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통 (7급 하지연/050929)
어젯밤 한참 잠이 쏟아지는데 전화가 울렸다. 처음엔 11시쯤 됐길래 TV에서 프란체스카를 하나 보다 했는데 불이 번쩍 번쩍 쏟아지는게 아뿔사 핸드폰이었다. 손을 뻗어 핸드폰을 열어보니 모르는 번호였다. 요런 시간에 모르는 전화번호는 대부분이 악몽이다. (주로 야근 하는 사람이 하는 전화이거나 잘못 걸린 전화이거나, 주차된 차 좀 빼달라는...) 생각해보니 주차도 제대로 된 것 같고 일이라면 지금 받아봐야 해결 될 리도 없고 잘못 걸린 전화라면 뭐 굳이 안받아도 상관없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뚝 끊어졌다. 얼씨구나 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여보세요”
“나다. 영재”
“어 그래 오랜만이네”
“어제 교수님이랑 술 한잔하다 너한테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
아! 교. 수. 님.
내가 교수님을 처음 만난 건 교양과목 강의 때였다. 철학이었는지 윤리였는지 지금은 모르겠다. 아직 덜떨어진 표정의 신입생이었던 나에게 교수님은 강의가 끝난 후 당신의 방으로 오라고 했고 아직은 이름도 생소한 교수님인지라 물어물어 찾아간 방은 선배인지 동기인지 모를 학생 서너 명이 소파에 앉아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교수님이 의자에서 일어서시더니 허허허 웃으시며 대견하다는 듯 나의 등을 두드리며 그 사람들에게 말했다.
“인사해라 우리 써클에 들어오게 된 1학년 ooo이다. 허허허”
“예?”
졸지에 써클 가입서를 받아들고 가입신청서를 작성하게 되었는데 그 이름이 교양 철학회였다.
“에...” 회장이었다.
“쫄지마라. 그냥 술 무쟈게 좋아해서 술 마시는 클럽인데 이름은 위장이다. 킬킬킬”
참 불량스러워 뵈는 선배였다. 머리는 한 사흘쯤 안 감은 것 같고 입에선 술냄새가 풀풀 풍기고 청바지는 흙인지 때인지 모를 시커먼 것이 묻어있고 손도 떠는 것처럼 보이는 폼이 영락없는 중증의 알콜 중독자처럼 보였다.
“전... 술 못 마시는데요”
“음... 상관없다. 신입생 회원이 5명이 되야 써클 등록이 되는데 지원자가 없어서 그러니까 그냥 한 장 써라”
문수 선배였고 나중에 알게 됐지만 주체 못할 정도로 감성이 풍부해 어이 없이 잘 울고, 울컥 잘하고, 곧잘 엎드려 뻗쳐에 줄 빠따를 애용하셔서 우리에게 공포와 함께 연민의 정도 불러일으키던 자퇴라는 카드로 마지막 퇴장까지 불가사의했던 선배였다. 결국 그날 저녁 신입회원 환영회라고 어리 버리하게 가입서를 쓰게 된 나와 그다지 사정이 나아 보이지는 않은 비슷한 처지의 세 사람과 학교 앞 대포집으로 끌려가서 안주라고는 달랑 두부 한모에 암바사(사이다 + 막걸리)와 폭탄 막걸리(막소주 + 막걸리)를 한 주전자씩 먹고 인사불성이 되어 어떻게 집에 까지 왔는지 모를 엄청난 귀소본능을 선보이며 급기야 어머니께 술주정까지 부리는 불효막심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날 저녁 술 취한 줄도 모르고 끙끙 앓는 딸 약 사러 밤 12시에 약국 문을 발로 찼다는 아버지의 얘기가 전설처럼 요즘도 가끔 나를 괴롭힌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분반을 하여 여중에 여고까지 남자라고는 집에서 다섯 살 어린 남동생밖에 못 보았을 정도로 남성기근현상에 익숙해져 있던 내게 강의시간 보이는 남학생들의 뒤통수는 새로운 종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슴이 벌렁거려 수업집중이 안 될 정도였다. 급기야 별로 나아보이지도 않은 또래 남학생 때문에 학업에 지장이라도 생길 것 같아 그냥 강의실 제일 앞자리를 고수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가끔 입심 좋은 교수님의 파편세례를 받기도 했고 아직 이름이 낯 설은 탓에 무작위로 지명되어 질문당하는 낭패를 겪기도 했지만 본의 아니게 모범생으로도 오해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도 나중에 시간이 지나 조금 친해진 동기생들에게 들은 이야기다. 나는 눈도 나쁜데다 강의만 끝나면 써클 선배에게 붙들려 술자리에 끌려 다니느라 1학기가 지나도록 과 동기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조금은 이상한 아이였다.
