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사 이야기] 한단고기에 대하여 
 
 
 
 


한단고기에 대하여


한단고기는 대한제국 말 일제 점령기에 계연수라는 사람이 옛부터 전해져 오던 책들을 손으로 베껴쓴 후 한데 묶어 펴낸 것으로 삼성기(三聖紀) 상?하편과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部餘紀), 그리고 태백일사(太白一師)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삼성기 상?하편의 저자는 신원이 확실치 않으나 단군세기(檀君世紀)는 고려때 행촌 이암이라는 사람이, 북부여기(北部餘紀)는 역시 고려 말 범장이라는 학자가 지었으며, 상고사 이야기 지난편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태백일사는 조선 중종때 찬수관을 지낸 이맥이 지었습니다. 






위서. 한단고기


한단고기가 위서 취급을 받고있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인정하지 않는 국내외 역사학자들의 시선도 있겠지만 그동안 발견된 사서들에서 한단고기가 한번도 인용된 적이 없다는 사실과 현대에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납득하기 힘든 구절들이 몇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중국에게 국호를 받아올 정도로 저자세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던 조선시대를 거치며 우리 상고사가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는 쉬이 짐작 가능합니다. 실제로 예종때 내려졌던 수서령을 보면 ‘전국에 우리 상고사를 가진 이가 있다면 국법으로 처리한다’고 했으니까요. 이런 이유로 다른 역사책에서 인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위서라는 얘기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다고 쳐도 이 책. 한단고기. 제대로 된 흠집이 있기는 있습니다.  


태백일사(太白一師)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에 

  王儉氏承經一周三經一四之機....

라 하여 왕검씨가 지름에 3.14를 곱해 둘레를 만드는 기계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태백일사(太白一師)를 쓴 이맥은 조선 중종때 사람이고 따라서 이맥이 원주율에 대해 알고있었을 가능성도 거의 없으니 누가봐도 이건 한단고기를 엮었다는 계연수가 임의로 덧붙여놓은 내용이라고 밖에 볼수 없겠습니다. 또한
삼한관경본기(三韓觀境本紀) 마한세가상(馬韓世家上)편에 보면 

苦者桓雄....曆以三百六十五日五時四十八分六秒爲一年也....

라 하여 ‘옛날 한웅께서는 1년을 365일 5시간 48분 46초로 삼았다’고 적혀있는데 우리가 개화기 이전까지 계속 음력을 썼으니 말도 안되는 얘기죠. 이 역시 계연수가 덧붙여놓은 내용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이 몇 더 있습니다만 제가 확실히 알고있는건 이정도입니다.(땀)





한단고기가 위서가 아니라는 증거


그간의 한단고기 연구에 따르면 한단고기가 위서, 즉 꾸며낸 이야기라는 자료도 많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자료도 많습니다. 가짓수가 많으니 번호를 달아 간략하게 보겠습니다.

1. 단군조선 13세 홀달간군 50년에 다섯 개의 별이 일렬로 서는 ‘오성취루(五星娶婁)’ 현상이 있었다고 한단고기는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슈퍼컴퓨터를 이용하여 증명해냈습니다. 이는 한단고기 위서논쟁과 관련해 가장 널리 알려진 자료고 KBS 역사 스페셜에서도 다뤄진 바 있습니다. 슈퍼컴퓨터로 증명한 연대와 한단고기에 실제 등재된 연대는 약 1년차이가 나는데 역법에 따라 이정도는 무시할 수 있는 오차범위라고 합니다. 
이 기록은 여러 가지를 시사합니다. 우선 이 기록은 한단고기 말고는 찾아볼수가 없는 기록이므로 한단고기가 일제때 조작된 내용으로 막 지어진 것이 아니라 그전에 근거가 되는 기록이 존재했다는 좋은 방증이 됩니다. 또한 고대국가에서 가장 최첨단을 달리는 과학이 천문학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오성취루(五星娶婁)현상이 우리 사서에만 유일한 것은 우리가 그만큼 강력한 국력과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이 오성취루(五星娶婁)현상이 한단고기가 위서가 아니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가장 유력하고 유효한 근거입니다. 확률을 어떻게 계산했는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역사내용을 조작해서 이렇게 들어맞을 확률은 0.007%라고 하는군요. 


