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사 이야기] 신시시대(2) 
 
 
 
 




중국인들은 고대 중국의 임금이라 하여 삼황오제란 이름으로 부릅니다. 삼황오제는 삼황 태호 복희씨, 염제 신농씨, 황제 헌원씨와 오제 소호금천씨, 전욱고양, 제곡고신, 제요도당(요임금), 제순유우(순임금)이 있습니다.(사마천 같은 경우는 소호금천씨를 빼고 황제헌원을 5제에 포함시키기도 합니다) 삼황중 복희씨와 신농씨에 대한 언급은 지난 글에서 했지요. 오늘 자오지 한웅(치우) 얘기를 들어가기에 앞서 알아둬야 할 인물이 삼황의 마지막이자 한족의 시조라고 불리우는 황제 헌원씨입니다. 


염제 신농의 아버지인 소전의 후손 지파중에 공손(公孫)이라는 성을 쓰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공손의 후손중에 황제헌원이 태어나게 됩니다. 중국 초사에 간략하게 이와 관련된 구절이 등장합니다.


황제(皇帝)는 백민(白民)에서 태어나고....그는 동이(東夷)족에 속한 사람이다.


황제헌원이 중요한 이유는 삼황이후에 등장하는 오제중 소호금천과 제요도당(순임금)을 제외한 3명이 헌원의 직계족보를 타기 때문입니다. 전욱고양은 헌원의 손자, 제곡고신은 증손자, 제순유우(우임금)는 헌원의 8대손임이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황제헌원이 자기보다 앞서 등장한 태호복희씨와 염제신농씨를 제끼고 중국대륙의 시조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자오지 한웅(치우)와의 일전 때문입니다. 복희씨가 세우고 신농씨가 받은 나라는 변방 제후국에 불과했거든요. 신농씨의 후예인 유망이  시해당하고 황제 헌원이 권력을 차지했을 즈음 세력이 급격히 불어나 신시에서 자오지 한웅(치우)이 직접 탁록으로 내려와 한판 붙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중화족은 비약적인 문명의 발전을 이루고 신시를 위협할만한 세력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편의상 아래부터는 ‘자오지 한웅’을 널리 알려진 ‘치우’라는 이름으로 지칭하겠습니다. 


