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된다는 것에 관하여 
 
 
 
 
올해 초에 어쩌다보니 절친한 친구 두 녀석이 사범대학에 들어가게 됐다. 수능을 다시보고 이리저리 먼 길을 돌아 이제야 그나마 삶의 궤도라 할만한 위치에 자신을 실어놓은 것이다. 그간 녀석들이 겪어야 했을 몸고생, 마음고생에 대해 열렬한 축하도 축하지만, 가게 된 곳이 ‘-교육과’다 보니 왠지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게 된다. 이제 곧 선생님이 된다는거 아닌가.(어지간하면) 음, 선생님이라. 학창시절, 흑녹색의 광이 희끄므레 나는 칠판 앞에서, 삐걱거리던 교단 위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방학이 아니고 휴일이 아닐 때면 매번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던 선생님, 어릴 때는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는, 화장실도 안가고 욕도 안하는 줄 알았던 막역한 존경의 대상이었고, 어떤 때는 애증이 교차하는 가파른 갈림길에서 우리를 갈등하게 했던 우리 선생님. 내 친구들이 이제 몇 년 후면 그 선생님이 된다니. 음. 이제껏 말로만 선생님이 되는 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쉽게 이야기 해 왔는데, 현실에서 정말 선생님을 앞둔 친구들을 갖게 되니 이제는 더욱 더 입조심에 입조심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든다. 선생님들이 이러이러하고 저러저러하다는 것은 술자리에서 나오는 흔한 안주거리 아니던가. 게다가 복학을 앞두고 들려오는 학교 소식 속에서는 종종 교직 이수를 하고 교생을 나간다는 선배, 동기들의 이야기도 있으니 이제 선생님이라는 존재는 당연한 경외의 대상에서 일상의 영역에서 내가 쉽게 닿을 수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복도를 지나며 흘낏흘낏 보던 교무실이 기억난다. 교무실에 간다는 것은 언제나 꺼려지는 일이었다. 야자를 하기 싫어 변명거리를 만들어내던 곳이었고, 심부름을 하거나 특정 지령을 받들어야 하는 귀찮은 일이 생기는 곳, 뭔가 모종의 음모가 꾸며지는 듯한 금단의 영역. 하지만 난 이제 그 금단의 영역을 마음껏 출입할 특권을 지닌 친구가 생기게 될 현실에 직면했다.

며칠 전, 신문 칼럼에서 선생님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기사의 내용은 최근 ‘학부모에게 무릎 꿇은 선생님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필자는 선생님의 유래는 고대 그리스의 노예-고대 그리스에서는 아라비아나 페르시아 등지의 유식한 노예를 구입, 가정교사로 보충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와 유료 논변교사 소피스트에서 시작되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런 직업인으로서의 선생님의 위상과 함께 봉사나 이런저런 역할들이 복합적으로 요구되고 있기 때문에 결론인즉, 오늘의 선생님은 참 힘들다고 말하고 있었다.(오독일지도 모른다) 노예나 소피스트 뭐 이런 이야기는 별반 중요한 내용은 아니고, 오늘의 선생님이 다양한 요구에 직면해 있는 것은 누가 봐도 분명한 현실이다.

‘오늘의 선생님’을 말한다는 것은 그가 ‘과거의 선생님’과 뭔가 달라졌다는 대단한 얘기. 그 때문인지 최근 내가 선생님과 관련해 귀가 아프도록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장래 결혼감 1위인 직업, 그러니 전역하면 여교사를 잡아라-, 뭐 이런 이야기였다. 그런데 20대를 넘어서면 과외를 통해 대학생은 선생님이 되는 12년간의 지위를 역전시키는 획기적인 반전을 종종 겪게 되고, 대학교에서 우리를 가르치는 사람은 그냥 교수님이 된다. 스승의 날이 있지만, 대학생이 되면 선생님들을 찾는 경우가 딱히 많은 것도 아니다. -선생님이라는 단어는 이제 정말 존경을 담지 않고서는 꽤나 하기 힘든 말이다. 대신, 우리는 직접 선생님이 되거나 앞으로 선생님이 될 친구들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선생님은 최고의 배우자감으로 철저하게 사회적, 경제적인 교환 가치로 평가되는 하나의 직업군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철저하게 기능과 교환가치를 중시한 대가다. 

