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독서후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코맥 맥카시, <로드>를 읽고  
상병 박재현   2009-07-02 12:48:35, 조회: 264, 추천:0 

  읽는 내내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들은 왜 걷는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다 타버린 잿더미밖에 남지 않은 삶을 연장해나가도록 하는 것인가. 도통 이해가 닿지 않았다. 차라리 도중에 그들이 삶을 포기하고 이야기를 중단하길, 그리하여 내 눈앞에 펼쳐진 참상을 걷어 내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들은 묵직한 문장들을 등에 짊어지고 내 이해의 영역 바깥으로 걷고 또 걸었다. 그 행보를 좇는 나라는 독자는 불가해의 늪에서 진창이 된 채 행간의 깊은 곳으로 하릴없이 내려들어갔다.

  <로드>는 이렇다 할 사건전개가 없다. 전 지구적 재앙으로 인하여 폐허가 된 세계와 그곳에 덩그러니 남겨진 남자와 아들. 그들은 뚜렷한 목적지 없이 다만 몰려오는 추위를 피해 남쪽으로 향한다. 그들은 늘 죽음의 조짐에 둘러싸여있다. 인간을 사냥감으로 간주하는 부랑자들부터 예기치 못한 자연재해와 추위, 질병, 아사餓死의 위기까지. 그에 비해 그들에게 찾아오는 희망은 버려진 과일통조림 따위의 미약하기 그지없는 것들이다. 이러한 일련의 위기와 희망의 반복이 <로드>의 서사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복은 내용상의 전개뿐만 아니라 소설의 전반을 아우른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잿빛 세계에 대한 묘사가 그렇다. 묘사는 반복되지만 이곳에서 저곳으로, 원거리에서 근거리로 초점을 옮겨가며 그 속에 담긴 내밀한 의미들을 건져 올린다. 묘사가 반복되고 중첩됨에 따라 빈약한 상상이 아닌 오감으로 감각하는 입체적인 세계 속에 독자를 발 딛게 한다. 대화가 이뤄지는 방식도 그러하다.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남자와 아들의 대화는, 아들이 남자에게 묻고 남자가 답하는 식으로 반복된다. 대화의 내용 또한 삶과 죽음, 자신들 행위의 정당성에 대한 화두가 집요하게 계속된다. 소설은 이러한 반복을 통해, 남자의 과거에 등장하는 여자의 말처럼 ‘이야기할 게 남지 않은’ 땅을 천천히 파내려간다. 그리하여 깊은 곳으로부터 끌어올린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아주 오래된 물음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물음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오늘을 살아가게끔 하는 동력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의식주와 같은 물질적 수단부터 살아가면서 겪는 크고 작은 보람이 이에 속할 것이다. 또 하나는 삶의 목표가 되는 지향에 대한 물음이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해석을 통해 볼 때 남자와 아들이 처한 상황은 절망적이다. 현재를 버티게 할 보람도 희박하며 기대하고 지향할 미래도 어둡다. 그들이 ‘사람’으로서 산다는 것은 가느다란 줄 위에서 힘겹게 균형을 잡는 일이나 다름없다. 그나마 간신히 버틸 가느다란 줄이라도 있는 것은 그들이 끝끝내 믿음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믿음은 어디서 오는가? 여기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다시금 증명된다. 남자와 아들은 ‘나’가 있고 ‘타인’이 존재하는 최소단위의 사회를 이루고 있다. 이 최소단위의 사회는 한 번의 다툼으로 해체될 수 있을 만큼 위태롭다. 소설에서도 때때로 이런 일이 등장한다. 여정의 주도권을 지닌 남자가 아들의 뜻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하고, 아들은 울음과 침묵으로 반항한다. 그러나 그들은 금세 서로 이해하고 화해한다. 그들의 사회는 부자父子라는 특수한 관계로 맺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핏줄로 얽힌 결속은 남자에게는 아들에 대한 책임감을 부여하고 아들에게는 남자에 대한 믿음을 부여한다. 물론 가족이라는 울타리만으로 그들의 결속을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은 그 작고 단단한 울타리 안에서 끊임없이 소통한다. 소통은 앞에서 짚은 ‘아들이 묻고 남자가 답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일견 아들에 대한 남자의 일방적 훈육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화를 들여다보면 그들의 감화가 쌍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지금도 좋은 사람들인가요?” “그래. 우린 지금도 좋은 사람들이야.” “그리고 앞으로도요.” “그래 앞으로도.” 

