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여성학 강의
                박준연

  첨단과 유행, 그리고 시대의 대세에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며 살아온 한국인들 사이에서 요즘 이른바 뉴 트랜드의 하나로 회자되는 것은 바로 남성의 영역에 도전하는 겁 없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남성적인 관료조직에 들어가서도 위축되지 않고 거침없는 추진력과 업무 장악력으로 높은 평점을 받은 여성 장관들, 총선에 도전장을 내밀고 민생정치를 외치는 여성 정치인들. 좀더 고전적인 예를 든다면 고시나 공무원 시험에 여성 합격자들이 크게 늘어나고 스포츠계에서도 남성 골퍼들과 맞대결한다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다.

  도전하는 여자들, 성공을 쟁취하려는 여자들의 공통점은 바로 ‘능력’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집약된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라는 문구처럼 여성들도 스스로 전문성과 역량을 쌓아 당당하게 자기 몫을 찾을 수 있다는 의욕과 질시가 함께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직접 총칼을 들고 몸을 날려 조폭과 범인을 처단하는 여전사들은 이미 한국 영화나 드라마의 평범한 캐릭터가 되었다. 또한 발랄하다 못해 노골적으로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여주인공의 이미지가 관객들의 판타지 안에서 더 이상 낯설지도, 생경하지도 않은 것이다.

  강한 여성 이미지의 확산은 ‘IMF 위기’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는 경기침체와 일자리 가뭄으로 ‘회사인간’으로 살아 온 남성들의 직장 내 위치를 위협할 뿐 아니라 남성 가장의 권위에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처럼 여성들의 도전은 부정적인 의미의 새로운 신화로 덧칠되고 있다. 여성들은 기존의 안정과 질서를 위협하며, 조직과 전체를 위하기보다는 이기적 욕심을 앞세워 출세하거나, 시대를 잘 만나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무임승차를 하기도 한다는 등의 질시와 평가절하의 목소리가 만만치 않다. 수년 전 군가산점의 위헌심판을 둘러싼 남성들의 거센 저항도 바로 그런 예이다. 남성들은 자신들이 군대에서 ‘빡빡 기면서’ (대통령님의 말씀대로) 썩어가는 동안 도서관에서 공부를 계속한 여성들이 시험에서 따낸 높은 점수를 도저히 실력으로 인정하기 싫었고, 그래서 군대 감축이나 훈련 체계의 변화를 요구하기에 앞서 “여자들도 군대를 가던지, 군 가산점 제도를 부활시켜라” 등의 주장이 사이버 공간에 넘쳤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도전은 새로운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 희생자’보다는 ‘여성 도전자’라는 이미지가 대중들 사이에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정말 한국 여성들이 희생자의 굴레에서 벗어난 야심찬 도전자가 된 것일까? 그러나 객관적인 지표들은 다른 현실을 보여준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50%에 못 미치고, 또 여성 취업자 중 70% 정도가 비정규직이다. 또한 70개국을 대상으로 집계한 여성권한척도에서 한국은 63위에 머물렀다. 이처럼 순위가 낮은 이유는 전문직, 고위 간부직, 행정부나 의회에의 여성 진출이 우리보다 경제수준이 낮은 국가보다도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남성이 보편적 인간의 기준이 되는 한, 여성은 남성적 기준을 충족시킬 때 비로소 평등을 누릴 수 있게 된다. 미국의 여성 법학자인 리틀턴은 남녀평등을 지향하는 여러 가지 구상 중에서도 이러한 유형을 ‘동화모델’ 이라고 이름 붙였다. 우리는 주변에서 남자 못지않은 여자들의 성공담을 자주 듣는데, 그 여성들은 대개 결혼을 하지 않거나, 결혼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거나, 아이를 낳더라도 양육 및 가사노동을 다른 여자가 전담하게 하는 방식으로 가정 밖의 일에 전념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정치인으로 성공한 여성의 출세담은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50대 미혼자인 이 여성은 스스로 ‘국민과 결혼했다.’고 말했으며, 특히 친화력과 리더십이 특출하다고 소개되고 있다. 그 한 예로 회식 술자리에 가면 이 여성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여기에 더 이상 여자는 없다”고 호언하고 스스럼없이 좌중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개인에 대한 평가와는 무관하게, 이 에피소드는 그 자체로 자신이 여성임을 부정함으로써 조직의 지배 문화에 헌신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여성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동화모델’이 한국 여성의 유일한 출세 전략인 셈이다.