2.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 장수왕이 즉위 직후 建興 라는 연호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1915년 충북 충주시 노은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光背名)에 建興五年歲在丙辰이란 구절이 등장합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壬子년인 서기 412년에 죽고 장수왕이 즉위하는데 이 해를 장수왕 원년으로 보면 장수왕 즉위 5년이 바로 병진년이 되지요. 


3. 한단고기에 발해 3대왕 문왕 대흠무의 연호가 大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역시 다른 사서에는 없는 기록입니다. 이 사실은 1949년에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출토된 정효공주묘지 비문에서 문왕 대흠무가 자기를 가르켜 大興寶曆孝感金轉聖法大王라고 한 것이 밝혀져 인정된 것이죠. 


4. 한단고기에 연개소문의 아버지와 조부, 증조부의 이름이 각각 太祚, 子遊, 廣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1923년 중국 낙양 북망산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의 묘지에서 천남생의 증조부 이름이 子遊라고 씌여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우리 사서중에 주류 국가의 왕도 아니고 일개 대막리지의 자잘한 가족사기록이 씌어있는 사서는 없습니다. 연개소문의 집안 내력에 대한 기록은 한단고기에만 유일합니다. 


5. 1993년 평양 강동현에 있는 대박산에서 단군릉이 발굴되었습니다. 왕과 왕후로 보이는 유골도 발견되었고 유골을 전자상자성공명법으로 분석한 결과 1993년으로부터 5011년 전 것으로 판명되었지요.(오차범위 ±267년)
이는 한단고기에 나오는 단군조선의 실재를 증명해주는 좋은 자료이지만 릉의 양식과 다른 부장품이 고구려시대의 것이라는 것, 유골의 연대측정에 C14탄소연대측정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등의 이유를 들어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단군릉 발견이 유효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6. 한단고기의 단군세기에 12세 단군 아한때 ‘가림토’로 추정되는 우리 원시 한글이 없어질 것을 염려하여 순수관경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겼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와 같은 내용이 ‘단기고사’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기고사는 발해 초기에 지도자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이 기존에 있던 기록을 재편집하여 발행한 책인데요. 위의 기록에 따르면 한단고기가 위서일 경우 단기고사 역시 같은 사람이 쓴 위서가 됩니다. 상식적으로 판단했을때 순수관경비를 세웠다는 내용이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내용이 아닙니다. 과연 이 자잘한 부분을 위해 굳이 두권의 역사책을 공들여 위작했는지의 여부도 회의적일 뿐더러 한단고기와 단기고사에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 기록들도 있어 일제시대때 같은 사람이 두권의 책을 위작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간단하게 한단고기가 위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나열해보았습니다. 
실제로 한단고기 옹호론자들이 한단고기가 위서가 아니라며 손에 꼽는 이유들은 이보다 더 많습니다. 위에 적은것들은 그중에서도 비교적 실증적인 것만을 골라놓은 맛뵈기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럼 우리는 어떡하라고.


주말 사무실 청소를 맡은 병사가 깜빡하고 실수로 탁자 하나를 닦지 않고 지나쳤습니다. 월요일에 출근한 상급자가 와서 그 탁자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이것 봐라. 넌 주말에 청소를 하나도 하지 않았구나.”
흔히들 일어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만 상급자의 지적은 옳지 않습니다. 
“이 탁자는 청소를 안했구나.”하고 다른 곳도 청소를 하지 않았는지 직접 살펴야 
억울한 병사가 생기지 않는 법입니다.(웃음) 