대답을 하는 쪽은 남자이지만, 사실 대답은 아들의 입에서 이미 나왔다. 남자는 확신을 줄 뿐이다. 이 대화는 마치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사고작용을 연상케 한다. 아들의 질문이 번뜩이는 깨달음이라면 남자의 대답은 깨달음을 의심하고 이해하여 내면화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를 통해 서로는 이 황무지에 자신을 제외하고도 ‘사람’이라 부를 만한 존재가 남아있음을, 그 존재가 바로 내 눈앞에서 함께하는 자임을 인식한다. 인식은 일체감을 획득하고, 일체감은 존중과 사랑으로 이어진다. 

  그 상호간의 연대를 기반으로 공통의 신념, 즉 이데올로기가 탄생한다. 이들의 유일한 이데올로기는 위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좋은 사람’으로서의 신념이다. 이데올로기라고 하기엔 너무 모호한 신념일지 모르겠지만 모든 이데올로기의 근원에 닿아있는 신념이기도 하다. 모든 사상의 목표는 결국 좋은 사람들이 꾸려나가는 평화로운 세계이지 않은가. 인류와 사상이 궤멸에 이른 세계에서 ‘좋은 사람’에 대한 믿음은 어떤 희망에라도 옮아붙을 불씨가 된다. 그들이 스스로를 ‘불을 운반하는 사람’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그들은 자기내면의 온기를 보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운반’하려 한다. 세계를 구원해야한다는 사명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사명의식은 소설의 후반부, 아들의 흐느낌에 섞여 또렷하게 전달된다. 

“네가 모든 일을 걱정해야 하는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굴지 마.” 소년이 뭐라고 말을 했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에 젖은 더러운 얼굴. “그렇다고요. 제가 그런 존재라고요.”

<로드>가 감히 성서와 비견된다는 평은 이 지점에서 기인한다. 인류를 위해 스스로를 짐 지운 인간이 밑바닥에서부터 퍼트리는 구원. 부처와 예수도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소설은 구원을 장담하지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 남자는 번져나가는 죽음을 이기지 못하고 생을 끝맺는다. 남자는 구원을 일으키지 못한다. 비록 죽음에 이기지 못했어도 굴복하지는 않았다는 점. 자신 내면의 온기를 아들에게 전달했다는 점. 남자가 믿음을 저버리지 않음으로 실현한 것은 이 두 가지에 불과하다. 하지만 아들은 남자가 살아있던 시간과 순간마다 타올랐던 불씨를 고스란히 기억한다. 그러므로 남자의 죽음은 유의미하다. 

  남자가 죽고 난 뒤 아들은 어느 낯선 가정으로 편입된다. 거기서 소설은 끝난다. 구원은 없다. 그럼에도 그 가능성만은 선명하게 남는다. 

“신의 숨이 그의 숨이고 그 숨은 세세토록 사람에서 사람에게로 건네진다고.” 

