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병 최후의 날


초등학교 시절 가장 자주 받는 질문이 있었다. 

장래희망이 뭐니?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에 자신이 바라는 것. 소망. 기대. 요구. 그 모든 것의 투영이 ‘장래희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반대로 ‘장래희망’이란 현재의 자신이 가장 높게 생각하는 가치를 그대로 투영한다.

2005년 12월 23일.
 나에게 물었다. 장래희망이 뭡니까? 

병장이요.

하하하. 우스운가? 나는 우습지 않았다. 

많은 시간이 있었다. 아니 시간’만’이 있었다.

2005년 12월 23일부터 2006년 4월 30일까지 나는 이등병이었고,
2006년  5월  1일부터 2006년 10월 31일까지 나는 일병이었고,
2006년 11월 1일부터 2007년 5월 31일까지 나는 상병이겠지. 

그 시작점으로부터 521일의 시간이 지나 나는 장래희망을 성취하기 일보 앞의 단계까지 와 있다. 우스운 일이다. 희망을 이루기 위해 나는 아무런 노력도, 관심도 경주하지 않았다. 그저 시간만이 521일의 시간만이 흘렀고 나는 목표를 달성하려 한다. 우습고 또한 잔혹하다. 

왜 그 시절 나는 ‘병장’을 꿈꾸었는가? 군이라는 조직에서 나가고 싶다면 ‘전역’을 꿈꾸었어야 할 텐데 어째서 나는 ‘병장’을 꿈꾸었을까. 간단하다. 나는 혁명을 원했다. 

이등병 시절 하루가 24시간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잔혹했었다. 지구라는 놈은 어째서 24시간 만에 한 바퀴 회전하는 것일까. 12시간이라면 너무나 좋을 것이다. 8시간 자고 1시간 30분 밥먹고 1시간 30분 근무서면… 어이쿠 1시간이 남네. 주특기라도 해볼까.

자대에 와서 처음으로 배운 것은 ‘국가를 지키기 위해 왔다’라는 자부심도, 충성심도 아닌 그저 ‘걸레를 잘 빠는 법’이었다. 걸레라는 놈에는 ‘이등병’이 가져야 할 모든 가치들이 집약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항상 제 몸을 내던져 모든 더러움을 씻어내고, 더러워진 몸을 다시 씻어내기 위해 온몸을 비틀고 비틀고 비틀어, 몸이 분쇄될 만큼의 고통을 참으며 물기를 제거당했다. 그리곤 빛이 들지 않는 청소함 한 구석에 잠들곤 한다. 
그 걸레를 들어 침상을 네 발로 기어다니며 먼지를 털어내고, 걸레를 빨고, 걸레를 털고, 걸레가 잠들면 나 역시 미라처럼 양 팔로 온몸을 감싼 채 이등병들이 우글우글한 한 내무실 구석 총기다이 옆에서 잠들었다. 이게 군대구나. 

변화를 꿈꾸었다. 높은 이상을 원했다. 분대장을 제외한 모든 병은 상호간에 평등하다. 그런데 심지어 이등병 사이에도 계급은 존재했다. 1달, 1달. 계급은 연속 스펙트럼처럼 길게 늘어서서 나는 붉은색도 아닌 적외선에 서 있었고, 병장 그네들은 너무나 멀어 Cosmic Ray 의 영역에서 노닐고 있었다. 군대는 계급 사회고, 병장과 상병이 다르고, 상병과 일병이 다르고, 일병과 이병이 다르다. 그러나 그것이 온갖 착취적인 행위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1,2년도 아니고 10,20년도 아니고 반백년에 가까운 군대의 역사에서 이어져온 카스트적 시스템은 21세기를 넘어선 지금에도 그 위상을 견고히 하고 있었다. 

물론 많은 것이 변했다. 병장의 전유물이던 사제 샴푸와 세안제들은 이등병들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내무실에 누워서 잠을 취하는 것 역시 이등병들에게 까지 허용되었다. 주말 아침이되면 내무실은 계급에 상관없이 거대한 수면텔이 되곤 한다. 책을 읽는 것 역시 허용된다. 좋은 세상이 되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내무실에서 잠을 자는 것. 사제 샴푸를 사용하는 것. 사제 속옷을 입는 것. 책을 읽는 것. 이런 행위들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행동들을 제한해 왔던 것은 계급적 차별성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을 뿐, 그 자체가 자신들에게 피해가 오는 것은 아니었다. 이등병이 사제 샴푸를 쓰던 비누를 쓰던 까놓고 말해 내 머리의 비듬과는 하등의 상관도 없다. 단순한 기분의 문제인 것이다. 

가장 적나라하게 들어나는 계급적 차별은 이러한 상황이다. 
“각 내무실 작업병 두 명씩 행정반 앞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병장들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상병들은 그윽한 눈길로 일병을 훑어본다.
일병들은 잽싸게 자기 밑으로 두 명이 있는지 확인 한 후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병들은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이등병’중 어떤 두 명이 나갈지를 결정한다. 

이것은 샴푸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샴푸는 내가 쓰던 남이 쓰던 상관이 없다. 그러나 작업은 내가 나가는 것과 후임이 나가는 것이 다른 문제가 된다. 상,병장은 커녕 일병만 작업을 나가려고 해도 다들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이등병 애들 놔두고 왜 니가 나가? 앉아있어”

 나는 남들과는 다르리라. 계급이 되고 속칭 짬밥이 된다고 해서 놀고만 있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며 작업병을 찾는 행정반의 메시지에 몸을 일으켰다.

 “내가 나간다. 한 명만 더 나랑 같이 가자”

그 날 이등병들은 단체로 캐갈굼을 당했다. 미안하다. 얘들아

혁명이란 단순히 병장이라는 높은 계급이 되고, 분대장이라는 명령권을 얻는 문제가 아니었다. 시스템이라고는 해도 결국 내무실에 거주하는 40명 남짓하는 작은 규모의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정한 규칙이며 틀일 뿐이지만 그것은 단단하고 탄탄했다. 시스템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룰 – 계급에 따른 의무 부여 – 을 뒤집기 위해서는 40명 전원의 동의를 이끌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심지어 현재 착취당하는 입장에 있는 이등병 역시 마찬가지이다. 
 
“저도 언젠가 상병 되고 병장되면 편해질 거니까. 그때 보면서 힘냅니다”

아아 - .

 그러니 나의 장래희망은 틀렸다. 
 나의 장래희망은 ‘병장’이어서는 안되었다. 이미 계급이나 권력에 기대어서 시스템을 바꾸어 보겠다고 하는 자체부터가 이미 시스템에 종속되고 있을 뿐임을 어째서 나는 상병 최후의 날이 되어서야 깨달을 수 있었을까. 내가 진정으로 해왔어야 하는 것은 ‘설득’이요, ‘점진적인 변화’였다. 
병장이 되기 전 이등병이었을 때도, 일병이었을 때도 나는 동기들을 후임들을 가까운 선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설득시켜왔어야 했다. 그것이 비록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는 시도했어야 했다.  ‘실천’이 결여된 ‘사고(思考)’만큼 무의미한 것도 없음을

상병 최후의 날은 이내 지나 병장 최초의 날이 다가올테지. 

그 시간들은 부디 무의미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