한단고기 옹호론을 펼치는 사람들도 시대에 걸맞지 않은 어휘(원래 ‘문화’라 함은 ‘문치교화’의 뜻으로 지금 사용하는 ‘문화(culture)’와는 그 뜻이 다릅니다. 한단고기에서는 후자의 뜻으로 문화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나 계연수의 가필로 추정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한답니다. 단지 그 몇몇 부분으로 인해 한단고기 전체가 위서로 부정되는 것에 강하게 반발하는 실정이지요. 
비록 하늘에서 내려와 나라를 세운다든지 하는 류의 애교성 짙은 대목들도 즐비합니다만 한단고기는 몇몇 중국사서들에 쥐꼬리만큼 등장하는 고대 우리민족의 역사를 비교적 개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만큼 갖춰진 형식의 정말 몇 안되는 자료라는 점과 기록된 내용을 전체와 분리해서 바라봤을 때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는 부분도 적지 않다는 점에서 좀더 개방적이고 긍정적인 시각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어떡하긴요. 더 공부해야죠.(먼산..)







다음편엔 치우천왕과 중국의 동북공정을 연계해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병장 엄보운 (2006/06/21 14:30:29)

역시. 더 공부를.. (먼산) 

동환님. 잘 읽었습니다. 다음 편은 무척 흥미를 끄는 내용이네요. 기대할게요!    
 
 
병장 김동석 (2006/06/21 17:43:03)

한단고기에 대한 1차사료를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한단고기 연구는 확실히 고증 가능한(그것도 유물로) '선' 안에서밖에 인정받을 수 없다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정말 정확한 1차사료가 존재하였고 계연수가 멋대로 부분부분 날조한 것이라면 희대의 멍청이 계연수는 상고사를 몇십 년 가까이 후퇴시켰다는 평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고구려사와 백제사의 소실(만일 50여권에 달하는 백제사가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삼국시대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겁니다)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네요. 고구려사와 백제사가 남아있었다면 이전의 역사서들도 어느 정도 언급되어있을 테고 그것을 토대로 한단고기의 대략적 복원도 가능했을 텐데.    
 
 
병장 김태경 (2006/06/21 19:36:06)

거 짜식 구라치지말고 좀 솔직하게 썼으면 좋았을걸요. 3.14니 365일이니 이런거 빼고... 
그랬으면 정사로 인정받고 우리의 상고사를 찾을수 있었을텐데. 되돌릴수도 없는 일들이니 아쉬울 뿐이네요.    
 
 
상병 김현우 (2006/06/21 20:08:45)

몇가지 간단한 반론. 

환단고기의 전승 과정을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제시대 계연수가 "기억에 의해" 기존 본 사서들을 모두 암기해 필사하였고, 이유립이란 사람에게 60년이 지난 후 공개해달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만, 
일본인 가시마 노보루가 일역해 유언보다 일찍 1978년(정확한 년도는 기억이..)인가에 공개했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1970년대 당시에는 오성취루현상을 계산할 여력이 충분했고, 오성취루는 환단고기 이외에도 중국쪽 사서에도 나온다는 점이지요 이쪽에 관해서는 얼마 안가 나들이를 나가니 다녀와서 몇가지 덧붙이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1970년대에 쓰여졌다는 가정을 하면 2번, 3번, 4번은 반론할 필요조차 없지요. 그 이후 쓰여진 책에 나오는것이 당연한 일이니까요. 

전승의 과정에 명확하지 않다는 점때문에 기원전에 원주율이나 영고탑같은 현대적인 단어들이 나오는걸 "필사자의 오류"로 판단할 여지도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 

어디까지나 사견입니다만 단군릉같은 경우는 북쪽의 정치이데올로기가 사학에 침투된 케이스라고 보는 송호정교수의 입장에 동의합니다. 단군릉 유물에 대한 3회의 측정 결과값이 동일하다는것도 참으로 미심쩍은 부분이지요. 뭐 송교수님의 덮어놓고 환단고기 까고보자에는 저도 좀 거부감을 가지고는 있습니다만..    
 
 
병장 조용준 (2006/06/22 07:57:21)

C12를 이용한 연대측정법은 약간 문제가 있는것이... 

측정방법이 정확하다고 할 경우(!!), 동위원소 비율의 변동으로 인한 오차가 약 200년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동위원소의 측정이 부정확할 경우, 오차는 몇배에서 몇십배 늘어나기도 합니다. 

