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삶의 부조리를 향한 절규 ~F.카프카 <변신>을 읽고~  
일병 김영한   2009-08-27 15:24:37, 조회: 138, 추천:0 

(bgm :: 넬 - 벽)



이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의 일상에 대한 우화이다.


     프란츠 카프카는 그의 짧았던 일생 내내 주체할 수 없는 고독 속에서 살았던 작가다. 특히 그는 가정의 생계유지를 위해 원치 않는 직업을 가졌는데, ‘노동자 재해 보험국’에서 일했다고 한다. 그의 문학에 대한 열망과 그것을 가로막는 현실적인 문제, “먹고 사는 일”간의 갈등이 그를 얼마나 괴롭혔을지는 안 봐도 뻔한 것이다. 그 가공할 이중생활 속에서 그는 끔찍하리만치 고독했겠지. 주변엔 문학의 'ㅁ'조차 알지 못하는 지긋지긋한 속물들이 득실득실했을 것이고, 그는 그런 좌절스러운 현실 앞에서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갔을 것이다. 그렇게 시름시름 마음이 병들어간 그는 결국 지독한 고독과 불안감 속에서 요절하고 만다.

     <변신>은 그런 생을 살았던 카프카 스스로의 분신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생계를 위해 매일같이 회사에서 사장을 비롯한 상사들의 비위나 맞춰줘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상과, 그 와중에도 여동생을 음악 학교에 진학시키는 것과 같은 소박한, 그러나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내일의 꿈을 꾸며 현실을 어떻게든 견뎌나가는 그레고르. 이 장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이건 분명 직장은 X같은데 먹고 살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당신의 이야기다. 어쩌면 어이없게도 그저 돈벌이가 잘 되고, 안정적인 직장을 가질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명문 대학을 강요받으며 입시 공부에 시달리는 너희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건 이 땅에서 Rock을 하는 것을 꿈꾼다며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수학교육과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던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레고르 잠자는 여느 때와 같은 일상 속에서, 어느 날 갑자기 잠에서 일어나 보니 한 마리의 혐오스러운 독충으로 변신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난 이 ‘독충’이란 소재가 카프카가 사용한 일종의 상징 혹은 은유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가족마저도 가까이하기조차 꺼려하는 추악한 벌레의 탈을 씌움으로써, 타인과의 거리감과 그로 인한 소외감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주는 극적 장치이다. 우리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이 명제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카프카의 우화는 너무도 기묘하여 초현실적인 인상마저 줄 때가 있기 때문에, 가끔은 ‘이게 대체 무슨 헛소릴까? 갑자기 벌레가 되었다 뒤졌는데, 뭐 어쩌라는 얘기지?.’하는 생각이 들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본격적으로 리뷰에 들어가기 전에 음악 한 곡을 틀고 시작하자. 넬의 <Speechless> 앨범에 수록된 벽이란 곡이다. 변신을 읽는 내내 이 노래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독충이란 혐오물과 그들이 노래하는 벽은 어쩌면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다만 벌레 그레고르는 가족들에 대해 언제나 수동적인 태도를 견지했지만, 김종완의 벽은 비교적 능동적으로 절규하며 아파하는 것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고 본다. 아무튼 비교적 장문의 글이 이어질 것이니, 스크롤의 압박에 너무 지루해하지 말고, 볼륨업하고 본격적으로 들어가 보자.


벽

사라지길 너 영원히 내 앞에서 사라지길
너 때문은 아니지만 나를 위한 너였지만

이젠 없어

다가오지 마 그어진 내가
너를 아프게 할지도 몰라

슬프지만 진실이야 내가 만든 니가 만든
불신의 벽 그 앞에선 모든 게 다 거짓이야

그래도 돼

다가오지 마 그어진 내가
너를 아프게 할지도 몰라

너와 나에겐
넘을 수 없는
나를 떠나가



일상에서 깨어나는 부조리의 감수성.


     “변신”이란 상징의 의미를 좀 더 깊이 파고 들어가자면, 이건 한 인간의 부조리에 대한 각성이며, 궁극적으론 그 각성 후의 자살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알베르 카뮈가 그의 에세이, <시지프 신화>에서 말했던 “무대 장치의 붕괴”나 “부조리의 감정”과 일맥상통한다. 생각하는 인간이라면, 아마 당신도 그런 경험이 분명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매일 행하는 기상-출근-노동-점심-노동-퇴근-수면, 그리고 그런 생활의 연쇄가 똑같이 반복되는 월화수목금토일. 이 습관은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지지만, 다만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를 때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돌아보니 우리가 행하는 이 일상의 챗바퀴질이 정말 어처구니없게 느껴지고, 그로 인한 충격에 각자의 밀실에 들어가 고뇌하기 시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모든 소외의 시발점이고, 각성이며 곧 “변신”이란 말이다.