  또한 우리가 익히 아는 한국의 모성 이미지는 이중적이다. 가족과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금욕적 어머니의 이면에는 바로 자기 가족과 자식의 출세를 위해 맹목적 경쟁을 벌이고 끊임없는 욕망의 연쇄에 매몰되어가는 어머니, 곧 ‘포식자 아줌마’의 모습이 있다. 전자는 전통적힌 형태로, 후자는 매우 현대적인 형태로 그 외양은 다르다. 그러나 양자의 공통점은 가부장제로부터 벗어나고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가부장제의 가치와 재생산에 공헌함으로써 일정한 위치를 인정받는 것에 있다. 

  그렇다면 여성의 사회진출을 활발하게 논의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는 메커니즘은 어떤 것일까? 때로는 여성이 약자이므로 보호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때로는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때로는 여성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현실적 효과성을 고려한 유연적 전략도 필요하겠지만 이것은 편의적 혼용이라고 생각된다. 결국 한국 여성의 현실에 근거하여 추구해야 할 여성적 권리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일차원적 성별 이분법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우리가 승인 받고자 하는 성차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계속 되어야 한다.

  ‘여성 대 남성’의 대결에 관한 허구적 이야기들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젠더’ 자체에 대한 경계가 항상 작동하고 있다. 다시 말해 ‘여성다운 여성’과 ‘여성답지 못한 여성’을 구분하는 이분법, 더 나아가 ‘남성다운 남성’과 ‘남성답지 못한 남성’을 배타적으로 가르는 이분법이라고 표현해야 정확할 것이다. 여성답지 못한 여성은 현실에서 승리하고 부나 명예를 얻을지라도 정서적 반감, 도덕적 비난에 직면할 것이며, 남성과 동일한 의미의 승리자가 되기는 불가능하다.

  성별 이분법은 남성뿐 아니라 여성에게도 강력한 유혹이 된다. 남성과는 다른 여성성에 대한 강조는 대중에게 쉽게 호소할 수 있다. 그리고 단기적 목표를 구체화할 수 있기 때문에 여성들의 뜻을 모아 세력화하는 데에도 유용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재의 지각과 경험에 호소하는 여성을 강조하는 것은 여러 가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우선 그것은 가부장제의 억압성에 대한 전체적 성찰을 멀리하고 현존 질서 내의 여성 몫을 늘려달라는 요구로 변질되고 폄하될 위험이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 배타적 여성성의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 즉 여성만이 이해하고 나눌 수 있는 ‘경험의 소유’에 대한 배타성, 그리고 여성들만이 여성의 현실을 연구할 수 있다는 배타적 ‘방법의 소유’에 대한 유혹이다.

  성 대결의 논리는 가부장제를 공격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될 때에도 결국 현존질서에 대한 전체적 통찰에 실패할 위험이 크다. 그렇기에 성 대결은 다시 한번 깨어져야 한다. 그리고 남성 중심주의의 의미세계에 종속되지 않는 새로운 여성성, 우리가 승인 받고자 하는 차이에 대한 상상력을 키워가야 한다. 여성성의 차이를 승인 받고자 하는 노력들은 결국 여성 뿐 아니라 남성, 그리고 모든 소수자를 옥죄고 가두는 권력과 지배 전체에 대한 도전과 통찰로 상승해 갈 것이다. 

상병 김재영 
  여성적인 리더십이 요청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 곧바로 <권력의 여성화> 내지는 <여성의 권력화>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는 점......... 
권력과 결부지어 회자되는 여성성의 논리 역시 '이미' 가부장적인 권력의 성격을 더욱 강화시키는데 부역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상병 박준연 
  재영 / 저는 가부장제 하에서 허용되는 여성성이 아닌, 여성 자신이 표현하고 누리는 여성성에 대한 '사회적' 승인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남성을 인간 보편의 기준으로 만드는 가부장적 권력의 해체는 곧 기존의 권력과 지배질서 자체를 바꾸는 것이죠. 이러한 지배구조를 바꾸지 않은 채 단지 여성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덧붙여 여성성을 승인하는 사회란 지배질서에 의해 주변화되었던 다른 소수자의 상상력과 언어를 인정하는 사회이기도 하겠지요. 성이 더 이상 하나가 아니라면 그것이 반드시 둘일 필요는 없으며, 정형화되지 않은 새로운 개방성과 다원성도 함께 인정되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단상. "여성성"개념의 허구에 대하여
                                     상병 김현진

