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적 시선으로 순수한 사랑 바라보기
순수한 사랑을 타락시켜 바라보기
-사회학 만세.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새하얀 그녀의 피부. 기다랗고 새까만 머리카락. 호수와 같이 맑고 깊은 커다란 눈. 그리고 그녀의 자상함. 따뜻함. 그녀의 포근함을.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순수하게, 보다 본질적으로 그녀를 사랑한다...나는 그런 그녀를 지켜주고 싶은 것이다"
라는 말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무릇 인간의 감정이란 순수한 것이니까. 피부의 상태나 헤어 스타일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순수한 사랑의 마음. 사랑은 바다를 가를 수 있고 사랑은 태산도 무너뜨리는 그런 것이니까. 그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새하얀 피부와 검은 생머리를 하고, 다정한 마음을 가진 여자를. 비꼬려는 의도는 전무하다. 실제로 그럴 수 있지 않은가. 우연히 정말로 사랑스러운-왜, 인지 설명할 수 없는 정말로 '운명적인 어떤 끌림'에 의하여-여자를 만났는데 그녀가 백옥 같은 피부에 칠흑 같은 생머리에 반달 같은 눈썹을 지니고, 어머니와 같은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세상은 의외로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다. 순수하게 '돈'이 좋아서, 결코 잘 먹고 잘 살려고 한다거나 하는 속된 이유가 아닌, 정말로 영적으로 '돈'이 좋아서 돈이 버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존재하는 세상이니까.
정말? 응. 정말이다. 국민학교 5학년때 우리 반이었던 어떤 친구는 정말로 돈을 좋아해서 지금 열심히 돈을 벌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모은 돈이 5천만원이 넘어간다. 하지만 그는 결코 돈을 쓰는 일이 없다. 그는 그저 돈의 축적을 순수하게 영적인 관점에서 즐기는 친구인지라. 뭐랄까, 일종의 마술적 리얼리즘이다(그러니까 그런 친구가 없다 내게는). 하지만 실제로, 당신이 순수하게 돈이 좋아서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 수도 있다. 돈의 향기가 좋을 수도 있고, 돈의 디자인이 마음에 꼭 들었을 수도 있다. 결코 다른 음흉한 목적들-이를테면, 잘 먹고 잘 살아보겠다거나 하는-없이 순수하게 돈이 좋아서 돈을 버는 사람일 수 있다. 물론 그런 경우는 극히 희박한 경우이겠지만,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렇게 우기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는 것이 보다 사회과학적인 분석이 되겠지만.
하지만 한번 순수하게 돈을 즐긴다고 우기는 경우를 초월하여, 실제로 순수하게 돈을 즐기는 그런 인간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그야말로 정말로 '순수하게' 돈을 좋아하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의 내면의 차원에서 그는 순수하게 돈을 즐기는 그런 인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개인으로 살아지지 않는다. 이것은 당위가 아니라 현상이다. 결국 그 인간도 사회 속의 삶을 영위하는 인간일 것이고, 사회 안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돈을 얻을 수 밖에 없다. 결국 사회 속에서 그가 '돈을 좋아한다'고 발화하고 '돈을 굉장히 많이 버는' 행위는 그가 실제로 순수하게 돈을 좋아하는 지, 아니면 무엇인가 돈 외의 음흉한 목적-이를테면, 그 돈으로 타워팰리스에서 BMW7을 굴리고 싶다거나 하는-을 이루기 위하여 돈을 구하는지에 상관 없이, 그저 '돈을 굉장히 많이 버는'행위가 될 수 밖에 없다. 그가 돈의 디자인을 좋아하든 에비앙 생수가 먹고 싶든지간에 기업을 차리고 환경을 파괴하고 원자력 발전소를 짓고 제3세계에 공장을 지어 아이들에게 하루 열한 시간 노동의 즐거움을 설파하고 한다면 어차피 그게 그거라는 거다. 개인의 의도성은 물론 중요한 무엇이지만, 사회적 관계 속에서 실천은 개인의 의도를 압도한다. 허원영(김강록이어도 좋다)의 논리는 중요한 무엇이지만, 대인적 관계 속에서 그의 외모는 논리를 압도한다거나 그런 것이다.
