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해체하기
- 알랭 드 보통,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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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773호는 특집으로 금융사들의 ‘공포 마케팅’을 다루었다. 1997년 이후 사회적 안전망이 깔끔하게 제거되는 ‘구조조정’을 겪은 이후, 한국 사회 구성원들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오로지 축적된 재산을 가져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상황으로 추락했고, 노숙자는 노동자의 미래처럼 그려졌다. 기업에 자신의 노동을 던져 얻어내는 임금만으로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노동자 신화는 잔인하게 깨어졌고, 이제 사람들은 다른 희망의 끈을 찾는데 급급해졌다.
‘공포 마케팅’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탄생한다. 금융사 직원이나 보험외판원들이 하루에 5000원짜리 설렁탕을 20년간 먹기 위해서 얼마가 필요한지 살벌하게 계산해 놓은 뒤, 이정도 돈도 못 벌면 늙어서 거지꼴을 못 면한다고 윽박지르면 사람들은 금세 펀드니 CMA니 하는 상품에 덥석 가입한다. 이러한 마케팅이 가능해진 상황은, 그만큼 현대 한국인들이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방증하지 않는가?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신용/부채가 나락으로 향하는 다이빙보드일 수 있기에 경계하겠지만, 불안에 휩싸인 상태에서 신용/부채는 그저 도약을 향한 하나의 지렛대 정도일 뿐이다. 모든 것을 다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신용/부채,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화차>의 범인도 이러한 신용/부채를 ‘가능성의 도구’로 쓰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이러한 우회는 주기적인 파국을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다.
보통이 다루는 ‘불안’은 사실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에서 오는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이처럼 모든 것이 “가능해진” 시대에 나타나는 특별한 수준의 불안이다. (지위)불안은, 인간이 사회 안에서 가지는 지위를 재는 기준이 경제적 성취로 표준화된 이후에나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예측할 수는 있지만, 항상 위험은 예측 너머로 다가오는 시대, 모든 것이 가능해진 사회이지만 동시에 나만큼은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은 현실, 불안은 근대 이후의 인간의 삶에 항상 묻어 있다. 수많은 추천작들 가운데 이 책을 고르게 된 단 한 가지 이유는, 보통이 불안을 제대로 응시하고 있다면 지금의 상황에 어떤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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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1776년을 기점으로 통상 서양에서 지위가 부여되는 기준에 경제적 성취가 거의 단독적으로 연결되었다고 주장한다. 1776년과 1789년은 거대한 전환의 두 축인데, 1776년은 구유럽의 유산이 가지는 무게가 현저하게 가벼운, ‘평등한 부르주아’의 실험이 실현되는 공간을 창출했고, 1789년은 기존의 대륙 위에서 새로운 실험을 실현한 해다. 두 축 모두 기존의 유럽에서 유지되어 오던 관계망들이 혁명적으로 전환되었다. 그 이전까지 지위는 혈통, 명예, 종교 등의 가치와 연결되어 있었다면, 이 두 혁명에 의해 변화된 공간 위에서 모든 이들은 평등해졌다. 그들은 모두 기회의 평등을 약속하는 계약을 천명했고, 그 평등 위에서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는 일을 정당화했다. 인간의 높고 낮음은 사라졌으나, 다만 모든 이들은 자신들이 노력한 만큼 부를 얻을 수 있기에 게으르지 말아야 했다.
