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이성 
 병장 임정우 03-16 10:29 | HIT : 307 



 어제 뉴스에서 유괴사건에 대해 보도를 했다. 아이가 유괴되고, 유괴범이 전화로 돈을 요구하고, 전화 수법이 영화 그놈 목소리과 관련된 모방범죄일지도 모른다는, CCTV가 범인검거에 큰 도움을 줬다던가 하는 내용이었다. 물론 아이가 죽은 것이 이 사건 중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왜 아이를 죽였을까. 아이를 유괴할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회란 대체 무엇인가. 왜 자식있는 아버지가 이런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을까. 이런 생각들은 서로 겹쳐진 비늘처럼 한꺼번에 수면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세상엔 끔찍한 사건이 많다. 사건이라고 특정화 시킬 필요도 없을 정도로 어느정도 일상이라고까지 할만하다. 그 종류는 너무나 다양해서, 위 사건처럼 가해자가 있는 피해도 있고 가해자를 구분하기 모호한 사건도 있을것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건 세상에 이런, 소위 끔찍한 일들은 드물더라도 그것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 빈도수의 크고 적고를 떠나 일어난다는 필연성은 스스로를 양팔 사이에 꼭 가둬둔채 결코 놓치지 않는다.

 뉴스에선 각종 사고들이 보도된다. 교통사고로 일가족이 죽었다, 화재사고로 어린아이가 온몸에 3도 화상을 입었다, 공사현장에서 떨어지는 자재에 깔려 죽었다, 변심한 애인이 칼로 찔렀다, 길가다 황산을 맞았다, 아이가 유괴되서 죽었다 라던가 하는 제각각 고유의 표징을 소유한, 하지만 동일한 표의를 간직한 문제들. 이어서 피해 가족중 누군가가 소리친다. "왜 하필 우리 아들이 이런..." 소리지르고 목내어 운다. '왜 하필, 왜 하필...'

' 왜 하필' 이란 소리를 듣고 난 생각한다. 만약 '왜 하필' 이라 울부짖는 어머니의 아들이 죽지 않았다면 대신 내가 죽는다는 이야기 인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 어머니 역시 왜 하필 이냐 울부짖으며 다른 사람의 죽음을 바라겠지.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왜 내가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았을까, 왜 내가 화상을 입지 않았을까, 왜 내가 칼로 찔리지 않았을까, 왜 내가 어릴적에 유괴되서 죽지 않았을까, 하는 죄책감이 거칠은 생각 속으로 부드럽게 스며들어 구토를 유발한다. 이 죄책감은 나를 거쳐 세상을 돌고 돈다.
 마치 바람처럼 우리곁을 스쳐가는 것, 이것이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투철한 이성이다. 사지가 뒤틀리는 불치병의 걸릴 확율이 0.001% 해도 걸렸다면 걸린 순간 그 한명의 세계는 곧 100%인 것처럼. 


 세계의 이성은 지금 이순간도 '왜 하필' 이란 소리를 듣기위해 한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상병 진규언 
 마지막 줄이 확 와닿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로, 혹은 전혀 다른 이야기로 치부될 수 있겠지만.. 저는 비슷한 논리로서, 이곳 책마을에서 있는 시간을 충분히 누리고 싶습니다. 인트라넷에 접속할 수 있고, 보급창에 접속할 수 있고, 책마을에 접속할 수 있는 나름의 권한 아닌 '권한'을 온전하게 내 것으로 누리고 싶습니다. 

 하나의 권리체계를 규정하고픈 의도도 아니요, 단지 접속할 수 없음에서 기인한 누군가의 '소통불가'의 상황을 비웃고 싶은 마음 또한 아닙니다. 그리고, 왜 나는.. 이라는 이야기를 하며 자책할 수많은 이곳 사람들에 대하여 우월감을 갖고자 하는 시도 또한 더더욱 아닙니다. 

 다만, 주어진 소통의 방편을 그 한도내에서 마음껏 향유함으로써 어떤 아들의 왜 하필.. 이라는 소리를 더 초라하지 않게 만들고 싶습니다. 주어진 (소소한) 자유를 누리지 않는 것은, 자유가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기만행위라고도 생각하니까요. 
 말도 안되는 비약이 있지만 너그러이..(머쓱..) 03-16   

 병장 임정우 
 규연 /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저역시 누군가를 구제하기 위해 저를 희생할 용기도,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반대로 제 행복을 누군가에게 베풀만한 그럴듯한 방법론을 가진것도 아니지요. 
 단지 제가 말하고 싶은것은 세계의 신은 결코 선이 아니며 또한 악도 아닌, 
 가혹함 또는 당연함 이란 것입니다. 03-16   

 상병 진규언 
 가혹함 또는 당연함 이라고 표현해주시니 정우님의 글이 보다 명료해지는듯 합니다. 애초에 당연하단걸 모르고 있을때는 그저 '당연하다'가, 당연하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게 되면서 '왜 당연해야 하지?'라는 의구심을 갖는게.. 지금의 제 모습이라서 배울점이 많습니다. 조금 시일이 지나서 학교로 돌아가 꺾이고, 사회에서 더 꺾여버리면 당연한걸 당연하다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구태의연한 사춘기적 고민스러운 이야기지만.. 그것이 조금 두려워 지기도 합니다. 
 요새들어, 의도적으로 왼쪽의 이야기들을 머리속에 담고자 합니다. 정우님과 같은 문학적 소양은 제로의 영역에 가까워 문학에서 그 함축적 의미를 발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그래서, 간단 명료하게 표현되어 있는 정보전달을 위한 글만을 독식하려고 하는데.. 쉽지가 않네요. 오히려, 조금씩 알아갈수록 마음에 안드는 점들이 많아지고 가혹한 면면들을 보며 나의 위치 내지는 책무에 대한 고민.. 이라는 거창한 물음 까지는 아니라도 자꾸만 작아지는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합니다. 결국 가혹한 내가 될 것 같고, 당연한 내가되어버리는것도 같구요..(긁적긁적..) 03-16   

