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세계의 존재에 관하여 
 병장 이승일 05-19 10:51 | HIT : 355 





 저는 '사후세계'라는 주제에 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이 주제에 관해 커다란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거부감의 정체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 거부감에 어떤 합리적인 이유들이 있는지 하나씩 따져보려 합니다. 저는 "기생수" 라는 가상의 인물을 상정해놓을 예정입니다. (이름에는 아무 뜻도 없습니다. 어제 완결까지 본 만화 제목입니다.-) 이 인물은 "사후세계는 존재한다" 는 의견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기생수가 가질 법한 주장을 검토해봄으로써 그가 과연 얼마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지 알아 볼 생각입니다. 

[ 검증 가능성 논의]

 가장 우선적으로 기생수가 제기할 거부의 이유는, '사후세계의 존재가 검증 가능하지 않다' 는 것이리라고 생각합니다. 검증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최소한 '합리적인' 사람들의 집단에서 주장될 수 있는 의견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로 그러한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자, 우선 '검증가능하다' 라는 말의 뜻 부터 천천히 살펴봐야할 것 같습니다.
 검증 가능성의 말을 자세히 알려달라는 저의 요구에 기생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 자, 빛의 속도는 진공에서 항상 일정합니다. 이런 것을 검증 가능하다고 하는거에요. 우리가 직접 실험해보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기생수는 지금 당장 그것을 눈앞에서 보여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이 말을 하고 있는 순간, 그는 아무런 증거도 보여줄 수 없습니다. 대신 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 아아, 물론 지금 당장이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현실적 여건이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내 말은,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그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으리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 말 역시 완전히 사실은 아닙니다. 정말로 우리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랬다면 지금 당장 안 될 이유도 없었겠지요. '현실적 여건' 은 지금 당장의 검증을 가로막을 뿐아니라  임의의 미래 시점에서의 검증에도 장애물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생수가 '광속도 불변성이 진실이라는 것은 검증 가능하다' 라고 말하는 것은, <현실적 여건이 달라지면> 그 때엔 확인할 수 있으리라는 말입니다. 광속도 불변을 검증하려면 완벽한 직각을 젤 수 있는 레이저 측량기가 있어야 하고, 흠 없는 거울 두 개가 있어야 합니다. 또한 1/100 ms 까지 잴 수 있는 정밀 시계가 있어야하고, 순도 높은 레이저 광원이 있어야 합니다. 이게 귀찮다면 이 모든 설비를 갖춘 연구실을 알아보고 거기 가서 실험할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이 모든 것을 준비하고 그에 필요한 물리학을 공부하는데에는 명백히 '시간' 이 소요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할 수 없는 것이며, 원한다고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생수는 "꼭 내가 직접하지 확인하지 않아도, 훌륭한 과학자들이 이미 했기 때문에 검증 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충분히 수용할만한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권위에 대한 호소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식으로라면 전혀 비과학적이라고 불릴만한 주장들도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과학자들이 인정하지 않는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았는데, 이 중 일부는 그 어떤 과학자들보다 더 큰 지지를 얻었고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심지어 '성인' 이라고 불리며 존경을 받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들 대부분은 그 존재를 실제로 '지각할 수 있다' 고 까지 말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권위에 호소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이들의 주장까지 받아들여야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명백히 기생수가 원하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엄밀한 '검증 가능성' 의 개념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결국 '나 자신이 직접 지각할 수 있는 가능성' 으로 소급해 오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수천명의 사람이 귀신이나 UFO를 보았다고 진술해도 내가 직접 보지 않으면 믿기 힘든 것처럼, 나의 직접 지각을 통해서가 아니고서는 엄밀한 의미에서 '검증 가능하다' 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개념은 지금 당장의 검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난 후 검증할 가망이 존재하느냐를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사후세계의 검증 가능성' 에 대해서 이야기 해봅시다. 만약 사후 세계가 있다면, 그곳에서 하는 모든 행동은 곧 검증 실험이 될 것입니다. 그곳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곳이 있다면 우리의 의식은 살아있을 테니까요. 우리의 의식이 죽어있는 사후세계라는 개념은 없습니다. 그것은 사후세계가 없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그런 의미의 사후세계라면, 그냥 이 지구가 사후세계라고 말하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상 수백억명이 죽었지만 세상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진행되고 있으니까요. 아무튼 사후세계가 있다는 말은 우리가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계속 살아있다는 말입니다. 사후세계는 '다른 세계' 가 아니라 그냥 삶의 연장 - 물론 매우 다른 차원의 연장 - 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그 세계의 존재를 검증해줄 것입니다. 사실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지각' 하기만 해도 되겠지요. 결국 사후세계가 있다면, 사후세계는 검증될 수 있습니다. 
 기생수는 이제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내가 광속도 불변이 검증 가능하다고 말했을 때, 나는 아무것도 전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사후세계가 있다는 전제 하에 검증가능성을 말했으므로 엉터리 아닙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기생수가 아무 전제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광속도 불변은 '현실적 여건' 이 갖춰진 조건 하에서만 검증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 여건이 갖춰지리라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가능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광속도 불변성은 '만약 현실적 여건이 성립 가능하다면 검증 가능하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검증 가능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이 '검증 가능성' 을 훼손시킬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능성' 이라는 개념은 아무리 겹쳐져도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홍길동은 실존했을 가능성이 있다" 가 참이고, "홍길동이 실존했다면, 그는 단순한 도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가 참이라고 해봅시다. 그렇다면 "홍길동은 단순한 도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도 참입니다. A 일 가능성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면, 그냥 A 일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양상논리학에서는 이것을 '양상연산자의 환원법칙'이라고 합니다. ◇◇A → ◇A ) 
 사후세계가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 못하는 한, '사후세계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는 참이 되고,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면, 그곳에서 그 사실을 검증할 가능성이 있다' 도 참이 됩니다. 그래서 '사후세계를 검증할 가능성이 있다' 도 참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기생수는 다음과 같이 반박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미래의 일이고, 현재의 우리에게 그것이 알려질 수 없으므로 무의미합니다."  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것은 모든 검증 가능성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말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것을 검증하는 것은 항상 미래의 일이니까요. 미래에서 현재로 정보가 전달될 수 없는 것은 문제삼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후세계의 검증 가능성' 은 가장 엄밀한 의미의 검증가능성을 적용시킨다고 하여도 정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난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생수는 같은 방식으로 '사후세계가 없다' 라는 주장도 검증 가능하다고 주장할 테니까요. 그러나 재미있게도 '사후세계가 없다' 라는 주장은 절대로 '참'이라고 검증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후세계가 없다는 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냥 죽을테고, 결코 그것을 검증할 길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만약 사후세계가 있다면, 이 주장은 단지 거짓으로 검증 되겠지요. 따라서 사후세계가 있건 없건, 사후세계가 없다는 주장은 '참'인 것으로 검증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다음과 유사한 상황에 있습니다. 만약 '내일 지구가 멸망하고 우리 모두 사라진다'는 주장에 대해 찬반으로 엇갈려 있다고 합시다. 그래서 갑은 멸망한다는 쪽에, 을은 그렇지 않다는 쪽에 돈을 걸었다고 합시다. 을은 돈을 딸 가능성이 어쨌든 있습니다. 그러나 갑은 100% 돈을 딸 수 없습니다. 그가 돈을 따려면 지구가 멸망해야하는데,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는 돈을 딸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이 논증을 통해 '사후세계가 있다' 라고 주장한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저 개인은 정말로 있다고 믿는다는 것을 숨기진 않겠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한 내용은 저의 믿음과는 사실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특정 종류의 주장에 대해 반대하기 위해서 제시한 것입니다. 특정 종류의 주장이란  "사후세계가 있다는 의견은 검증 불가능하기 때문에 처분해야한다" 는 주장입니다. 최소한 이 주장은 틀렸다는 것이 제가 이 절에서 하고 싶은 말입니다. 만약 정말로 검증 가능성에 올인하고 싶다면, 폐기처분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사후세계가 있다는 주장이 아니라 그것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사후세계가 있다는 주장과 없다는 주장은 검증 가능성에 대해 전혀 대칭적이지 않으며, 정말로 검증의 가망이 없는 쪽은 사후세계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 불가지론 논의]