자오지 한웅(치우)은 신시시대에서도 가장 업적이 뚜렷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사서에 그에관한 기록이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습니다. 치우에 대한 기록은 사기(史記)를 비롯해 40여종의 중국 사서에 등장하지만 아쉽게도 한국의 정사에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삼국사기’와 ‘동사강목’에 ‘치우기’라는 혜성이 나타났다는 내용이 유일하며, ‘연려실기술’, ‘대동야승’, ‘청장관전서’등에서는 중국의 기록을 인용해 놓았을 뿐입니다. 그밖에 ‘성호사설’에는 우리의 민속을 설명하면서 치우를 수호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고 정사는 아니지만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치우사당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세차례 등장합니다. 물론 우리 사서중에 치우에 대한 기록이 전무한 것은 아닙니다. 한단고기(桓檀古記)의 태백일사(太白逸史)나 규원사화(揆園史話)에는 자오지 한웅(치우)이 황제와 싸우게 된 배경, 치우가 만들었다는 무기와 대략적인 전투방법, 금속을 제련하는 방법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만, 요 두 서적은 현재 사학계에서 위서 취급을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상고사 이야기를 하는데 있어 한단고기(桓檀古記)는 절대 방치해둘 수 없는 좋은 아이템중 하나이므로 이번 치우 이야기는 중국사서들을 중심으로 한단고기의 태백일사와 규원사화를 짬뽕시켜 함께 상식적인 선에서 다뤄보고, 특히 한단고기에 대한 썰은 다음편에 따로 분리해서 풀어보겠습니다. 우선 사마천의 사기(史記)나 반고의 한서(漢書)등에 기록된 이야기들로 물꼬를 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아마도 가장 널리 알려진 중국 역사책일것입니다. 사마천은 흉노를 토벌하러 갔다가 포로로 잡힌 이릉 장군을 변호하다가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남자의 생식기를 절단하는 궁형을 받은 일화로도 유명하지요. 부계사회의 상징을 제거당하는 수치를 견디면서도 사마천이 궁형을 받고 살아남은 것은 부친의 당부 때문이었습니다. 사기(史記)의 서문격인 ‘태사공(太史公) 자서(自序)’에 보면 부친 사마담이 사마천에게 자신의 사후에 꼭 태사(太史 :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 중 우두머리)가 될 것을 당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마천은 태사공(太史公) 자서(自序)에서 “태사공 담이 죽은지 3년이 지나 태사령이 되었고, 여러 가지 역사 기록과 석실(石室), 금궤(金櫃)속의 책을 섭렵할 수 있었다”라고 썼는데 이렇게 원체 역사가 집안이라 집안에 내려오는 자료도 많았거니와 황실의 석실, 금궤속의 책을 토대로 쓰여진 책이 사기(史記)이기 때문에 이 책이 일반적으로 높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이고 위의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사기(史記)가 그야말로 깔끔하고 엄정한 역사책일 것 같은 인상을 심어줍니다만 그같은 인식은 섣부른 감이 좀 있습니다. 우선 사기(史記)는 그 종류가 무척 많아 정말 많은 판본이 전해지고 있으며 그중 어느판본이 사마천이 집필한 진본인지 정확한 구별이 불가능합니다. 이미 5세기 남북조시대에 ‘어떤 것이 진짜인지 구별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 다 한셈이죠. 
그래서 사기(史記)를 공부하는 사람은 사마천이 사기(史記)를 지어 내놓은 기원전 91년경 이후부터 꾸준히 다른 학자들에 의해 쓰여진, 당대에 맞춰 사기(史記)에 주석을 달아놓은 학자들의 ‘사기(史記) 주석집’(이게 책 이름이 아니고 사기에 대한 주석을 모아 엮은 책입니다)을 꼭 함께 봐야 합니다. 사기(史記)가 무척 좋은 조건으로 작성된 사서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간의 사기(史記)연구를 보면 자국, 한족의 역사를 미화시킨 부분이 무척 많거든요. 이른바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의해 쓰여진 중국 사서들에 대해서는 상고사 이야기 2편 ‘조선상고사’편을 보시면 좀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어쨌든 치우 관련 기록또한 사기(史記)와 주석집의 내용이 조금씩 다른데요. 우선 사기(史記) 본문을 보실까요. 



사기(史記)1권 ‘오제본기’의 첫머리는 “황제(黃帝)는 소전의 아들로 성은 공손(公孫)이요, 이름은 헌원(軒轅)이다”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서술 바로 뒤에 치우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치우가 난을 일으켜 헌원의 명을 듣지 않았다. 이에 황제가 제후들에게 동원령을 내려 치우와 탁록의 들에서 싸워 마침내 그를 사로잡아 죽였다. 비로소 제후들이 헌원을 신농씨를 대신해 천자로 추대하니 이가 바로 황제(黃帝)다. 세상에서 황제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를 토벌하고 평정한 뒤에는 바로 군대를 철수해 그곳을 떠났다. 


사기에 대한 주석집중 가장 권위있는 것으로는 남조(南朝) 송(宋)의 배인이 쓴 사기집해(史記集解), 당나라 사마정(司馬貞)의 사기색은(史記索隱), 당나라 장수절(長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 요 세가지가 꼽히는데요. 우선 셋중 가장 오래된 배인의 사기집해(史記集解)에서는 “응소(應召)는 ‘치우는 옛날의 천자’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천자라 함은 천하의 지배자를 뜻하니 사기 본문에서 ’치우가 헌원의 명을 듣지 않았다‘는 구절과 맞서는 내용입니다. 사기집해(史記集解)뿐 아니라 장수절의 사기정의(史記正義)에서도 용어하도(用魚河圖)라는 책을 인용해 치우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도 본문과는 조금 내용이 다릅니다. 