 상병 이선열 
 뭔가 오싹한데요.(웃음) 
 결국 세상에 정의의 사자란 존재할 수 없다는 거겠지요. 
 누군가를 구한다는 것은 곧 누군가가 희생한다는 것이 바로 세계의 법칙이라는 거니까요. 
 가령,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뛰어들고 아이를 모두 구한 뒤 힘이 다해 죽은 청년. 
 가령, 자신의 자식을 낳기 위해 목숨을 바친 임산부. 
 가령, 도로 위에서 할머니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트럭에 치인 사람. 
 모시기 만화에 나오는 연금술사는 고증도 없는 가라라고 생각합니다만, [등가교환]이라는 말에는 나름대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이를 먹고 나름대로 총명해진 어른은 세상에 대해서 알아 그런것을 꿈꾸지 않습니다. 
 다만 세계(자신이 아닌 모든 것)이 정해준 운명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죠. 그런 가운데에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시련은 오히려 행복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만일 그런것에도 궂궂히 자신의 마음속 무언가를 정의하고 그것을 관철하려는 의지를 끝까지 지킨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영웅이 아닐까요. 

... 덧붙여 제 마음속의 영웅은 63빌딩에서 떨어지는 할머니를 위해 서슴없이 몸을 날리고도 살아남는 사람입니다. 불사왕? 03-16   

 병장 임정우 
 규언 / 위 같은 생각은 10년 전부터 문득 들었던 문제였고. 
 중학교 부터 입대전까지 독서라곤 두달에 한권 읽을까 말까 였고, 
 입대하고 한동안 손도 못대다가 병장 달면서 약간 열심히 읽은것 뿐인걸요. 
 만화책은 한 4-5천권 봤을겁니다. 
 아마 저에게 문학적 소양은 없고 만화적 소양은 있을거에요. (긁적..) 

 하여간 당연한게 제일 무섭습니다. 03-16   

 병장 정준엽 
[ 관계의 단절]이죠. 
 세계의 이성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국은 나 자신(self)으로만 귀결되고, 타인은 그저 타인으로써 남아 있는 이상 죄책감이라는 문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공동체적 관점이라면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이것을 파나(fan안의 관계성이라고 부릅니다. 공동체 속에서도 우리가 죄책감을 느낄까요? 아니죠. 그것은 죄책감의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의 아픔이자 나의 아픔입니다. 03-16   

 병장 임정우 
 준엽 /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결코 해결할수 없는 문제라고 확신합니다. 
 준엽님의 말씀대로 공동체는 더 나아지기 위해 모든 발악을 다 합니다. 
 하지 않는다구요? 바로 이 한계 역시 세상의 순리의 일부일 겁니다. 
 분명 어느정도는 좋아질수 있겠지요. 그런 타이밍이 온다면 말입니다. 
 허나 그것은 말그대로 조금 더 나아질 뿐입니다. 게다가 유한합니다. 
 언제 어느 순간에 어떤 부분에서 균열이 생길지는 누구도 예측못합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비관적인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03-16   

 병장 정준엽 
 정우// 
 현실주의적 노선이 현실적인 이유는 바로 그 지점 개인의 불완성과 이기성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좌파는 기본 전제가 개인의 완전성을 전제로 하고 있지요. 이를 전제로 한 좌파가 그럴듯해 보이는 원리를 내세우지만 개인의 불완전성에 대해 대답하라는 요구에 답변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 정우님이 가지는 비관적 생각의 원인이 있지 않은가요? 03-16   

 병장 이승일 
 미국의 정치학자 롤즈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만약 태어나기 이전에 모두 모여서 자신의 계급이나 사회적 위치, 언제 사고날지, 언제 죽을지 등등을 전혀 모른 채, 이를테면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에 가려진 채, "어떤 사회가 정말로 정의로운 사회인가?" 에 대해 토론을 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고 말입니다. 이 경우 자기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최악의 상황을 제일 우선적으로 고려해보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최악의 상태일 때 어느정도 살만한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고 합의할 것입니다. 사고의 경우도 마찬가입니다. 자기가 사고당할 확률이 어쨌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상황에 대한 '사회적 보험' 을 들어놓을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때문에 사회적 안전망 확충, 피해자에 대한 보상, 재기를 위한 여건 마련... 등등은 특정한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가 신경써야할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삶은 아직 100% 결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야 말로 우리를 정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현재 군인이지만, 나중에 학생이 될 수도 있고, 노동자가 될 수도, 장애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100% 군인은 아니겠지요. 10%는 학생이고 10%는 노동자이며 한 5%는 경영자, 그리고 1%는 장애인일 것입니다. 0.5%는 사기꾼일지도 모르고 0.1 %는 심지어 살인자일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학적 개입을 피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03-16 * 

 상병 김윤호 
 정말 잘 읽었습니다. 사실 이걸 '이성'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참 난해합니다. 

' 본성'이라고 말하면 더 좋지 않을까요. 이성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슬퍼집니다. 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