특히나, C14라는건 식물이 흡수를 해서 동물에게 옮겨지는것이기 때문에, 탄화곡류나 식물의 사체등에나 유용한 방법이지, 생태계의 특성이나 분해과정의 특성에 따라서는 동물의 경우에는 상당한 오차를 가져다 줄수 있고, 더군다나 화석에서는 C14를 이용한 연대측정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한가지 대표적인 예로, 특정 식물의 경우, C14를 이용한 연대측정을 하면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 500년쯤 미래에서 온 생명체가 되는 경우도 있죠.(웃음) 

오직 C14로 측정한 방법에는 저런 문제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3회 측정결과가 동일하다는건, 조작의 가능성이 좀 높다는 점입니다.(웃음)    
 
 
 병장 김동환 (2006/06/22 07:57:50)

동석/ 몇권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삼국중 가장 방대한 분량이었던 고구려의 '유기'도 지금은 
단 한권도 전해지지 않지요. 참 안타까운 일이에요.    
 
 
 병장 김동환 (2006/06/22 09:42:46)

/현우 

사실 제가 본문에 적어놓은 것은 미적지근하게 한단고기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1차적인 입장이고 그간 한단고기의 진위여부가 인터넷 게시판 이곳 저곳에서 끊이지않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내용은 일부러 넣지 않았는데 현우님 덕분에 좀더 자세하게 이야기해볼 기회를 얻었네요. 감사.(웃음) 

재반론을 하겠습니다. 
우선 오성취루(五星娶婁)현상은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다섯 행성이 한 별자리 부근에 모이는 현상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약 250년의 주기로 일어나는 현상이며 박창범 서울대교수의 발표이후 고천문학이라 하여 고대국가의 연대를 측정하는 유용한 방법으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아주 정확하다는 장점이 있지요. 
제가 알기로는 기원전 1733년(홀달간군 50년)에 일어났던 오성취루(五星娶婁) 현상을 다룬 역사서는 한단고기가 유일합니다. 다만 이 오성취루가 몇천년에 한번씩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약 250년을 주기로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기원전 1733년 이외의, 다른 주기의 오성취루현상이 기록된 사서(엄밀한 의미로 보면 사서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내용입니다만. 왜 그런지는 아래에 나옵니다.)는 중국에 존재합니다. 아마 현우님이 알고계신 중국 사서의 내용이란 아마 기원전 1953년에 일어났던 현상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보통 기원전 1733년에 일어난 것을 오성취루, 기원전 1953년에 일어난 것을 오성취합이라고 구분해서 부릅니다. 
중국이 1996년부터 5년간 2백여명의 역사, 고고, 천문, 연대측정학등의 과학자들을 모아 하나라와, 상나라(은나라), 주나라의 연대 확정사업을 벌여 2000년에 '하상주 연표'라는걸 공식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원전 1953년 오성취루가 중요한 단서로 사용되면서 대중에 알려지게 되지요. 
이 연표에 따르면 중국 하나라 시대는 기원전 2070년에 시작되었고 하나라를 이어 상나라가 들어선 것이 기원전 1600년, 은으로 천도한 것이 기원전 1300년, 상나라를 이어 주나라가 등장한 것을 기원전 1046년으로 확정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하왕조가 건국된 연대는 기원전 2100년 전후로 추정되고 있었는데 '하상주 연표'의 완성을 위해 사서를 뒤지던 중 태평어람 7권에서 인용하고 있는 효경구명결(孝經鉤命訣)에서 "우임금 시절에 5개의 별이 마치 구슬을 꿴 것처럼 포개져 둥근 옥이 연이어 있는 듯이 밝게 빛났다"는 기록과 고미서(古微書)라는 책에서 "제왕이 흥기하여 종횡으로 별들이 합쳐지니 상서로운 조짐이로다"라는 기록을 발견하고서는 천문학의 힘을빌어 기원전 2100년부터 전후 100년쯤을 뒤져보니 1953년 2월 26일 밤에 일반인들도 쉽게 발견할 수 있을만큼 확연한 오성취합 현상이 일어났음을 확인하고서 2070년으로 하나라 건국을 '합의'해낸 것입니다. 
제가 인용한 중국 사서의 기록을 보셔도 알겠지만 중국사서에는 정확한 연도가 표기되어 있지 않은 반면 한단고기에는 정확한 연도까지 표시되어 있습니다. 현우님이 말씀하신 중국사서의 내용이 기원전 1953년의 것이 아니라 1733년의 것이라면, 그리고 정확한 연도까지 표기되어 있다면 현우님의 반론은 유효합니다. 