 이제 기생수는 다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 지금 뭔가 크게 오해하고 계세요. 제가 '사후세계는 없다' 라고 주장한다면 물론 그것은 결코 검증할 수 없는 것이 되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주장하려는게 아니라 단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고 주장하려는 것입니다."
 자, 아마 이것이 현대사회 가장 일반적인 대중의 의견에 가깝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알 수 없다' 라는 것이 과연 주장(assertion)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주장이란, 외부 사실이 어떠어떠하다는 진술을 의미합니다. '저기 나무가 있다' 는 진술이나, '자기 나무가 있는 것 같아', '저기 나무가 있다고 믿어' 라는 진술들은, 모두 그 w진술을 제기하는 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동일한 사실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즉 외부의 어떤 사실과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기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라는 주장은 단지 자신의 심리상태에 대한 진술입니다. 이것은 '나는 지금 기분이 좋지 않아, 나는 지금 졸린걸' 과 같은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물론 자신의 '심리적 사실' 에 대한 주장은 될 수 있겠지만,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에는 개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후세계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라는 주장은 단지 자기 자신의 상태에 대한 표현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적극적인 주장일 수 없으며, '사후세계가 있다' , '사후세계가 없다' 는 주장 중 그 어떤 것과도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잠정적인 입장 표명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강력하게 주장 하는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난 모르겠어! 난 모르겠단 말이야! 안그래? 난 모르잖아!"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예, 맞습니다. 당신은 모른다는걸 이제 알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알고자 하는 것은 당신이 아느냐 모르느냐가 아니라 사후세계가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그러니 잠시만 조용히 해주세요. 모른다는게 자랑은 아니지 않습니까?" 