     소설의 주인공, 그레고르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가족의 생계를 떠맡아 영업 사원 일을 하는 충실한 아들이다. 그는 비록 지금의 일이 맘에 들지 않지만,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살아간다. 그에게는 사장에게 진 빚을 모두 청산하고, 여동생을 음악 학교에 진학시켜 주겠다는 소박한 꿈이 있다. 그는 흡사 우리와도 같은, 지극히 일반적인 서민인 것이다. 그런 그 역시도 하루하루 돌아가는 ‘먹고 사는 일’의 어처구니없는 성격에 분노하고, 그 “변신”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소설이 시작한다.

     변신 전의 그레고르는 말하자면 가족의 생계유지를 위한 기계였다. 밖에서 돈 벌어오는 가장이 기계와도 같은 존재로 전락하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친숙한 이야기이다. 아마 당신의 가족도 별반 다를 바 없을지 모른다. 사실 난 종종 내 가족도 이와 비슷하다고 여겨질 때가 있으니까. 아무튼 아버지의 사업이 파산한 후, 가족이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한 몸 희생한 그레고르. 그가 첫 월급을 타 가족 앞에 내놓을 때엔 날아갈 듯 기쁘고, 스스로가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타성에 젖게 되고, 어느 샌가 가족들은 그레고르가 돈을 벌어 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월급을 타다 줄 때의 기쁜 감정은 사라진다. 그냥 말없이 주고받을 뿐이다. 그가 출장길에 오를 때면 상상하는 가족끼리 단란하게 저녁 식사를 하는 모습마저도, 실제론 침묵과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의 식사였을 뿐이다.

     이런 부조리에 마주한 그레고르는 아마 스스로에게 의문을 제기했을 것이다. ‘대체 나의 존재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저 돈이나 벌어다 주는 일벌레일 뿐인가?’하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회의감이 종종 들었을 것이다. 특히나 회사에서 상사에게 스스로의 자존심을 굽힐 때면, 그런 회의감과 가족에 대한 의무심이 맹렬히 싸웠을 게 뻔하다. 그래도 그레고르는 퍽 성실한 사람이어서, 벌레로 변신된 자신을 발견하고도 자신의 몸을 걱정하기보단, 어떻게 해야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고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를 걱정한다. 벌레가 된 그가 어떻게든 출근하려 바동거리고, 지배인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가련한 모습은 우리 시대의 수많은 가장들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더욱 우스운 점은 그런 가련한 그레고르의 빈자리가 너무도 쉽게 매꿔지고 만다는 데 있다. 그레고르가 독충이 되어 돈을 벌어오지 못하자, 가족들이 각자 일자리를 구해 생계를 꾸려 가는데, 이건 마치 고장난 기계 부품을 다른 것으로 교체하는 일과 흡사하지 않은가! 이것으로써 그레고르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사라지고, 그의 작은 소망들도 빛을 잃고 마는 것이다. 별레가 된 그는 그저 가족들에게 쓰잘데기없는 짐으로 전락해버리고, 갈수록 심한 무관심에 방치된다. 아니, 집에 세를 놓아 수입을 챙기는데 방해가 되자, 그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여 처단할 정도까지 간다. 최후에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인 양, 가족끼리 오랜만의 나들이를 떠나며 행복한 미래를 예감한다.

     그는 결국 가족들에게 돈을 벌어다주는 노예와 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그것도 그가 없어지면 그 자리를 매꿔줄 수많은 대용품 중에 하나였을 뿐이다. 벌레로 변해버려 쓸모가 없어지자 그를 외면하고, 끝내는 방해가 되자 그를 매섭게 내치는 가족들의 추악한 이기심을 보며, 나는 치를 떨었다. 그것은 아마 우리 인간의 부조리한 본성이리라. 우리도 그레고르와 별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삐걱삐걱 돌아가는 일상의 권태 속에서, 우리네 삶의 의미는 쉽게 잊혀진다. 어느 순간부턴 흡사 커다란 기계의 자그마한 톱니바퀴처럼 변해버려 그 존재의 가치는 순식간에 빛을 바랜다.



