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사 이야기] 2편- 조선상고사 (1) 
 
 
 
 

에헴. 많이 늦었습니다.(땀)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상고사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는 분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은 즐겁게 글을 쓰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만 그 반대편엔 꼭 그 즐거움 만큼의 무게를 지닌 부담감이 들더군요. 
검증된 증거가 없는 이야기를 역사의 틀에 맞춰 풀다보니 언제 자신이 양치기 소년이 될지 모르겠다는 겁도 나고. 통상적인 '역사'라 함은, 아무래도 '역사=사실(fact)'이라는 면에서 좀더 실증에 꽁꽁 매여있고 상대적으로 논리적인 여유공간은 적은 소재니까요. 더구나 제가 옮기는 이야기는 학계에선 질색하는, 아직 '음모론' 비슷하게 취급중인 미움받는 비주류가 아니던가. 허허허.(땀) 


이놈의 노파심 때문에 2편을 쓰든 도중 
'혹시라도 내 글을 읽고서 좋은 느낌을 받은 누군가가 상고사 이야기를 다른 곳에 가서 풀어놓다가 만약 강력한 치아를 가지신 어느 국사교과서 애호가에게 포착되는 날엔 틀림없이 머쓱해지는 상황이 벌어질 것만 같다'
는 강력한 우려가 들었어요. 살다보면 조금만 아는 것이 아예 모르는 것보다 더 해가 되는 경우도 왕왕 발생하듯이 말이죠. 실제로 대학에서 한국사를 전공하는 친구에게 상고사에 대한 질문을 몇개만 들이밀어 보세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주 난감한 표정을 지어줄겁니다. 


그래서 오늘 두 번째 이야기와 이어질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기왕 하는김에 상고사 얘기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앤드 혹여나 나중에 역사관이 다른 사람과의 논쟁에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한 배경지식을 몇가지 짚고 넘어갈까 합니다. 두번째 이야기에서는 조선 상고사가 그 재료이고, 세번째 이야기에서는 '중국 25사'가 그 주역입니다.


쪼끔. 길어도 이해해 주시길.(베시시시)





조선 상고사


두둥. 북소리 한번 내줘야 합니다. 
근대와 현대. 우리 상고사에 대한 연구는 단재 신채호가 물꼬를 텄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조선 상고사는 원래 '조선사'라는 이름으로 상고역사부터 조선시대까지 총체적인 역사를 저술할 요량으로 신채호에 의해 씌여진 책이나 완성되지 못하고 백제의 멸망과 그 부흥운동까지만 다루고  그 이후의 역사는 수록되지 않았으며 1931년부터 조선일보 학예란에 연재되었으나 연재가 상고사 부분에서 끝났기 때문에 조선 상고사라는 이름이 붙게된 책입니다. 상고사 이후의 역사가 추가된 단행본은 1948년에 종로서원에서 출간되었구요 전 12편으로서 1편 총론, 2편 수두시대, 3편 3조선 분립시대, 4편 열국쟁웅시대 대(對)한족 격전시대, 5편 (1)고구려 전성시대, 6편 고구려의 중쇠(中衰)와 북부여의 멸망, 7편 고구려·백제 양국의 충돌, 8편 남방제국 대(對)고구려 공수동맹, 9편 3국혈전의 시작, 10편 고구려 대수전역(對隨戰役:수나라와의 전쟁), 11편 고구려 대당전역(大唐轉役:당나라와의 전쟁), 12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신채호는 총론에서 '나'와 '내가 아닌 것'의 투쟁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있고요, 역사발전의 원동력을 사물간의 모순과 상극관계에서 파악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그닥 깊이 공감가는 내용은 아닙니다. 
주목할만한 점은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위해 역사를 연구하는 방법으로 사료의 선택과 수집, 모은 사료에 대한 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실증주의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채호는 실증주의를 강조하며 과거 사대주의적 사관으로 역사를 서술한 유학자들과 당시 식민주의 사가들을 비판했으며 사실 현대에 조선상고사가 갖는 의미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한가지 재밌는점은 당시 신채호가 실증주의로 우리의 상고사를 곧추세우려 했다면 지금은 그 실증주의 때문에 우리 상고사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한가지 더 알아두어야 할 점은 당 서적에서는 종래에 단군, 기자, 위만, 삼국 순서의, 혹은 중간의 위만조선이 생략된 순서로 계승되던 역사 인식체계를 거부하고 대단군조선, 고조선, 부여, 고구려 순서로 역사를 나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느 인식체계가 맞다는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역사를 바라볼수도 있다는,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하나쯤 추가시킨다는 생각으로 읽으면 부담이 없겠습니다.(웃음)


아무튼 지금은 상고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고 사실 당 서적의 역사적 서술을 그대로 베끼는 것도 의미가 있겠으나 제가 당 서적을 끌어들인 이유는, 사실 한국사의 대부분을 상하로 엮인 국사 교과서 두권에 기대고 있을 분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기 위함이므로 총론 부분만 같이 살펴보고 넘어갈 생각입니다. 
이 책의 총론 부분을 보면 간단한 역사와 상고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가 뭉텅뭉텅 잡혀오는 바. 그 총론만을 최대한 줄여서 발췌하고 쉽게 써서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나 관심있어 하실분들을 위해 총론 부분을 첨부하겠습니다. 여유가 있다면 총론뿐 아니라 조선상고사 전문을 읽어봐도 좋을것이나 
국한문 혼용체의 압박이 다소 있음은 미리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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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상고사
       
                                                                                                           신채호

제 1 편 총론

(1장은 생략합니다)


제 2장 역사의 3대 원소와 조선 역사의 결점

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짓는 것이요, 역사 이외에 무슨 딴 목적을 위하여 짓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객관적으로 사회의 유동상태의 거기서 발생한 사실을 그대로 적은 것이 역사요, 저작자의 목적을 따라 그 사실을 좌우하거나 덧붙이고 혹은 달리 고칠 것이 아니다. 

화가가 사람의 상을 그릴 때 연개소문(淵蓋蘇文)을 그리자면 모습이 괴걸(魁傑)한 연개소문을 그려야 하고. 강감찬을 그리자면 몸집이 왜루(矮陋)한 강감찬을 그려야 한다. 만일 이것과 저것을 억제하고 드날릴 마음으로 털꾸 만큼이라도 서로 바꾸어 그리면 화가의 본분에 어긋날 쭌 아니라 본인의 면목도 아닐 것이다. 이와같이 사실 그대로 영국사를 지으면 영국사가 되고, 조선사를 지으면 조선사가 되는 것인데, 기왕에 조선에 조선사라 할 조선사가 있었더냐 하면 수긍하기 어렵다. 