 한편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 중에는 "알 수 없다는 것은 증명할 수 있다" 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경우엔 이것이 적극적 주장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짓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이미 논증한대로,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검증가능' 하기 때문입니다. 검증 가능하다는 것은 또한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이므로, "알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는 주장은 단순히 거짓이 되고 맙니다. 

 이런 '거짓' 주장 말고, 소극적으로 '알 수 없어' 라는 말을 하는 기생수의 의견에 대해 좀더 생각해 봅시다. 이 사람은 지금 외부 사실에 대해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심적 상태에 대해 말하고 있으므로, 그가 원하는대로 그의 심리에 귀기울여 봅시다. 제 생각에 기생수는 '최악의 오류는 면하기 위해' 입장을 유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지요. 신중한 것은 좋은 것입니다. 거쳐가는 과정으로서는 그렇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영원히 신중할 수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됩니다. 만약 기생수가 죽을 때 까지 어떤 입장도 갖지 않는다면, 즉 일종의 중립상태에 머문다면, 그는 볼 것도 없이 진실을 알지 못하고 죽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후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는 주장은 (비록 검증 불가능하지만) 어쨌든 참일 가능성이 있고, '사후세계가 존재한다' 는 주장도 참일 가능성이 있지만, '중립상태'는 어느 쪽이 참이건 거짓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후세계는 있거나 혹은 없는 것이지 반절만 있고 반절은 없거나, 있으면서 없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과정이 아닌, 결론으로서의 중립상태는 최악의 태도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박쥐가 되기로 마음먹는다면, 뭍짐승이 이기건 새가 이기건 패배할 것입니다. 박쥐는 100% 패배가 보장된, 가장 어리석은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중립적 태도는 최악의 오류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그와 함께 모든 가능한 진실로부터도 격리된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모르겠다' 는 의견이 사실은 '사후세계가 없다' 는 믿음과 그 효과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점을 본인도 알기 때문에 '모르겠다' 는 소극적 태도를 적극적 주장으로 제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가지론자의 세계관과 삶이 사후세계가 없다고 믿는 사람의 그것과 과연 무엇이 다를지 생각해 보십시오. 불가지론자는 '없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관심 갖는 것에 관심 가질 것이고, 그가 관심갖지 않는 것에 관심 갖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알 수 없다' 라는 태도는, 실용적 측면에 국한해서 보자면, '없다' 라는 주장과 동일하며 단지 더 모호하고 비겁한 태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과정이 아닌 <결과>로 생각한 경우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 프로이트적 논의]

 이제 우리의 기생수는 다음과 같은 주장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저는 이것을 프로이트적 주장이라고 부르고 싶군요.
" 인간이 사후세계의 존재를 믿는 것은 단지 그런 것이 하여간 있었으면 좋겠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말이지요. " 
 자, 우선 '인간이 사후세계의 존재 - 특히 천국 - 를 원한다' 는 주장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원한다는 사실과 사후세계가 실제로 있다는 것 사이에 대체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예, 우리 모두는 전역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래서 어쨌단 말이죠?  우리가 전역을 원한다는 사실은 전역일이 존재한다는 우리의 믿음에 대해 그다지 말해주는 바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전역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혹은 믿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원하게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프로이트적 주장은 정 반대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했으면 합니다. 기생수에게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당신은 단지 사후세계가 없었으면 좋겠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것이 있을 경우 당신이 감당해야 할 의무와 세계관의 수정은 당신에게 전혀 달가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러한 것이 없을 때 삶을 더 깔끔하게 살 수 있을 것 같고, 더 자유롭고 편하게 즐길 수 있을 것 같이 느낍니다. 당신은 사후세계의 부재를 원하기 때문에 그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한다면 기생수는 무어라 반론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찾아내려고만 한다면, 거의 모든 주장 속에서 만약 그 주장이 참이라면 충족될 욕망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유신론에서도, 무신론에서도, 양자역학에서도, 결정론에서도, 민주주의에서도, 독재주의에서도, 심지어 정신분석학과 심리주의에서도 우리는 그것이 충족시켜줄 욕망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석은 (이 분석 자체를 포함하여) 모든 주장에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테고, 인간의 모든 주장은 '요청된 것' 으로 간주될 수 있을것입니다. 명왕성의 존재도, 블랙홀의 존재도, 광자의 존재도, 도덕과 법률의 존재도, 수학과 논리법칙의 존재도 말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는 대체 무엇입니까? 단지 우리가 좀 더 주의하고 정직해야한다는 것 이외에 말이죠. 