두 번째로. 
한단고기 진, 위 논쟁에서 가장 맥빠지게 만드는 반론이 한단고기가 1911년에 계연수가 편찬한 것이 아니라 계연수의 제자인 이유립이 1949년에, 혹은 1979년에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현우님 말씀처럼 이유립이 한단고기를 완성한 것이라면 2, 3, 4번은 무의미해집니다. 그러므로 이점은 확실히 해둘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알려진 한단고기는 1979년 이유립씨가 공개한 필사본으로 1911년 계연수씨에 의해 간행된 원본이 아닙니다. 1911년 계연수씨가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등을 엮어 한정판 30부로 출간한 바 있으나 당시 일제 총독부의 사료말살 계획에 의해 유실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해방 후 이유립씨가 귀국하여 자신이 간직하고 있었던 원본을 오형기씨에게 필사하게 하고 그것을 공개했지요. 가공할만한 역사적 파급력을 지닌 한단고기가 공개되자 기성 역사학자들은 이유립씨에게 원본을 공개하라고 요구합니다만 이유립씨는 원본을 분실해(이것도 좀 웃긴 일입니다만) 공개하지 못했습니다. 그 와중에 현우님이 말씀하신 가시마 노보루라는 일본인이 한단고기를 일역해 내놓기도 했지요. 
그런데 얼마전 숙명여대 도서관에서 1911년에 계연수가 간행한 한단고기 원본이 발견되었습니다. 저한테 숙명여대 도서관 도서검색 캡쳐가 있는데 보여드릴수 없어 아쉽군요. 이 책은 숙명여대 도서관에 있는 한단고기는 애국지사로서 건국훈장을 받은 바 있는 송지영 전 KBS이사장이 1989년에 기증한 것인데요, 계연수가 지은 것을 이기(李沂)라는 사람이 교열한 것으로 광무 15년이라는 연호까지 찍혀있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한단고기는 오형기씨 판본, 가시마 노보루 판본, 임승국 판본, 임 훈 판본, 그리고 얼마전 숙명여대 도서관에서 발견된 원본, 이렇게 총 다섯 종류인데 다른 판본은 모두 지정학적 관계에 대한 서술에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표기한 반면(요동을 중심으로 만주를 표기하면 동남쪽이 되지만 한반도를 중심으로 만주를 표기하면 북서쪽이 됩니다) 숙명여대 도서관에서 나온 원본은 만주와 요동일대를 중심으로 표기하고 있는 점이 다릅니다. 이것 때문에 계연수씨가 편찬한 한단고기의 의미를 축소하려는 의도로 또 다른 가필이 첨가되었다는 의혹도 일고 있지요. 실제로 가시마 노보루의 일역본은 조금 애교스럽게 말하자면 개판입니다. 고려말 문인 목은 이색을 '목은'이란 사람과 '이색'이란 사람을 분리해서 각각 다른 사람으로 다룰정도로 기본적인 역사적 소양이 없는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줘 한단고기의 가치를 떨어뜨리는데 혁혁한 역할을 하고있지요. 