예전에 선생님은 어쩌면 ‘신성 불가침’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 불가침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선생님은 푸코적인 관점에서 어설프나마 째려보면, 학교라는 일종의 감시, 훈육 구조의 대리인으로서 피감시자, 피훈육자인 학생들과 날카롭게 대치한다. 그 때문에 감시되고 훈육되는 대상인 학생들에게 감독관인 선생님의 위치는 전체적인 질서와 규칙을 보장하기 위한 불가침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대드는 것은 윤리적인 금기에 가까웠고, 그 금기를 깨는 것은 곧 질서 파괴의 혐의를 오래토록 쓰게 되는 문제아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때문에 선생님의 권위는 ‘신성’과도 같았다. 하지만 상황은 역전되었다. 

영화 <친구>나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등장하는 선생님과 학교는 권위를 앞세운 폭력과 부패로 뒤섞여있어 주인공들은 그들로부터 존경을 철회하고 의도적인 거리두기를 함으로써 스크린에서 선악의 이분법 구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학교와 선생님이 강제하는 질서와 규칙이야 말로 극복해야 할 과제로 그려지고 있으니까. 그래도 거기까지는 선생님은 부정적인 색채로 덧칠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강력한 규칙과 질서를 수호하는 존재였다. 결코 경계를 풀어서는 안되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선생님들은 화장실도 안가는 줄 알았다는 예전의 순진한 믿음은 싹 사라졌다. 선생님은 더 이상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위치하지도, 경계나 존경의 대상으로서 버티고 서 있지도 않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선생님은 방학을 여유롭게 놀고,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는 준 공무원인데다 여성의 경우에는 가사와 육아까지도 큰 무리 없이 챙길 수 있는 결혼감 1위의 초 세속적인 지위였음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게다가 이제껏 불가침의 권위를 상징하던 체벌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추세고, 학생들의 자유와 인권의 소중함이 학교에 출동한 112나 폰 카메라에 잡힌 동영상 등으로 인해 사회의 중요한 관심사로 대두하면서 선생님들은 예전의 불가침 영역을 몽땅 상실한 채 이제 결혼감 1위로만 이야기되는 세속적인 직업인으로서 교육 소비자인 학생들과 판매자 혹은 고용인의 지위에서 그들을 대하게 되었다. 정치적인 관점을 반영하는 것은 선생님으로서 지켜야 할 중립성에 어긋나므로 무조건 지양해야 하는 것이고, 수능이나 논술을 대비한 교육을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지 않는 비수능 전문가는 도태되어야 마땅하다는 논리가 교육계를 지배한다. 그리고 공교육 현장에서의 선생님들에 대한 불신은 절로 사교육의 융성, 교육‘시장’을 확대시키는 계기를 만든다.

물론, 직업적인 기능으로 선생님이 판단된다는 것이 곧바로 비도덕적이거나 천박함을 의미하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선생님이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많은 의미들이 괄호 속에 묶인 채 생략되고 사회에서의 지위를 바탕으로 한 경쟁력의 경제논리, 단 하나만 살아남게 된 상황은 분명히 고민해봐야 한다. 학교와 학원의 차이가 희석되는 것은 사교육의 질적 향상이나 교육 열풍 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비용 대비 효용의 측면에서 선생님을 필두로 하는 공교육이 경쟁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지 않을까. 학군 좋다는 강남의 학교들을 안 다녀봐서 모르겠지만, 그 학교들로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여전히 선생님들이 그저 선생님으로 남아 있는건지 아니면 비용 대비 효용의 측면에서 소비자들을 만족시키는 기능적인 판매인이기 때문인지 나는 때로 궁금해진다. 