아, 잠깐. 물론 돈을 버는 행위가 나쁜 것이라서 이런 예시를 든 것은 아니다. 특정 경제적 체제에서 '돈을 굉장히 많이 버는 행위'가 수반하는 무수한 파괴가 떠오르기에 이런 예시를 든 것도 아니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사랑에 있어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어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감정은 순수하다. 과연? 순수한 내적인 감정에 사회과학의 칼날을 댈 수는 없지만(내적 감정에 칼을 댈 수 있는 존재는 딱 하나 있다. 결국 헤겔이 이겼다), 그 순수하고 지고한 감정은 결국 사회 내에서 '실천행위'로 발화될 수 밖에 없으며, 그러한 사회적 실천에는 얼마든 사회과학의 칼날을 들이대어 볼 수 있다. 내적으로 누구에게든 사랑의 감정을 품을 수 있다. 상대방이 어머니 같은 자애로운 여성이든지, '자유로운 영혼' 로자 룩셈부르크이든지, 키 작고 성격 더러운 사회과학도 이상희든지. 그리고 그러한 감정의 순수성에 대해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순수한 무엇일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은 무엇일지도 모른다. 마치 돈을 대하는 태도와 마찬가지로. 이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의도의 영역이란 순수와 비순수가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영역인 것이다.
당신은 '청순가련형 여성'을 순수하게 어떠한 불순한 의도도 없이 그냥 좋아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청순가련한 스타일이 좋아'라는 하는 발화 행위는 '청순가련한 여성성'을 추구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일익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개인이 선행을 하면 좋은 사회가 만들어 질 것입니다' 하는 근거 없는 휴머니즘적 선동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체계적인 주장이다. 일상의 틀을 얽어매는 것, 일상의 틀로 얽매어지는 것이 여성주의적-단지 여성주의의 차원이 아니라, 조금 세심한 눈으로 사회를 보는 사회학적 조류 전반의-차원에서 거대한 '사회'이자 '정치'인 것이니까. 그리고 당신이 되도록이면 착한 사람이 되고 싶고, 되도록 성평등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당신은 특정한 형태로 이미지화된 여성상에 대해 심도 있는 고민을 해 보아야 한다. '청순가련형' 여성상이 어떠한 사회적인 맥락 위에 세워진 여성상인지, 그리고 그러한 여성상이 어떤 사회적인 맥락들을 재생산하는지에 대해 말이다. 그것은 기존에 존재하던 '순종적인 여성상'의 세련된 업그레이드버전에 다름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그러한 여성을 원하는 것은/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여성에게 순종성을 강요하는 사회를 창조하는 것과 관련한' 확실하게 정치적인 문제이며, 논쟁의 지점이 될 수 있다. 취향을 가지고 논쟁할 수 없다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식으로 사회학주의자들에게 살해당했다. 당신의 취향이 기반하는 사회적 맥락은 결코 '순수'할 수 없는 것이다. 이쯤에서도 나는 다만 '청순가련한 여성'이 좋을 뿐이라면, 한 단계 낮은 수위의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당신은 왜 '청순가련형 여성'을 좋아하는 것인가. 당신의 그 순수한 의도 뒤에는, 당신이 감지하지 못하는 그러나 당신을 이루는 것이 분명한 이 사회가 악착같이 달라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여성이란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는 세상의 관념들이 당신을 당신도 모르게 조종하는 것이 아닌가. 어차피 당신도 이 거대한 사회의 일부이며, 사회와 상호작용하는-보통의 경우 사회에게 패배하는-그런 소심한 주체가 아닌가. 하지만 역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의도의 순수성'과 관련된 논쟁이 발생하기에, 이정도에서 정리하자. 내 이야기는 어떤 '순수한 의도의 사랑'이 있다고 전제하고 시작되었으니까. 물론 나는 그러한 전제에 굉장히 비관적이지만(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멸망했다고 천사의 목을 붙잡고' 울 필요는 없다. 어떤 의도성을 가진 사랑이건, 그러한 사랑의 행위와 실천이 멋진 무엇이면 된다는 이야기니까. 오해의 소지가 참 많은 이야기인데, 글 전체의 문맥에서 이 표현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라면소주오이를 무사히 먹은 후에 보론 같은 걸 써볼까 하는 생각이다. 또한 '청순가련'을 예로 들었는데, 예로 들 때에는'섹시누님'도 좋고 '고스로리'도 좋다. 이미지化된 모든 여성상이 예시로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고자 하는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그래. 소중한 사람을 나는 지켜주고 싶다. 남성보다 여성에게 확실히 적대적인 이 세계에서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지켜주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 하지만 일반적인 상황에서 '나는 내 여자를 지켜줄꺼야'라고 외치는 것은 역시 지금까지 한 이야기와 같은 맥락에서, 여성에 대한 억압을 재생산하는 적극적인 실천이 된다. 물론 이는 이것이 발화된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또한 이 발화 전후의 문맥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겠지만. 일반적인 상황에서 당신의 그 발화는 당신이 착한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당신이 어떠한 의도성을 가지고 있건간에 하나의 '억압을 위한 실천'인 것이다. 밤중에 집으로 돌아가는 여자친구를 바래다주며-실제적으로, 밤중의 길은 위험하니까-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정당성을 가질 수 있겠지만.