용어하도(用魚河圖)에서 말하기를 황제가 섭정할 때 치우는 형제가 81인이었는데 모두 몸은 짐승인데 사람의 말을 하고 동으로 된 머리에 철로 된 이마를 하고 사석(沙石)을 먹고, 창과 칼 그리고 큰 쇠뇌같은 군사용 무기를 만들어 그 위세가 천하에 진동했다. 주살(誅殺)하는데 무도하고 자비로움이나 어짐이 없었다. 만민이 황제가 영을 내려 천자의 일을 행하기를 바랐으나 황제는 인의로써 치우를 금지하기가 불가능했다. 
이에 하늘을 보고 한탄하자 하늘에서 현녀를 내려보내 황제에게 군사를 움직일 수 있는 신부(神符)를 주었고,  치우를 제압해 복종시켰다. 황제는 이로 인해 주병력을 보내 팔방을 제압했다. 치우가 몰락한 후 천하가 다시 소란스러워지자 황제는 치우의 형상을 그려 천하에 위세를 떨쳤고, 천하는 두루 치우가 죽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팔방 만방이 다 기꺼이 복종했다. 



우선 주목할점은 사기(史記) 본문의 기록과는 달리 황제와 치우를 동등한 관계로 그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황제가 ‘섭정’을 했다는 것은 권력을 위임받았다는 얘긴데 의아한 것은 이후의 어떤 기록에도 황제에게 권력을 위임한 이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드러나있지 않습니다. 게다가 황제가 치우를 제압해 복종시켰음에도 나중에 천하가 소란스러워지자 치우의 위세를 빌려 진압했다는 점은 확실히 어폐가 있습니다. 

사기의 주석중 치우 관련 내용으로 산해경(山海經 : 중국에서 제일 오래된 지리서로 B.C 4세기의 저서이고 23편중 지금은 18편만이 전해집니다)을 인용한 부분이 있는데 이 또한 사기 본문과는 내용과 시각이 다릅니다. 


치우가 군사를 일으켜 황제를 토벌했다. 이에 황제는 물을 관장하는 응룡(應龍)에게 명해 기주지방의 들에서 치우를 공격했다. 치우는 풍백, 우사를 불러 크게 바람을 일으키고 비를 퍼붓게 했다. 이에 황제는 발(魃)이라는 천녀를 불러 비를 멈추게 하고 마침내 치우를 살해했다. 


사기(史記)는 치우가 난을 일으켜 헌원의 명을 듣지않아 토벌했다는 것이지만 산해경에서는 오히려 치우가 먼저 군사를 일으켜 황제를 토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싸움장소도 사기에서는 탁록, 산해경에서는 기주라고 했는데 탁록은 지금의 베이징 서북쪽이지만 기주는 지금의 라오닝성 서부와 허베이, 산시성, 그리고 하난성 북부에 해당합니다.
정리하자면 사기와 사기 주석, 산해경은 결국엔 치우가 헌원에게 패배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치우와 헌원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점에서는 각각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이지요.





자. 이제 우리 사서쪽으로 눈을 돌려봅니다. 
아무래도 상내략외(詳內略外 : 자국 역사는 자세하게 외국 역사는 간단하게, 춘추필법의 원칙중 하나입니다)원칙을 벗어나기 힘든 중국사서보다는 우리 사서가 자세한 기록이 많습니다. 
우선 위서 취급을 받고있는 우리 사서를 바로 언급하기보단 중국 사서와 겹치는 기록부터 살펴보죠. 장수절의 사기정의(史記正義)의 내용이 한단고기(桓檀古記)에도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치우의 형제 81인’이나 ‘짐승의 몸에 사람의 말을 하는’, ‘구리 머리와 쇠로 된 이마’, 모래와 돌을 먹고 칼과 창, 큰 활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부분은 시사하는 바가 많은, 의미심장한 부분인데요. 치우가 이미 금속문명을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굳이 치우에 한정해서 이런 기록을 남긴 것은 치우는 칼과 창 이외에도 투구와 갑옷을 만들어 쓸 정도로 대량의 금속무기를 사용했지만 헌원은 그렇지 못했다는 얘기기도 하거든요. 실제로 지금 사용하고 있는 한자 ‘철(鐵)’의 옛 글자가 ‘금(金)’자와 동이족을 뜻하는 ‘이(夷)’자를 합친 ‘철(?)’이었던 것만 봐도 당시 치우의 야금술 수준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끔 합니다. 
금속무기를 사용했던 치우와 금속무기를 다룰 능력을 갖추지 못했던 헌원.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싸움 전에 누가 더 세력이 컸을 것이며 싸운 후 어느편이 이겼을지는 자명합니다.