(*이 글은 준연님의 <새 여성학 강의> 후기를 읽고 떠오른 생각이 제 멋대로 가지를 친 결과물입니다. 한 마디로 '잡초같은 글'이라는 소린데요, 히히. 저의 글쓰기는 여전히 아마추어적입니다. 논리적 고찰보다 순간순간 떠오른 '발상'에 의존한다는 말이지요. 제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이 글을 쓴달까요. 여튼, 태클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단상. "여성성" 개념의 허구에 대하여.




영어권에서는 남성을 Men이라 지칭하고 그 앞에 'wo-'를 붙여 여성(Women)을 지칭한다. 보통 Men이 남성 뿐만 아니라 사람 일반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는 지극히 남성 기준의 언어이며(언어의 남성성이라고 하기도 하..던가?) 고로 '여성'이라는 이름은 차별 속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이름의 탄생이 그렇다고 해서 여성이 탄생부터 남성의 그늘에 있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여성을 구속하는 것은 그녀들에게 갈빗대 하나 떼어주듯 이름을 지어 주었던 기존의 헤게모니이므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단어를 사용하자는 운동에 힘입어 언어는 적극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사람'을 뜻하는 단어 또한 마찬가지인데, 이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Men 대신 'People'을 사용하자고 주장한다. 조금 배웠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설득력을 얻는 주장이지만, 나는 이것이 윤색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단어는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표현"의 단어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People을 입에 담으면서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Men을 떠올리며, 이 때 언어는 걸러지지 않는다.(그러므로 이것은 그저 표현의 차이로 전락한다.) 물론 세대가 흐르면 해결될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더욱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하는데, 바로 이렇게 한 번 걸러진 단어가 세계의 모순을 의도적으로 은폐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정치적이다.) 여성의 정체성 문제는 이름을 고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이름이 반영하는 것은 표면일 뿐이고, People이 무시하고 있는 Men의 세계가 문제의 진원지임을 잊으면 곤란하다. 

'여성성'은 그녀들의 특성이다. 정확히 말하면 사회가 부여한, 그녀들에게 '어울리는' 특성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위에서 설명했던 '여성'만큼이나 모호한데, '여성'이 '남성'에게서 나왔던 것처럼, '여성성'이라는 개념이 포섭하는 특성들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남성성'에 대한 고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성 개념"이 갖고 있는 한계가 발견된다. 이를테면 '힘, 능동성, 적극성' 등의 속성들을 '남성성'이라는 가방 안에 집어넣으려 발버둥치다 보면 많은 예외를 발견하게 된다. 남성적인 가치를 갖고 있지 않은 수컷들도 많을 뿐더러, 오히려 이런 속성들을 암컷이 갖는 사회 집단 또한 존재한다. 

이렇게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남성성은 여성적이지 않은 것"이고 "여성성은 남성적이지 않은 것"일 뿐이다. 이래서야 정의는 커녕 개념의 존재 자체를 의심할 수 밖에 없다. 남녀가 유별했던 조선시대나 통금이 존재했던 쌍팔년대라면 남성성이나 여성성의 존재 대해 인정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동화 속 임금님의 O라인 몸매가 만천하에 드러난 건 그가 착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마법의 옷을 입었기 때문이고, 우리는 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백성들이 믿었던 것처럼.(결국 그들은 옷의 존재또한 '믿는다.') 그러나 메트로섹슈얼과 하이브리드가 판치는 지금 이 개념들은 쓰레기통에 쳐박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액형에 따른 성격만큼이나 쓸모없는 이 개념이 존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물음의 답은 간단하다. "바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바꿀 필요가 없다는 말은 당연히 '바꿀 수 있는 주체'를 가정한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주장을 들이대려 한다. 굳이 형용모순의 남성성을 형용모순의 여성성과 싸우게 만드는 "헤게모니"가 존재한다는 게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헤게모니가 존재한다는 점이 아니라, 그 이전에 여성성의 문제를 '성(性) 밖의 것'으로 해석하려 한다는 점이다. 쓸모 없어진 개념의 틀은 오직 그 뒤에서 문제의 본질을 은폐하려는 자들만이 필요로 할 뿐이다. 