인간의 내심-내적인 마음-에 대해서, 내적인 의도에 대해서 우리는 쉽사리 재단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지점에 대하여 침묵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적인 의도와 상관 없이, 그러한 내적인 의도의 발현에 우리는 보다 심도있게 고민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내적인 의도'라는 것도 그렇게 순수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당신이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거나, 돈이든 커피든 콜라든 당신이 무엇인가를 좋아하는 행위의 내적인 의도는 보통, 순수한 것과는 조금 거리가 먼 복잡하고, 외부로부터의 영향으로 생성된 그러한 의도가 아닌가. 그러나 이렇게 이야기를 진행하게 되면 결국 복잡해진다. 인간 행위의 근원을 심리학이라든지 사회학으로 심급해가는 행위는 쉽사리 결론나기 힘들며, 우리에게는 이러한 근원에 대한 탐구보다 그 행위 자체가 가지는 현상적인 문제들이 더 중요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행위'에 포커싱하는 이런 글을 쓴 것이고. 아. 이런 설명투는 역시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만. 아무튼.
그래서 끝으로.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보자. 나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인지를. 그것의 근거에는 무엇이 존재하는를. 그리고 사랑의 행위가 사회 내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 낼 수 있는지를. 하. 나는 성공적으로 '순수한 사랑'을 실제 사랑의 위치로 타락시키게 되어 기쁘다. 이런 것을 이렇게 고민하는 것, 그것이 사회학이다. 순수함의 근거를 철저하게 찾아내는 것. 깨끗한 거울에 확대경을 들이대는 것. 그리고 그러한 행위로써 '거울에 균열이 있다'고 외치는 것이 아닌, 거울에도 세균이 살 수 있음을 밝혀내는 것. 그것이 사회학인 것이다. 라는 어처구니 없는 말도 한 마디 끼워붙이고 싶다. 중요한 것은, '행위'인 것이니까. (결론이 뭐 이래)
상병 박진우 (2006/03/29 16:19:04)
아~ 조회수 1의 달콤함이 이거였군요!
'키 작고 성격 더러운 사회과학도 이상희'가 누구죠???? 누굴까나..
제목처럼 순수한 사랑이 사회학적으로 타락되어가는군요.
특정한 형태로 이미지화된 여성상이 아닌 특정인물로 압축된 여성상에게도 이런 방법을 적용할수 있는지 궁금해지네요.
예를 들면 있는 그대로 사랑스러운 나의 러블리 최강희씨 라던가...
으하하하.
자. 강짱연대를 구축해봅시다!
병장 육이은 (2006/03/29 16:23:18)
상희씨는 참 훌륭한 분이더군요. 영준씨와 7년이나 사귀고. 아무튼 선리플 후감상
상병 조용준 (2006/03/29 16:35:47)
역시 영준님의 저 비비꼬기 미학.(웃음)
병장 김형진 (2006/03/29 16:44:21)
희애인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제가 상희씨를 만나자마자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
"저기, 혹시, 주영준씨한테 약점 잡힌거 있으세요?"
상희씨야말로 몸소 살신성인을 실천하고 계신 분 아니었던가요!