우리 써클 지도교수님은 당신 스스로 술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풍채도 멋진 무골호인이었다. 학교 앞 대포집에 가면 교수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가끔 젊은 과부와 젓가락 장단에 밤이 으슥하도록 노래를 부르던 당신모습도 심심치않게 목격이 되는 그리하여 술집매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시던 분이었다.
나에게 조금의 철학이 있다면 그건 교수님의 영향이었다. 술을 마시기 위해 써클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는 하지만 교수님은 당신이 구입하신 철학책을 우리에게 손수 나누어주시고 술자리 권주의 구호도 Philosophy를 외치시던 술과 철학의 상관관계와 디오니소스적 오류에 대한 연구를 요구하셔서 오로지 술은 마시기 위해 있다고 철썩같이 믿는 우리를 고뇌에 빠뜨리기도 하셨던 분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알 수 없는 건 항상 불안정한 모습에 강의가 끝나면 쏜살같이 사려져 열람실 어디에 짱 박혀 있고 말을 붙여도 반응은 5초나 뒤에 나타나는 붙임성이라고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던 나를 많이 예뻐하셨다는 것이었다.
“너는 파쇼야”
술자리에서 항상 옆에 앉혀놓고 술이 거나하게 되시면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이마에 뽀뽀를 해주셨는데 그 당시 나의 정서로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과도한 애정표현이셨다.
그러나 아버지와도 같았던 교수님의 애정은 20년도 넘게 닫혀있던 나의 마음을 서서히 열어갔다. 나는 당신을 어려워하면서도 존경했고 사랑하면서도 부담스러워 했다. 그 미묘한 감정은 오랫동안 정리가 되지 않아 당신을 많이 서운하게 하였다. 어느 봄날 강의 들어가신 교수님이 들어오시는 것도 모르고 교수님 방에서 당신 책장에서 무심코 뽑은 게바라를 읽고 있던 나를 가만히 보시더니
“넌 파시스트야” 라고 말씀하셨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날 그 말뜻을 완전히 이해했다. 그리고 당신은 점심식사를 하자며 찾아오신 동료 교수님과 나가셨고 나는 파쇼란 말을 오랫동안 생각했다.
성장기의 고통은 자기 연민으로 스스로 침잠(沈潛)하였지만 그때를 기점으로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교수님은 내안의 깊은 곳을 보아주셨고 스스로 발아(發芽)하기위한 고통을 술과 철학의 애정으로 어루만져 주셨던 분이었다.
오만한 나는 과연 저 스스로 성장했다고 믿고 싶지만 언제나 인생의 고비에 숨은 사람을 가지고 있다. 환경에 쉽게 동화되고 사람들에게 가장 약한 모습을 보이는 나의 약점이다.
그대들은 이런 사람을 가졌는가
어느 복 받은 이는 그런 분을 부모님으로 가지고 있고 또 어떤 이는 친구로, 소심한 나 같은 사람은 스승으로 기억한다. 잠시 동안은 독서의 양으로 체득한 장고(長考)라 자만했지만 독선적인 고뇌는 온기가 없는 까닭에 내게 작은 온기라도 있다면 그건 교수님의 영향이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보며 밤을 지새울 수 있었던 건 그 시절에만 가능한 치기(稚氣)일 것이다.