멀리 돌아왔는데, 나는 이 문제에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대립항을 제거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문제와 억압받는 그녀들의 특징은 근본적으로 권력의 문제이며, 남성과 여성 개념은 그 뒤에서 화살을 피해 숨어 있던 '헤게모니를 쥔 집단'의 존재를 효과적으로 숨기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남성성'이 포섭하는 가치는 사실 '강자의 논리'가 집약된 결과물들 뿐이다. 만약 세상을 쥐락펴락했던 자들이 수동적이고 부드러운 것을 통해 권력을 얻을 수 있었다면 오히려 그것이 '남성성'에 포섭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남성과 '권력을 가진 자들' 은 교집합이 (크게) 존재할 지언정 동일하지는 않다. 모든 남성이 힘을 가진 것은 아니며, 힘을 가진 자들이 모두 남성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들을 보라. 그녀들은 '거시기 안 달린 남성'이다. 이 때의 남성은 XY염색체를 가진 수컷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헤게모니 위에 선 자'를 의미한다.)

'여성성'의 모순은 그 개념적 불순함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여성성이라는 동질성을 기준으로 뭉친 여성 집단이 존재해서 이들이 남성 집단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실은 여성성을 가진 동일한 여성이라는 개념 속에 왜곡되어 기존 체제에 의해 착취당하는 파편적인 '그녀들' 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녀들은 뭉칠 수 없는 개념을 통해 뭉치려 하기 때문에 뭉쳐 있다고 믿을 뿐 뭉치지는 못하며, 싸우되 진정한 적과 싸우지 못하기 때문에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타겟을 찾지 못한 채 자본논리와 정치적 의도에 수시로 휘둘리는 모습이, 그녀와 그녀들의 현실이다.

요즘은 생물학적 성에 근거한 단어인 Men/Women보다 인성적인 측면의 성(=젠더)에 근거한 Male/Female의 사용을 권장하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이 단어마저도 여성(Female)이 남성(Male)에서 분화되었음은 주목할 만 하다. 이는 현재 여성의 위치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예가 아닐까. 그녀들은 존재할 수 없는 '여성으로서의 자신'이 아니라 순수하게 '사회적 소수자'로서 개성과 다원성을 보장 받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 여성성의 강조는 이를 왜곡하는 정치적 수사일 뿐이며, 그녀들은 '여성성'을 버려야 그녀들을 조종하고 있던 진정한 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병장 서정현 
  대체적으로 동의합니다. '여성성'과 '남성성'으로 구분짓는 것은 인위적인 산물이라 생각합니다. 최근 읽은 책에서 기억나는 문구가 있는데요. '자연 자체는 너무도 다양하고 이질적인 구성원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페미니즘과 관련하여 그 누구의 편도 들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은 자연일 뿐이다!' 란 문구였습니다. 