상병 송희석 (2006/03/29 16:44:36)
빙빙 꼬인 상태에서 둘쑥날쑥한 스크류바 글을 읽는 느낌이네요!
상병 박진우 (2006/03/29 16:47:36)
//이은,형진//
아닛!!!!영준님에게 7년차 여자친구가 있을줄이야!
이건 세컨드 임팩트 이후로 엄청난 충격인걸.
병장 육이은 (2006/03/29 16:48:13)
형진 // 그 보다, 상천씨와 제가 "어떻게 영준씨와 사귀게 되었나요?"라고 묻자, 순간 슬픈 얼굴로 먼산을 바라보던 그 분의 모습을 보셨어야 했는데 말이지요...
... 는 농이구요. 아무튼 두분, 굉장히 잘 어울리시더군요. 오래오래 만나시길 바라겠습니다.
병장 김형진 (2006/03/29 16:54:02)
이은 // 저도 오래오래 만나길 바라고 있어요. 하지만 가녀린 상희씨에게 주영준은 너무 무거운 짐일까나.
앞으로 상희씨한테 잘해줘야겠어요. 다음에 만나면 크리스피 크림이라도 사줘야지, 정말.
병장 김강록 (2006/03/29 16:55:09)
지금 준응군에만 살짝 귀뜸해준 모종의 음모를 물밑으로 꾸미고 있는데, 제목을 보고 영준씨가 선수를 친 게 아닌가 걱정했었습니다. 휴, 헌데 그렇진 않군요. 본인 역시 사회과학도의 입장에서 그 문제를 한번 짚어보리다. 곧.
병장 육이은 (2006/03/29 16:56:02)
형진 // "흑곤돌에게 과연 가녀린 상희씨가 어울리는가"의 문제를 두고, 야수와 미녀를 떠올리는 것이야 말로, 영준씨가 이 글에서 비판하고 타락시키고 있는 그러한 주제겠지요. 아무튼 상희씨가, 내년에 제가 한국에 돌아오면 여자를 소개 시켜줄 것 같은데요.
병장 박준응 (2006/03/29 16:58:47)
강록 /
도대체 언제쯤 볼 수 있는 거예요?(추궁)
너무 뜸하신 거 아녜요?(笑)
병장 김계성 (2006/03/29 16:58:54)
결국, 제목처럼 순수한 사랑을 타락시켜 바라 보신 것 뿐이군요..(씁슬)
병장 김형진 (2006/03/29 19:01:48)
이은 // 그러게요, 출국하기전에 이은씨를 한 번 볼수나 있을까요 전.
진우 // 그야말로 책마을 임팩트.
상병 최태욱 (2006/03/29 23:49:42)
영준님/
글 잘 읽었습니다. 사회과학도로서의 자부심 같은 게 느껴지네요.
전역해서 복학하면 저도 사회과학쪽으로 좀 배워볼까 생각 중이었는데,
이런 게 사회과학이구나, 쉽게 알 수 있게 해준 글 같습니다.
이 글의 의도-어떤 ‘행위’에 대해서 사회적 의미를 돌이켜보자-는 충분히 수긍이가고,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 예로써 사랑이라는 감정을 사용하신 건 적절치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사랑이라는 건 사회과학적으로 분석되어야 되는 게 아니라, 심리학적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야기가 되어야 되는 것 아닌가요? 개인에 따라서 사랑이라고 느끼는 감정은 전부 제 각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준님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제가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공감이가거나 비슷한 부분도 있을지 모르지만요. 이런 개인적인 사랑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다는 것에 저는 의문이 듭니다. 물론 영준님 글의 요지는 사랑의 ‘실천행위’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이란 것을 알고 있으나(이 부분은 충분히 수긍이 갑니다) 영준님이 이 글에서 표현하신 사랑이라는 건 어떤 이상형(취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청순가련형’ ‘섹시누님’ 등으로 표현되는 이상형(취향) 말이죠. ‘청순가련형’이라는 이상형(취향)의 이미지가 좋다는 건 영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어떤 ‘사회적인 맥락’에서 분석될 수 있겠지만, 실제 사랑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실제 사랑은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진우님의 말씀을 빌리자면-‘특정인물로 압축된’ 이미지(여성상)가 실제의 사랑이라는 것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러니깐 제가 생각하기에 영준님은 이 글에서 사랑이 아닌 이상형(취향)을 예시로 글을 전개 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준님 이 글의 말미에 이야기 하신 ‘나는 성공적으로 순수한 사랑을 실제 사랑의 위치로 타락시키게 되어 기쁘다’는 말은 제가 보기엔, ‘순수한 사랑’이 아닌 ‘이상형(취향)’을 실제의 위치로 볼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말로 해석됩니다. 제 말이 틀렸는지요.