[ 실용주의적 논의]

 마지막으로 저는 기생수로부터 다음과 같은 반론을 듣겠습니다. 
" 나는 더 이상 사후세계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어요. 다만 사후세계의 존재를 믿는 것은 최소한 실용적으로는 무익한 일임은 분명합니다. 사후세계를 믿는다면 우리는 모두 현실을 떠나 그 쪽으로 도피하려고 할 것이고, 현실은 피폐해 질 것입니다. Marx 아저씨도 그래서 종교를 대중의 아편이라고 했지요."
 저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은 비유를 통해 생각해보길 권합니다. 우리는 지금 2년(혹은 그 이상) 군 복무를 하고 있습니다. 이 기간은 우리 인생의 전부가 아니며, 훨씬 더 긴 시간이 전역 후에 존재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군생활 그 자체도 물론 중요하지만, 군복무기간동안 사회에 나가서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는 일에 더 관심을 갖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때때로 군생활 자체에는 부정적인 요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공부만 하려다가 선임병과 관계가 틀어진다던가 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좀 더 현명하다면 이것이 결코 최상의 선택이 아님을 금새 알 수 있습니다. 사회생활에서 필요한 것은 공부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회생활의 핵심은 지식이라기 보다는 인간관계라는 사실에 대체로 동의하리라고 봅니다. 때문에 만약 정말로 훌륭한 사회생활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형태의 인간관계든지 매끄럽게 이어가려는 노력을 할테고, 군대라는 열악한 곳에서도 그것을 연습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공부도 더 많이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선임병과 친해져서 그의 후원을 받는다면, 맘 편하게 공부할 수 있었을테니까요. 반면 "사회생활이야 제대하고나서 생각하면 되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이들은 대체로 짬없을 때에는 스트레스 속에서, 짬이 차고 나서는 TV 앞에서 세월을 보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아도 '잘 하는 군생활' 은 분명 아닙니다. 
 결국 전역 후의 생활을 예상하고 준비하는 것은 결코 군생활을 망치는 것이 아니며,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준비는 군생활을 더욱 성실하고 열심히 하게 만들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전제가 있는데, 그것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과 군대에서 할 수 있는 것 사이에 연관성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 전제를 사후세계 논의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사후세계에서 요구하는 것이 현재의 삶에서 할 수 있는 것이어야한다' 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후세계의 존재를 인정하는 종교에서 대체로 참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물론 반대로 말하는 종교도 있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종교는 현실세계와 사후세계를 경쟁하는 것으로 바라볼텐데, 그 경우 현실세계가 희생당하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사후세계에 관한 특정한 - 제가 보기에는 그릇된 - 입장에 불과하며, 사후세계 전반에 대한 이야기는 될 수 없습니다. 가장 건전한 의미에서 보았을 때, 사후세계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현실세계를 무의미하거나 소극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이유는 전혀 없으며, 오히려 그로 인해 현실의 삶을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열정적으로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피적' 이라는 수식어는 사실 사후세계의 존재에 대한 인정과는 꽤나 거리가 있다는 말이지요. 

[ 결론]

 저는 사후세계에 반대하는 기생수의 의견 중 그 어떤 것에서도 별다른 합리성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후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저는 그의 믿음을 어쨌건 존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 이유가 자신의 우월한 합리성과 이성 때문이라고 한다면, 저는 그가 거짓말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요즘 시대에 그런 것을 믿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라고 말한다면 저는 더욱 어리둥절 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체 사후세계의 존재와 '요즘시대' 라는 것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사후세계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이 문제는 전적으로 보편적인 사안이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취직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공부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군대가지 않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취직과 공부와 군대에 관한 문제는 완전히 보편적인 지위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게다가 만약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가 됩니다. 모든 개인은 최소한 몇십년 안에 그것을 경험할테고, 그것은 순수한 의미에서 자기 삶의 '미래', 그것도 매우 중요한 미래에 해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평생 이 문제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지 않고 있다가, 혹시 무언가가 정말로 존재하면, 그 때가서 알아차려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너무 늦었을지도 모릅니다. 대체로 현실이란, 그것이 눈앞에 도래했을 때에는 이미 감당할 수 없는 힘으로 우리를 제압하기 때문입니다.  