이 구절은 새로운 가정이 어떤 정신을 공유하는 사회인지 말해주는 힌트임과 동시에 이 소설에서 가장 집약적인 문장이다. 나아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완벽한 답이다. 사람과 신이 한 몸으로 숨을 쉰다는 말은 곧 사람의 속에 신이 잠들어있으며 사람이 신의 권능을 실현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숨은 세세토록 사람에서 사람에게로 건네진다’는 말은 ‘불을 운반하는’ 것과 상통한다. 행여 먼 미래에도 세계가 폐허와 같은 상태를 면치 못한다 해도 희망을 간직하는 사람들은 존재할 것이며, 사람이 존재하는 한 가능성은 영원히 이어질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심사는 슬픔만으로 채워져 있지 않다. 그 땅에서 벌어진 절망을 기억하되 그 땅에서 펼쳐질 희망 또한 짐작하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남자와 아들은 서로가 없었더라면 오늘을 살아가지 못했을 것이며, 그들이 지친 발걸음을 놓아 가려했던 곳은 사람이 마음의 불을 되찾은 훗날이었다. 기나긴 여정 끝에 기다리고 있는 답은, 결국 사람이다. <로드>의 메시지는 이미 수백수천 년 전에 나온 가르침을 답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소설의 울림이 유효한 것은 우리가 너무 당연한 것을 잊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당연하게 여긴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로드>의 세계를 겪고 나면 번쩍 정신이 드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왔는가, 하고. 그 순간을 깊게 새겨야 한다. 우리가 사람이라는 단어를 빌려 쓰는 존재인 이상, 우리는 그 단어에 깃든 의지를 실현할 의무가 있다.    


-------------

전 끔찍하게 무식해요
그래서 쥐꼬리만큼 아는 걸로 밀어붙이는 것 말곤 못하겠어요
그렇게 읽고 그렇게 써요
이건 공本에서 주최하는 독후감공모에 제출한 건데
기한이 지나도록 결과가 안 나오네요
사람 애타게시리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8-24
16:08:35 



상병 진수유 
  저도 최근에 읽었는데, 잘 정리해 주신 것 같아요. 잘 읽었어요. 2009-07-02
13:05:51
  



상병 김형조 
  좋네요. 제가 읽고 느낀 감상과도 유사해서 공감도 가고요. 
[로드]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처럼 
절망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역설적으로 그 곳에서 희망의 실마리를 끌어올리는 작품들이 전 좋습니다. 맥카시의 명성은 역시 명불허전인 것 같아요. 2009-07-02
13:11:48
  



상병 김정민 
  캬, 진짜 좋습니다. 2009-07-02
13:56:40
  



상병 윤정기 
  아, 왠지 굇수 주영준씨의 글, '들불을 내기 위해 촛불을 지키는 사람이고자(맞나?)'의 이미지가 떠오르네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가 그토록 침잠던 질문이자, 가장 인간 본연의 질문이기도 하지요. 잘 읽었습니다. <로드>는 읽어보진 못했지만, 한번쯤 보고싶어지네요. 2009-07-02
15:13:50
  



병장 차종기 
  좋네요, 가지로. 

저도 로드를 보면서 그 음울한 세계의 색깔이나, 
희망이 보이지 않는 끝 없는 길 같은 것 때문에 
읽고 나서도 찝찝했는데. 이 글을 읽으니,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그들의 희망이 통조림이었다니. 2009-07-02
15:16:11
  



상병 류선웅 
  좋은데요? 저도 가지로. 

2주전엔가 읽었는데 참.. 음 뭐라할까 
회색이다 못해 너무 절망적인 상황이 참 암울했었는데 
'폐허' 있죠? The Ruins 이거랑 느낌이 비슷하더라구요 

여튼 이렇게 정리하신게 정말 되단하신듯 2009-07-02
17:06:41
  



상병 고재형 
  몇번의 희망과 수없이 계속되는 절망, 
울지도 못하겠고 웃지도, 화내지도, 욕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책이었습니다. 

1주일 내 비가 산발적으로 내리고 흐린날 후배와 돌아가면서 
봤는데 둘이 창밖을 내다보며 아- 하고 한숨만 쉬었던 기억만 남네요. 2009-07-03
00:26:21
  



상병 고재형 
  아 그리고 가지로 + 1 2009-07-03
00:26:41
  



병장 차종기 
  금세 와버리는 구나, 역시나, 무서운 책마을......... 2009-07-09
08:31:23
  



상병 우한솔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저도 이렇게 정리할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