안정복이 [동사강목](東史綱目:기자조선에서 고려까지의 역사)을 짓다가 개연히 내란의 잦음과 외적의 출몰이 동국(東國:우리나라)의 옛 역사를 흔적도 없게 하였음을 슬퍼하였으나, 나로서 보건대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적의 전쟁에서보다 , 곧 조선사를 저술하던 그 사람드의 손에 의해 더 없어졌다고 본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하면 역사란 머리에 쓴 말과 같이 시간적 공간적 발전으로 되어오는 사회활동 상태의 기록이므로 때, 곳, 사람 세 가지는 역사를 구성하는 세가지 큰 원소가 되는 것인데 이 원소들이 올바르게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자면 신라가 신라됨은 박, 석, 김 세 성과 동산 고헌촌등 여섯부족의 사람과 경상도인 지리적인 위치와 고구려, 백제와 한 시대인 때로써 신라가 된것이니, 만일 그보다 더 올라가 2천년 전이 왕검과 같은 연대이거나 더 내려와서 2천년 뒤인 오늘과 같은 시국이라면 당시의 신라와 똑같은 신라가 될 수 없으며 또 신라의 위치가 유럽이나 아프리카에 있었더라면 그 또한 다른 면목의 나라는 되었을지언정 당시의 신라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명백한 이치인데 그동안 조선의 역사가들은 매양 그 짓는 바 역사를 자기 목적의 희생으로 만들어서 도깨비도 떠 옮기지 못한다는 땅을 떠 옮기는 재주를 부려 졸본(卒本:고구려가 처음 개국한 압록강 북쪽)을 떠다가 성천 혹은 영변에 갖다놓으며, 안시성(安市城: 만주 요동에 있는 고구려의 성. 양만춘 장군으로 유명하죠.)을 떠다가 용강 혹은 안주에 갖다놓으며, 아사산(단군이 도읍을 옮긴 곳)을 떠다가 황해도의 구월산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허다한 땅의 빙거(憑據:사실을 증명할 근거를 댐. 또는 그 근거)가 없는 역사를 지었다. 더 크지도 말고 더 작지도 말라고 한 압록강 이내의 이상적 강역을 획정(劃定:경계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을 말합니다.)하려 하며, 무극, 일연등 불자가 지은 역사책(삼국유사를 말합니다)에는 불법이 단 한글자도 들어오지 않은 왕검시대에부터 인도의 범어로 만든 지명, 인명이 가득하며, 김부식 등 유가가 적은 문자(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말합니다.)에는 공자와 맹자의 인의를 무시하는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무사의 입에서 경전의 문구가 관용어처럼 외워지고, 삼국사(三國事: 중국 역사책의 하나)열전에 있는 여러 백년 동안 조선 전역의 인심을 지배하던 영랑, 술랑, 안상, 남석행 등 네명 큰 성인의 논설은 볼수 없고 지나를 유학한 학생인 최치원만 세세히 저술하였으며, 여사제강(麗史堤綱)에 원효, 의상 등 여러 철인들의 불학에 영향을 미친 고려 일대의 사상이 어떠한지는 찾아볼수가 없다.

이와 같이 때의 구속을 받지 않고 역사를 지어 자기의 편벽된 신앙의 주관적 심리에 부합시키려 한 것이 허다하고, 심한 경우에는 사람까지 속여 신라의 금왕(金王)을 인도의 찰제리종(刹帝利種:왕족)이라 하며(삼국유사의 작품인 듯), 고구려의 추모왕을 고신씨(중국 오제의 한사람입니다)의 후손이라 하며(삼국사기에 있다는군요), 게다가 조선 사상의 근원이 되는 서운관(書雲觀)의 책들을 공자의 도에 어긋난다하여 불태워버렸다. 

크롬웰(영국 찰스1세의 목을 잘랐던 그 크롬웰 같군요)이 화가가 자기의 상을 그릴 때 그 왼쪽 눈 위의 혹을 빼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고 나를 그리려면 나의 본 얼굴로 그리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화가의 아첨함을 물리칠 뿐 아니라 곧 자기의 참된 상을 잃을까 함이었다. 

조선사를 지은 기왕의 조선의 사가들은 매양 조선의 혹을 베어내고 조선사를 지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네들이 쓴 안경이 너무 볼록하므로, 조선의 눈이나 귀나 코나 머리 같은 것을 혹이라 하여 베어버리고 어디서 수없는 진짜 혹을 가져다가 붙여놓았다. 혹 붙인 조선사도 지금까지는 읽는이가 너무 없다가, 세계가 서로 크게 통하면서 외국인들이 왕왕 조선인을 만나 조선사를 묻는데 어떤이는 조선인보다 조선사를 더 많이 아는 고로 부끄러운 끝에 돌아와 조선사를 읽는 이도 있다. 

그러나 조선인이 읽는 조선사나 외국인이 아는 조선사는 모두 혹 붙은 조선사요, 옳은 조선사가 아니었다. 지금 남아있는 기록이 그와 같이 다 틀린 것이라면 무엇에 의거하여 바른 조선사를 짓겠는가? 우리의 문적(文籍)에서 사료를 구하기란 모래 한말을 일어 좁쌀만한 금을 얻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지라, 혹 어떤 사람은 조선사를 연구하자면 우선 조선과 만주 등지의 땅 속을 파서 많은 발견이 있어야 하고, 금석학, 고전학, 지리학 미술학, 계보 등의 학자가 쏟아져 나와야 한다고 하는 이가 많은데, 그도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우선 급한대로 역사서적을 가지고 득실을 평하며 진위를 비교하여 조선사의 앞길을 개척함이 급한 일일 것이다. 



제 3장 역사의 종류와 그 득실의 역사

조선의 역사에 관한 서류를 찾는다면 신지(神誌)부터 비롯되겠는데, 신지는 권벽(權擘:선조 때 사람)의 응제시(應製詩:임금의 명에 의해 지은 시)에서 단군 때 사관(역사를 기록하는 관리)이라고 한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단군은 곧 수두 임금이요, 신지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수두 임금의 수좌인 벼슬 이름 신치이니, 역대의 신치들이 해마다 10월 수두 대제(大祭)에 우주의 창조와 조선의 건설과 산천지리의 명승과 후세 사람의 거울 삼을 일을 들어 노래하였는데, 후세의 문사들이 그 노래를 혹은 이두문(吏讀文)으로 편집하고 혹은 한자의 오언시로 번역하여 왕궁에 비장하였으므로 신지비사 또는 해동비록등의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고려에 와서는 저작자의 성명을 알 수 없는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삼국사(三國史)등과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가 있었으나, 지금에 전하는 것은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뿐인데 그 전하고 전하지 아니하는 원인을 생각하건대 김부식, 일연 두 사람만의 저작이 우수하여 전해진 것이 아니라, 대개 고려 초엽부터 나라에는 크게 두 파가 있었는데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아가 북쪽의 옛땅을 회복하자는 화랑의 무사가 한 파를 이루고, 사대(事大)로 국시(國是)를 삼아서 압록강 안에 구차히 편안하게 있을 것을 주장하는 유교도(儒敎道)가 나머지 한 파였다. 
두 파가 대립한지 수백년 만에 불교도 묘청이 화랑의 사상에 음양가의 미신을 보태어 평양에서 군사를 일으켜서 북벌을 실행하려다가 유교도 김부식에게 패망하고, 김부식은 이에 그 사대주의를 근본으로 하여 삼국사기를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동, 북 두 부여를 떼어버려 조선문화가 유래한 곳을 진토속에 묻고 발해를 버려 삼국이래 결정된 문명을 초개속에 던지고 이두문과 한역의 구별에 어두워 한 사람이 몇 사람이 되고 한 곳이 몇 군데가 된 것이 많으며, 내사나 외적의 취사(골라서 버리는 거죠.)에 홀려서 앞뒤가 모순되고 사건이 중복된 것이 많아 거의 사적 가치가 없다고 할 것이다. 