 병장 홍연택 
 삶의 중심에서 죽음을 생각하라. 더이상의 논의가 필요없는 탁월한 글이었습니다. 잘 읽었어요. 05-19   

 병장 김청하 
[ 검증가능성 논의]에서, 과학의 권위와 과학자들의 권위를 착각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우리가 빛의 속도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훌륭한 과학자들'이 실험해서 얻은 결과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그 과정에서 추론을 통해 가설을 세우고 엄격하게 다른 가능성들을 제거하고 그 실험이 (실험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조건에서 수행된다고 해도 역시 동일한 결과를 낳을 것이며 그 과정 전체가 이해가능하다는 사실 때문이겠지요. 

 물론 엄격한 검증가능성에 대해 얘기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기대', 과학자들이 '정말로' 그렇게 검증했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얘기해야 하겠지요. 결국 이런 명제들에 대한 믿음 또한 일정 부분 학계의 권위에 의해 구성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광속불변성의 검증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다면 그것은 분명 학계의 권위 때문일테구요. 

 하지만 그것은 '성인'들의 발언이 갖는 권위와 분명 다른 성격을 갖습니다. '성인'들의 발언의 권위는 그들이 어떠한 추론과정을 거쳐 그러한 발언을 하게 되었는지 그 발언이 얼마나 검증가능한가가 아니라,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에 더 큰 영향을 받으니까요. 

 정말로 엄격한 검증가능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접 눈으로 목격한 것조차 믿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본 것은 그저 색색깔의 점들 뿐인데도 불구하고 고아라는 정말 예뻐, 라고 말하는 것이 인간이니까요. 그렇다고 데카르트, 코기토까지 내려가자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어느 정도의 권위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권위에는 종류가 있고 각자의 용도에 맞춰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사후세계에 대한 제 의견은, 그것이 아직 제가 납득할만한 체계에 의해서는 검증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론 존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구요. (물론 승일 씨의 글처럼, 제가 겉으로 보이는 소망과는 달리 그것이 존재했을 때 가해지는 세계관의 수정을 견디지 못할 뿐일 수도 있죠.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신체 이상의 존재라는 하나의 결정적인 증거가 될테니까요) 05-19   

 병장 이승일 
 청하 / 과학자들의 '권위' 와 기타 '권위' 가 어쨌든 다르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저 역시 공감합니다. 그 점에서 오해할 소지가 있었던 것 같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 권위의 차이에 대해서는 잘 못 지적하신 것 같습니다. 차이는 '검증가능'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검증의 성격에 있는 것입니다. 어느 성인(꼭 이들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도 어떠어떠한 존재가 자기 자신만 접근할 수있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즉 보편적 접근 가능성을 전제하고 말합니다. 따라서 과학자들의 권위가 최소한 검증가능성의 문제와 관련해서 특별히 더 수용할만하다거나 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이죠. 

 한편, "그것이 아직 제가 납득할만한 체계에 의해서는 검증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라는 말에서 '제가' 라는 표현이 갖는 무게가 어느정도인지 궁금하군요. 예컨대 AI 역시 그 누구도 성공시킨 적 없음에도 불구하고 청하씨는 그것의 가능성을 깊이 신뢰하고 계신데, 이 신뢰 역시 '제가' 로 인한 것인가요? 05-22 * 

 상병 이기중 
 실용주의적 논의에 대하여. 
marx 가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비판한 것은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이 현실의 불평등한 구조를 타파하려는 노력을 무디게 하기 때문이라고 보는데요. 그것은 현실을 얼마나 보람차게 살아가는가와는 다소 결이 다른 문제입니다. 
 말하자면 '전역만이 살길입니다'. 병들은 2년만 버티면 전역을 하기 때문에 군대 내의 수많은 불합리와 억압을 그냥 견디고 보아넘기는거죠. 그냥 조금만 참으면 되는데, 이 체제 안에서, 제일 말단의 계급에서, 현실을 바꿔보겠다는 것은 쓸데없는 노력입니다. 그리고 전역은 난데없이 전쟁이라도 벌어지지 않는 한, 거의 확실하게 예정되어 있는 일이므로 이 체제를 어떻게든 바꾸고 싶다면 전역해서 사회에서 무슨 일이라도 하는게 훨씬 효율적이죠. 만약 이 곳이 평생 살아야할 집이고 직장이었다면, 이 곳을 어떻게든 바꾸려는 노력이 내부에서 생겨나지 않았을까요. 