그리고 영준님은 사랑의 ‘순수한 내적인 감정에 사회과학의 칼날을 댈 수는 없’다고 말하셨습니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미 글에서 ‘사랑의 내적 감정’에 대해 칼날을 대셨다는 생각이 드는데 제가 오해한 것인지요. ‘그리고 사실 내적인 의도라는 것도 그렇게 순수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라는 말은 신이 아닌 이상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그런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사랑에 대한 개인의 ‘내적의도’를 영준님의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하신 말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리고 개인이 ‘돈’과 ‘커피’, ‘콜라’ 등의 기호를 좋아하는 것과 한 사람을 사랑으로서 좋아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 아닙니까? 돈이나 커피, 콜라 같은 것들은 사회 혹은 기업의 필요(이익)에 의해서 생겨난 도구나 수단이므로 당연히 그런 기호를 선호하는 것은 어떤 사회적인 맥락에 의해 파악할 수 있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디 사회의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요?
그리고 이건 다른 필진님들께 말씀 드리는 건데
지금까지의 리플은 글에 대한 이야기 보다는 정말 필진님들의 친분에 의한 개인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군요. 요즘 이런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에도 정말 썩 좋아 보이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칼럼의 답글에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루니, 일반회원들이 접근하기 어려워하고, 주류네 비주류네 하고, 필진이 이래서 싫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거라고 생각이드네요. 당연히 필진님들이 이런 걸 일부로 유도하는 건 아니겠지만, 일반회원 입장에서는, 혹은 필진님들과 친분이 없는 회원의 입장에서는 오해의 소지가 충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길었네요. 이만 쓸께요.
하사 윤석호 (2006/03/30 00:50:20)
태욱/
좋은 지적입니다. 한사람의 순수하디 순수한 감정을 사회학적 매스에 거리낌없이 노출시키다니.(쯧쯧) 영준님의 글에 동의를 못하겠수다!!!! 라구 말한다면 속이 편하겠지만, 아무래도 칼럼에 대한 댓글이니까 좀더 이성적으로 써야겠죠. (둘째문장부터는 영준씨에 대한 제 속마음입니다. 태욱씨의 말을 비꼰의도는 없었으니 이해해주세요.)
-영준님. (이렇게 말하려니까 상당히 어색하고 거슬리긴 하다만, 마을이니 어쨌든 존댓말!) 영준님이 쓰고자 했던 말을 간략히 줄이자면, "남자가 여자를 사랑한다 가정했을때, 그 이유가 100%내면적일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그 이유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해 놓았는데, 여기저기 들리고 젖가락에 휘감아 뱅뱅 돌리긴 했지만, 역시 "사회에서 자유로울수 없는 지극히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가지는 시각은 -그것이 자기자신은 너무나 주관적이라 생각하여도, 객관적으로 볼때- 개인적일수 없다."는게 아닐까 싶네요. 거기에 대한 근거는 "시각이란 인간의 경험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고, 경험이라는 것은 사회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요. 아니라면 어쩔수 없지만.
이걸 '전반적인 사랑에 대한 사회학적 승리'라고 볼 수는 없어요. 보편적 사람이 특정인물에 대하여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지게 되는데 필요한 요소중 하나인 '인식과 느낌'에 대해서만 서술한 그 무엇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이러한 부분이 사랑이란 감정이 형성되는데에 주로 관여한다고는 볼 수 있지만, 아닌 경우도 상당히 많잔아요. 영준님도 글에서 회화된 "키 작고 성격 더러운 사회과학도 이상희"도 텍스트로만 살핀다면(영준씨 애인분은 사회적으로 아주 훌륭히 통용될 외모를 갖추고 계십니다. 이 글이 실례가 되지 않았으면 해요. 그냥 예시로만.) 사회적인 기준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인물인데, 영준씨는 사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사랑이라는 전체적인 면에서의 승리를 거두었다 하기엔 아직 이른게 아닌가 싶어요. 여기까지 태욱씨가 말한것의 첫번 문장에 대한 재해석이자 심적동의 였습니다.