마지막으로 단군릉에 대한 것인데. 북쪽의 정치이데올로기가 사학에 침투된 케이스라고 보는 송호정교수의 입장에 저도 동의합니다. 다만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진정 정치 이데올로기를 위해 유물을 조작한 것이라면 북한측이 내놓은 자료가 너무 허술합니다. 제가 뭘 조작하려고 했다면 아마 고구려필이 나는 유물들은 애초에 싹 치워버리고 깔끔하게 도굴의 흔적이 완연한 텅 빈 무덤과 5000년된 시신 두구만 내놓고서 "이거 일제시대때 어떤 간나들이 도굴한 것으로 보이오."했을껍니다. 그런데 북한측이 내놓은 자료는 너무 솔직하단 말이죠. 
또한 3회측정이라는 것은 잘못 알고계신 것 같은데 제가 알기로는 두 개의 연구기관에서 6개월에 걸쳐 각각 30회와 24회, 도합 54회 측정해서 도출한 결과가 5011±267년입니다. 
북한측이 단군릉을 무슨 피라미드 버금갈정도로 삐까뻔쩍하게 복원한 후 그 단군릉을 자신들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위해 적잖게 이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건 그거고 역사적 사실은 역사적 사실. 그래서 저는 긍정적인 발견으로 보고있습니다. 

이상입니다.    
 
 
 병장 김동환 (2006/06/22 09:54:42)

용준/ 
오. C12를 이용한 연대측정법도 있었군요. 게다가 C14에 그런 맹점이 있는지는 몰랐군요. 감사.(웃음) 
그럼 꼭 C14탄소연대측정법을 사람의 유골을 질료로 측정하지 않은것에 대해 북한측을 비판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닌셈이네요. 오호. 

말나온김에 짚어두면. 
C14는 토리노의 수의가 예수의 몸을 감쌌던 진본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낸 분석법으로 유명합니다. 
국내외 학자들이 북한에게 왜 전자상자성공명법만 사용하고 C14탄소연대측정법을 사용하지 않았느냐고 따진 것은 전자상자성공명법은 보통 1만년이 넘는 물건의 연대를 측정할때 쓰이고 C14탄소연대측정법은 1만년 이내 물건의 연대를 측정할때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북한은 C14탄소연대측정법을 하려면 시료가 많이 필요한데 5천년 묵은 뼈가 그리 많지도 않거니와 굳이 C14탄소연대측정법만을 고집할 이유도 없다고 대응했었죠. 
아무리 생각해도 관을 봉할때 쓰인 철못까지 버젓이 유품이라고 내놓는 황당하고 자신있는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조작이라고 단언하기 힘들지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병장 조용준 (2006/06/22 12:48:32)

동환// 
허헉. 오타네요. 사실 탄소동위원소 측정법이라는게 C12와 C14의 비율을 분석해서 측정하는 방법인데, 통상적으로 C14분석이라고 하죠. 그런데 중요한건, Alt-Tab신공을 쓰면서 글쓰던 제가 멋지게 오타를 냈다는 사실!!(웃음) 

그리고 전자상자성공명법은 C14분석보다 오차가 "더 큽니다". 위에서 C14의 오차를 300년 정도로 잡는데, 전자상자성공명법은... 제 기억으로는 최소 천년 이상 오차를 낼수도 있다고 한걸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제대로된 시설에, 제대로된 분석에, 제대로된 분석과정을 거쳤다고 했을때죠. (사실 이 부분에서, 북한의 연구시설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자료가 필요합니다. 90년대 초반 국내 최고의 기술력과, 2004년 당시 한 대학교 실험실의 기술력을 비교해보면, 진짜 뼈저리게 느낄수 있습니다.) 

사실 고고학에서, 동위원소를 이용한 분석법은 별로 각광받기 쉬운일이 아닌게, 너무나도 시간이 짧다는게 문제입니다. 고고학에서는 주변 유적과, 발견한 유적의 연대를 역추적하는 방법이 가장 정확하죠. 뭐, 이 방법은 사실 고생물학에서도 쓰는 방법입니다. 의외로 동위원소를 통해서 연대를 추측해내는게 "오류"의 확률이 높다는 것이죠. 분석기술의 탓도 있지만, 워낙에 변수가 많거든요.    
 
 
 병장 김동환 (2006/06/22 13:21:02)

용준/ 
음..하긴 변수가 많을 수 밖에 없겠군요. 자세한 설명 고맙습니다.(웃음)    
 
 
 병장 노지훈 (2006/06/23 04:46:24)

진실은 어디에~ 
재밌습니다.    
 