그들은 내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우리가 이 독충을 보며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바로 소통의 단절, 타인과의 끝없는 거리감이다. 매일매일 악착같이 살아가는 생활의 부조리가 깨어날 때면, 주변의 모든 것이 “낯설어”질 때가 있다. 챗바퀴에서 벗어나 시선을 멀찌감치 뒤로 빼고 ‘왜?’라는 의문을 제기할 때면, 일상에서 마주치던 모든 것들의 의미가 갑자기 희미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주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톱니바퀴가 완전히 허물어지면, 법석을 떨며 그들만의 일상을 돌리고 있는 타인들이 갑자기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저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저토록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 걸까?’ 하는 거리감이 들고, 그들의 기계적인 행동은 무의미한 몸짓에 불과해진다.

     그레고르가 변신된 후 겪는 가족과의 단절은 이러한 “낯설음”과 너무나 유사한 데가 있다. 가정에서 그가 차지하던 존재 이유가 사라진 후, 그는 가족과는 상관없는 타인이 되어가는 것이다. 또한 가족들은 그의 혐오스런 모습으로 인해 그를 기피하게 되는데, 이는 마치 우리가 우리와는 다른 인간을 배척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대학에 오고난 후 주변 사람들에게서 느꼈던 바로 그 감정.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나와는 너무나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고, 난 마치 대양 위에 홀로 떠있는 섬 같은, 바로 그 외로움이 아닌가 싶었다. 아마 당신도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레고르가 가족들로부터 소외되는 과정은, 우리가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 사람을 대하는 행동과 너무나도 유사하다. 우리 역시 처음엔 타인이 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그에게 관심을 베푼다. 변신을 한지 얼마 안됐을 때, 누이동생이 그레고르에게 친절을 베푼 것처럼. 하지만 곧 그의 말과 생각이 나의 그것과는 계속 엇나가게 되면, 우린 그를 자신으로부터 떨어뜨리고 소외시킨다. 아예 그와 만나지 않으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우리를 귀찮게 하거나 삶을 방해하면, 우린 그를 가차 없이 떼어낸다. 무시를 하던, 어떠한 유형의 폭력을 행사하던. 존재 이유를 상실한 그레고르를 대하는 가족의 태도는, 우리의 본성에서 드러나는 이기심과 비겁함, 그로 인해 서로 소외되는 외로운 인간군상을 너무나 잘 보여준다.

     다만 독충 그레고르에 있어 조금 다른 점은, 그가 혐오스러운 독충의 탈을 쓰고 있기 때문에, 가족들의 감정이 크게 과장되어 그 효과가 더욱 극적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타인에 대한 감정은 보통 무관심과 배척일 뿐이지만, 가족들이 그레고르를 본 후의 반응은 극도의 혐오이다. 심지어 대화조차 불가능하기에 가족들과 그의 사이엔 커다란 벽이 그어지게 되고, 그의 존재가 그 벽을 넘어 가족에게 위협으로 다가올 때면, 어디선가 아버지가 나타나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한다. 아마 우리 자신도 깊은 내면에선 자신과 다른 타인을 그렇게 싹둑 잘라버리려는 충동이 있을 것이다. 다만 세간의 도덕이나 예절 따위의 행동 양식에 억눌려서 겉으로 표현되지 못할 뿐이다. 우리가 우리와 섞일 수 없는, 마치 물과 기름과도 같은 사이의 타인에게 던지는 무관심의 폭력을, 그레고르는 세상의 “위선”이란 여과조차 없이 직접적으로 당하고야 마는 것이다.

     변신된 그레고르는 그렇게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죽어간다. 그가 충실히 수행하던 “먹고 사는 일”은 전부 그 의미를 잃었고, 그에 연달아 가족들은 타인으로 돌아섰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낯설어졌고, 그의 존재는 무의미해졌다. 시계탑의 종소리와 함께 밝아오는 여명을 보며 최후의 약하디 약한 숨을 토해내는 그를 보며, 나의 불안한 존재 역시 껌뻑껌뻑 명멸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Damien Rice의 노래를 들으며 그 이유를 알 길 없던 막연한 외로움에 조용히 몸서리치던 나의 지난 새벽들을 회상하면서...



반항하는 인간


     그러나 그 숱한 방황의 밤들을 지내고도, 난 여전히 살아있다. 나 역시도 자살을 생각했던 적이 셀 수 없이 많다. 열차가 들어오는 지하철 플랫폼에서, 강의실 창문 밖 하늘을 바라보면서... 그렇지만 난 아직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일상의 부조리함과 타인과의 단절감에 몸서리친다고 해서, 굳이 그레고르처럼 죽음으로 귀결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살아가야 할 심각한 이유 따윈 없었다고 착각하는 것이며, 삐걱삐걱 돌아가는 하루하루의 톱니바퀴에서 떨어진 먼지 속에 묻혀있는 귀중한 보물을 내버리는 행위에 불과하다.