마르크스든 폴라니든, 이러한 전환이 발생하는 시기를 전후로 나타나는 사회의 해체와 시장의 발달에 대해 비슷한 지적을 했다. 마르크스는 모든 관계가 화폐로 사고팔 수 있는 상품판매/구매의 관계로 바뀌었다고 말했고, 폴라니는 사회에 묻어 들어 있던 시장이 사회를 재조직하는 기본 공리로 전도되었다고 말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전환된 사회는 중세까지 유지되던 공동체의 해체 이후 새로운 원리에 의해 결합된 조직체로, 사전적으로든 사후적으로든 그 조직의 구성원으로 등록을 해야 하는 클럽과도 같은 존재다. 끊임없이 회원권은 갱신되어야 하며, 그 비용은 등록 이후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충분히 보상받을 ‘수도’ 있다. 다만 등록되지 못하면 이미 해체되어 버린 기존 공동체의 보호는 바랄 수 없다. 모든 비개인적/사회적 보조가 사라지고 개인적 자조로 환원되는 상황처럼, 사회는 점차로 불안/공포를 자기의 응집 원리로 삼는다. 회원권을 얻기 위해 암표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해체-이후의-사회에 사는 ‘개인’의 조건, 거기에 그 존재 자체가 가지는 불안이 있다. 공포에 의해 사회는 계약되나, 공포는 사라지지 않은 채로 남아 구성원들을 경악시킨다. 사회와 자본은 그러한 공포 위에 서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환의 과정을 지나고 나서부터의 사회를, 우리는 근대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며, 보통은 바로 이러한 근대사회의 인간들이 느끼는 지위불안의 원인을 다섯 가지로 지적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보통이 지적한 원인은 다음과 같다 :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 사랑결핍은 한마디로 말해 ‘응답’의 욕구다. 지위 그 자체에 대한 탐닉이라기보다는 높은 지위를 가지게 되면 따라오는 사람들의 관심과, 낮은 지위에 있을 때 내 말을 무시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성심성의껏 대답하고, 자신의 욕구에 응대해주는 것에서 오는 희열이 높은 지위를 추구하게 되는 이유이다. 이런 높은 지위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전제로서 ‘높은 지위’의 추구가 실제로 가능하고, 측정될 수 있어야 한다. 화폐는 이러한 두 가지 전제를 만족시켜 주는 기준이다. 그것은 서로의 위계가 없는 공동체와 타 공동체 사이에 자신의 존재 근거를 두고 있었고(폴라니, 마르크스 모두 ‘화폐교환’은 공동체 바깥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비록 이상적이나마 공통된 교환의 비율과 환원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근대 화폐 사회의 성립이 가능해야 이러한 지위 추구가 실제적으로 가능해지게 된다.
속물근성은 앞서의 ‘응답’의 욕구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응답을 얻기 위해 지위를 추구할 때에는, 꼭 자신의 지위만 올릴 필요가 없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지위는 상승한다. 이 지위는 도구로서 작용하는데, 만약 타인에게 높은 지위가 없다면, 그 사람은 구태여 내가 공들여 만나야 할 이유가 없다. 바로 이러한 생각이 속물근성이다. 사회적 지위와 인간의 가치를 같은 것으로 보는 속물근성은 이 사회에서 보편적인 성향이 되는데, 속물이 아닌 사람도 “스스로 속물이 아닌 척 하는 고도의 속물”이라는 오해의 연쇄 속에 쑤셔 박기 때문이다.