병장 이기창 
  남성성과 여성성이 사회적으로 규정되고 그 기준에 벗어나는 정체성을 가진 그/그녀들에 대해서는 사회적 차별이 존재하며, 억압과 배제가 만연하다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듯합니다. 하지만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로 하여금 그녀들의 여성성을 버리게 하는 것이 해결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그/그녀들은 사회적으로 조직되고 규정되며 훈육되어온 '남성성'과 '여성성'을 자신의 일부인양 내면화하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에 모순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의 과거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를테면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자본이 수행해야했을 노동력의 재생산 노동, 즉 수많은 가사노동과 양육 등이 여성들에게 전가되는 현상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그 일을 묵묵히 수행해왔던 이땅의 수많은 어머니들의 과거를 부정하는 것은 그녀들의 삶에 대한 부정입니다. 1970년 서울 평화시장에서 자신의 몸을 불살라가며, 노동자로서 인간다운 삶의 보장을 주장했던 청년 전태일도 "자신의 과거가 부끄럽다고 해서 과거를 부정하는 것은 곧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페미니즘 운동역사에서도 (남성과 동일하게)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하는 운동으로 시작되었던 제1기 페미니즘(1기 페미니즘은 남성과 뭐든지 똑같은 권리와 책임을 요구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합니다. 다시 말해 여성과 남성, 여성과 여성, 남성과 남성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은, 자신의 삶을 긍정하되 남성과 여성, 이성애자/동성애자는 물론 같아보이는 집단 내에 존재하는 차이에 주목하는 2,3기 페미니즘으로 분화,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에 보다 본질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일방적인 강조/폐기라는 이분법을 넘어 억압당해왔던 그/그녀들의 삶을 긍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 모순이 내재한 삶의 무조건적인 긍정이 아닌 자신의 삶에 내재된 모순을 자각하고 이를 바꿔나가기 위한 긍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그/그녀들의 차이를 존중하고, 차이를 차별로 환원하는 사회구조를 바꿔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없어져야 하는 것은 여성성이 아니라 (여성성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여성에게)여성성을 강조하거나 (여성성을 가진 남성에게)여성성을 박탈하는 사회구조입니다. 차이는 타인의 삶에 저촉되지 않는 한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하며, 차이를 차별로 환원하는 가부장제는 반드시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상병 김현진 
  일단 모호하게 썼던 것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여성성을 버린다'는 말은 여성임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동안 내면화해왔던 속성들을 무시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준연님의 답글에 제가 단 댓글을 보시면 감이 잡히실 테지만, '여성성'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녀/그녀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게 제 발상의 요지입니다. 이 때 여성성은 모호한 개념으로 전락하는데, 지금 그녀들의 문제를 "권력을 가진 남성에 대한 권력을 갖지 못한 여성의 저항"으로 간주한다면 적과 자기 편을 잘못 인식하게 될 거라는 거죠. 

우리는 '여성'을 사회적 약자로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남성'이 사회적 강자인 것은 아닙니다. 여성의 적이 남성이 아니듯 남성의 적 또한 여성이 아닙니다. 사회구조와 '권력을 쥔 자들'은 양자를 대립구도로 몰아가면서, 소모적인 분쟁을 의도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치의 지역주의에서도 나타나지만 이런 '편가르기', '소모적 논쟁'은 국민의 쓸데없는 관심을 받지 않으려는 지배층의 전가의 보도지요. 

투쟁의 당사자(적과 동지)는 대립되는 양자이므로, 대립항이 진정한 적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여성의 이름으로 저항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모호한 주체의 투쟁이 실제적인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까요. 권력관계는 사회 전체에 작동하고 있으며, 여성 대부분에게 자행되고 있는 실제 문제들은 역시 실제 '피해자'의 관점에서 가해자와 싸워야 할 거라 봅니다. 


여성성에 대해 학계에서 어떤 정의를 내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본문에서 말했듯 '약자의 논리'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사실 페미니즘에 대한 지식은 전무한 상황에서 권력관계만을 기초로 쓴 글이라 기창 님의 댓글은 제겐 의미가 깊네요. 좋은 댓글 잘 봤습니다.



[re] 폐쇄회로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상상력.
                                           상병 박준연

* 우선 현진씨의 태클(?)에 감사함을.. 아쉬운 점은 제가 오늘부터 휴가를 조금 길게 나간다는 것. 아침에 신문과 컵 등 셋팅하러 올라왔다가 현진씨의 글을 봤는데 10일 정도의 시간동안 의견을 피력하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아 짧게나마 두서없이 적어봅니다.(웃음) 저 역시 백태클도 환영할께요.



  성별을 가르는 이분법에는 여러 가지 이질적 판본이 있습니다. 음과 양, 자연과 문명, 생명과 파괴, 평화와 전쟁, 공생과 경쟁등. 여성과 남성을 구별하는 관념들은 다양한 형태를 뛰고 있습니다. 성별의 구분은 아직까지 문명의 기본 범주처럼 인식되고 있기에 그 포괄성은 매우 넓으며, 과거의 그것을 전복하려는 새로운 발상도 다시금 또 다른 형태의 이분법에 포획되고 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땀) 여기에서 관심의 초점은 성별의 '차이'가 어떻게 사고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성별 이분법 중에서도 가장 친숙한 것은 남녀가 유별하니 각자 본분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는 전통적 규범입니다. 이 규범에는 성별 간의 위계적 관계, 남성이 주도하고 여성이 따르는 주종관계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남성은 '교환하는 주체', 여성은 '교환되는 객체'이며 가부장적 가족관계 및 성 상품화에도 동일한 논리가 관통합니다.

