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한 달여 만에 간 충성클럽. 이것 저것 고른 뒤 계산을 하고 거스름 돈을 받았다. 돈에는 청색 스탬프로 찍은 글귀가 우측에 90도 방향 꺾여서 찍혀 있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척 봐도 신권으로 보이는 5천원권에 선명하게 찍혀있는 이 문구를 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책마을에서 창조론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을 때였다. 원영씨의 빛나는 명문을 보고는 쓰던 글을 조용히 접어 일단락시키던 중이었는데, 흥미있는 이야기가 다시 제기되었다. "빈정거림이 아니라, 진정 창조론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논문을 읽어보고 싶다."는 화두. 이 문제는 나에게 있어 단순히 창조론/진화론의 과학적 증명 방법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는 진리를 설명해 나가는 행위, 설득해 나가는 행위' 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어떤 사안에 진정 확실한 믿음을 갖고 있는 동시에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무지로 인하여 치명적인 위험에 처해있다면, 나는 내가 갖고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하여 그 사실을 전파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치명적 위험까지도 갈 필요없이  내가 믿고 있는 바를 타인에게 설득하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갖고 있는 사회적 본능이라 할 수 있을텐데, 왜 그것의 달성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자폭형 문구들을 양산하는 것일까?


그러던 중, 이 고민과 굉장히 비슷한 한 문제에 사고가 닿았다. 그래. 그것도 같은 구조가 아닌가.


'나는 이미 더 나은 세상을 보았기 때문에, 다시 그들처럼 무지몽매하게 살아갈 수 없다.' 이곳의 어느 진보 논객(?)의 말이다. 그는 종교적 광신성에 필적할 정도로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확신하며, 모든 사회적 문제를 '절대악으로써의 자본'이나 '계급투쟁' 등의 틀로 파악한다. 예수를 믿어야만 천국의 문에 들어설 수 있다는 믿음만큼이나 '자본을 타파하고 계급을 무너뜨리기 위해 연대해야 함'은 자명한 진리이다. 불신이 광신적 기독교도의 절대악으로 다가오는 것 마냥, 그도 진보가 아닌 색깔의 사고는 칼을 들고 몸을 한껏 부풀려 싸워야만 하는 대상일 뿐이다. 자신이 옳다는 확신. 하나의 틀로 모든 사안을 수렴시키는 위대함. 내가 그의 글에게 숨이 막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종교의 광신적 답답함을 무섭도록 닮아있었다, 그의 사고는.


세상을 하나의 틀로 파악하고 그것이 절대 진리라는 확신을 갖은 뒤,  자신의 진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타자화시킨다. 타자에겐 자비로운 설득 대신 무차별적인 공격 뿐이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존중하고 받아들이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 보다는 기존의 자신이 갖고 있는 사고의 틀에 끼워맞춰 튀어나오는 부분을 모두 잘라버린다. 이 일련의 행위는 부차적으로 스스로에 대한 우월감까지 만족시킨다.

그 사람과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위대한 계급투쟁이나 연대와 혁명보다 안락한 가정을 꾸리고자 하는 못난 소시민들에게 철퇴를 내리고, 싸잡아 욕하고, 내가 옳다고 고래고래 소리 질러야만 할까? 멍청한 그들보다 나는 '우월한 세계'를 이미 경험했기에, 다시 돌아갈 수 없고 욕하고 비판하고 전투적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이러한 주장에는 '그 멋진 신세계가 과연 지금의 삶보다 완벽히 더 나은 세상인가?' 하는 근본적 질문을 차치하더라도  주장의 중심에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기에 옳은 진술일 수 없다. 백번 양보하여 만약 그들이 말하는 세계로 가는 것이 진정 옳아, 파레토 개선(改善)이 성립된다 할 지라도, 즉 그들의 주장대로 행하는 것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길이라 해도, 그것을 실행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관점을 집중해본다면 역시 수긍하기 힘든 태도가 발견된다.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애정의 결여다. 사랑이 아닌 폭력이라는 이름으로의, 배려와 존중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는, 진술은 '비판을 위한 비판'일 뿐  상대방을 진정 설득할 수 없다.