기대는 더 나은 삶의 조건을 꿈꿀 수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실제적인 궁핍은 감소한다. 그러나 상대적인 궁핍은 늘어나기만 한다.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겨 우리 자신과 비교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질투하는 사람도 늘어난다.”(60) 분명 누구나 자수성가 할 수 있다. 예전처럼 인간을 운명의 굴레에 매어두는 피의 제약도 없다. 그리하여 자서전, 조언집, 교훈담들은 내기만 하면 다 팔려 동이 날 정도로 인기를 누린다. 그러나 ‘프랭클린 다이어리’가 불티나게 팔리는 현상 뒤에는 불안이 도사린다. 다이어리는 말한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함으로써 네 능력으로 너는 성공할 수 있다고. 흩어지고 조직되지 않은 시간들을 체계화시킬 수 있는 결정력이 너에게 있다고 말이다. 현재의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데 역할을 했던 ‘자수성가’의 신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 다이어리와 신화는 이어서 말한다. “다 가능한데, 못하는 너는 회원에 등록될 자격이 없는 게 당연해.”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좌절을 오로지 자기 자신의 실패로 환원시키는 함정을 품고 있다. 근대 사회계약론의 주창자들은 인간이 서로가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존재로서 평등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계약 이후의 불평등은 그들이 자초하는 결과로 환원된다. 계약은 위반되지 않으면서도, 불평등은 정당화된다. 능력주의는 이러한 함정을 파두고, 그 위를 ‘자유로운 인간들의 진보’로 위장한다. 토크빌이 이미 200여 년 전에 “왜 미국인은 번영 속에서도 그렇게 불안을 느끼는가?”라고 예민하게 짚어낸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조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 대가는 우리가 현재의 모습과 달라질 수 있는데도 실제로는 달라지지 못하는 데서 오는 끊임없는 불안이다.”(82)
능력주의는 ‘기대’와 밀접한 연관관계에 있다. 능력주의는 ‘지위’가 세습되는 것도 아니지만 완전하게 평등한 것도 아니며,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계약 이후의 불평등은 오히려 정당하고 존경받는다고 주장한다.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
마지막으로 불확실성은 삶의 조건의 예측 불가능한 다섯 가지의 요소를 포함한다. 변덕스러운 재능, 운, 고용주, 고용주의 이익, 세계경제. 이 가운데 변덕스러운 재능과 운이 비교적 개인적 역량과 연결된다면, 고용주와 그의 이익, 세계경제라는 부분은 사회적인 측면과 연결된다. 고용주에게 노동자들의 모든 것이 사실 달려있는, 불공평한 게임을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차지하게 될 노동자의 위치는 언제나 불안을 품는다. 구태여 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보통의 이 한 마디로 설명될 수 있다.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이에 어떤 동지애가 이룩된다 해도, 노동자가 어떤 선의를 보여주고 아무리 오랜 세월 일에 헌신한다 해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지위가 평생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 그 지위가 자신의 성과와 자신의 속한 조직의 경제적 성공에 의존한다는 것, 따라서 자신은 이윤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감정적인 수준에서 변함없이 갈망하는 바와는 달리 결코 그 자체로 목적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늘 불안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142-143)
세계경제의 부분은, 보통이 지적한 것보다 더욱 강력하게 인간의 불안을 유발한다. 단순히 노동자라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통째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위험이 세계화와 함께 발생했기 때문이다. 각 지역이 가지고 있던 자기 나름의 사회적 보호가 소멸되고, 모든 이들이 자율적인 시장이라는 악마의 맷돌 안으로 갈려 들어가게 되면, 시장은 ‘자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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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분석에 이어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다섯 가지다 :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 하지만 이러한 해법들은 여전히 인간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편이다. 철학은 이성적 자기 판단을 통해 타인의 시선에 자기 자신을 맞추지 않으면 불안의 양을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러한 판단은 여론은 최악이라는 지적 염세주의로 흐를 공산이 크다. 또한 그러한 해법은 불안이 단지 개인 심리에 의한 것이라는 말로 오해될 소지를 낳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보통이 이 책에서 공들여 분석하고 있는 ‘불안’은 비록 인간 유전자에 원초적인 공포와 맥을 같이 한다 하여도, 근대 이후의 특정한 형태의 ‘불안’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가끔 그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불안이 역사를 뛰어넘는 속성인 듯 파악한다. 