모습입니다. 20대는 이제 상품공략 대상이지 창출인의 일부가 아닙니다. 이렇게도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20대. 그냥 난 해당되지 않는다며 나몰라라 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원익님의 말씀대로 무언가의 변혁이 필요 없이 그대로 텍스트의 권위를 믿고 지금과 같은 텍스트 제작 형태를 고수해도 되는 지 말입니다. 


상병 박원익 
  저는 김태완님의 비아냥거림이, 김태완님의 비관론만큼이나 '전략적'이라고, 혹은 '방법적'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웃음) 왜 데카르트가 세상의 모든 지식을 회의할 때도 그것은 단지 '방법적 회의'일 뿐이지요. 저는 태완님을 비롯해 몇몇 분들이 재생산하는 모종의 비관론이, 지나치게 어둡고 비관적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자처하는 것만큼 충분히 비관적이지 못하다는 데서 위화감을 느낍니다. 가령, 어떤 대상을 다시 되찾기 위해 일부러 잃어버리는 속임수가 쓰이는 기분이지요. 
가령 텍스트의 권위를 강조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제가 보았을 때 누구보다 텍스트주의자이며 텍스트를 강조하는 건 김태완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책마을 사람들 대다수가 그렇지요. 저는 텍스트의 권위를 바로 확립하자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비가시적 권위, 신비한 아우라를 접근 가능한 것으로 만들자는 입장이기 때문에, 마치 저를 퇴행적인 권위주의자로 몰려는 김태완님의 말씀에 수긍하기 힘든 부분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오히려 퇴행적인 구석이 있다면 태완님의 포지션에 있다고 저는 공격하고 싶은데, 가령 여전히 88만원 세대의 문제를 그들의 취업난이나, 상품공략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층위에서만 찾는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태완님이 말씀하시는 '변혁'은 어떤 건가요? 고작 언젠가 실업난에 허덕일지도 모른다는 게 태완님의 문제인가요? 사실 저는 예찬님이나 태완님이 단지 사회경제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88만원세대라는 기표에 얽힌 보다 근본적인 곤궁을 지적하고 있다는 데서 반가움을 느꼈습니다. 
제가 소수정예를 필요로 하고 갈망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제가 '바디우주의자'라는 점에서 그 말은 부분적으로나마 옳습니다(웃음). 다만 정정해야할 게, 제가 필요한 건 소수정예가 아니라 소수의 투사들이며, 그들만으로도 당장 충분히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게 생각이지요. 


병장 김태완 
  사실 조금 비아냥거린 감이 없지 않습니다. 원익님의 웃음은 참으로 무섭게 느껴지는군요.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를 드리는 바입니다. 
사람에게 있어 의식주 해결은 그 무엇보다 우선시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현시대에서 의식주는 돈으로 밖에 해결이 안됩니다. 내가 주체적으로 돈을 벌지 못하면 아무리 계획한 꿈이 원대하다 할지라도 기를 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희 집은 그렇게 잘사는 편이 아닙니다. 그런데 전 재수, 삼수를 하고 사립대학에 들어가는 참사를 낳았습니다. 부모님께 어마어마한 빚을 진 셈이지요. 아직 졸업하려면 멀었는데 그 등록금들은 이제 또 어찌 감달할까요. 대학을 때려 치우고 일하러 나가 돈을 갚겠다고 말하기도 부끄럽습니다. 그냥 아무 신경쓰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서 성공할 생각이나 하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살 수 없었습니다. 발언권과 내 삶에 대한 주체성을 잃은 셈이지요. 원익님께서는 저를 보고 텍스트나 88만원세대들에 대한 생각이 지나치게 어둡고 비관적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자처하는 것만큼 충분히 비관적이지 못한 것 같다는 데에서 위화감을 느낀다고 하셨는데,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속임수 따위가 아닙니다. 제가 사회경제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 실생활과 그것들이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전 궁에서 나가서까지 소수의 투사중 하나로서 근본적인 곤궁에 대한 근원적 해결을 제시할 만한 재목도 되지 않을 뿐더러 그러한 여건도 저에게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전 제 자신이 88만원세대이란 것과 제 자신이 88만원세대와 비슷한 곤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상적으로 보이는 것을 쫓으며 자칫 잘못하여 텍스트 안에서만 맴도는 상황에 빠지는 것보다 실생활에 적용되는, 내가 조금 더 성장할 수 있는 타계책을 찾고 싶은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텍스트의 변혁 부분에서 턱 막혔는데요. 이는 제가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원익님과 같은 투사분들이 제시하고 이끌어 주셔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전 텍스트의 종언을 옹호한 사람입니다. 또한 저에겐 그런 변혁을 제시할만한 지식 또한 재반되어 있지 않습니다. 글을 읽고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문제에 대해 실증적으로 판단하고 비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텍스트주의자는 아닙니다. 저녁을 먹으면 영상을 더 선호할 가능성이 다분히 있는 88만원 세대 중 하나일 뿐입니다. 



병장 김예찬 
  태완님은 스스로 '투사가 될 재목이 못된다'고 하시는데, 그 투사라는 것에 어떤 자격이나 조건을 미리 지워놓는 것 자체가 어떤 패배적인 자기 합리화, 혹은 자기 변호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원익님처럼 랑시에르를 빌려서 이야기해보자면, 그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던 '역사 상식'을 뒤집어 놓습니다. 그는 수년 간 고문서를 뒤지면서 작업한 결과로, 계몽적 지식인들에 '의하여' 노동자들이 스스로 계급 의식을 자각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노동자들 스스로 밤마다 책을 읽고 시를 쓰면서 '정치적 주체'로 나아가고 있었다는 증거를 내놓습니다. 이와 연결되는 작업으로, 그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부르주아-지식인/노동자-무지렁이'의 도식을 거부하고 '지적 평등'을 선언합니다. 이 부분 부터 시작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요, 
원익님은 '철학은 어렵다'라는 말이, 그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애정이나 관심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단호하게 배격되어야 할 계급 프로파간다(?)라고 선언하고 싶습니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죠. 여기서 철학을 '변혁'이나, 혹은 '투쟁'으로, '투사'로 바꾸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누구나' 투사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가능의 문제이기도 하고, 또 필연의 문제이기도 하죠. (정말 어쩔 수 없는 삶의 조건 속에서 '투사'가 될 수 밖에 없는 경우를 너무나 자주 만나게 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물론 태완님의 고민을 십분 이해합니다. 저도 태완님과 거의 마찬가지의 상황이니까요. 하지만 그 것은 태완님, 혹은 저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죠. 아마 책마을의 거의 모든 이들이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을겁니다. (혹은 그 것보다 더 암담한.) 
'텍스트'로 우리 세대를 설득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저도 회의하게 되지만, 적어도 그 형식이 바뀌는 한이 있더라도 그 내용 자체는 원익님이 말씀하신 바 대로, '1차 텍스트'에 대한 독해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1차 텍스트'는 바로 태완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독법을 담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흔히들 말하는, '고전의 지혜'라는게 바로 이런 것일지도 모르지요. 여기서 시작하지 않으면, 어떤 담론도 실패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지요. 어떤 문제 상황을 돌파해냈던 '1차 텍스트'야 말로 우리의 문제 상황을 돌파하게 해줄 단서가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