그러나 또한 성장통의 단점은 그 통증을 잊어버린다는 것에 있다. 너무 오래 기억하면 그 고통으로 인해 또 다른 성장에의 진도에 스스로 움추려 드는 결과를 초래하겠지만 그래서 그런지 어쩌면 어른들 말씀이 맞다.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르고 여자들 애 낫는거 힘들다 힘들다 해도 낳고 나면 싹 잊어버리고 또 낳는다는 말씀.
나는 참으로 늦은 사람이라 겨우 스물이 되어서야 성장통을 경험했지만 조숙한 당신들은 언제 자신을 스스로 들여다 보아야 하는 성장의 고통을 트라우마처럼 간직하고 있는지.
나는 파시스트답게 졸업하고 더 이상 그분을 뵙지 못했다.
그 분을 뵐 기회는 몇 번 있었지만 나 스스로 연락을 접었다.
모르겠다. 그 기억이 이렇게 아련하기도 하지만 다시 들여다보면 또 다른 고통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그래서 나는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칼레파 타 칼라
병장 구태우 (2005-09-29 17:13:31)
무척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하지연님의 글 솜씨가 대단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겠지만, 왠지 지금
생각해보니, 하지연님의 내공이 깊은 청아한 글솜씨는 술과 함께한 번뇌와 젊음의 치기가 있었기
때문이었군요. 라고 혼자서 생각해 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부끄럽지만, 가능하다면 저의 성장통도 부끄럽지만 한 번 써보고 싶은 치기를 부리고싶네요.
병장 박윤철 (2005-09-29 18:12:51)
칼럼 잘 읽었습니다. 저랑 여섯 학번 차이가 나는 철학과 선배가 3차까지 간 술자리에서 아도르노의 자연사 이론을 말해 주었죠. 이해가 가지 않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지만, 학문을 머리로만 한다면,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은 학문이 할 일이 아닌 것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요. 오만함과 자존심으로 뭉쳤던 제 대학교 신입생 때의 시절도 생각이 납니다. ( 암바사 + 폭탄막걸리도 함께 말이지요. 웃음)
병장 양용구 (2005-09-29 18:21:36)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정말 읽다보니 어느새 끝자락에 닿아있는 제 눈길을 느낀 순간, 머리속이 잠깐 멍해졌습니다.
하지연님의 글을 읽고서 제 자신에게도 성장통의 기억이 있었나...
한번쯤은 생각하게끔 되네요.(웃음)
9월의 마지막 문턱입니다. 날씨도 선선하다 못해 쌀쌀하기까지 하네요.
감기 조심하시고, 다음에도 좋은글 부탁드립니다(웃음)
병장 손현태 (2005-09-29 22:21:00)
이야... 하하... 재밌네요...
상병 손동철 (2005-09-29 22:47:59)
능숙한 필치는 물론 스토리 형식으로 주제를 표현하는 기술이 무척 부럽습니다(웃음). 전 대학 초년 땐 트라우마로 남을 성장통을 비교적 많이 겪었습니다. 자발적인 아웃사이더로서의 1년. 잘 나가던 수업 그러나 정작 중요한 시험 기간은 사유도 없이 모조리 결석 그리고 후에 날아든 성적표 등등 생각해보면 강하게 억압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군에 입대해 할일 없는 시간이 너무 많아, 지난 못난 기억들을 어거지로 끄집어 내서, 지금의 성숙한 자아로 재해석하니 웃음이 나오는 추억으로 변하더군요
병장 이규곤 (2005-09-30 03:22:18)
정말 부럽도록 잘쓰시는군요...전 교수님들과 늘 대립적인 관계를..
멋진교수님들도 많았었는데, 왜 그랬는지..