불행히 그 뒤 얼마 안 가서 고려가 몽고에 패하여 쿠빌라이의 위풍이 전국을 놀라게 하고 황궁(皇宮)이니 제궁(帝宮)이니 하는 명사들이 철폐되고, 해동천자의 팔관악부가 금지되고, 이로부터 만일 문헌에 독립자존에 관한 것이 있으면 길체 꺼려 피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때라 허다한 역사 저서 중에서 유일한 사대사상의 고취자인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그에 딸려있는 삼국유사만이 전해질 수 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 당대의 사승(史乘:역사가 날조된 사실)을 말한다면, 고려 말엽에 임금과 신하들이 고종이전의 나라 형세가 강성하던 때의 기록은 더욱 몽고의 꺼리고 싫어함에 걸릴까보아 두려워서 깎아버리거나 고치고, 오직 말을 낮추고 후한 예폐(후하게 대접한다는 맥락입니다.)로 북쪽 강대국들에게 복종하여 섬기던 사실만을, 혹은 부연하고 혹은 지어내서 민간에 퍼뜨렸다. 이러한 기록들이 곧 이조의 정인지가 지은 고려사(高麗史)의 원전이 되었고, 이조 세종이 비상하게 사책(史冊: 역사서를 만듦)에 유의하였으나, 그의 할아버지인 태조와 아버지인 태종이 고려 호두재상(虎頭宰相) 최영의 북벌군 중에서 모반하여 사대(事大)의 기치를 들고 혁명의 기초를 세웠으므로 권근, 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조선사략, 고려사, 고려사절요등을 편찬하게 함에있어 몽고의 압박을 받던 고려 말엽 이전의 사료에 의거하여 역사를 짓지 못하고 몽고의 압박을 받은 이후 외국에 아첨한 글과 위조한 고사에 의거하여 역사를 짓고 구차하게 사업을 마쳤다. 정작 고려시대의 실록은 민간에 전해짐을 허락하지 않고 규장각안에 보관했으나 임진왜란의 병화에 죄다 타버렸다. 그 뒤에 세조가 단종의 자리를 빼앗고, 만주 침략의 꿈을 품고서 강계(江界)에 둔병(屯兵)을 경영하다가, 
조선 태조의 존명건국(尊明建國)의 주의에 충돌되어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 간하는 일이 분분하고,
중국 대륙에 용맹하고 억센 명나라가 있어 조선에 대한 감시가 엄중하고,
마침내 명나라 사신 장영이 엄중히 둔병의 이유를 힐문(갈구면서 물어본다. 쯤이 적당하군요)하므로,

세조의 무를 숭상하고 공을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조선 문헌의 정리를 자임하여 불경을 간행하고 유학을 장려하는 외에 사료의 수집에도 전력하여 조선 역대 전쟁사인 동국병감과 조선 풍토사인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편찬하고(동국병감은 문종때, 여지승람은 성종때 편찬), 그 밖에도 허다한 서적을 간행하였으니 비록 큰 공헌은 없으나 얼마간 공적은 있었다 할 것이다. 선조, 인조 이후에는 유교계에 철학, 문학의 큰 인물이 배출되고 사학계도 차차 진보되어 허목의 단군, 신라 등 간략하기는 하나 왕왕 독특한 견해가 있으며, 유형원은 비록 역사에 관한 전문 저서가 없으나, 역대 정치제도를 논술한 반계수록(磻溪隧錄)이 또한 사학계에 보탬이 적지 않았으며, 한백겸의 동국지리설(東國地理設)이 비록 수십줄에 지나지 않는 간단한 논문이지마는 일반 사학계에 큰 광명을 열어서 그 뒤 정약용의 강역고(疆域考)며, 한진서의 지리(地理)며, 안정복의 동사강목에 실린 강역론(彊域論)이며, 그밖의 조선 역사 지리를 말하는 사람은 모두 한백겸의 그 간단한 지리설을 부연하였을 뿐이다. 

안정복은 평생을 열사 한 가지에만 노력한, 5백년 이래 유일한 빈한한 선비로서 서적의 열람이 부족하여 삼국사기 같은 것도 그 늘그막에야 겨우 남이 베낀, 틀린 글자가 많은 것을 얻어보았으므로 그가 저술한 동사강목에 후백제 궁예의 국호를 마진기(摩震紀)라 한 웃음거리를 남겼으며, 중국의 서적 중에서도 참고에 필요한 위략(偉略)이나 남제서(南齊書)같은 것이 있음을 몰라서 고루한 구절이 적지 아니하다. 
석
게다가 시대에 유행하는 공자의 춘추(春秋)며 주자의 강목(綱目)의 웅덩이에 빠져 기자본기아래 단군과 부여를 덧붙이로 하였으며, 신라 마지막 판에 궁예와 왕건을 참주로 한 망발도 있고 너무 황실 중심의 주의를 고수하여 정작 민족 자체의 활동을 무시함이 많았었다. 

그러나 연구의 정밀하기로는 선생 이상 가는 이가 없었으므로 지지의 잘못의 교정과 사실의 모순의 변증에 가장 공이 많다 하여도 좋을 것이다. 