-하지만 태욱씨도 잘못 생각하신게 있는게 두번째 발화의 경우, 기호나 내적의도의 경우 , 사회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영준씨의 관점이 이상치 않다는것 이에요. 기호는 개인적 현상처럼 보이지만 사회적 현상이 맞습니다. 윗글의 7번째 문단을 발화의도에 맞추어 다시 해석해 보시면 될거 같아서 길게 글을 쓰지 않겠어요. 영준씨의 글은 해석의 난감성이 있기에 한편으론 이런 주장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생각됩니다. 또한 '내적의도'의 경우 우선 단어적으로 살펴본다면, '의도'라는 단어가 가지는 '순수하지 못함'의 뜻을 이해해 주세요. 의도라는 것은 '어떠한 뜻을 이루기 위한'이라는 뉘앙스가 숨어 있는거 같아요. 또한 위에서 말했듯이 '사람이 살아가는게 사회이고, 경험하는 것이 사회인 이상, 그 사람의 사상과 사유와 개념이 속한 사회에서 자유로울순 없다' 라는 면에서 내적의도또한 이해해 주시면 좋을것 같아요.
-태욱님의 3번째 발화의 경우 책마을 필진분들도 인간이고 감정을 가지고 있고, 서로의 친분을 확인하기 좋아하고, 서로를 놀려먹기 좋아하는 지극히 사회적인 인간임을 감안할때, 그렇게 나쁘게만 보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실 마을의 상황이 이러하고, 태욱님도 그 쪽과 관련해서 깊은 성찰을 하셨을 시기이니, 그렇게 생각하신게 아닌가 싶네요.
영준/ 잘 읽었어요. 하지만 사랑에 대해서 좀더 신중히 접근해 줬다면 더 좋은 글이 되었을걸..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사랑은 '빠져듬'의 제 1시기와 '이해함'의 제 2시기, '맞춰감'의 제 3시기로 이루어지고 3시기 막바지에 이루어서야 비로서 '사랑'이라는 개념이 형성되는게 아닐까 생각되요. 나머지 지켜가는건 사랑이 아니라 '정'에 의한 것이니 논외로 하는게 좋겠구요. 영준님의 시각은 1시기쪽에만 맞추어 진게 아닌가 생각되요. 반한다고 사랑이 아니죠. 사랑은 서로의 사상과 개념에 대한 공유와 거기에 맞춘 감정의 쌍방향성, 평형성을 동시에 갖추고도 여러가지 디테일한 상황들을 잘 이루어야 이루어 진다고 생각해요. 그전까지는 '사랑하는것'이 아니라 다만, '좋아하는것'이라 생각되네요. 사랑을 남발하는 세상이 가슴아픈 저입니다.(물론 영준씨는 7년간 한사람만을 사랑해온 사랑에 대한 글을 쓸 자격이 충분히 있는 사람입니다!!!!)
병장 김동환 (2006/03/30 08:58:40)
잘 읽었어요.
저는 아직 사랑이란 소재가 청소년들이 살이 터질때까지 콜라를 사먹는 거나 20대 아가씨들이 미백화장품에 목을 매는 것과는 구분될 필요가 좀 있는 소재라는 생각의 로맨티스트 입니다만.(푸g)
병장 김대현 (2006/03/30 08:59:26)
태욱님 / 사랑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에도 사회과학의 칼날은 대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것이 남이 믿고 있는 것들을 허물어뜨리는 악취미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영준씨가 얘기하는 듯 하구요. 순수한 의도가 꼭 행동의 "순수함"으로 옮아가진 못한다는 것, 마치 사랑이 마음만 가지고는 안되는 것처럼, 무심결에 진심인듯 나오는 내 행동이 "알고 보니" 그닥 적절치 못한, 상황에 안맞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어떤 것일수도 있다는 의심을 항상 가져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검증하는 데 있어 사회과학적인 시선이 큰 도움이 되는 거라 생각하구요.