‘규원사화(고려 공민왕때 이명이 쓴 진역유기(震域遺記)를 보고 1675년에 -북애자-라는 인물이 편찬했다는 책인데 현재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17세기 중엽이 아니라 일제시대때 대종교 계통에서 저술한 위서라고 봅니다)’에서는 치우와 헌원의 일전에 대해 좀더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헌원은 이미 여러번 패했으나 다시 병마를 일으키고 치우를 본받아 널리 병갑을 만들게 하고 새로이 지남차(指南車)를 제작해 싸움을 거니 치우는 하늘을 우러러보고 탄식했다. 중토의 왕기가 점점 성하고 염제의 백성이 굳게 단결하고 있으니 이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욱이 각각 그 임금을 섬기니 부질없이 무고한 백성을 죽일 수 없다 하고 되돌아서기로 결심했다. 


치우는 항상 헌원보다 적은 수의 병력으로 압승을 거뒀는데 주로 바람을 등지고 진을 치고 염초를 태워 연기를 만든 후 연기가 자욱해지면 우왕좌왕하는 헌원을 덮치는 전략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헌원이 항상 남쪽을 가르키는 지남차를 만들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밖에도 규원사화에서는 치우가 헌원에게 잡혀 죽었다는 탁록전투에 대한 사기(史記)의 기록을 부인하면서 “치우의 부장이 공을 세우려다 잡혀 죽었는데 사기(史記)에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라고 한 내용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지요. 




그럼 마지막으로 태백일사(太白逸史) 신시본기(神市本記)의 내용을 보면서 우리 사서에 기록된 치우 관련 내용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태백일사(太白逸史)는 조선시대 연산군때 문과에 급제해 중종시대 찬수관을 지낸 이맥이 지은 책으로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 한국본기(桓國本紀), 신시본기(神市本記), 삼한 관경본기, 소도경전본훈, 고구려국본기, 대진국본기(발해 역사를 다룬 책입니다), 고려국본기가 차례대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뭐 짐작들 하시겠지만 이 책도 짤없이 위서취급을 받는 책이고 사마천의 사기(史記)와는 정 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책입니다만 인과관계에 벗어나는 것이 없고 뭣보다 제가 지루하게 쓰고있는 상고사 시리즈의 핵심의식인 ‘이야기’로서의 가치가 있으므로 길게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 치우천왕은 신시를 이어받아 백성과 더불어 새롭게 시작하여 능히 베풀고 얻었다. 치우천왕은 온갖 사물의 기본원리를 빠짐없이 살폈으니 그 덕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고, 지혜가 모두 옳았으며, 힘 또한 모두 갖추었다. 치우천왕은 백성과 더불어 범 무리를 떼어 하삭(강 하구의 황무지)에 살도록 하고 안으로는 용감한 병사를 양성하고, 밖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관찰했다. 
유망의 정권이 쇠약해지니 군대를 보내어 정벌했고, 집안과 가문에서(지난편에 ‘치우’는 원래 성이라고 말씀드렸죠) 장수가 될 만한 인재 81명을 뽑아서 여러 부대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고, 갈로산의 쇠를 캐내어 도개(칼입니다), 모극(矛戟 : 두갈래 갈라진 창), 대궁(大弓), 호시(?矢 : 호나무로 만든 화살)를 많이 만들어 잘 다듬더니, 탁록(?鹿)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구혼(九渾 : 지명입니다)에 오르셨으며 연전연승하며 그 위세가 천하에 가득했다. 한해동안애 아홉 제후의 땅을 점령하고 다시 옹호산(雍狐山)에 웅거하여, 구야(九冶 : 아홉번 담금질)로 수금과 석금을 개발하여 예과(芮戈 : 방패와 창)와 옹호의 창을 만들어내고 다시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들을 이끌고 양수(洋水)를 건너 출진하더니 재빨리 공상(空桑)에 이르렀다. 이 해에 12제후의 나라를 점령하고 죽이니,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가득 메웠다. 
이에 서쪽 지방에 사는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하여 숨지않는 자가 없었으며 유망이 소호로 하여금 치우천왕과 맞서 싸우게 하였으나, 치우천왕은 예과와 옹호극을 휘두르며 소호와 크게 싸우고, 큰 안개를 일으켜 적을 혼란에 빠지게 하니 소호는 크게 패하여 변방으로 내빼더니 공상(空桑)으로 들어가서 유망과 함께 도망쳤다. 
치우천왕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천하의 태평을 맹세하고는 다시 군대를 진격시켜 탁록을 포위한 다음, 멸망시켰다. 