그런데 문제는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이렇게 세속적인 판매자로 전락하기엔 꽤 의미심장한 위치에 있다는 점에 있다. 다들 경험적으로 알고 있겠지만, 가정을 떠나 세상을 만나기 시작하는 아이들이 처음 어른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 선생님으로부터고, 성장하면서 2차 성징과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을 때 부모님과 친구 다음으로 가까이에 있는 것이 선생님이다. 생각해보라, 학창시절을 떠올릴 때면 선생님에 관한 기억의 편린들이 얼마나 많은지. 특정 선생님의 용모나 행동이 두고두고 우스울 때도 있고, 또 어떤 선생님과의 기상천외하고도 기막힌 사연이 연거푸 술잔을 들이키게 만드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선생님이 건넨 말 한마디가 나비효과의 날개짓이 되어 다가올 수도 있고, 선생님의 무관심이 또 다른 길로 학생들을 접어들게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던가. 영화 <여고괴담>시리즈나 강풀의 <타이밍>, 드라마 <학교>, <반올림> 등에서 우리가 봐온 이야기들은 실제와 완전 무관한 드라마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지마라는 옛 교훈들이 내포하던 무한한 존경과 경외는 어디로 갔을까. 단어 그대로가 의미하는(先生) 연장자에 대한, 그리고 선생님들이 주시던 결국 피가 되고 살이 되던 크고 작은 가르침들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얼마나 좌우할 수 있을까. 마키아벨리도 말했듯 권력은 타인에게 나의 의사를 강제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회사의 신입사원보다 선생님은 훨씬 더 큰 권력을 갖게 되는 위치에 선다. 단순 계산만으로 일년에 최소 서른 명의 인생을 좌지우지하게 되니 이것만으로도 그 권력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선생님이 된다는 것은 그저 자신의 삶이 안정적이고 편안하도록 보장하는 수단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무수한 인생이 맞이하는 숱한 변화의 갈림길을 정한다는 책임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결코 교대나 사대를 가서 임용되고 발령받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라는 생각은 정말 오산이다. 자칫하다간 누군가의 인생을 훼손해버리는 두고두고 후회할만한 경험을 겪을 지도 모른다. 우리 중에 분명히 존재한 특정 선생님에게 당한 경험이 있는 누군가의 기억처럼.

혹자는 선생님의 위상이 이렇게 변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그에 동의한다. 선생님이 뺨을 때리거나, 이제 군대에서도 볼 수 없는 가혹행위를 군인들보다 열 살 가까이 어린 학생들에게 가하는 것은 정말 시대착오적이고 말도 안되는 행위다. 그리고 그렇다고 선생님들이 잃어버린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되찾아주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선생님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보고 싶었다. 세속적인 교육판매자로 전락해버린 위치를 인지하는 동시에 책임이라는 선생님이기 짊어져야 하는 무게를 같이 이야기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선생님들에 대한 존경을 철회해버린 오늘의 우리가 교육에 대해서 진지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생님들을 통해 무언가 배워왔고, 곧 그 누군가의 선생님이 될 우리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책임의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은 교육에서 선생님의 올바른 권위를 북돋아주는 것이고,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정당한 가르침을 줄 수 있도록 다양한 방면에서 그들을 자극하는 일이다. 선생님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그 무거운 책임을 끊임없이 상기하는 문제다. 어찌 쉬이 선생님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현 교육제도 아래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선생님이라는 지위의 구조적인 문제와 한계를 말할 수도 있다. 허나, 특정 위치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구조주의로 모든 것을 환원하면 개인의 책임은 상대적으로 희박해진다. 물론 구조는 개개인이 저항하기에는 여전히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이제껏 우리가 하나둘 간직하고 있는 사제간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그를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을 준다. 내가 여전히 교사나 선생이라는 단어 대신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고집할만한 존경심을 마음 속에 간직하는 것처럼, 그리고 아직도 아름다운 선생님들이 여전히 학교에 남아 아이들을 가르치고 계시는 한. 아무리 아이들이 일찍 ‘철이 들고’, ‘교사’가 지니는 교환가치에 기대어 ‘교사’가 되려는 사람들로 교육대학과 사범대학의 원서 접수창구가 북적거리고, 선생님이 수능전문가라는 희안한 직책을 맡게 되어도 여전히 우리의 학교에서는 그 선생님이 여전히 인자한 웃음을 띠고 우리를 기다려 주실 것이다. 

친구들아, 나는 너희가 그런 선생님이 되기를, 나의 아이들이 너희에게 세상을 배울 수 있길 기대한단다.