이걸 '사랑'의 문법으로 풀자면, 제게도 사랑은 소중하기에, 그 사랑이 다른 것으로, 저도 모르는 새에 더럽혀지는 것이 싫을 따름입니다. 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겠죠.
그리고 태욱님 말대로, 개인적인 친분의 과시가 다른 사람의 접근을 과도하게 막는 사태는 가급적 지양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지적 해주셨네요. 앞으로 저도 주의하겠습니다.
상병 송희석 (2006/03/30 09:06:24)
대현/ 개인적으로는 조금 반대견해가 있어요. 어떠한 것이든 사회과학적인 해석은 가능하지만, 결국 그것은 사회과학 한계적인 의심밖에는 할수 없는것이죠! 결국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 남이 생각하는 '사랑'은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결국 사회과학적 시선으로 바라볼수밖에 없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가끔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는것을 왜? 사회과학적인 시선으로만 봐야되는가? 다른시선으로는 볼수 없는가? 라는 의문이 저는 들기 때문이랍니다.
아! 그리고 태욱님 의견에 저는 전적으로 맞다고 판단됩니다. 좋은지적이십니다. 저도 주의하겠습니다.
병장 김대현 (2006/03/30 09:16:28)
그래서 제가 "문법" 얘기를 한 겁니다. 사회과학적 시선이 전부가 아니듯, 사랑의 시선(이란 말이 합당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도 전부가 아니라는 거겠구요. 다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고서도 고르게 되는 하나의 문법 같은 건 있을지 모르지요.
그리고 사회과학 한계적 의심이 진국에 다다르면 그도 좋을 일입니다. 어떤 사람의 사랑이 진국에 다다르면 그 역시 어떻게 건드릴 수 없는 것처럼요. 더구나 이 글에서 영준씨가 사회과학적 환원주의에 빠져있다는 흔적은 보이지 않기에, 저는 이렇게밖엔 달리 말씀드릴 수가 없는 거구요.
병장 주영준 (2006/03/30 09:17:48)
사회과학적 해석이 옳다, 라기보다는 '왜 사랑에는 사회과학적 해석을 가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끄적거린 글입니다. 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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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과 관련하여, 보다 '낮은 수위' 에서 보다 '래디컬'한 글을 한 발(내지는 두 발) 장전중에 있습니다. 이 글은 아마 그 글의 2부격이 될 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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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저도 로맨티스트.
상병 송희석 (2006/03/30 09:18:00)
대현/음 저하고 다른 생각을 하고있다고 밖에 달리 말씀드릴수는 없네요. 대현님 글 잘 읽었습니다.
병장 김대현 (2006/03/30 09:23:51)
희석/앞으로 그 다름에 대해 차근히 나눠보기를 기대합니다.
병장 김강록 (2006/03/30 09:34:46)
태욱 / 옳은 지적이십니다. 물론 너무 딱딱해질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의 진지함은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오가는 것이 결코 도를 넘어서서 주를 이루어서는 안되겠죠. 저도 주의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병 문윤기 (2006/03/30 14:22:07)
원래 타락한 모습이었던 사랑을 인문학이 순수한 모습으로 감쌌는지도 모르죠
상병 김형훈 (2006/04/13 11:47:34)
어느쪽이 순수한 것인가?
돈을 영적으로 좋아하는것?
잘먹고 잘살아 보겠다는 것?
말씀하신것처럼 세상의 의외로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그 어떤것이 가장 순수하다고 말할수 없다는게 본인의 생각.
영적으로 돈을 좋아 하는것이나..
지독히도 호환성이 죽을만큼 완벽하다는 장점을 통해
잘먹고 잘살자는 것이나..
대체 머가 더 순수하다는건지..
상병 김형훈 (2006/04/13 11:48:42)
함부로 정의를 내리기엔 '세상은 의외로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직접 작성하셨지요 아마
상병 김형훈 (2006/04/13 11:54:02)
하지만 사랑이란 주제로써 사람을 있는그대로 바라보고 평가(?) 한다는 취재는
상당히 저의 입맛에 맛는 주제 인거 같군요..