     삶의 부조리함과 인간의 존재론적 외로움은, 알고 보면 누구나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경험이다. 그것은 우리의 이기심과 독립성, 의식 구조 상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인간 본성일 따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처음 그것을 깨달았을 때 미칠 듯이 휘몰아치는 부조리함에, 한없이 불안하게 떨리는 우리의 존재를 꽉 부여잡는 일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 둔탁한 아픔이 한차례 지나간 후 쓰라린 상처를 쓰다듬으며 뒤돌아보면, 그것은 인간의 성격상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며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가 온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그렇다. 이렇게 현실의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뭐랄까 예전과는 다른 마음의 안식이 생기고, 삶의 의미도 다시금 찾을 수 있게 된다.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충만한 내면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한 안정 상태에 들어가면, 비로소 부조리에 반항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사실 잘 생각해보면 내가 그토록 외로워하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헤매던 시기에도, 나에게 위안이 되는 사람들이 있었고, 충분히 가치 있는 일들이 있었다. ‘왜?’라는 각성 이후에도 조금만 냉정히 주변을 살펴보면, 분명 그 삐걱삐걱 돌아가는 일상의 태엽에서도 의미 있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그레고르에게도 마찬 가지라고 생각한다. 비록 벌레가 되었을지라도 그의 의식이 또렷이 남아있는 한, 그는 새로운 유희와 행복을 찾아 떠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가 벽과 천장 등지를 기어다니며 새로운 쾌감을 느꼈던 것처럼. 다만 부조리의 충격이 너무나 컸기에 그것을 이겨내지 못했을 뿐이다.

     카프카의 <변신>은 분명 우리네 현대인이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권태와 소외, 그리고 타인과의 거리감, 종잡을 수 없는 외로움을 날카롭게 통찰해낸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그렇게 북적 떨며 살아야 할 만큼 삶이라는 건 충분히 그 가치가 있다. 게다가 당신이 아무리 외로워도 주변을 둘러보면 당신이 사라지면 눈물을 흘릴 사람들이 있다. 부조리는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지만, 그 와중에도 행복은 분명히 있다. 우리는 부조리에 눈이 멀어, 삶의 의미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부조리한 운명에 반항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해내야 할 것이다. 오늘 하루도 힘든 일상을 보냈을 당신, Live Forever!





덧1. 이 부조리의 감수성이란 가슴으로는 직접적으로 와닿지만, 냉철한 이성으로 사유해내기엔 상당히 벅찬 데가 있다. 아마도 내가 아직도 그 깊은 외로움 속을 헤매고 있기 때문이리라. 따라서 종종 어색하고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당신이 그 부조리를 몸소 느낀 적이 있다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미안하다. 내 능력의 한계다.

덧2.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 <시지프 신화>를 많이 참고하였다. 또한 마지막 부분의 “반항하는 인간”은 그의 또 다른 에세이, <반항적 인간>을 떠올릴 수 있으나, 난 아직 그 작품을 읽어보지 않았고, 그냥 제목만을 따온 것이다. 그렇지만 아마 그 에세이도 비슷한 내용이리라 나는 감히 짐작한다.

덧3. 이렇게 살아서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것에 대해 감사하며, 내 주제에 이런 멘트를 남기는 것은 상당히 건방지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 글을 내가 살아있을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들에게 바치고 싶다. 그리고 작가 카프카와 카뮈, 밴드 넬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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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프란츠카프카, 부조리, 자살, 시지프신화, 알베르카뮈, 벽, 넬, Nell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9-08
14:59:52 



상병 권홍목 
  저녁드시고 문득 삶의 부조리한 사이클이 느껴져 힘드시다면 연락하세요. 소심한 반항을 위한 축배정도는 해드리지요. 낄낄 2009-08-27
15:51:56
  



상병 유재균 
  변신은 두고두고 보고 또 봐도 가슴을 아리게 하는 매력적인 소설이죠 
카프카의 난해한 소설들을 접하고 나서 '이게 뭐지'라는 생각밖엔 떠오르지 않았으나 
차츰 그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나니 여러 작품들이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만큼 자신의 삶을 문학에 잘 표현한 작가를 아직은 못본것 같군요. 
후기 잘봤습니다 2009-08-27
15:55:43
  