우리가 진정 더 나은 세계로 가야한다면, 그들이 즐겨하는 말대로 '연대'해야 한다.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마땅히 투쟁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전에 우리는 서로 손을 잡아야 하는데, 그들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대신 우리의 행동과 그 속에 감춰진 태도, 사상까지도 모두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 무자비한 공격을 퍼붓는다. 따뜻한 애정이 담긴 수긍할 만한 꾸짖음이 아니라, 복날 개패듯 반대의 극단으로 밀어붙혀 비판한다. 도저히 함께 연대하고 투쟁할 동지로서의 시선은 찾아볼 수가 없다. 불신자를 오직 타도의 대상으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만, 쏘아 보는 광신도의 눈을 무섭도록 닮아 있다.


우리가 정말 함께 가야 한다면, 정말 더 좋은 곳으로 이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사명을 안고 태어났다면, 서로에 대한 애정의 끈을 놓치지 말자. 조금의 다름을 기준으로 적(敵)이라 간주하거나, 자신의 사상과 다르다고 무조건 배척하기 보다는  함께 가야할 동지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자.

20대는 세상의 때가 비교적 덜 묻은 시기이다. 지금을 기준으로 점차 시간이 흘러 우리도 나이를 먹게 되면 지금 공유하고 있는 공통점보다 더 많은 차이점들이 부각될 것이다.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의 차이보다 훨씬 더 큰 괴리감이 우리 사이에 놓여지게 될 것이다. 그 때도 조금의 다름을 기준으로 비판하고 몰아세우고, 마녀 사냥을 즐길 것인가? 그렇게 해서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우리에게 다가올까?


비판 좋다. 토론 좋다. 겉으로 죽일 듯이 서로의 논지를 파해치고, 상대방이 보지 못하는 점을 일러주고 얕은 시각을 부끄럽게 해주자. 더 공부하도록 자극하고, 더 생각하도록 다그쳐주자.

하지만, 그 안에 애정의 자리를 마련해두어야 한다. 애정이 없이는 결국 입장의 차이를 확인할 뿐이다. 존중과 배려 없는 비판은, 딱 비판한 그 자리에서 끝이 난다는 것 우리는 수 많은 경험으로 명쾌하게 알고 있지 않은가.

계급 투쟁도 좋고 투쟁과 연대도 좋지만, 그것을 절대 진리로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모습은 책마을에서 볼 수 없었으면 좋겠다. 나의 생각이 중요하고 나의 논리가 귀중하듯이, 그만큼 타인의 생각과 논리도 존중하는 태도가 책마을에 뿌리 내렸으면 좋겠다.

'절대성'은 우리가 모두 함께 가야 한다는 것. 서로를 애정으로 관찰해야 한다는 것. 그것만 남기고 스스로의 사상을 위한 절대성은 서로를 위해, 서로를 받아들일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조금씩 뒤로 물려두는 것이 어떨까?


나는, 계급에 대한 투쟁보다, 절대성과 광신성 그리고 편협함에 대한 투쟁이 더 중요하고 시급하다 생각한다. 상대방을 배척하는 계급투쟁으로 연대하여 결국에 세상을 뒤집을 수 있다 하여도, 그것은 또다른 편벽과 맹종이 고개를 쳐든 것 뿐이지 않겠는가.

극우와 극좌가 서로를 위해 썩은 퇴비가 되듯, 또 타국의 민족주의가 자국의 민족주의 발달에 냄새 지독한 자양분이 되듯. 지금의 배타적 투쟁은 또다른 배타성을 잉태할 뿐일 것이다.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인류의 구원은 오직 사랑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의 의미를.

책마을도 사랑으로 서로를 구원해줄 수 있기를 기원한다.









* 이 글은 바로 전의 칼럼 '제한된 합리성의 이론'에 대한 강록씨의 답글과 주고 받은 쪽지가 바탕을 이루었습니다. 졸문에 당신의 이름을 거론하게 되어 죄송스럽지만, 강록씨의 '애정 이론'은 저에게 큰 시사점을 던져주었기에 이 자리를 빌어 감사함을 전합니다. 

  
 
 
 
병장 엄보운 (2006/06/15 09:50:52)

그리하여 제목 또한.    
 