  전통적이고 위계적인 성별 구분은 근대화와 산업화의 결과 그 설득력이 계속 쇠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교육, 직업, 선거권과 피선거권 등에서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참여할 기회를 달라는 주장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전 세계로 확대되었구요. 이와 더불어 남녀 간의 본질적 차이를 부정하고 동등한 가회와 여건을 마련해 준다면 성별을 불문하고 능력에 따른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평등주의 담론도 강화되었습니다. 평등주의는 성차별 없는 평등한 기회의 제공,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 등으로 구체화되었고 공적 영역에 진출하고자 하는 여성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평등주의는 법과 제도, 공적 영역에는 어느 정도 적용될 수 있겠지만 사적 영역과 일상 생활에 뿌리 내린 여성억압을 바꾸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여성이 취업한 후에도 가사노동과 양육을 1차적으로 담당해야 한다면, 역으로 노동자를 임신이나 출산, 양육을 담당하지 않는 사람으로 전제하는 조직체계속에서, 여성은 결코 남성과 평등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성별의 구분은 기실 여성과 남성을 각각 저울의 양쪽에 올려놓는 이원론이 아니라, 남성을 정상성의 기준으로 삼는 일원론적 가치의 파생물임이 드러납니다.  저는 문제는 어떤 경우에도 남성이 정상성의 기준으로 작동한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동일자와 타자의 배타적 이분법은 계속 폐쇄적으로 재생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폐쇄회로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상상력은 어떻게 가능할지..? 하나인 성을 '하나가 아닌' 복수의 성으로 해체하는 것입니다. 남성의 대립물이나 그림자가 아닌, 그래서 가부장제의 파생물이 아닌 그 자체로 온전한 새로운 여성성을 승인받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별 '차이'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뒤집어볼 때 우리는 차이 자체를 배후세력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차이가 사유되는 방식을 비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병 김준호 
  현진님의 글에 대한 답글을 적을까 했는데, 준연님이 좋은 글을 써주셨네요. 남성성으로부터 파생된 여성성에 대한 접근까지는 현진님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성적 차이가 발생하는 방식을 간과한 채 여성성을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대립의 축은 남성과 여성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성적 판타지를 중심으로 한 성폭력적 사유와, 여성으로서 자신의 몸을 긍정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사유일 듯. 이 대립의 축을 전제한 후, 여성 운동의 파급과 효과를 위해 여성적 사유가 포괄할 수 있는, 포괄해야 하는 모순과 성격들을 따져봐야 할 것 같네요. 때문에 성폭력적 위계가 위 대립의 축을 토대로 발생하고 있는 상황을 간과한 접근은 적합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병장 이건룡 
  쭉 논의해오던 글들 잘 읽었습니다. 좀 핀트가 어긋나지만 ‘인위적’이지도 않고 ‘작위적’이지 않으며 약간의 수정을 가하자면 ‘자본논리와 정치적 의도’가 아닌 ‘자본의 정치력’에 노출된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덫 붙이자면 여성에 대한 폭력적인 판타지에 대한 기원을 창녀라는 유례 깊은 ‘상품’적 인식에서 강도스런 빈약한 상상력을 짜내고 새로운 여성상 정립을 위한 활력적인 문제 양상에 대한 파악이 필요하다 생각 했습니다. 더구나 여성성이나 남성성 등등의 여러 가지 정체성마저도 ‘상품’의 광고에서 미진한 상상력을 마저 채워 주는 것 아닐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루카치와 벤야민, 아도르노 등이 산업사회에서 (비약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기까지를 제2의 자연이라 명명 하고 그 속에 현대인을 새로운 자연속의 ‘선사인’이라 취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기술이 주는 편리함(상품)과 안정(돈)등에 안주하며 전통과의 단절 속에 잊혀져간 성에 대한 인식에 대한 새로운 도약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생각이 들었습니다(후기 자본주의 사회 등의 세대엔 걸맞지 않은 뒤떨어진 사고이여서 신선한 것은 없네요). 