어떤식으로 고찰을 들어내고 그에대해 한치의 티도 허용하지 않을듯한
엮어 내림은 살짝 머리가 아프게 하기도 하지만
딱딱하면서도 부드러운 철학이란 주제(과연?)의 커튼에 둘러 쌓여있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밀폐된방에 한줄기 먼지낀 햇쌀이 비추는 듯한 느낌입니다.
약간 머리는 아프지만
병장 주영준 (2006/04/14 11:23:33)
대체 머가 더 순수하다는건지.. 에 대한 제 글의 결론은 '순수하다거나 그렇지 않음이 사랑의 핵심적인 무엇이 될 수 없다' 비슷한 것일 겁니다(물론 이 것이 이 글 전체의 결론은 아닙니다). 오래(?)된 글에 이파리 달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병장 정치훈 (2006/04/30 11:24:18)
자신의 취향은 무의식중에 사회의 영향을 받는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자신의 의도와 상관 없이 사회는 자신의 행동에 의해 어떠한 영향을 받는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둘다? 아니면 제가 전혀 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체 헛소리를?
병장 주영준 (2006/04/30 15:20:59)
흐음. 원체 해체적 텍스트(를 빙자한 탈맥락적이고 조잡하며 단일 주제에 대한 심층적 접근보다는 다양한 주제를 적당한 지점에서 시작해서 적당한 지점에서 마음대로 끊어버리는, 의도적으로 그랬다기보다는 글솜씨와 사고가 편협해서 할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글)을 지향하는지라, 글의 의미를 묻는 이파리가 많이 달리는군요. 특별한 '단일한 의미'는 없어요 제 글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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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훈 씨의 말에 답변하자면, 일단 자신의 취향은 무의식중에 사회의 영향을 받습니다. 개인을 초월하는 어떠한 사회적 힘을 전제하는 것은 사회학의 기본적인 전제죠. (만일 사람이 모여 있는데 그게 그야말로 그냥 모여있고, 그러한 개인들에게 그러한 '모여 있음'이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면-사회학 용어로 '사회적 실체'가 부재한다면-사회학은 전혀 쓸모없는 학문이죠. 그러나 그러한 사회적인 실체가 분명히 존재하기에 그것을 전제하고 그에 대한 분석을 하는 것이 아마 가장 정통적인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정의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일단 치훈 씨의 첫 질문에 대한 답은 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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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의 질문에 대한 대답도 네. 입니다. 이거 그냥 세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에 네. 라고 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치훈 씨 말대로 자신의 의도와 상관 없이 자신의 행동은 당연히 사회에 영향을 끼칩니다. 이 부분은 어느 출판사의 누가 쓴 사회학 입문서일 지라도 1장에 반드시 나오는 그런 내용입니다. 흐. 제 글을 읽고 그런 부분까지 읽어내신 건, 글 쓴 이로서 굉장히 고마운 일입니다. 아무튼. 그리고 하나 더 중요하게 덧붙이고 싶은 것은 <자신의 의도와 상관 없이, 자신의 행동은 '사회적 의미'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영향을 받는 것도 분명 중요하고 사회학에서 굉장히 핵심적인 전제 중 하나이지만, 이 글에서 제가 보다 더 초점화하고 싶었떤 부분은 그러한 행동이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사랑의 실천 행위-이를테면 기념일에 선물을 챙겨 준다거나 하는 것-역시 사회적으로 그것은 현대 소비자본주의의 산물이라거나 하는 식의 '사회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거죠. 누구를 어떻게 왜 사랑하는 가 하는 것은 그것이 사회에 영향을 줌과 동시에 사회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의미를 만드는 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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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핵심은, 헛소리가 아니라는 점.
병장 정치훈 (2006/05/01 03:46:29)
갑자기 죄송해지네요. 제 독해력이 딸려서 질문을 한 것인데 주병장님 본인의 글솜씨에 까지 고민이 미치게 한 점 사과드립니다. 책마을 분들의 사고 수준이 워낙 높아서 제 의견을 피력할 만한 수준은 못되고 궁금한 점이 생기면 질문하는 것이니 개의치 마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