 
병장 박준응 (2006/06/15 10:23:56)

곳곳에 보운씨 특유의 논리정연하여 더 날카로운 칼날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 근간에 새로이 자리잡아 그것들을 덮어 버리는, 따뜻한 햇살에 제 기분마저 나른해지는군요. 
TV에서 워낙 떠들어대서 어느새 의식하기 시작한 그 놈의 자외선에 좀 따꼼따꼼 하더라도, 
오후가 되면 찾아 가고 싶은 그런, 포근한 햇살 말예요. 

지금 껏 읽은 당신의 글 중에 가장 와닿는 좋은 글, 잘 읽었어요(생글)    
 
 
상병 송희석 (2006/06/15 10:33:06)

한동안 잠적하더니, 이런 좋은 글을 쓰고 있었군요. 잘 읽고 갑니다.    
 
 
일병 황성규 (2006/06/15 10:38:26)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병장 고계영 (2006/06/15 10:51:28)

무슨말을 해야할까 많이 고민되는 글이네요. 
예전의 글과는 뭔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처음에 읽었을 때는 또 강렬한 글들이 오고 갈 것 같았는데 그러지 않을 것 같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의 마음속의 생각과 흡사하여 짐짓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돌아오시는 겁니까?라고 묻고싶지만 그런 질문은 무의미한 것 같아 각설하도록 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병장 강승민 (2006/06/15 10:59:52)

무슨 말들이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궁금하긴 하구요. 원영님때문에 글쓰기를 고이 접어두려했다라고 하셨는데 저 또한 원영씨때문에 책마을을 열어본다는게 두렵고 힘들어집니다. 

보운님의 글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여러번 읽어보고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물론 동의하거나, 와닿았다고 말하진 않을래요. 

사람은 언제나 자기 몫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 처럼 글쟁이도 자기 몫만큼의 글을 써야한다고 생각하는데 말할 수 없는것에 침묵하고 말해야 하는 것에 분노해야 한다는 전재하에서 
저는 빨리 모운님의 다음 글들, 경제학 칼럼을 읽고 싶어요.    
 
 
상병 박진욱 (2006/06/16 10:53:33)

브라보- 
저도 저 종교적 저돌성에 골치를 썩이던 중이었습니다만. 
이 글을 보고 문득 틈事봐 [적을 닮아가는 중] 이었군요. 

깨달음을 주셔 감사합니다.    
 
 
병장 김강록 (2006/06/17 22:36:16)

아닙니다! 명문에 저의 졸명을 거론하여 주셔서 삼가 영광입니다. 구체적인 언급 없이 그저 '강록씨의 답글과 주고 받은 쪽지가 바탕을 이루었다'라는 막연한 서술로 제게 뜻하지 않은 신비감을 부여해주셔서 저로선 마냥 감사할 따름입니다. 음화화화화화화.    
 
 
 병장 박진우 (2006/06/18 15:23:10)

김강록씨가 애정이론... 이라는 말을 하다니. 
이 사실로써 저는 또 한번 김강록이라는 사람에게 충격을 받고 맙니다. 

문근영을 대타자로 설정하며 자신은 자신의 주장과 고집에 얽매여 사랑은 할수없지만 실은 로리콘이었다는 사실을 뱅 돌려서 말하던 파전집에서의 강록씨와 상대방에 대한 애정을 중요시하는 애정이론의 강록씨. 

당신의 이름은 김강록.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을 부를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린 그 사람인지요. 당신에게 들리지 않는 당신의 이름이, 김강록, 당신의 이름인지요.    
 
 
 병장 김동환 (2006/06/19 08:13:35)

아.. 좋아요. 글 잘읽었어요.(웃음)    
 
 
병장 김강록 (2006/06/20 17:06:24)

진우 / 문근영이 문화자본의 아이콘이라는 건 그날 제가 얘기하고자 했던 바의 시작점에 깔려 있는 전제입니다. 그 자리에서 제 얘기가 '사실은 문근영은 로리콘이다'라는 결론으로 끝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면 저로선 정작 제가 진짜 말하고 싶었던 부분은 거의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고밖에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병장 박진우 (2006/06/22 15:42:48)

강록/ 그리하여 우리의 다음 만남은 꼭 기약되야 하는것이군요! 
으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