병장 김석안 (2005-09-30 08:41:18)
머리가 띵할 정도로 마음에 와 닿는 글을 읽고도 할 수 있는 표현 이라곤 "아~참 잘썼구나" 라는 말 뿐인가.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기가 눈치가 보인다고 아직 생각이 정리 되지 않았다고 핑계를 대어 보지만 위안이 되지 않네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병장 이정민 (2005-09-30 10:55:03)
영화 "극장전" 전의 "오늘도 당신에게 영화같은 하루가 시작된다" 라는 글귀가 머릿속을 스치네요.
누구에게나 다 다른 하루하루가 있었고 있을테지만 지연님의 글을 읽어보면
정말 영화처럼 드라마처럼 재미있는 일상(특별하거나 특이하거나 등), 아니면 일반적일수도 있는일까지도
이렇게 부럽게까지 표현하시는 분들(지연님 포함 여러분들..)이 위해대해보이까지하고(땀)
저에게도 이렇게 특이하거나 특별한 일이 있었을테고 있을테지만 이렇게 글로 표현 할수 없음이
안타깝기 그지없네요..(웃음)
글을 잘쓴다라는거 굉장히 매력적이네요.
정말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일병 사경인 (2005-09-30 13:20:23)
저도 문득 교수님 한 분이 생각나네요.
대학원 수업을 술로 진행하시던... 처음엔 수강생이 5명이었는데, 3명은 술에 나가 떨어지고 둘만 남아서 들었습니다. 수업이 1시에 교수님 연구실에서 이루어졌는데 항상 "너네 밥 먹었냐? 안 먹었지?"로 시작하셔서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탕수육 세트랑 소주 3병을 시키셨던...
그런 뒤 술 마셔가며 3시간 수업(수업의 질은 높았습니다. 세명이서 수업주제 하나로 3시간동안 담론을 했으니... 미리 내용을 예습해오지 않으면 담론이 될 수가 없었죠) 마친 뒤 "수업도 끝났으니 한 잔 하러갈까?"하시며 호프집으로 우리를 이끄셨던...
시험과목으로 받아들였던 학문이 그보다 큰 인생일 수 있으며, 어렵고 높아만 보이던 상아탑이 시장터 아낙의 셈속과 별반 다를게 없음을 던져주셨던...
합격자 발표일마다 같이 울고 같이 웃어주셨던 그 분께, 시험합격 뒤로는 무심했던것 같아 죄송스러운 마음이 드네요. 입대하면서도 건강히 다녀오겠다는 인사말씀도 못 드리고 와서...
다음 휴가때는 좋아하시는 소주 한 상자 사들고 쳐들어가서 낮술한잔 올려야겠습니다.
상병 김동환 (2005-09-30 14:21:46)
적절한 표현이군요. 파쇼에. 파시스트라..
잘 읽었습니다.(웃음)
일병 안대섭 (2005-09-30 15:18:45)
너는 내 파쇼.
일병 박민수 (2005-09-30 17:19:26)
고요해지는군요. 음. 아.
병장 한상천 (2005-09-30 19:12:44)
성장통이란 말에 떠오르는것은 막 키가 자랄때 다리에 오는 성장통이군요(이야기와는 다른소리지만)
갑자기 키가 자라다 보니 근육의 성장이 그 만큼 따라오지 못해서 오는 그 성장통의 아련한 추억이..
지금 늦지 않았으니 다시 왔으면 좋겠습니다.(흑흑)
병장 백승철 (2005-09-30 20:50:23)
그런데 마지막 글귀는 뭘까요.
상병 이승준 (2005-09-30 22:00:38)
키 크고 싶은 이 느낌은..
병장 손영청 (2005-10-01 06:15:02)
음.. 저는 언제 이런 성장통을 겪어볼련지...
아.. 그런데 마지막 말은 무슨 뜻이죠..?
병장 김태영 (2005-10-03 11:10:34)
kalepa takala
그리스어로 "좋은 일은 좀처럼 이루어지기 어렵다."라는 말입니다.
상병 노현웅 (2005-10-04 06:46:39)
이문열의 '칼레파 타 칼라' 참조
상병 김영서 (2005-10-05 10:23:23)
추천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