 

  
 
 
 
병장 박형주 (2006/05/29 23:32:59)

잘 읽었습니다. 저도 가르치는 일을 직업으로 하게 될 일은 당분간 없고 앞으로도 없을지 모르겠지만 선생님 소리 듣는 게 평생의 소원이거든요. 저는 '교수님'이라는 호칭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가장 많이 쓰이지만 왠지 이도저도 아닌 느낌이 있거든요. '교사님'이 이상한 것과 비슷한 이치로 직책에 님자를 붙이는 게 맞지 않다는 생각도 들고(물론 실제로는 많이 쓰고 자기 스스로 꼭 '교수님'을 고집하는 사람도 있죠), '선생님'이라는 말에 담긴 존경의 의미가 '교수님'에는 없는 것 같고. 괜찮은 수업을 하는 사람 중에서 진짜 교수는 몇 안된다는 이유도 있고. 수업이 이상하면 그냥 '김민환 교수' 혹은 '아무개 강사'라고 하고 괜찮으면 교수든 강사든 '선생님'이라고 하는 게 제일 자연스럽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뭐 남들은 다르겠지만.    
 
 
 병장 김동환 (2006/05/30 07:54:42)

저도 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기로 마음을 정해가고 있어요. 어째됐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기로 했거든요. 

형주// '교사'는 선생님이 스스로를 낮춰 부를때 하는 말이라서 '님'자가 어색한 거래요.    
 
 
상병 이영준 (2006/05/30 08:16:17)

저는 학교 다닐때 교무실 보다는 학생부실이 더 무서웠습니다. 
학생부실을 채우고 있던 학생부 선생님들. 
거기를 지나갈때마다 마치 지금 헌병대를 지나가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괜히 잘못한것도 없는데 두렵곤 했어요.    
 
 
병장 강승민 (2006/05/30 09:21:45)

음..사실 혼란스러워요. 
벗어나고 싶었던 그곳을 교사가 되어 다시 간다는게.    
 
 
상병 송희석 (2006/05/30 09:27:25)

제꿈은 교수인데. 흘흘. 아마 제가 교수가 된다면 저한테 배운 대학생은 최소 정신이상자가 될지 모른다는 뭐 그렇다는 생각입니다. 홍홍.    
 
 
일병 김현동 (2006/05/30 09:42:08)

저도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을 생각했었는데. 
꼴통만 세 번쯤 연달아 가르쳐보니 선생님 할 자격이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병장 한상원 (2006/05/30 17:20:09)

성훈님/ 직업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과장이 있었지만 기분나쁘셨다면 그 감정에 사과드릴게요. 물론, 님의 말씀처럼 남의 이야기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안 힘든 사람 하나 없지만, 저는 '우리가' 함부로 하는 그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그저 언급한 것 뿐이라는 변명을 드려야 겠군요. 저것은 세속적인 통념이지, 제가 주장하는 선생님들의 진실은 아닙니다.    
 
 
병장 김성훈 (2006/05/30 17:25:28)

상원님/ 댓글은 이미 지웠습니다. 제가 약간 어머니 직업이다 보니까, 좀 감정적이다든가, 그렇게 됐네요. (멋쩍음) 상원님의 글의 요지는 물론 공감합니다. (웃음) 다만, 일반적으로 교사가 '사람을 만드는' 직업이라 하는 것을 이야기할 때, 조금의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여깁니다. 교사는 학생의 길에 조력하는 사람이어야지, 학생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볼 때, 비행청소년들이란, 교사의 무관심에 의해 생기기도 하지만, 되려 교사의 너무 일방적인 관심에 의해서도 생성된다고 봅니다. '교사'의 자리에, '부모'를 넣어보심이 좋을 듯...    
 
 
병장 김성훈 (2006/05/30 17:26:59)

위 댓글은 상원님의 글에 대해 한 이야기는 아니고, 일반적인 '바람직한 교사상'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굳이 몇 자 적은 겁니다.    
 
 
병장 한상원 (2006/05/31 10:28:42)

성훈/어쨌든 저로선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전달되었다는 사실에 참 만족하고, 성훈님을 비롯 다른 분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계시다는 점에 만족, 만족, 대만족입니다. 선생님뿐 아니라 전반적인 직업윤리에 대해 조금은 언급할 수 있었군요. 하하.(긁적)    
 
 
 병장 노지훈 (2006/05/31 14:53:42)

권위와 위엄이 사라지더라도 선생님은 계속 선생님일 겁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