유혜풍(柳惠風)의 발해고(渤海考)는 대씨(大氏 : 대조영이 세운 발해왕조) 3백 년 동안 문치(文治)와 무공(武功)의 사업을 수록하여 1천여 년이나 사학가들이 압록강 이북을 베어버린 결함을 보충하였고 이종휘(李鍾?)의 수산집(修山集)은 단군 이래 조선 고유의 독립적 문화를 노래하여 김부식 이후 사학가의 노예 사상을 갈파하였는데, 특별한 발명과 채집(採集)은 없다 하더라도, 다만 이 한 가지만으로도 또한 영원히 남을 일이다.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는 오직 지나. 일본 등의 서적 가운데 보이는 우리역사에 관한 문자를 수집하여 거연히 방대한 저술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삼국사(三國史)에서 빠진 부여. 발해. 가락(駕洛). 숙신(肅愼) 등도 모두 한 편의 세기(世紀)를 구성하였으며,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없는 저근(姐瑾). 사법명(沙法名). 혜자(慧慈). 왕인(王仁) 등도 각각 몇 줄씩의 전기(傳記)가 있고 궁중어(宮中語). 문자. 풍속. 등의 부문이 있다. 

게다가 그의 조카 한진서(韓鎭書)의 지리속(地理續)이 있어서 뒷사람들의 고증의 수고를 덜어주었으니 또한 역사학에 두뇌가 있었다고 할 것이다. 다만,

1) 너무 글자 사이에서 조선에 관한 사실을 찾다가 민족 대세의 관계를 잃었으니 곧 부루(夫婁)와 하우(夏禹)의 대 국제교제로 볼 오월춘추(吳越春秋)의 주신(州愼)의 창수사자(蒼水使者)와 2천 년 동안 흉노와 연(燕)과 삼조선(三朝鮮)이 혹은 화의하고 혹은 싸운 전후 큰 일들을 다 빠뜨렸고,

2) 유교의 위력에 눌려 고죽국(孤竹國)이 조선족의 갈래임을 발견치 못하는 동시에 백이(伯夷).숙제(叔齊)의 성명을 빠뜨렸고,

3) 서적의 선택이 정확하지 못하였으니, 진서(晉書)의 속석전(束晳傳)에 의하면, “우(禹)임금이 백익(伯益)을 죽이고, 태갑(太甲)이 이윤(伊尹)을 죽였다.”는 등의 기록이 있는 것이 죽서기년(竹書紀年)의 진본(眞本)이요, 현존한 죽서기년은 가짜인데, 이제 그 가짜를 그대로 기재하였으며,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무릉서(武陵書)는 당나라 사람의 위조인데, 그대로 신용하여 인용하였고, 이 밖에 지나인이나 일본인이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서 우리 나라를 속이고 모욕한 것을 많이 그대로 수입하였으니, 이것이 그 책의 결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조 일대의 일을 적은 역사로 말하면, 내가 일찍이 정종조(正宗朝) 한때의 기록을 엮은 수서(修書)라는 아주 잔글자로 쓴 2백 권의 거질(巨帙)을 보았었고, 만일 관서(官書)인 국조보감(國朝寶鑑), 조야첨재(朝野僉載) 등을 비롯하여 허다한 개인 저술의 역사서까지 친다면 몇 백의 수레에 찰 것이다.

이 태조(李太祖) 이하의 사실을 적은 역사로는 조야집요(朝野輯要),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 몇몇 책을 대강 훑어본 이외에는 자세히 다 읽어본 것이 없으므로 아직 그 낫고 못함을 말하지 못하거니와, 대개 열에 일고여덟이 사색(四色)의 당쟁사(黨爭史)-노론, 소론, 남인, 북인의 당파싸움-임은 단언할수 있을 것이니 아, 이조 이래 수백 년 동안의 조선인의 문화사업은 이에 끊어졌도다.

이상에 열거한 역사서를 다시 말한다면 대개가 정치사요, 문화사에 해당하는 것은 몇이 못 됨이 첫째 유감이요, 

정치사 중에서도 동국통감, 동사강목 이외에는 고금을 회통한 저서가 없고, 모두 한 왕조의 흥하고, 망한 전말로 글의 수미(首尾)를 삼았음이 유감이요, 

공구(공자를 말합니다)의 춘추(春秋)를 역사의 절대적인 준칙으로 알아 그 의례를 본받아서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억누르기를 위주하다가 마지막에는 자기나라까지 비방하는 편벽된 논란을 벌임이 셋째 유감이요, 

국민의 자감(資鑑)에 이바지하려 함보다 외국인에게 아첨하려 한 의사가 더 많고(李修山 일파를 제하고) 자기 나라의 강토를 조각조각 베어주어 마지막에 가서는 건국 시대의 수도까지 모르게 만들었음이 넷째 유감이다.

우리의 사학계가 이와같이 눈멀고, 귀먹고, 절름발이 등 온갖 병을 죄다 가져서 정당한 발달을 얻지 못함은 무슨 까닭인가? 너무 자주 내란과 외환(비교적 오래 편안했던 이조 일대는 제하고)과 자연의 재난이 잦았던 것은 그만두고라도 인위(人爲)의 장애를 이룬 것을 들건대,

(1) 신지(神誌) 이래의 역사를 비장(역사를 공개하지 않고 숨겨 보관한다는 맥락입니다)해두는 버릇이 역사의 고질이 되어 이조에서도 중엽 이전에는 동국통감, 고려사 등 몇몇 관에서 간행한 책 이외에는 사사로이 역사를 짓는 것을 금하였으므로 이수광은 내각에 들어가서야 고려 이전의 비사(秘史)를 많이 보았다 하였고 이언적(李彦迪)은 사벌국전(沙伐國傳)을 지어가지고도 친구에게 보임을 꺼려했다. 당대 왕조의 잘잘못을 기록하지 못하게 함은 다른 나라에도 간혹 있거니와, 지나간 고대의 역사마저 사사로이 짓거나 읽는 것을 금함은 우리 나라에만 있었다. 그리하여 역사를 읽는 이가 별로 없었고,

(2) 송도(松都:지금의 개성)를 지나다가 만월대(滿月臺)를 쳐다보라. 반쪽의 기와가 남아 있는가? 한 개의 주초가 남아 있는가? 막막히 넓은 밭에 이름만 만월대라 할 뿐이 아닌가? 슬프다, 만월대는 이조의 아버지뻘로 멀지 않은 고려조의 대궐인데, 무슨 병화에 탔다는 설도 없이 어찌 이와같이 정(情)이 없는 빈터만 남았는가?
이와 똑같은 예로서 부여에서 백제의 유물을 찾아볼 수 없으며, 평양에서 고구려의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이에서 나오는 결론은 뒤에 일어난 왕조가 앞의 왕조를 미워하여 역사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파괴하고, 태워버리기를 위주한 것이다. 신라가 일어나매 고구려.백제 두 나라 역사가 볼 것이 없게 되었고, 고려가 되매 신라의 역사가 볼 것이 없게 되었으며, 이조가 대신하메 고려의 역사가 볼것이 없게 되어 매양 현재로서 과거를 계속하려 아니하고 말살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역사에 쓰일 자료가 박약해졌으며,

