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프로가 아니면 우리는 죽어버리는 걸까. 삶에 대한 프로 자격 시험이라도 있어서 그 테스트에 불합격 하면, 지정된 사형수들이 하나둘 다가와 목을 뎅겅뎅겅 잘라버리는 걸까? 아니다. 그건 아니다. 다만, 패자가 된다는거다. 프로야구에서 치열하지 못한 팀이 패자가 되듯이. 그래서 한바탕 욕을 먹다가 팀이 해체되듯이. 말하자면 ‘삼미 슈퍼스타즈’처럼. 패자가 된다는 뜻이다.

박민규는 패자의 심볼로 삼미 슈퍼 스타즈를 내세운다. 이 소설 안에서 ‘삼미’는 그 슈퍼스타즈라는 이름과는 아주 아이러니컬 하게도 ‘슈퍼루저’의 성격을 띈다. 모든 패배자들의 대변인이며, 그 누구보다도 패배를 절절히 실감했던 팀이다. 박민규가 재조명하는 것은 ‘패배자들’이다. 프로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패배자가 된 사람들. 그리고 소설의 주인공 또한 거기서 논외가 되지 못한다. 마치 ‘삼미’ 처럼, ‘슈퍼루저’가 된다.

그렇다면, 이미 죽은 게 아닌가? 프로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했다. 프로로서 실격이라면 죽으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프로가 아닌 ‘패배자들’은 왜 살아있는가? 왜 살아남아서 숨을 쉬고들 지‘랄들인가. 그래서 박민규는, 아니 ’삼미‘는 프로의식 자체가 틀려먹은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프랜차이즈된 ’프로의식‘에 의해 우리는 무리한 삶, 무리한 꿈들을 요구당하고, 그래서 자살충동을 불러일으킬 만큼 ’무리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빌어먹을 놈의 ’프로의식‘이 없으면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고 너 좋고 나 좋고 재미나게 쿵떡쿵떡 살텐데, 왜 굳이 프로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느니, 프로가 아름답다느니, 프로의 세계는 약육강식이라느니, 아마추어를 비하하느니, 따위의 이야기를 하냐는 것이다. 재밌냐? 그렇게 살면 재밌냐? 나도 프로세계에 뛰어들려고 해 봤는데, 그건 아니올씨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신앙의 한가운데에 우리의 ’삼미‘가 있다. 18연패의 엄청난 전적, 한국 최초의 노히트 노런, 이 절망적인, 그야말로 절망적인 팀 말이다.



패자를 응원하는 마음

내가 사랑하는,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팀, 또는 선수가 스포츠에서 상대 팀, 혹은 상대 선수에게 무참히 밟히는 광경을 본 사람은, 이 마음을 알 수 있다. 열심히 기가 차게 응원하는데도 기어코 지고 마는 그 마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절히 응원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패자로서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은 그런 것이다. 패자를 응원하는 마음. 즉, 패자인 자신을 응원하는 마음이다. 세상은 자꾸 자신을 패자로 만들고, 그래서 그 빌어먹을 프로의 세계는 냉혹하기만 한데, 그렇다고 세상을 때려 치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무리 패자일 지언정 응원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패자로서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82년, 84년, 85년의 삼미를 응원하는 마음과 같다. 박민규는 이러한 마음을 잘 알고 있다. 삼미 슈퍼 스타즈의 어린이 팬클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결 방법은 다르다.
삼미가 83년 엄청난 기적을 일으킨 이후, 다시 예전의 삼미로 돌아 왔을 때, 소설 속 화자는 응원을 때려쳐 버린다. 그래, 그렇게 화자는 프로야구의 세계를 떠나왔다.

그런데

이 세계는 프로의 세계라는데, 이 세계도 떠날 수 있나?

물론, 떠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시사하는 바는 ‘정 안되겠음 자살해라’ 가 아니다. 그래서 소설 마지막 까지 화자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자처하는 것이다. 물론 의의는 다르다. 프로야구 세계에 속한 삼미를 응원하는 팬클럽이 아니라. 그들만의 야구를 하는 삼미를 응원하는 팬클럽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일테면, 패자고 승자고 나발이고, 야구 하면 됐지 뭐. 저들끼리 재미나면 됐지 뭐. 하는 것이다. 그래.

패자고 승자고 나발이고. 인생 저들끼리 재미나면 됐지 뭐. 하는 것이다.
그것이, 패자, 즉 화자가 자신을 응원하는 또 다른 마음이다. ‘프로’로서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응원하는 마음이다. 작품은 프랜차이즈된 프로들이 아니라, 우승만을 향해 달려가는 획일화된 프로의식의 ‘프로’들이 아니라,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진 ‘인간’을 응원하고 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인생은 목적은 한 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프로’야구와는 다르게...


그러나 결국은 자위


지면 어때?
이 말은 그럴 듯 하게 보인다. 자전적 소설이 분명한 이 ‘삼미’는 박민규가 살면서 느꼈을 인생의 농후한 실패, 패배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그 메시지에 대한 타당성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 소설의 한계는 거기에 있다. 