당시에 ‘공손헌원’이란 자가 있었으니 토착민들의 우두머리였다. 치우천왕이 공상(空桑)에 입성하여 새로운 정치를 편다는 말을 듣고, 천자가 되려는 뜻을 가지고 병마를 일으켜 싸움을 걸어왔다. 치우천왕은 항복한 장수 소호를 보내어 탁록에 쳐들어가도록 하고, 탁록을 포위하여 헌원의 군사를 멸했지만 헌원은 굴복하지않고 계속 덤볐기 때문에 치우천왕은 구군(九軍)에 명을 내려 네 갈래로 출격케 하고 자신은 보병과 기병 3000명을 직접 일끌고 탁록의 ‘유웅’이라는 벌판에서 헌원과 계속 싸우면서 명령을 내려 사방에서 압축하여 죽였다.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게 하면서 싸움하니 적군은 혼란에 빠졌으며 도망쳐 숨기에 바빴다. 백리 안에 병사와 말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치우천왕은 연의 회대(?岱)지역을 모조리 점령하고자 곧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지방을 차지하였고, 이에 헌원의 부하들이 신하되기를 원하며 찾아와 조공을 바쳤다. 
치우천왕은 군사를 정돈하여 4개 방면으로 진격해 헌원과 10년동안 73회싸웠으나 장수는 피로의 기색이 없고 군사들은 물러섬을 몰랐다. 헌원은 여러 차례 싸워도 계속 지므로 원한이 더욱 커졌다. 헌원이 신시를 본때 병기와 갑옷을 대폭 만들고, 지남차도 만들어 출전하는지라 치우천왕은 분노했다. 형제들과 종당(宗當 : 집안 친척들로 구성된 집단)들로 하여금 헌원과의 싸움에 대비했다. 
한바탕 크게 싸움이 일어났고, 혼란한 가운데 1진(陳)을 살육한 뒤에야 비로소 전투가 멈췄는데, 이 싸움에서 우리 장수중 치우비(蚩尤飛)라 하는 자가, 공(功)을 서두르다가 불행하게도 진이 무너지게 되었다. 치우천왕은 크게 화가나 무기 만드는 전문가를 시켜, 돌을 날려보내는 무기를 새로이 만들어 진을 치고 진격하니 적진은 저항하지 못했다.
이에 병사를 나누어 서쪽은 예탁의 땅을 지키고 동쪽은 회대의 땅을 취해 성읍을 삼게하고 헌원이 동쪽으로 침략해 올 수 있는 길을 지키게 했다. 
그 뒤 300년 동안은 별일이 없이 무사했는데 다만 전욱(?頊)과 한번 싸워서 이겼을 뿐이다.






*요즘 연구되는 자료들을 보면 중국의 동북공정과 관련해서 치우얘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는데 논점도 많고 얘기할 것도 많지만 신시시대의 전반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차원에서 많은 부분을 일부러 적지 않았습니다.  치우에 대한 요즘 연구는 아무래도 관심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알기어려운 내용이기도 하거니와 뭣보다 그에 대한 적당한 홍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라 이 다음편에 한단고기에 대해서, 그 다음편에는 치우와 동북공정에 대해서 상고사 이야기의 번외편 정도로 꼭 올릴 예정입니다. 


자. 이정도로 해서 신시시대에 대해 제가 아는 것은 다 털어놓은 셈입니다. 한숨 돌렸네요. 흐흐.

신시시대 18세 한웅인 거불단 한웅 다음에 왕위를 잇는 이가 바로 단군왕검입니다. 
다음 상고사 이야기에서는 단군조선때부터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목표는 일단 단군조선까지 마치는 건데. 이거 계약만료전까지 얼마나 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땀)









 

  
 
 
 
병장 김동석 (2006/06/05 18:36:00)

계약 만료되면 인터넷을 통해 애프터서비스 해주시면 되죠.    
 