 
병장 한상원 (2006/06/23 13:12:45)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동환씨 이게 다 머리에 들어가 있는건 아니겠죠? 윽.    
 
 
상병 허동훈 (2006/06/26 10:44:27)

다른건 다 봐도 뭐가 뭔지 전문지식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한단고기가 우리나라 역사였으면 하는 바랩에서 몇자 적고 싶습니다. 

위서라는 근거로 두가지 들었는데... 

우리 조상이라고 왜 파이를 모른다고 단언하는지 참... 

더욱 말이 안되는건 양력이랑 음력이랑 기준이 다른거 뿐이지 

어느것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하루는 낮과 밤이고 계절은 4계절인데 

음력을 썼으니 365일... 가 틀렸다는게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 썼는지 제가 무식하다면 깨우쳐 주십사 청합니다.    
 
 
 병장 김동환 (2006/06/26 16:50:12)

동훈/ 
하핫. 저도 뭐 전문지식은 없습니다만 나름 아는대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원주율부터. 
인류가 원주율을 계산하게 된 역사는 B.C 2000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바빌로니아인들이 B.C 2000년경 3(1/8)로 원주율을 사용했고요 그 옆동네 이집트인들은 2(16/9), 즉 3.1605쯤으로 원주율을 계산해 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의 범람, 피라미드의 건설과 관련해 비약적으로 앞선 측량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지요. 지금과 비교해도 0.02정도밖에 차이가 나질 않아요. 
태백일사(太白一師)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라 함은 적어도 B.C 2500년을 뛰어넘는 까마득한 옛날입니다. 우선 가장 상식적으로 그시절 원주율을 3.14로 정확히 계산해낼 수 있는 산법이 존재했는지, 숫자를 표기할 수 있는 문자가 존재했는지의 여부가 일단 의심의 대상입니다. 이집트인들의 3.1605라는 원주율도 지금 그들의 계산법을 십진법 소수점을 이용해 나타낸것이지 저렇게 표기가 되어있는게 아니거든요. 
두 번째로, 동아시아권에서 원주율이 계산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B.C 12세기 중국에서입니다. 수치또한 이집트에 비교하면 다소 원시적인 '3'입니다. 그 이전에 동아시아권에서 원주율이 정확한 3.14로 계산되었다면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한단고기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B.C 12세기 중국의 원주율 기록도 좀더 정확한 것이 되어야만 하지 않을까요? 
'3.14'로 대표되는 원주율값은 B.C 240년쯤 아르키데메스가 최초로 계산해냈지요. 따라서 시기상으로는 조선 중종때 사람인 이맥이 알고 있었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조선은 과학기술이 천대받던 시절이고 또한 이맥의 직책이 문관인 찬수관이었던 만큼 원주율에 대한 지식을 갖고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봅니다. 자연 계연수가 가필로 첨가했을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된것입니다. 

두 번째. 1년의 주기에 대한질문은 저의 어휘사용이 적절치 않았네요. 그러나 이 대목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간단하고도 확실하게 이 대목은 잘못되어 있습니다. 무협지 한권만 봐도 직감할 수 있죠. 문제가 되는 부분은 '365일'이 아니라 '5시간 48분 46초'입니다. 하루를 24시간으로 쪼개서 생활하게 된 것이 제가 알기로는 조선 세종때부턴데 분단위나 초단위는 그보다 훨씬 이후의 이야기죠. 물론 지적하신대로 음력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우리나라는 중국의 영향으로 태음력과 태양력을 혼합해서 사용해 왔습니다. 달은 태양보다 변화를 알아보기 쉬우므로 자연 태음력이 많이 쓰이게 되었지만 계절을 구별하는데는 태양의 변화를 알아보는 것이 필수였으므로 태양의 주기와 맞지 않는 음력은 사용이 불편했었죠. 동훈님께서 양력이나 음력이나 기준이 다를뿐 다른건 같지 않냐고 하셨는데 엄연히 다릅니다. 태양력은 일년이 365. 25일이고 태음력은 354.63일(소수점 아래는 틀릴수도(땀))입니다. 이슬람문화권은 아직도 태음력만을 고집하기 때문에 이슬람교도들의 순례절기가 해마다 다르지요. 
우리나라의 고유 역법으로는 세종때(가물가물) 최초로 우리나라의 절기와 맞는 '칠성산 내편'이라는, 한달이 약 29일로 지금써도 별 무리가 없을 달력을 만든바 있죠. 삼한관경본기(三韓觀境本紀) 마한세가상(馬韓世家上)편에 쓰인 '365일 5시간 48분 46초'는 '칠성산 내편'보다도 정확한 계산이라 도리어 믿기가 힘들다면 적절한 대답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거 원 자료가 없어서 대충대충. 안타깝네요. 
더 궁금하신 점 있으시면 말씀하세요.(웃음)    
 
