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다시 3월이 왔네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제가 갓 대학에 입학했던 새내기 시절을 떠올려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더 많은 밤들을 그이들과 함께 술로 지새웠죠. 오가는 사람들마다 서로의 희망찬 대학생활의 시작을 축복했었고, 우리들의 영원한 우정에 대해 무수히도 많은 맹세를 다져갔죠. 어떤 이는 벌써 사랑을 이뤘고, 또 어떤 이는 벌써 사랑을 잃었어요. 사랑을 얘기하고, 젊음을 얘기하고, 희망을 얘기하고, 꿈을 얘기했었죠. 그 나날들이, 그 시간들이, 그리고 그 순간들이 아직도 나를 웃음짓게 하는데. 지나간 시간들이 으레 그러하듯, 그 시절 역시 어제처럼 붙잡아질 것 같기도 하다가 금세 아스라이 부숴져 버리네요. 하긴, 많은 시간들이 지났으니까요. 그 친구들은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또 제대를 해서 복학을 하고. 이제 모두 그 '고학번'이라는 것이 되었으니까요.
아. 그러다 문득 저에게도 붙어버린 '고학번'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요. 내게 있어 '고학번 선배'란 무엇이었을까? 나를 '고학번 선배'라고 여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고요. 어쩌면 여러분과 전 평생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며 살수도 있을거예요. 하지만 또 어쩌면 우린 서로의 삶을 비춰주는 작지만 소중한 불빛이 될지도 모르죠. 그들이 제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예요. 그래서 이제 얘기해보려구요. 사실, 아직도 '고학번'이라는 말에 되려 제가 어색해지지만요.
새내기 시절에 참 많은 고학번 선배들을 볼 수가 있었어요. 새터나 신환회를 비롯한 특별한 과행사는 물론이거니와, 과방에서도 종종 일곱학번 정도 차이나는 선배들도 볼 수 있었죠. 가끔은 이웃집 아저씨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이들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주눅들때도 있었고, 갑자기 다가와 느닷없이 어려운 정치얘기를 하는 통에 머리가 지끈지끈 해지기도 했어요. 근데 뭐랄까. 그 땐 묘한 낭만같은게 있었어요. 그 낭만들은 대성리로 가는 버스안에서 어떤97학번 선배와 제 동기 녀석이 함께 기타를 치며 신나게 불렀던 노래소리 속에, 혹은 위하"고"를 외치며 홀짝홀짝 비워냈던 소주잔 깊은 곳에 스며들어있었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낭만들이 기억이 되고, 그 기억이 더 많은 나이를 먹고 추억이 되었어도 제 삶의 일부가 되어 저를 움직이게 하는 건, 아직도 그들의 삶이 저에게 유효하기 때문일거예요. 기나긴 줄서기의 과정에서 드디어 맨 앞 부분을 차지했다고 믿었을 때, 넌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라고 말해준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절망과 나약함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좌절이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비로소 한 걸음 내딛게 하는 시작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으니까요. 제가 생각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삶이 존재함을 알게되었고, 그 모든 가능성들이 저에게 열려있음을 보여주었어요. 그들로 하여금 저는 제 삶을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었고, 제가 속한 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얻을 수 있었어요.
세월이 많이 흘렀기 때문일까요. 이제는 고학번 선배와 새내기들이 얘기하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어졌어요. 어쩌면 세월때문만은 아니겠죠. 이유는 많을거예요. 학생회와 학회는 점점 그 기능을 상실하고 있고, 해가 거듭될수록 신입생들의 개인주의화 현상은 심해지고 있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조차 잘 모르겠어요. 선배들은 먼저 인사를 하지 않는 후배들이 버릇없게 느껴지고, 후배들은 괜히 선배들이 와서 억지로 술을 먹이지나 않을까 걱정하게 되었어요. 그런게 아닌데. 아직 우린 서로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하는데, 아니 알 기회조차 없었는데 말이죠.
지나간 시절들에 대한 애틋한 향수만은 아니예요. 단지 그 시절들이 더 재밌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구요. 무엇보다 무궁무궁한 잠재력과 가능성이 있는 후배들에게 더 많은 삶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예요. 그들이 아직 찾지 못한 빛이 도처에 비추고 있으며, 한번도 뒤돌아 보지 못했던 자신들의 그림자 또한 길게 드리워져 있음을 알려주고 싶어서예요. 새내기들의 젊음과 열정과 싱그러움에서, 세계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으로 가득찬 눈빛에서 다시 한 번 용기를 얻고 싶어서예요. 당신들의 삶 속에서 지난 날의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어서예요.
이제는 서로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서보기로 해요. 과방을 두리번 거리는 이웃집 아저씨, 아줌마 같은 사람들에게 반갑게 말을 건네봐요. 아까도 말했듯이, 우린 어쩌면 서로의 불빛이 될지도 모르는 사이잖아요. 무슨말을 어떻게 시작할까 모를땐, 새내기들만의 필살기를 써보세요.
"선배, 밥사줘요(웃음)"
어쩜, 그 말은 그 사람들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일수도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