(3) 현종(顯宗)이, “조총(鳥銃)의 길이가 얼마나 되오?”하니, 유혁연(柳赫然)이 두 손을 들어,
“이만합니다.”하고 형용하였다. 기주관(記注官:기록을 맡은 관리)은 그 문답한 정형(情形)을 받아쓰지 못하고 붓방아만 찧고 있었다. 유혁연이 그를 돌아보며, “전하께서 유혁연에게 조총의 길이를 물으시니(相問鳥銃之長於柳赫然) 혁연이 손을 들어, ”자, 남짓이 하고 이만합니다,“고 대답하였다(然擧手尺餘以對曰如是)라고 쓰지 못하느냐?” 하고 구짖었다, 숙종(肅宗)이 박태보(朴太輔)를 친히 문초하는데, “이리저리 잔뜩 결박하고 뭉우리돌로 때려라.”하니, 주서(注書) 고사직(高司直)이 서슴없이, 필(必)자 모양으로 결박하여 돌로 때려라(必字形縛之無隅石擊之).“라고 썼다 그래서 크게 숙종의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들이 궁정의 한 가화(佳話)로 전하는 이야기이지마는, 반면에 남의 글로 내 역사를 기술하기 힘듦을 볼 것이다. 국문이 늦게 나오기도 했지마는, 나온 뒤에도 한문으로 저술한 역사만 있음이 또한 기괴하다. 이는 역사 기록의 기구가 부족함이요,

(4) 회재(晦齋:李彦迪)나 퇴계(退溪:李滉)더러 원효나 의상의 학술사상(學術史上) 위치를 물으면 한 마디의 대답을 못 할 것이요, 원효와 의상에게 소도(蘇塗:솟대)나 내을(奈乙:박혁거세의 탄생지)의 신앙적 가치를 말하면 반분의 이해를 못 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조의 인사들이 고려 시대의 생활의 취미를 모르며, 고려나 삼국의 인사들은 또 삼한 이전의 생활의 취미를 모를 만큼 반식(飯食). 거처(居處). 신앙. 교육 등 일반 사회의 형식과 정신이 모두 몹시 변하여 오늘의 아메리카 사람으로 내일 러시아 사람됨과 같은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 이는 역사 사상의 연락이 끊어짐이라, 어디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구명할 동기가 생기랴? 이상 몇 가지 원인으로 하여 우리의 역사학이 올바르게 발달하지 못한 것이다.

3백 년 동안 사색(四色)의 당파 싸움이 크게 국가에 해를 끼쳤다 하지마는, 당론이 극렬할수록 제각기 나는 옳고 저는 그르다는 것을 퍼뜨리기 위하여 사사로운 기술이 성행하고 당의 시비가 매양 국정에 관계되므로 따라서 조정의 잘잘못을 논술하게 되어 모르는 사이에 역사의 사사로운 저작의 금지가 깨뜨려져서 마침내 한백겸. 안정복. 이종휘. 한치윤 등 사학계에 몇몇 인물이 배치되었음도 그 결과이다.

혹 어떤 이는, “사색 이후의 역사는 피차의 기록이 서로 모순되어 그 시비를 가릴 수가 없어서 가장 역사의 난관이 된다.”고 하지마는, 그들의 시비가 무엇인가 하면 아무 당이 이조의 충신이니, 역적이니, 아무 선생이 주자학의 정통이니 아니니 하는 문제들뿐이라,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보면 서릿발 같은 칼을 휘둘러 임금의 시체를 두 동강이 낸 연개소문을 쾌남아라 할 것이요,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여 명륜당(明倫堂) 기둥에 공자를 비평한 글을 붙인 윤백호(尹白湖)를 걸물(傑物)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냉정한 두뇌로써 회재.화담(花潭:徐敬德). 퇴계.율곡(栗谷:李珥) 등의 학술상 공헌의 많고 적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주자학의 정통이 되고 안 됨은 희담(戱談)이 될 분이요, 노론(老論).소론(少論).남인(南人).북인(北人)의 다툼은 그 정치상에 미친 영향의 좋고 나쁨을 물을 뿐이며, 이조의 충성된 종 되고 못 됨은 잠꼬대에 지나지 않을 뿐이요, 개인의 사사로운 덕의 결점을 지적하여 남의 명예를 더럽히고 혹은 애매한 사실로 남을 모함하여 죽인 허다한 사건들은 그 반면에 있어서 당시 사회 알력의 나쁜 습속으로 국민과 나라를 해친 일종의 통탄할 사료가 될 뿐이다.

만일 시어머니의 역정과 며느리의 푸념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 일에 낱낱이 재판관을 불러 그 굽고 곧음을 판결하려 한다면 이는 스펜서의 이른바 이웃집 고양이 새끼 낳았다는 보고(난감한 비유군요(땀)) 같아서 도리어 이로써 사학계의 다른 중대한 문제를 등한히 할 염려가 있으니, 그냥 던져둠이 옳다. 그리고 빨리 지리 관계라든가, 국민생활 관계라든가, 민족의 성쇠라든가 하는 큰 문제에 주의하여 잘못을 바로잡고 참된 것을 구하여 조선 사학계의 표준을 세움이 급무 중의 급무라 생각한다. 



제4장 사료의 수집과 선택

만일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디서 무엇으로 어떻게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여야 하겠느냐 하면 , 그 대답이 매우 곤란하나, 우선 나의 경과부터 말하고자 한다. 

이제부터 16년 전에 국치(國恥:한일합방)에 발분하여 비로소 동국통감(東國痛鑑)을 읽으면서 사평체(史評體)에 가까운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지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지상에 발표하고, 이어서 수십 학생들의 청구에 의하여 지나식(支那式)의 연의(蓮義)를 본받은 역사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대동사천녀사(大東史千年史)란 것을 짓다가, 두 가지 다 사고로 인하여 중지하고 말았었다.그 논평의 독단(獨斷)과 행동의 대담하였음을 지금까지 스스로 부끄러워하거니와, 그 이후 얼마만큼 분발하여 힘쓴 적도 없지 아니하나 나아간 것이 촌보(寸步)쯤도 못 된 원인을 오늘에 와서 국내 일반 독사계(讀史界)에 호소하고자 한다.


