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9-03 10:59:30, 조회: 224, 추천:0 

  사실 이 글은 라캉에 대한 독서후기를 쓰기 한 참 전에, 히로키에 대한 독서후기로 준비되었다가, 일종의 서문에만 그치고 그만 둔 글입니다. 아즈마 히로키가 누군지, 그가 책을 통해 무엇을 썼는지에 대해서는 제가 과거에 쓴 <한 줌의 도덕, 동물화하는 책마을>(책가지로 옮겨졌군요, 지금 보니)을 참조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 글을 보면 마치 나를 두고 쓰여진 글인가라면 반문하실 분이 몇몇 계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책마을에서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걸 미리 밝혀두고 싶습니다. 저는 오히려 더 넓은 의미에서의 비평적 관행, 혹은 비평적 자의식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런 자의식을 극복해야한다는 취지로 글을 썼습니다. 

                                                          *  *  *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히로키만의 '오타쿠론'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이 책에 서술된 바의 독특함이 있다면, 그것은 오타쿠에 대한 '철학적' 혹은 보기 드문 고유한 '비평적-비판적' 시점이 개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독특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어떤 대상의 고유함을 해명할 때, 그리고 그것이 k히나 어떤 저널리즘적 관심사  속에 흔히 놓이곤 할 때, 오히려 우리가 더더욱 그러한 대상에 대한 '비평적' 태도를 취하기 힘들기 때문은 아닐까? 이것은 통상적인 '대중문화 비평'에 대한 세간의 감각에 비추어볼 때 상당히 이상하게 들릴 법도 하다.