 
병장 김희곤 (2006/06/05 18:42:47)

오호.. 그런 훌륭한 방법이 있었군요. 
그런데 한단고기 등은 왜 위서 취급을 받는 것이죠? 사료로서 진위가 의심된다고 얼핏 들은 것 같습니다만.. 사실 다른 고서들도 비슷하지 않나요?    
 
 
상병 박종민 (2006/06/06 01:35:44)

한단고기편 기다리고 있습니다. 끄응. 
상고사 참 재미있는데, 이걸 받아들이는 올바른 자세에 대해서 
아직도 저는 정당한 스탠스를 못찾겠습니다. 

그나저나, 
거불단에서 솔로부대의 영원한 적, 
커플부대의 징후가 느껴집니다. 꼭 차음같잖아요!    
 
 
병장 김동석 (2006/06/06 08:29:12)

한단고기, 규원사화, 태백일사 등이 위서로 취급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한단고기의 예를 들자면, 계연수라는 사람이 이전에 있던 '옛 책'을 토대로 정리하였다고 하는데 그 '옛 책'은 여태까지 그 어느 역사책에서도 그런 책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며 또한 지금 실존하지도 않습니다. 적어도 사료로써의 진위와 권위를 가지기 위해서는 다른 검증받은 사료들에게서 그 사료에 관한 언급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그 당시에도 그 사료가 존재했고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지요. 하지만 한단고기나 옛 책들에 대한 내용은 어느 사료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게다가 19세기 이후에나 쓰이기 시작한 표현 - 이를테면 '문화'라든지 하는 어휘를 사용한 것들 - 을 쓰는 것으로 보아 계연수가 지어냈거나, 혹은 '옛 책'이 있었더라도 상당 부분 계연수의 영향을 받아 날조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위서로 취급받는 것이죠.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설령 한단고기의 내용을 뒷받침해줄 만한 사료나 유적이 발견된다 해도 한단고기가 위서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다만 한단고기의 내용 중에는 진실과 근접한 내용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2차 사료'로써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상병 김현우 (2006/06/06 10:42:30)

기원전 우리 조상들이 잠수함, 직접민주주의, 우주의 생성등을 21세기적 이론으로 접근했다고 주장하는 책이 있다면 위서라고 생각할수밖에 없지요. 
그 외에도 위에 김동석님이 말씀하셨듯이 단어의 문제도 있지요. 과거 사서에도 문화라는 단어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건 "문치교화"이 의미로 사용한것이지 "Culture"로 사용하지는 않거든요. 물론 환단고기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문화가 사용됩니다. 
이 밖에 그 당시 쓰여지지 않았던 영고탑등의 지명이 나온다는것도 정황상의 증거로 지적됩니다. 

환단고기 위서, 진서 논쟁만큼 양측이 소모되는 논쟁도 없으니 비겁하지만 저는 빠지렵니다. (웃음)    
 
 
병장 김태경 (2006/06/06 11:58:10)

단군만해도 까마득한 과거의 일로 생각했는데, 단군 이전에도 이렇게 많은 기록이 남아있고 (환단고기같은 책들이 위서라고 하더라도, 사기에도 치우에 대한 내용은 확실히 나오는거잖아요?) 더 긴 역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랍거든요. 
그런데, 신시시대의 1세 거불한 한웅이 석기시대였는데 14세인 치우천왕이 철기라는건 좀 안맞는듯하네요. 1500년도 안되는 기간에 석기->청동기->철기로 변화했다는 얘긴데.. 계산해보면 거불한 한웅이 기원전 3800년, 신시시대를 1500년으로 잡고 치우천왕까지 1000년이 지났다고 계산해봐도 기원전 2800년... 그런데 중국 황하 유역의 청동기가 기원전 2200년. 아리송합니다. 훗훗. 
정말 재밌게 읽고 있어요. 다음편도 7월 내로 어떻게...    
 
 
병장 박민수 (2006/06/06 16:26:38)

정말 잘 읽었습니다. 계약만료가 되시기 전에 나머지 편들도 다 볼 수 있길 빌어봅니다. 끙.    
 
 
 병장 노지훈 (2006/06/11 11:40:02)

이제야 읽었네요. 어쨌든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