1) 옛 비석의 참조에 대하여

일찍이 사곽잡록(四郭雜錄:저자미상)을 보다가 “신립(申砬 : 임진왜란 초기에 전사한 조선의 장수입니다. 자연 사곽잡록은 그 전 기록이겠지요)이 선춘령(先春領)아래에 고구려 옛 비가 있다는 말을 듣고(申砬聞先春領下有高句麗舊碑), 몰래 사람을 보내 두만강을 건너가서 탁본(拓本)을 떠왔는데(潛遣人 豆滿江 模本而來), 알아볼 만한 글자가 3백여 자에 지나지 않았다(所可辨識者 不過三百餘字).그 글에 황제라고 한 것은 고구려왕이 스스로를 일컬은 것이요(其曰皇帝 高句麗王自稱也), 그 상가(相加)라고 한 것은 고구려의 대신을 일컬은 것이었다(其曰相加 高句麗大臣之稱也).“고 한 일절이 있음을 보고 크게 기뻐서, 만주 깊은 산중에 천고(千古) 고사(故事)의 이빠진 것을 보충할 만한 비석쪽이 이것 하나뿐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해외에 나간 날부터 고구려 발해의 옛 비석을 답사하리라는 회포가 몹시 깊었었다.

그러나 해삼위(海參威:브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로프스크를 왕래하는 선객들에게 그 항로 중에서 전설로 내려오는 석혁산악(錫赫山嶽)에 우뚝 서 있는 윤관(尹瓘, 혹은 蓋蘇文)의 기공비(紀功碑)를 보았다는 말이며, 봉천성성(奉天省成)에서 간접으로 이통주(伊通州)를 유람하였다는 사람이 그 고을 동쪽 70리에 남아 있는 해부루(解夫婁:夫餘의 왕)의 송덕비(頌德碑)를 보았노라는 이야기며, 발해의 옛 서울에서 온 친구가 폭이 30리인 경박호(鏡泊湖:古史에는忽汗海)의 앞쪽(북쪽)에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와 겨룰 만한 1만 길 비폭(飛瀑)을 구경하였다고 하는 말이며, 해룡현(海龍縣)에서 나온 나그네가 죽어서 용이 되어 일본의 세 섬을 가라앉히겠노라고 한 문무대왕(文武大王:신라)의 유묘(遺廟)를 예배하였다는 이야기 등이 나에게는 귀로 들을 인연만 있었고 눈으로 볼 기회는 없었다.

한번 네댓 친구와 동행하여 압록강 위의 집안현(輯安縣), 곧 고구려 제2의 환도성(丸都成)을 얼씬 보았음이 나의 인생에 기념할 만한 장관이라 할 것이나, 그러나 여비가 모자라서 능묘(陵墓)가 모두 몇인지 세어볼 여가도 없이 능으로 인정할 것이 수백이요, 묘가 1만 내외라는 억단(臆斷 : 확신을 했다는 뜻)을 하였을 뿐이었다. 마을 사람이 주는 댓잎 그린 금척(金尺)과 그곳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박아서 파는 광개토왕 비문을 값만 물어보았으며(깨어진 그 땅 위에 나온 부분만), 수백의 왕릉 가운데 천행으로 남아 있는 8층 석탑, 사면이 네모진 광개토왕릉과 그 오른편의 제천단(祭天壇)을 붓으로 대강 그려서 사진을 대신하였고 그 왕릉의 넓이와 높이를 발로 재고 몸으로 견주어서 자로 재는 것을 대신하였을 뿐이었다

(높이 10길 가량이고, 아래층의 둘레는 80발인데, 다른왕릉은 위층이 파괴되어 높이는 알 수 없고 그 아래층의 둘레는 대개 광개토왕과 같음). 왕릉의 위층에 올라가 돌기둥이 섰던 자취와 덮은 기와의 남은 조각과 드문드문 서있는 소나무, 잣나무를 보고 후한서(後韓書)에,

“고구려 사람들은 금은과 재백(財帛)을 다하여 깊이 장사지내고, 돌을 둘러 봉하고 또한 소나무, 잣나무를 심는다(高句麗人金銀財帛 盡於厚葬 環石爲封 亦種松柏).”고 한 아주 간단한 문구의 뜻을 비로소 충분히 해석하고, ‘수백 원만 있으면 묘 하나를 파볼 수 있을 것이요, 수천 원 혹은 수만 원이면 능 하나를 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수천 년 전 고구려 생활의 활사진을 볼 수 있을 것인데.’ 하는 꿈 같은 생각만 하였다. 아! 이와 같은 천장비사(天藏秘史)의 보고(寶庫)를 만나서 나의 소득이 무엇이었던가? 인재(人材)와 물력(物力)이 없으면 재료가 있어도 나의 소유가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하룻동안 그 외부에 대한 어설픈 관찰만 이었지마는 고구려의 종교. 예술. 경제력 등의 어떠함이 눈앞에 살아 나타나서 그 자리에서 “집안현을 한번 봄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번 읽는 것보다 낫다.(저도 그렇게 생각해요(땀))” 하는 단안을 내렸다.

그 뒤 항주(杭州) 도서관에서 우리 나라 금석학자 김정희(金正喜:秋史)가 발견한 유적을 가져다가 지나인이 간행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을 보니, 신라말 고려초의 사조(思潮)와 속상(俗尙)의 참고가 될 것이 많았고, 한성의 한 친구가 보내준 총독부 발행의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도 그 조사한 동기의 어떠함이나 주해의 억지로 끌어다 붙인 몇몇 부분만을 제외하면, 또한 우리 고사 연구에 도움될 것이 많았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우리 한미한 서생(書生)의 손으로는 도저히 성취하지 못할 사료임을 스스로 깨달았다.


2) 각 서적의 호증(互證)에 대하여

① 일찍이 고려 최영전(崔塋傳)에 의거하건대, 최영이 말하기를, “당나라가 삼십만 군사로 고구려를 침범하여, 고구려는 승군(僧軍) 삼만을 내어 이를 대파하였다.” 고 했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 50권 중에 이 사실이 보이지 아니한다. 그러면 승군이란 무엇인가 하면,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재가(在家)한 화상은 가사도 입지 아니하고 계율도 행하지 아니하며, 조백으로 허리를 동이고 맨발로 걷고, 아내를 가지고, 자식을 기르며, 물건의 운반, 도로의 소제, 도랑의 개척, 성실(城室)의 수축 등 공사(公事)에 복역하며, 국경에 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단결하여 싸움에 나서는데, 중간에 거란(契丹)도 이들에게 패하니, 그 실은 죄를 지어 복역한 사람들로서, 수염과 머리를 깍았으므로 이인(夷人:오랑캐)이 그들을 화상이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에서 승군의 면목을 대강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내력이 어디서 비롯하였느냐 하는 의문이 없지 않다. 

통전(通典).신당서(新唐書)등 이름있는 책에 의하면, 조의선인이라는 관명(官名)이 있었고, 고구려사에는 명림답부(明臨答夫:고구려 재상)를 연나조의라 하였고, 후주서(後周書)에는 조의선인을 예속선인이라고 하였으니, 선인(先人) 선인(仙人)은 다 국어 ‘선인’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고, 조의 혹 백의(帛衣)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이른바 조백으로 허리를 동이므로 이름함이다. 