지면 어떠냐니? 지면, 기분 나쁘다. 글쎄? 그게 프랜차이즈 된 ‘프로의식’때문 이라고? 아니. 인간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타인보다 우월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다못해 외모라도 타인보다 잘생겼으면 한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 짐승이었을 때, 더 나은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우월성을 가리던, 그 시대의 유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 근거야 어쨌건 간에, 우리는 이기고 싶고, 지면 기분 나쁘다는거다. 지면 어떠냐고? 기분 나쁘다니까. 이 작품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승패’를 가르는 세상의 이치가 다만 ‘프로의식’에 국한되어 있다고 규정짓는 데에 있다. 우리는 다들 ‘승패’를 공공연히 생각하고 있다. 하다못해 연애를 하더라도 주도권을 갖는 쪽이 승자이다.
그래서, 지면 기분 나쁘다는 논리에는 일절, 가격할 배트가 없는 것이다. 

박민규가 이 소설을 냈을 때, 별 ‘됻 같은 소설’이라고 사람들이 욕을 했다면, 그래서 패배자의 감흥을 느꼈다면, 그는 그때에도 ‘뭐 어때 소설 쓰는 게 재밌는데’ 라고 이야기 했을까. 어디까지나 승리는 달콤한 유혹이다. 그것은 부정 할 수 없다. 

‘삼미...’ 가 말하려고 하는 바는, 대충 알겠다. 패배자들에 대한 위로와, 프로의식에 대한 항거와, 빌어먹을 이 세상은 왜이렇게 됻같니, 우리 너무 열심히 살지 말자, 뭐 이런 것이겠지. 하지만, 박민규는 너무 과하게 찔러 들어간 감이 없지 않다. 세상에서 패배자들이 가질 수 있는 ‘타협점’은 얼마든지 있다. 그래, 이쯤에서 안도 하자, 그래, 직장 까짓거 짤리면 어때, 또 취직하면 그만이지. 에이, 내 능력 별 거 없으면 어때, 이렇게 저렇게 살면 되지. 요정도 타협점은 가능하다. 그러나, 승부를 떠난 세계를 원하는 것은 그야말로 세상을 뜨겠다는 이야기다. 이 ‘삼미..’의 일부 캐릭터들이 너무나도 꿈에 한한 비현실적인 태도를 비추는 것이 독자들에게 거부감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승리라는 감정이 가짜가 아니라 진짜라면, 결국은 얻는 방법이 있는 것이고, 우리는 얻으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승리가 없다고 치부해 버리고, 뭐 어때 하며 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섹스의 존재를 거부한 채 자위로만 살아가는 것과 다름 없다. 그렇다. 자위다 자위. 결국은 자위라는 거다.


가진 자의 논리


또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여유의 삶에 대한 희망적 논조가, 비교적 가진 자의 논리라는 데에 있다. 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언제든지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고, 집 걱정, 자식걱정, 뭐 이런 걱정들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설 속 주인공은 엘리트 교복을 입었었고, 중산층이었으며, 배운 것도 많고(비록 그것이 빌어먹을 공교육의 폐단에 의한 획일화 된 암기식 교육이었건 어쨌건), 일류대라는 타이틀도 거머쥔 인물이었다. 만약 그가, 인생의 처음부터, ‘지면 어때’ 라는 식으로 살았었다면, 그랬다면, 과연 훗날에 가서 ‘지면 어때’라고 웃을 수 있었을까. ‘삼미..’를 추억하며, 승패보다는 자신의 인생을, 이라는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결국은 이놈도 ‘똥꼬가 찢어지게’ 가난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따위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박민규는 ‘프로야구에 겁 없이 뛰어든 슈퍼루저’들을 조명하며 위로하고 있지만, 사실상 ‘프로세계’에 뛰어 들고 싶어도 뛰어들지 못하는 ‘꿈만 많고 능력은 안 되는 부조리의 아마추어 집단’이 존재한 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되는대로 일하면서, 적당히 벌어먹고, 적당히 사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들을, 박민규는 기똥차게 외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리하지는 말자.


자,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 말만은 동감한다.
어깨가 나가면서까지 야구 혼을 불사르는 것이 멋지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대충대충까지는 아니더라도, 너무 열심히, 무리해서 달음박질 하지는 말자. 아니, 최소한 달음박질 하되, 그것이 무엇을 위한 길인지는 알고 달음박질 치자. 자신이 원하는 ‘승리’란 무엇인지 알자. 최소한 ‘자신의 야구’가 지향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자. 그래서 차라리, 삼미처럼 ‘정장’을 입고 원정 훈련을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도록 하자. 우리 인생이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 인생의 승리는 무엇인지 각자 그려볼 일이다. 그러니까, 너무. 너무, 타인을 패자로 만들기 위해 안달복달 하지 말자.

라는 말에는 동감한다.

나도, 나만의 야구를 지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