병장 이재원 
  최근에 저도 변신을 읽었는데, 흐흠. 뭐랄까. 그레고르는 결국 일회용품같은 모습을 보여줬던거 같아요. 가족들의 모습은 단물만 쪽 빼먹고 버리는것 까지는 아니지만서도. 아, 뭔소리를 하는거야.... 2009-08-27
19:42:53
  



상병 황호상 
  같은 글을 읽고도 이렇게 다른 output을 산출해내시는군요... 허허. 
글 잘 읽었습니다. 공감이 많이 되네요.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굳이 살아야 할 '심오한 이유'는 없는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살아있음으로 인해 느낄 수 있는 소소한 '보석'들이 소중한지라, 결코 삶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군요. 

그나저나 ‘이게 대체 무슨 헛소릴까? ... 뭐 어쩌라는 얘기지?' 에서 뜨끔. 카프카 씨의 '선고'라는 소설 읽고 5분간 멍하니 정면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생애, 그의 아버지와 관련된 일화들을 읽어보니 조금 알듯말듯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2009-08-28
09:22:27
  



상병 김형석 
  "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네요!! 

먼저 영한님께 감사드립니다- 

1년전에 봤던 책 내용을 상기시키며 영한님의 후기를 천천히 읽어보니 
마치 오래전에 맞추지 못했던 퍼즐을 지금에서야 완성시킨 느낌이에요. 

한많은 인생 그레고르가 밑도 끝도 없이 흉칙한 벌레로 변한 과정은 일절 생략한채 시작하는 소설, 카프카의 <변신>은 일반적인 소설들의 내용전개와는 엄청난 차별성을 두어 제 흥미를 확 잡아채 끝까지 읽게 되었었죠. (그래봤자 단편이지만) 

소설 초반, 반짝에 불과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가족들의 그레고르에게 보냈던 동정에 비해 결말으로 갈수록 몸서리가 치릴 정도로 급격히 적대적으로 돌아버리는 가족들의 태도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죠. 

너무 과장스럽교 비현실적이라고 해야되나..? 

글에서도 말씀하셨듯이 마지막 부분은 죽어가는 그레고르를 (죽었나요?) 제외한 가족들이 다같이 행복한 미래를 도란도란 꿈꾸며 나들이를 가는 장면은 후우. 어떤의미로는 단연 소설의 백미가 아닐까 생각되네요. 가장 제겐 인상깊었어요. 

이 장면을 보면서 분명 무언가를 풍자한 소설이긴 할텐데~ 하면서도 끝내 의문을 풀지 못한채 책장을 덮었던 기억이나네요. 

영한님 고마워요! 
생각치도 못하게 제게 다시한번 <변신>에 대한감상을 되새기게 해주셔서- 2009-08-28
16:48:05
  



상병 정성근 
  에, 뭐랄까 저는 본론보다는 이걸 보면서 가족이란 개념의 해체를 떠올렸다나 뭐라나. 
솔직히 사바세계의 공기를 마시다보면 별 해괴한 가정파괴 사건들을 듣게 되다보니 
그레고르에게 하는 가족의 태도는 그저 귀엽게 보이더군요. 
생각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으니까요. 2009-08-29
01:09:42
  



상병 이준범 
  사회의 부속품이었던 그레고르가 그 가족들로 대체되는 사실이 너무 냉혹하죠. 
<변신>을 읽으면서 항상 군에서 느끼던 부속품이자 대체품이라는 생각이 확고해져서 
더 우울해질 따름이네요. 2009-08-29
09:49:01
  



상병 지장호 
  이야 이렇게 멋진 글을 이제야 봤다니 
잘 봤습니다. 통찰력이 매우 뛰어나시네요 
흠.. 저도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카뮈의 수필도 
다 읽어봐야겠어요.. 
흠. 내용이 너무 공감적이어서 좋았습니다. 2009-09-01
16:12:36
  



병장 김범준 
  그렇지만 카프카는 결국 '끝'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회적이고 절대적인 폭력의 끝에서 타자가 갈구 할 수 있는건 사회에 대한 편협적인 협력과 혹은 어떤 절대적인 것에 대한 우상인데 후자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귀결됩니다. 

그리고 브레히트가 말했듯이 편협적인 협력과 사회적 만족은 끝내 파시즘으로 말해지겠지요. 
어떤 의미에서 카프카는 실제를 알고 있었지만 결국 인정하지 않고 도망친 비겁한거라고 볼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2009-09-02
12:5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