선인(仙人)은 신라 고사(故事)의 국선(國仙)과 같은 종교적 무사단(武士團)의 단장이요, 승군(僧軍)은 국선 아래 딸린 단병(團兵)이요, 승군이 재가한 화상(和尙)이라 함은 후세 사람이 붙인 별명이다. 
서긍이 외국의 사신으로 우리 나라에 와서 이것을 보고 그 단체의 행도을 서술함에 있어서, 그 근원을 물으니 복역한 사람이라는 억측의(名詞)를 말해준 것이다. 
이에 고려사로 인하여 삼국사에 빠진 승군을 알게 되고, 고려도경으로 인하여 고려사에 자세치 않은 승군의 성질을 알게 되고 통전. 신당서. 후주서와 신라의 고사 등으로 인하여 승군과 선인(先人)과 재가한 화상이 같은 단체의 무리임을 알게 되었으니, 다시 말하면 당나라의 30만 침입군이 고구려의 종교적 무사단인 선인군(先人軍)에게 크게 패하였다는 몇십 자의 약사(略史)를 6,7가지 서적 수천 권을 뒤진 결과로써 비로소 알아낸 것이다.

②당나라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침략하다가 안시성(安市城)에서 화살에 맞아 눈이 상하였다는 전설이 있어 후세 사람이 매양 이것을 역사에 올리는데, 이색(李穡)의 정관음(貞觀吟:정관은 당나라 태종의 연호)에도,“어찌 현화(玄花:눈)가 백우(白羽)에 떨어질 줄 알았으리(那知玄花落白羽).”라고 하여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하였으나,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지나인의 신구당서(新舊唐書)에서는 보이지 않음은 무슨까닭인가? 

만일 사실의 진위를 묻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또는 버렸다가는 역사상의 위증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당나라 태종의 눈 상한 사실을 지나의 사관(史官)이 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그 해답을 구하였다. 

명(明)나라 태종(太宗)이 거란을 치다가 흐르는 화살에 상하여 달아나 돌아가서, 몇 해 후에 필경 그 상처가 덧나서 죽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송사(宋史)나 요사(?史)에는 보이지 아니하고, 사건이 여러 백 년 지난 뒤에 진정이 고증(考證)하여 발견한 것이다. 
이에 나는 지나인은 그 임금이나 신하가 다른 민족에게 패하여 상하거나 죽거나 하면 그것을 나라의 수치라 하여 숨기고 역사에 기록하지 않은 실증을 얻어서 나의 앞의 가설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지나인에게 국치(國恥)를 숨기는 버릇이 있다 하여 당나라 태종이 안시성에서 화살에 맞아 눈을 상하였다는 실증은 되지 못하므로, 다시 신구당서를 자세히 읽어보니, 태종본기(太宗本紀)에 태종이 정관(偵觀) 19년 9월에 안시성에서 군사를 철수하였다 하였고, 유박전(劉泊傳)에는 그 해 12월에 태종의 병세가 위급하므로 유박이 몹시 슬퍼하고 두려워하였다고 하였으며, 본기(本紀)에는 정관 20년에 임금의 병이 낫지 아니하여 태자에게 정사를 맡기고, 정관23년 5월에 죽었다고 하였는데, 그 죽은 원인을 강복(綱目)에는 이질(痢疾)이 다시 악화한 것이라고 하였고, 자치통감(資治痛鑑)에는 요동에서부터 병이 있었다고 하였다. 

대개 높은 이와 친한 이의 욕봄을 꺼려 숨겨서, 주천자(周天子 :주나라 황제)가 종후(鄭侯)의 화살에 상했음과 노(魯)나라의 은공(隱公).송공(昭公) 등이 살해당하고 쫓겨났음을 춘추(春秋)에 쓰지 아니하였는데, 공구(孔丘:공자)의 이러한 편견이 지나 역사가의 버릇이 되어, 당나라 태종이 이미 빠진 눈을 유리쪽으로 가리고, 그의 임상병록(臨床病錄)의 기록을 모두 딴 말로 바꾸어놓았다.

화살의 상처가 내종(內腫:몸 속으로 곪음)이 되고 눈병이 항문병(肛門病)으로 되어 전쟁의 부상으로 인하여 죽은 자를 이질이나 늑막염으로 죽은 것으로 기록해놓은 것이다. 그러면 삼국사기에는 어찌하여 실제대로 적지 않았는가? 이는 신라가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미워하여 그 명예로운 역사를 소탕하여 위병(魏兵)을 격파한 사법명(沙法名)과 수군(隨軍)을 물리친 을지문덕(乙支文德)이 도리어 지나의 역사로 인하여 그 이름이 전해졌으니(을지문덕의 이름이 삼국사기에 보이는 것은 곧 김부식이 지나사(중국사)에서 끌어다 쓴 것이므로 그 논평에, ”을지문덕은 중국사가 아니면 알 도리가 없다“고했음), 당태종이 눈을 잃고 달아났음이 고구려의 전쟁사에 특기할 만한 명예로운 일이라 신라인이 이것을 빼버렸음이 또한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당태종의 눈 잃은 일을 처음에 전설과 목은집(牧隱集)에서 어렴풋이 찾아내어 신구당서나 삼국사기에 이것을 기재하지 않은 의문을 깨침에 있어서ㅡ 진정의 야산묵담(兩山墨談)에서 같은 종류의 사항을 발견하고, 공구의 춘추(春秋)에서 그 전통의 악습을 적발하고, 신구당서, 통감강목(痛鑑綱目) 등을 가져다 그 모호하고 은미(隱微)한 문구 속에서 첫째로 당태종 병록(이질 등)보고가 사실이 아님을 갈파하고, 둘째로 목은의 정관음(貞觀吟:당태종의 눈 잃은 사실을 읊은 시)의 신용할 만함을 실증하고, 

셋째로 신라 사람이 고구려 승리의 역사를 말살함으로써 당태종의 패전과 부상한 사실이 삼국사기에 빠지게 되었음을 단정하고 이에 간단한 결론을 얻으니 이른바, ‘당태종이 보장왕(寶藏王)3년(서기644)에 안시성에서 눈을 상하고 도망하여, 돌아가서 당시 외과 의사의 불완전으로 거의 30달을 앓다가, 보장왕 5년에 죽었다. ’라는 것이었다. 이 수십자를 얻기에도 5,6종 서적 수천 권을 반복하여 읽어보고 들며 나며 혹은 무의식중에서 얻고 혹은 무의식중에서 찾아내어 얻은 결과이니 그 수고로움이 또한 적지 아니하였다.
승군(僧軍)의 내력을 모르면 무엇이 해로우며 당태종이 부상한 사실을 안들 무엇이 이롭기에 이런 사실을 애써서 탐색하느냐 할 이가 있겠지만, 그러나 사학(史學)이란 것은 하나하나를 모으고 잘못 전하는 것을 바로잡아서 과거 인류의 행동을 여실하게 그려내어 후세 사람들에게 깨쳐주는 것이니, 승군 곧 선인군(先人軍)의 내력을 모르면 다만 고구려가 당나라 군사만을 물리친 원동력뿐 아니라, 