 이런, 근무를 가야할 시간이군요. 일단 이 정도만 얘기하고 후다닥. 05-22   

 병장 이승일 
 기중 / 평생 살아야할 집이기 때문에 오히려 바꾸려는 노력이 시도되기 힘들지도 모르지요. 예컨대 부사관 사회를 생각해보세요 (웃음) 05-22 * 

 병장 김청하 
 이것은 권위보다는 검증가능성에 대해 승일 씨와 저의 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검증할 수 있다.]는 근거로 승일 씨는 그곳에서의 모든 행동이 곧 검증 실험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사후세계를 검증하는 더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죽어보면 되거든요. 게다가 엄격하게 제한된 여러 명의 사람이 죽어보고 그것을 보고하면 검증가능성 뿐만 아니라 반복가능성까지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검증가능성에 대해 얘기할 때 이런 식의 검증가능성에 대해서까지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른바 '과학적 검증가능성'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지요. 과학자들 또한 이러한 명백한 검증 방법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검증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 전제(죽어보는 것)를 현실적으로 성립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광속불변성을 검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전제(실험 장치)를 현실적으로 성립시킬 수 있기 때문이지요. 

 현실적으로 성립시킬 수 없는 전제들을 가지고 검증가능성을 얘기하면 이 세상에 검증불가능한 것은 하나도 남지 않습니다. 이 세계에는 분명히 신이 있을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존재하죠. 어쩌면 신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줄 가능성도 존재할 것입니다. 결국 말씀하신 양상연산자의 환산법칙에 따라, 검증할 수 있는 것이지요. 

 성인들이 그 어떤 존재에 대하여 보편적 접근 가능성을 전제하는 것은 그야말로 '전제'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반복가능한지 우리가 능동적으로 검증해볼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죠. 그렇기에 우리가 그들의 말은 과학적으로 검증불가능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구요. (물론 그들의 말에 가치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건 별개의 문제죠.) 


 그리고, 
 굳이 "제가"라는 말을 쓰는 것에 큰 의미는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입장이 다른 사람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차피 그런 말을 쓰지 않아도 모든 글과 리플이 저의 생각일 테니까요. 그럼에도 굳이 그 말을 쓴 것은 동의하지 않는 (정확히는 제가 설득할 수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건 취향이나 가치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나는 옳고 당신은 그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확신할 수 없기에 당신의 생각도 인정한다, 의 완곡어법에 가깝겠지요. AI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05-22   

 병장 이승일 
 청하 / 이 세상에서 '죽음을 실현시키기 어렵다' 라는 주장만큼 확실하게 틀린 것이 또 있을까요? 
 저는 지금 광속도 불변을 측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이 모든 것이 '가능성' 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위에서 떠다니고 있는 것임을 주목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현실화 된 것이 아니라, 가능태로서 존재하는 것들 말입니다. 

 또한 AI 에 관해서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리고 그것이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면 당연히 '과학적으로 검증 가능한' 문제라고 보신다는 건데, 어떤 조건을 통해서 그것이 과학적으로 검증 가능한 문제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진심으로 듣고 싶습니다. 05-22 * 

 상병 이기중 
 부사관은 병보다 훨씬 인간적으로 살고 있죠. 만약 그렇지 않다면 누가 직업군인을 하겠습니까(웃음) 병들에게는 그런 인간적 삶이 전역 이후로 미루어져 있고. 이건 대학만 가면 뭐든지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강요당하면서 현재를 살아야하는 고등학생들에게도 비슷하게 해당하는 이야깁니다. 

 그리고 사후세계의 존재를 인정하는 대표적인 종교인 기독교의 경우는 아무래도 현실세계와 사후세계를 대립시키는 경향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힘들다'거나, 목수한테 버려진 돌이 머릿돌이 되었다던가, 현세에서 가장 작은 이가 천국에서 으뜸가는 이가 된다던가...등등, 사후세계에서는 현실의 권력관계가 역전될 것이다. 그러니 각자 맡은 위치에서 착하게 열심히 살게나...라는 뉘앙스죠. 
 다른 종교는 잘 모르겠어서 기독교의 예만을 들었지만, 사후세계에서는 현실의 권력관계가 역전될(혹은 평등해질) 것이라는 교리를 갖지 않은 종교는 아무래도 다수 인민의 지지를 받기 힘들겠죠. 현실이 힘들기 때문에 사후세계에서 보상을 바라고, 사후세계의 보상을 믿으니 현실에 어느 정도 만족하고 살게 되고. 아이러니죠. 05-22   

 병장 김청하 
 승일/ 음, 글쎄요. 죽음과 관련해서, 검증은 그냥 자기가 해본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검증과 검증가능성에 대해 일반적인 쓰임보다 광의의 정의를 사용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 모든 과정을 명확하고 분명하게 진술해서 다른 사람들도 납득가능한 형태로 만들어야 비로소 과학적으로 검증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여기서 이 '납득가능'의 범위가 문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밥시간이 된 관계로 더 생각해보고 쓰겠습니다. 