  그런데 사실 이 점은 대중문화를 '비평'하겠다는 야심가(이것은 실로 대단한 '야심'이 아닐 수 없다)들 가운데서도, 그리고 그것을 소비하는 독자들 가운데서도 철저히 몰인식되어 있다. 이러한 비평가들은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분석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거기에 대한 사회학적-문화론적 고찰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대표적인 게, GQ나 에스콰이어와 같은 잡지에 실리곤 하는 소녀 댄스그룹과 팬덤현상에 대한 사뭇 진지한 고찰들이다. 예를 들어서 한 평자는 어떤 소녀그룹의 멤버들에 세간의 호불호가 어떤 세대론적 함의를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애교삼아, 말미에 사족으로 필자 자신의 제시카에 대한 애정을 피력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비평이라면, 사실 조금이라도 냉소적인 자의식이 있는 소비자라면 되는대로 지어낼 수 있는 흔한 것이라서, 더 이상 비평이라고 할 수조차 없지만, 어쨌든 이것들은 '비평'이라는 레테르를 달고 팔리면 '저작권'의 보호를 받는다. 우리는 이것을 부도덕의 극치라고 말해볼 수 있을 텐데, 그들이 수행하곤 하는 것은 실로 비평이라기보다는, 혹은 정확히 말해서 하나의 담론이나 사유라기보다는, 상품 카탈로그로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반-자본주의적 예리함을 가지고 수행되는 문화비평의 전통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러한 문화비평에 수반되는 '비판적 자의식'이 오늘날의 대중문화 비평을 자처하는 상품카탈로그의 바로 그 항목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아도르노의 흉내를 낼 것도 아니며, 또한 우리는 하나의 아포리아를 발명했다고 의기양양해할 것이 아니라, 정확히 아즈마 히로키의 비평이 어째서, 대중문화의 주요요소인 '오타쿠 문화'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상이 근대문학이나 근대미술에 관한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비평'이며 속류 저널리즘과 무관한 비평적 관점이 여전히 살아 있는지에 대해 살펴봐야할 것이다. 사실 정작 근대문학이나 근대미술에 대한 비평이 '불가능해지고'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진지 오랜 이 시점에서, 예기치 못한 영역에서 수행된 이러한 '비평'이야말로 놀라운 것이다. 히로키의 글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놀라야만 하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동시대의 작품들을 거론하며 그의 오타쿠 취향을 드러내는지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의가 오타쿠에 대한 하나의 정확한 비평이 될 수 있는지, 혹은 그것에 대한 비평적-비판적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사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 출판된 지 상당히 오래된(대중문화의 시간감각으로 말하자면) 이 시점에서야말로 위와 같은 놀라움이 다시 제기되기에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가 거론했던 오타쿠라는 하나의 대상이 결코 세대론적인 혹은 저널리즘적인 현상에 국한된 게 아니라는 것이, 바로 이러한 시차를 경유해서 더욱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려 그가 거론하는 <디지캐럿>이라는 캐릭터 상품은 유행에서 한물 간 것이지만, 그가 그러한 사례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날의 오타쿠에 대해서도 '원리적인 것'을 말해주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오덕후'나 '오덕'이라는 용어로 오타쿠 문화가 나름 토착화된 한국에 대해서도 더더욱 유효하다. 말하자면 특이하게도 그의 비평은, 오타쿠의 '동시대성' 내지는 '유행성'에 집착하는 저널리즘적 관심사에 이상할만치 초연하다. 무엇보다 주목할만한 사실은, 그의 개인적인 배경이 어찌 되었뜬 간에, 그의 논의에서 오타쿠에 대한 동조의식이나, 그 취향에 대한 어떤 암시조차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가령 요새의 대중문화 비평가를 저차하는 사람들은, 프로이든 아마추어든 무관하게, 바로 자신의 비평을 구성하는 것이 바로 그 영역에 대한 모종의 '관심'과 '애정'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데 인색하지 않다. 예컨대 소녀시대에 대한 비평은 바로 제시카라는 대상에 대한 애정과 등가를 이룬다. 그런데 "이런 말로 다 애정이 있어서 하는 거야"라는 담론적 자기정당화가 대중문화 비평이나 대중문화 소비자들 가운데 이루어질 때, 이것은 물론 천박한 자의식에 불과하다. 천박한 대상에 대해 비평한다는 게 문제가 앙니라, 이러한 자의식 속에서 진정한 '비평적 관심'이란 사장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게 필연적인 수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으로 이러한 자의식 자체는 문단문학의 전통 자체에서 도래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의미에서 이 현상은 예컨대 '근대문학'과 '근대미술'의 비평(한국의 이 영역에서 이뤄진 비평들이 자족적이기는커녕 장식적인 기능을 수행해왔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에서 유래했으며, 그러한 영역에서의 곤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지는 않은가? 다시 말해 근대문학이 망해하고 있는 와중에, 대중문화의 비평도 이미 같이 글러먹을 수 밖에 없다는 기묘한 동조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는 특히나 대중문화 혹은 그것에 대한 비평이 고답적인 문단문학에 대한 대안 혹은 외부성을 창출한다는 통속적인 시각을 내속적으로 논박한다. 이것은 왜 우리가 근대문학의 치졸한 (자기 비평적) 자의식에 대해 비판하면 비판할수록, 그것의 외부에서 대안을 얻는 것이 더더욱 불가능해지는지에 대한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근대문학의 위기는 전 대중문화의 근대문학-화에, 혹은 근대문학의 자의식의 확산에 다름 아니다. 그러한 자의식이 시장의 확대와 더불어 다른 영역으로 전이되고 재생산되고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일본의 비평가이자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을 수호하겠다는 비평가의 결연한 자의식에서 자유로워지기 시작할 때, 그는 진실로 그만의 비평을 다름 아닌 '근대문학'의 영역에서 되살릴 수 있게 되었다. 다름 아닌 근대문학인 근대민족국가의 기획에 어떻게 복무하는지를 해명하면서 말이다. 그가 칸트와 맑스를 재독해함으로써 그러한 비평적 인식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 점에서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고진의 테제는 결코 "근대문학에 대해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 이제 아니메나 장르문학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말과 동일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점에서 우리는 비로소 히로키의 작업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비평이 '근대문학'에서 시작되든 혹은 '오타쿠 문화'에서 시작되든, 중요한 건 그것이 수행되는 영역 혹은 그 비평에서 다뤄지는 대상이 아니라, 어떤 대상을 취하든 간에 동일하게 유지되어야만 하는 비평적 '태도'일지도 모른다. 혹은 바꿔 말해 우리는 고유한 비평적 욕망에 대해 말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가라타니 고진의 비평적 욕망은, 그것이 근대문학 혹은 일본 내의 문단문학을 향해 있을 때조차 그것은 결코 근대문학의 욕망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를 진정한 비평가로 만드는 것이다. '오타쿠'에 대한 히로키의 태도 아니 욕망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다. 히로키 자신이 오타쿠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오타쿠에 대해 말할 때, 그가 오타쿠에 대해 뭔가를 말하고 싶어할 때조차, 그는 결코 오타쿠의 욕망과 동일한 수준에서 발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히로키에 대한 세간의 통념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다.