뒤따른 명림답부(明臨答夫)의 혁명군의 중심과 강감찬의 거란을 격파한 군대의 주력(主力)이 다 무엇이었던지 모르고, 따라서 삼국에서부터 고려까지의 1천여 년 군제상(軍制上) 중요한 점을 모를 것이며, 당태종이 눈을 잃고 죽은 줄을 모른다면 안시성 전국(戰局)이 속히 결말이 난 원인을 모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신라와 당나라가 연맹하게 된 배경이요, 당나라 고종(高宗)과 그 신하가 모든 희생을 돌아보지 않고 고구려와 흥망을 겨룬 전제(前提)요,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손을 맞잡게 된 동기이던 것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위에 든 것은 그 한두 예일 뿐이고, 이 밖에도 이 같은 일이 얼마인지를 모를 것이니, 그러므로 조선사의 황무지를 개척하자면 도저히 한두 사람의 힘으로 단시일에 완결시킬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병장 김태경 (2006/02/10 13:42:13)

'한가지 재밌는점은 당시 신채호가 실증주의로 우리의 상고사를 곧추세우려 했다면 지금은 그 실증주의 때문에 우리 상고사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 

이 부분이 잘 이해가 안돼서 그러는데요, 신채호가 '과거 사대주의적 사관으로 역사를 서술한 유학자들과 당시 식민주의 사가들을 비판'했지만 그 또한 일제시대에 글을 썼다는 이유로 현대의 역사학자들에게 비판을 받는건가요? 그래서 조선상고사가 정사로 인정받지 못하는 건가요? 
무엇보다도 상고사가 어떤 이유로 '음모론'으로 받아들여지는지가 궁금해요.    
 
 
상병 노지훈 (2006/02/10 16:14:23)

후아 읽는데 숨차네요. 대단하십니다.    
 
 
 병장 김동환 (2006/02/12 14:21:43)

태경// 음. 차례차례 설명드릴께요. 

우선 실증주의에 대한 얘기. 
조선상고사의 총론을 보면 역사학연구의 방법론으로서 실증주의가 총론을 관통하며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어요. 실증주의란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위해서는 사료의 선택, 수집, 비판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이죠. 신채호는 자신의 저서 총론부분에서 기존 사료에 대한 검증부터 시작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역사를 기술할수 있었던, 한국사가 축소되고 왜곡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곁들여서요. 

'내가 이책도 보고 저책도 보고 대충 맞춰봤는데 삼국사기의 내용은 이러이러이래서 나는 삼국사기를 못 믿겠다. 유물도 맞춰보고 이것저것 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삼국사 중 백제와 고구려역사에 대해서는 삼국사기를 사료로 선택한다는 것은 실수다.' 

요런 방법이 실증주의입니다. 다방면으로 우선 사료의 기록이 진짠지 따져보자 이거죠. 

그런데 지금은 그 실증주의 때문에 우리 상고사가 인정을 못받는다는건 또 뭐냐. 
우리 역사는 특히 일제시대에 많이 왜곡됐는데요. 일제시대 우리 역사 왜곡을 담당했던 단체가 '조선사편수회'라는 곳입니다. 근데 이곳에 속해있던(역사 왜곡에 참여했던) 많은 한국인 학자들이 해방을 맞으면서 경성대(지금의 서울대)에서 왜곡된 역사를 가르치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상고사이야기 1편에도 예로 들었던 웅녀얘기죠. 곰이 여자가 되고 우리는 곰의 자손이라는. (땀) 

30년이 넘는 일제시대동안 상고사를 증거할만한 증거들도 많이 없어졌고 무엇보다 지금은 조선사편수회에서 나온 학자들에게 배운 사람들이 역사를 가르치고 있으니 아무래도 자기가 배우고 가르친 그 역사를 보편타당한 것으로 생각해게 됩니다. 그사람들에게 상고사란 그냥 환타지일 뿐입니다. 
문제는 뭔가 직접적으로 상고사를 증명할 수 있는 건더기가 별로 없다는 겁니다. 총론 본문에도 나오지만 사실 우리 상고사를 증거할만한 물증이나 유물들은 현재 중국 내에 있습니다. 

'한번 네댓 친구와 동행하여 압록강 위의 집안현(輯安縣), 곧 고구려 제2의 환도성(丸都成)을 얼씬 보았음이 나의 인생에 기념할 만한 장관이라 할 것이나, 그러나 여비가 모자라서 능묘(陵墓)가 모두 몇인지 세어볼 여가도 없이 능으로 인정할 것이 수백이요, 묘가 1만 내외라는 억단(臆斷 : 확신을 했다는 뜻)을 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중국이 이미 동북공정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마당에 저런걸 가만 놔두지는 않겠지요. 개발한다고 포크레인으로 밀어버리면 간단한것을.(땀) 잘 파면 돈되는 유물들이 많이 나오니 어쩌면 현지인들이 이미 도굴해갔을수도 있구요. 실제로 백여년 사이 요동과 만주지방의 우리 유물들 상당수가 파손되었답니다. 

실증주의에 말려서 우리 상고사가 인정을 못받는 다는 건 대충 이런 의미입니다. 신채호의 시대와는 또 다르게 지금은 상고사의 입지가 무척 좁고 정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증거들이 있어야 하는데 일단 증거의 양이 적을 뿐더러, 몇 개 있는것도 학계에서는 잘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우리의 상고사를 상당부분 중국문헌에 기대어 고증해야 하는 형편이랍니다. 헥헥. 

그럼 음모론은 또 뭐냐.(땀) 
현재 상고사를 둘러싸고 으X으X 하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약간 국수주의적 성향이 있어요. 과거 고구려, 발해 땅이었던 중국땅을 우리가 되찾아야 한다는 초 강경파부터, 이미 고조선때 온풍기를 우리민족이 발명했다고 말하는 소심한 구라파까지. 
말하자면 상고사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지요. 
70년대 후반 상고사 복원 움직임이 반짝했던 것도 실은 순수한 역사를 복원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민족적인 감정을 고취시켜...(여긴 약간 민감한 문제니까 여기까지.(땀))....하려는 것이었다는 그런 평도 있고요. 거참. 알맹이를 빼고 설명하려니 힘드네요. 아무튼 이정도.(땀) 


영 만족스럽지 않은 답변이네요. 궁금한점 있으시면 또 물어보세요.    
 
 
병장 김태경 (2006/02/12 17:29:34)

와- 전 참 만족스러운 답변인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