 그리고 AI가 가능하리라는건 여러가지 방법에 의해서 검증가능해요. 학계 사람들이 수십년동안 반대론자들과 맞서가며 해온 것도 그거구요(뭐 수십년 했다고 해서 맞다는건 아니지만). 게다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걸 눈으로 보여주기 전에는 다들 안 믿으니까니.... 그렇다고 우리가 해놓은거 보여주기에도, 지금까지 해놓은게 솔직히 쫌 민망하거든요(...). 05-22   

 병장 이승일 
 청하 /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이 그것이에요. 저는 검증가능성 개념 자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것입니다. 가능성에는 두가지가 있어요. 시제에 의해 표현되는 가능성과, 양상표현에 의해 표현되는 가능성이죠. 전자는 경험적이고, 인식론적인데 비하여 후자는 형이상학적인 것입니다. 정말로 의미있는 검증'가능성' 은 후자여야함에도 불구하고, 과학에서 말하는 검증가능성을 계속 따지다 보면, 결국 전자에 가까운 가능성의 문제로 변하고 말아요. 그리고 그정도의 검증가능성은 심지어 사후세계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한편 AI 의 존재가 <검증 가능- 논리적, 형이상학적 의미에서>하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그런지 정말로 듣고 싶어요. 즉 '믿음' 이 아니라, 정말로 AI 의 존재를 보장할 수 있는 논증을 제시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AI 가 존재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라는 것이 아니라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 말이에요.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AI 의 존재는 사후세계의 존재만큼이나 단지 믿음에 달린 문제가 되고 말지요. 

 기중 / 부사관이 병보다 만족스러운것이야 월급주고 계급높아서가 아닌가요? (.....) 뭔가 논점을 착각하신 것 같아요. 기중님께서 말씀하신건 변화의 시도에 관한 것이고, 그 점에 있어서 부사관 사회가 더 변화(개혁?) 가능하냔 말이지요. 아마 기중님 리플을 다시 읽어보시면 어디가 잘못 되었는지 쉽게 아시리라고 생각해요. 
 한편, 기독교에 관해서는 기중님께서 잘못 알고계신 것 같은데, 그렇다고 기중님께 성경책을 한번이라도 읽어보라고 권하기도 뭐하므로 그냥 넘어가는 수밖엔 없겠군요. 하지만 뒷부분의 말씀은 맞는 말씀이에요. 그런 논리가 없다면 다수인의 지지를 받기 힘들겠죠. 왜냐하면 다수인들은 현실세계에서 불만족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05-22 * 

 병장 김청하 
 승일/ 이해가 잘 안되네요. 그 두 가지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을런지요. 저는 우리가 말하는 '검증'이라는 것이 애초에 개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개인의 경험 이상의 (가능한 최대한의) 객관적인 어떤 절차가 필요한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기에 전 아무리 생각해도 사후세계는 죽은 자들에게 의해 증명될 수는 있지만 '검증'될 수는 없다는 결론 이상으로 전진하질 못하겠어요. 05-23   

 상병 박수영 
 잘 읽었습니다만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관측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이 '관측가능'하다고 한다면 저는 물론 믿을 것입니다. 사후세계라 하면 '죽어서 도달할 수 있는 세계'를 의미하며, 삶과 죽음은 대극으로 서로 교차할 수 없기에 저희는 절대 죽음의 세계를 살아있는 지금으로 경험할 수 없습니다. 
 현재 우리에게 어떠한 이론적인 방법으로도 사후세계를 관측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정말로 검증의 가망이 없는 쪽은 사후세계가 있다는 주장입니다. 사후세계가 있다고 한다면 누군가는 그것을 관측했거나 사후세계에서 살아돌아와 부활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계시군요. 이것은 이제 과학이나 논리의 차원을 떠나 종교의 차원으로 개입하게 됩니다. 또한 검증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개인'의 지각가능성으로 귀결된다면(어떤 자신이 아닌 다른 집단이나 과학자 집단애 의해 진실로써 인정되는 부분이라 하더라도) 승일씨는 본인의 지각능력으로 사후세계를 검증할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럴수 없다면 이 논의는 끝없이 무의미 한 것으로 보입니다. 05-23   