 
상병 허동훈 (2006/06/27 10:58:31)

감사합니다. 

분초를 생각못했습니다. 苦者桓雄....曆以三百六十五日五時四十八分六秒爲一年也.... 
48분 6초라고 자구가 확실하다면 이견이 있을 수 가 없을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상들은 윤년이다 윤달이다 해서 일년을 정수로 확실히 끊지 않았습니다. 4년에 한번 윤년이라고 줏어 들은듯하고, 4*5시간 48분 46초 하면 대강 하루가 떨어지고 거기다가 윤달이 있으니 이는 윤년을 더 보완한 력법인데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구지 육십진법을 썼다는 것은 연구의 필요가 있는거지 후대 사람이 첨가했을지... 

첫번째는 우리가 배우는 수학은 다 서양에서 온 것입니다. 
수능문제에서 잠시 나온것 같은데 우리나라 산법도 참 오묘한게 많이 있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수리적 사고는 서양것이고 조상들의 것은 외계에서 온 듯 신비할 따름입니다. 
섯불리 말하고 싶은건 아르키메데스나 유클리드가 생각한 것을 조상들이 생각하지 못했다는 식으로 논리를 풀어가는데 석연치 않습니다. 건축물을 만들면서 기하학이 발달되었는데 사라진 문명은 
파이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모든게 확실치 않은데도 불구하고 예를들어 중국에서는 3이라고 했는데 훨씬 오래전 조상들은 3.14라고 한것은 잘못되었다고 하는데 논리적 오류인것 같습니다.(시간의 오류??) 

워낙 우리역사에 긍지를 가지고 있고 왜곡되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억지를 부린건 아닌가 싶습니다. 토달기 좋아하는 성격이라서 오해없이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는 거 없고 알려고 실천도 못하는 사람이지만 김동환님도 논박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기를 바라는 맘입니다.    
 
 
 병장 김동환 (2006/06/27 12:15:30)

동훈/ 
사실 상고사 이야기는 제가 모르는 것을 배우기 위해 '함께 이야기해보자'는 취지로 시작한 것입니다. 제가 얘기하는 것을, 논박하는 것을 싫어할 턱이 있나요.(웃음) 

역사가 뒷사람들의 양보와 합의로써 그 진실성을 보장받는 상황은 좀 마뜩찮습니다만 
한단고기를 입증할만한 직접적인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한단고기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는 부분들은 과감히 젖혀놓고 확실한 부분부터 차근차근 주장해 가는것이 
보다 전략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밖에 상고사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관심도 무척 중요하겠죠. 두런두런 얘기하다보면 언젠가는 고구려 이전의 역사도 우리 국사책에 당당히 실리게 될꺼라 믿습니다. 
아. 국사책이 길어질테니 학생들은 좀 짜증나겠지만.(땀)    
 
 
상병 허동훈 (2006/06/28 11:12:56)

감사합니다.    
 
 
상병 김현우 (2006/06/28 12:11:45)

나들이 다녀와서 다시 봅니다. 1911년 판본이 나왔다는건 뜻밖이네요. 
훌륭한 반론덕분에 논리를 재정립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낍니다. 고마워요. 

저도 여건이 된다면 "언어학"의 관점에서 에서 환단고기 관련된 글 한번 써봐야겠어요. 
여하튼, 좋은 글 계속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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