  역으로, 우리나라의 비평은 어떤가? 대표적으로 문학에서의 비평은 어떤가? 혹자는 히로키를 두고 '오타쿠'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게 맞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일급의 소설가나 시인이 동시에 일급의 비평적 권위를 지니고 있으며 거액의 상금이 달린 문학상의 심사위원으로 즐겨 초청되는 것을 볼 때, 역으로 우리나라의 문학현실이야말로 더 '오타쿠'스럽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누군가 문학에 대해 뭔가를 발언할 때, 그 혹은 그녀는 동시에 훌륭한 문학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 혹은 문학의 숭고한 사명을 수호하겠다는 욕망이 어떤 연장선상에 있는 사태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소위 말하는 인터넷 '덕질'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과 동형적이다. 소녀시대에 대한 비평적 관심은 사실은, 문학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비평적이다. 그것이 자신의 관심영역에 아무리 지적 거리를 두고자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그것에 대한 상상적 애착과 이미 구분 불가능하다. 동시에 환상문학 커뮤니티에서, 환상문학에 대한 비평적 욕망은 동시에 환상문학의 발전에 대한 이런저런 제언으로 환원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히로키가 말한 '동물화' 현상(<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단순히 오타쿠 문화에 고유한 무언가가가 아니라 이미 '전면적'인 것이다. 문단문학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히로키 자신이 발언하는 지점이 오타쿠의 욕망과 무관한 지점에서 말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그는 비쥬얼 노벨의 캐릭터의 모에요소를 분석하는 데, 그리고 그것을 비평이라고 믿는 오타쿠처럼, 자신의 지적 역량을 허비하지 않는다. 그의 작업을 읽을 때, 그러한 사실을 놓쳐서는 안된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10-21 10:55)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10-01-27
13:23:15 



병장 김범준 
  음 저 자신이 그러한 부류에 속하는 이른바 '오타쿠'이고 공부가 모자라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어떤한 비평이라는게 옳은 비평이고 그 예는 어떻다는거지요? 2009-09-03
11:28:10
  



상병 정성근 
  소녀시대에 대한 비평은 바로 제시카라는 대상에 대한 애정과 등가를 이룬다. 그런데 "이런 말로 다 애정이 있어서 하는 거야"라는 담론적 자기정당화가 대중문화 비평이나 대중문화 소비자들 가운데 이루어질 때, 이것은 물론 천박한 자의식에 불과하다. 

좋은 예시군요.(낄낄) 

결국 객관적인 입장에서의 비평이 필요한 겁니다.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 비평하는 대상에 대한 동조를 통해 결국 자가당착에 빠지는 비평이라면 이미 비평이 아니겠지요. 사물을 관찰하는 형태의 비평이 필요한 것이지 책을 읽고 그 감명을 쓰는 것 같은 비평은 차라리 독후감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2009-09-03
12:26:02
  



상병 박원익 
  김범준/거기에 대해서 저는 부정적으로 밖에 말씀드릴 수 밖에 없는데, 적어도 어떤 대상을 비평한다는 건 그 대상을 향유하는 차원에 자리잡아서는 안된다는 부정적 원칙 ㅃ누이지요.... 

정성근/객관적인 입장에서의 비평이라기보다는... 음, 사실은 라캉에 대한 독서후기 전에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속편으로 봐 주셨으면 합니다. 분석가에게도 욕망이 있듯이, 비평가에게도 나름의 욕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객관적인 비평을 불가능하지요. 하지만 어떤 대상의 근본을 파고들려는 자세가 궁극적으로 비평을 정당화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이건 제 개인적인 사견이지만, 저는 김현의 비평을 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저는 그런 식의 탐미적이고, 그 자체로 문학작품이 되는 비평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비평이 아름다워서 안된다는 건 아니지요.. 2009-09-03
16:11:48
  



상병 정성근 
  박원익/물론 완전한 객관적 비판은 존재할 수 없겠지만, 그런 자세를 견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군요. 뿌리의 근원을 파고 파고 또 파다보면 전부 파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해도 어느 정도 사실에 근접한 뿌리의 상태를 유추할 수 있겠지요. 2009-09-03
16:14:18
  