 상병 이기중 
 부사관이 상대적으로 인간적인 생활을 한다는 얘기를 한 것은 변혁의 필요성이 병에 비해서 그만큼 낮다는 얘기였습니다. 제가 얘기했던건 변화의 가능성이라기보다는 정확히는 변화를 추구하는 자생적 움직임의 발생/발전가능성이었는데, 애초에 군조직내에서 중간관리자인 부사관들이 받는 억압이란건 병과는 비교가 안되기 때문에 부사관의 예는 적절치 않다는거죠. 
 음, 그리고 성경은 고등학교때까지는 성당을 다녀서 좀 읽었는데(웃음) 저는 사후세계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현실에서 더 열정적으로 살 것이라는 승일님의 주장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현실세계와 사후세계의 가치는 분명 다르기 때문에 그 열정적인 삶의 방향은 분명 달라져요. 종교는 현실의 권력을 덧없는 것으로 치부하기 때문에 권력을 추구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고 오히려 비난하기도 하죠. 하지만 현실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한다면 권력을 추구해야 합니다. 05-23   

 병장 이승일 
 청하 / AI 가 어째서 검증 가능한지 설명해 주신다면, 검증가능성의 두 차이를 설명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영/ 이 글의 전반부는 '검증가능성' 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죄송하지만 수영씨의 리플은 그 부분을 읽지 않으신 것 같기에 따로 대답을 하기가 어렵군요. 그부분에 대한 전달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아요. (껭) 이 글은 바로 수영씨와 같은 생각에 대한 대답이었거든요. '광양자가설이 검증가능하다' 가 무슨 뜻인지를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어요. 

 기중 / 삶의 방향이 안달라진다면 그게 더 이상할겁니다.. 현실의 권력을 덧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종교가 있다면 아마 불교가 그러하겠죠. 05-23 * 

 상병 박수영 
 끙. 다시 읽어볼게요 05-23   

 병장 김청하 
 승일/ 아닛, 치사하게(...). 원하신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조만간 따로 글을 써보겠습니다만, 승일 씨가 원하시는게 정확히 어떤 글인지 모르겠군요. 

 단순히 AI의 검증에 대해서라면 리플로 짧게 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강AI의 검증은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튜링테스트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튜링테스트는 이전에 쓴대로, 잘 정의된 이론/논리적 기반 위에 서있는 테스트니까요. 약AI의 검증은 사실 지능의 정의에 달린 문제구요. 

AI 는 가능하다, 라는 명제가 어떻게 검증가능한지에 대해서라면 역시 AI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판단하면 되는 거겠죠. 하지만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현 시점에서' '납득할 수 있는' 검증을 원하는 것이니 지금 (죽어보거나 하지 않고서도) 얻을 수 있는 정보와 연구결과들을 이용해서 추론해야겠죠? 아마 승일 씨께서 원하시는 글은 이 글이리라 생각합니다. 05-23   

 병장 이승일 
America Chung /치사하다니 엉엉 
 제가 그것을 부탁한 이유는, 청하씨가 "AI 는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검증가능하다" 를 입증하시기 위해서 사용하실 '검증 가능성' 의 개념을 살펴보기 위해서에요. (치사하군요) 저는 우선 현재까지 발견되어있는 모든 과학적 지식을 참으로 간주 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지 않겠지만, 그런 것으로 문제를 삼으면 이야기하기가 힘들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AI 를 만들 수 있다' 는 주장이 어떻게 현재에 참인 것으로 검증 가능한지 보여주신다면, 청하씨가 생각하시는 '검증가능성' 을 제가 알 수 있을테고, 그것이 제가 말한 검증가능성과 어떻게 다른지 혹은 어떻게 같은지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편 '죽어보거나' 라는 말은 '사후세계가 없다' 는 말을 전제로 한 말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표면적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늬양스는 그렇다는 말이죠. 사후세계가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 죽음이 없다는 말이고 개개인으로 보자면 단지 '한 50년 쯤 뒤에' 검증 할 수 있다는 말이 될테니까요. 뭐 이건 그냥 사조기에요 05-23 * 

 병장 홍지택 
 글 잘봤습니다! 재미있게!! 

 좀 동떨어진 질문이겠지만... 
 어떤 합리적인 방법을 통해서가 아닌 그저 개인적인 믿음으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존재하는쪽? 그렇지 않은쪽? 05-25   

 병장 유내원 
' 임사체험 (상,하)',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 두 책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종교적인 접근이라면 '티벳 사자의 서' 란 책두요.. 05-28   

 병장 배진호 
 와우 언제 이러한 논의가 있었는지... 오랜뒤에나 보았군요.. 
 모두 흥미로운 글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