이런 생각이 든 것은 방안에 유행하는 상품으로 진열된 그리고 으레 같이 등장하는 탄력적인 근육과 몸매를 자랑하는 남ㆍ녀 배우 등이 등장하는 광고를 패러디한 콜라주 같은 예술 작품입니다. 멋진 제품들이 가득 찬 곳의 남, 여는 조각같이 완벽하죠(모 cf의 여주인들처럼?). 

주인은 미스터 근육이고 안주인은 개미허리에 풍만한 가슴 등의 ‘선사인’. 

여하튼 잘 읽고 갑니다. 


상병 김현진 
  공교롭게도 준연님께서 나가기 직전에 가만히 있는 제 발에 걸리신 거라는 농담(!) 던져봅니다. 

좋은 답글과 댓글 잘 읽었습니다...만, 사실 전 준연님의 글에 태클을 건 게 아닙니다. 핀트가 약간 맞지 않는 건 그래서인가 봐요. 

거대담론에는 항상 틈이 존재합니다. '여성/남성은 이렇다'라는 일반화 작업에는 예외가 존재하고, 여성성과 남성성의 빈틈은 바로 '개인 자신'이지요. "남들은 그렇다던데 어쨌든 난 안그랬어"라는 생각은 훌륭한 핑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외야말로 타겟과 투쟁방법을 왜곡시키는 게 아닐까요. 애초에 가해자가 남성일 수는 있지만(아주 많다고 봅시다) 남성 일반이 가해자는 아닙니다. 피해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수의 권력에 노출되어 있는 건 비단 여성뿐만이 아닙니다. 여성은 권력의 피지배층을 표현할 수 있는 효과적인 카테고리는 아닌 것 같아요. 

대부분의 여성이 겪는 사회문제도 결국은 개인과 개인들(여기선 그녀와 그녀들이 되겠지요)에 대한 사회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여성의 이름으로 주장되어야 한다기 보다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주장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실제 사회 문제에 적용해 볼까요. 가사노동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은 '가정주부'(여성일수도, 아닐수도 있지요)의 입장에서 싸워야 할 일이고, 취업 후에도 육아를 전담해야 하는 것은 '여성' 이전에 '그녀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녀들은 "그녀들만이"(여성&기존 관념에 의해 취업 후에도 육아를 요구받는)그녀들의 입장에서만 싸워야 합니다. 앞글의 결론이지만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해야 적도 잘 보이는 법이니까요. 

/여성성, 남성성의 '관념'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요. 맞습니다. 저는 그 관념 밖에서 싸워야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상병 장윤호 
  여성운동은 제도권 내부와 외부에서 같이 이루어지고 있는 얼마 안되는 진보적 사회 운동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 범위가 실로 광범위 한 것 같습니다. 제도권 내에서의 여성운동은 여성복지나 제도적 형평성과 같은 '실제로 얻을 수 있는 것을 얻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제도권 밖에서는 다양한 대안운동들이 페미니즘과 결합하여 그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소셜리스틱 페미니즘은 물론이고, 생태학과 결합한 에코페미니즘이나 해체적인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이 (적어도 이론적로라도) 존재하죠. 
제가 보고 느끼기로는 여성운동이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들을 모두 포괄하는 광범위한 진보운동으로 자리매김하자면, 비주류,소수자,피해자를 위한 운동이 되어야 하고, 이것을 모두 함께 끌고 가느냐가 관건이 될 것 같습니다.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여성성'은, 준연씨가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셨지만, 단일하고 단단한 개념 덩어리라기 보다는 '복수의 성- 동성애자, 트렌스젠더 등-'을 허용하는, 다양한 소수자의 정체성을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다양한'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해야 한다는 현진씨의 말씀과도 연결되고요, 
구체적으로 제도권과 부딪히는 사회운동의 측면에서 여성성의 강조를 시도하려하다보면, 결국 정치학적인 접근이 되는데, 현진씨 처럼 여기서 '권력화'의 뉘앙스를 느끼시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성성을 이렇게 바라본다면, 개념자체가 탈 권력에 친밀한 것이기 때문에, 형용모순이 될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우려는 해소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