상병 박원익 
  정성근 님께서는 굉장히 어렵고도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한 것 같습니다. 물론 완전히 객관적인 비평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것에 무한히 점근선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이는 실로 수 많은 비평가들이 이미 견지하고 있는 자세이지요. 그러나, 이럴 때 그들이 비평하는 영역이 그렇게 자명한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잊을 위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문학비평가가 노출되는 가장 큰 위험은, 왜 문학에 대해 말해야하느냐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지요. 물론 거기에는 '근거'라고 할만한 게 없습니다. 그런데 제 아무리 '엄밀함'을 추구하는 비평가라 해도, 그러한 사실을 자주 잊고 말지요. 그런데 가라타니 고진(그러고 보니 제가 이 사람만을 전범으로 삼는 듯 하네요) 같은 경우는, 방향을 완전히 바꿔서, "그렇다면 근대문학을 지탱했던 게 무엇인가? 혹은 근대문학을 지탱하는 무언가가 무너졌다면 그것은 무엇으로 대체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전회했지요. 

이것이 제가 고유한 비평적 욕망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이 비평하는 영역과 대상의 동일성을 내기에 걸어놓 때까지, 자신의 탐구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 이것이 라캉이 정신분석의 영역에서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저는 '비평가의 욕망'이라고 할만한 걸 명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가라타니 고진이 가장 전범적으로 보여줬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2009-09-03
16:24:16
  



병장 김태완 
  현대의 많은 비평들을 보다보면 고귀한 척, 냉철한 척을 하도 많이하여 자칫 그 비평가에 대한 경외심까지 들게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집에서의 모습과 회사에서의 모습이 전혀 다른 '건어물녀'처럼 이원화된 모습으로써 비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비평은 겉으로는 비평하는 척하며 실상은 감싸주기 마련입니다. 결국 이러한 비평은 자기비평을 하는 사태를 초래하죠. 

객관을 지향하는 비평은 비평대상의 본질에 대한 순수한 자의식을 품도록 유도하여 대상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비평을 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평은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닙니다. 첫째로, 위의 댓글에서 지적하다시피 우리는 대다수가 오타쿠의 면모를 가지고 있으며, 사회성을 부여받은 사람이라면 대중성을 띄거나 외부성을 띄는 대상들에 일단은 호의적 마인드를 가지기 십상입니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는 그만큼 자신의 주관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여 많은 사람들의 질타를 받을 각오가 되어있어야 하고, 비평대상에 대한 호의적 태도가 점근선적으로까지 배제되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둘째로, 비평은 비평을 낳고 탐구는 탐구를 낳는 순환현상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뿌리의 근원을 파고들며 그 뿌리를 향해 ‘왜?’라는 질문을 자꾸 던지다 보면 대상에서부터 벗어나 삼천포로 빠질 수 있습니다. 인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던져도 정답이 안 나오듯이 뿌리로 향하면 향할수록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모호한 경우가 많습니다. 거기서 마구 헤엄치다 보면 본래 비평할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사회에서 전면적으로 필요한 비평이 제한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비평이 중요할 때, 자꾸 원론적으로만 따지고 들면 소용없는 비평만이 난무할 수 있단 것입니다. 셋째, 대게 비평은 저널리스트나 칼럼니스트, 기자들이 많이 합니다. 이들에겐 비평이 돈벌이입니다. 대중에게 인기없는 비평은 살아남지 못합니다. 근본만 추구하다 보면 이슈화되지 못하는 비평, 관심받지 못하는 비평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문학이 근래 들어 괄시를 많이 받고 있는 것도 사회와 동떨어지거나 재미없는 것을 많이 추구하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일명 ‘초딩’이나 생각없는 연애인의 팬들처럼 무분별한 애착으로써 반대 의견을 싸그리 뭉게버리고자 하는 안하무인 비난식 비평같지 않은 비평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비평도 대상에 대한 애증이 있어야 그것에 대한 지식탐구도 하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비평거리도 만들 것인데, 최대한 애착을 배제한 상태에서 비평을 하라 그러면 비평이란 작업이 자칫 직업적 의무나 책임감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100% 객관적인 비평이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자신의 면모를 숨기며 고귀한 척 하는 것 보다 대상에 대하여 조금씩의 애증을 가지고 내가 진실로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동일하게 하는 비평도 괜찮지 않나 생각합니다. 2009-09-04
11:44:04
  



병장 윤정기 
  엄청나게 늦은 댓글이지만, 바르트가 비평가로서 자신의 위치를 말했던,(그의 저서, <글쓰기의 영도>에서의 내용과 결부됩니다만) '나는 비평가로서 전위의 후위에 있다'는 말이 생각나는 글입니다. 허헛. 2009-10-21
10:4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