가령,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날 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 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21) 그러나 그의 원인 분석은 언제나 특정한 시대 이후에 등장하게 되는 ‘경제적 지위 배분’에 따르는 불안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 스스로 이러한 괴리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예술과 정치는 기존의 지위체계가 배분되는 방식에 대한 비평으로 작동한다. 조지 엘리엇은 “영웅적인 삶을 살지 못한 수많은 테레사가 이 땅에 태어났다. 그들은 잘못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으며, 이것은 영적인 숭고함이 이에 부응하지 못하는 빈약한 기회를 만나 빚어낸 결과다.”(185)라고 말한다. 지위 체계는 언제나 그들이 원하는 만큼 사회 전체를 포괄하지 못한다. 항상 배분은 불만에 사로잡힌 사람을 만나게 되어 있다. 이것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는 데 예술과 정치가 기여하는 부분이 있다고 보통은 주장한다. 세상에서 무엇을 존경하고 존중할 것인가에 대한 속물적 관점을 교정하는 데 예술이 영향을 미치며, 이러한 관점을 교정하는 현실적 힘은 정치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영원 혹은 절대자를 상정함으로써, 그 앞의 모든 차이를 무화시킨다. 그럼으로써 모든 인간들의 높낮이는 사실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귀종하다는 인식을 회복할 수 있을 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그런 인식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과 태도를 조성할 수 있을 때,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어둡게 보지 않는다.”(333) 공동체가 우리는 결국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반면 현대 사회의 인간들은 평범한 것에서 벗어나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기독교/종교는 그러한 평범함에 대한 혐오를, 인간의 자율적인 발전 자체를 미미하게 만들어버림으로써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격차에 따르는 불안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보헤미아는 현대 사회의 고위 계급이 되어버린 부르주아지가 과연 높은 지위를 얻을 자격이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어떤 이유에서인지를 그들의 행동으로서 보여준 이들이다. 그들은 부르주아들의 예술적 취향을 낡고 진부한 것으로 취급하면서 자신들의 천재성을 유별나게 드러낸 초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들은 ‘기행’을 함으로써 ‘정상적’이라고 여겨진 수많은 관습들에 의문을 제기했다. 지금까지의 위계 배분은 그들의 기행, 아방가르드 정신에 의해 무너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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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책이 인문교양서이라는 점 때문에, 그가 전제하는 수많은 사회적 현실들은 항상 배경처럼 흐릿하다. 이는 원인을 분석하는 데에서 뿐만 아니라 해법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보통이 제시하는 이 모든 해법들은 그 스스로가 말하는 것처럼 지위의 위계 자체를 없애지는 않은 채 대안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이러한 대안들에 보통 그 자신도 그리 마뜩찮았던 이유는, 현대인들의 삶을 집어삼키는 자율성의 괴물이 그 몸집을 키워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불안에 이르는 병에 걸리는 이유, 그것은 우리가 상품이 되어 팔리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은 지위를 결정하는 변수가 경제적인 것에 걸리게 된 현실을 묘사하고 분석하는 데에는 탁월했지만, 인간이 그 자체로 변수가 되었다는 사실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인간을 다른 상품들과 다른 것으로 보호해주던 수많은 제한과 사회적 보호는 자기 조정적인 시장체제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의 등장으로 사라져버렸다. 인간을 분석하는 기준은 전혀 다른 장으로 옮겨 갔으며, 그 장에는 이미 수많은 재화들이 가격표를 달고 부유하고 있었다. 폴라니가 스피넘랜드법의 제정과 철폐가 이루어지던 순간에 인간이 어떻게 노동시장으로 편입되어 갔는지 설명한 대목을 읽게 되면, 근대 자본주의 속 인간의 불안이 근본적으로 어디에 원인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폴라니, 『거대한 전환』) 상품이 아닌 것이 상품이 되게끔 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해준 인간의 계약, 스스로 불안하기를 벗어나기 위해 맺은 계약이 스스로를 불안의 불구덩이로 던져 넣는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의 상품으로 변모하게 되었다는 것은, 언제나 쓰이지 않으면 / 팔리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재고(실업자)가 됨을 의미한다. 메이도프가 사용했던 폰지-다단계 수법은 바로 현대 자본주의의 인간사용설명서나 다름없다. 폰지-다단계 수법에서 회사가 이익을 내는 방법은, 신규 투자자의 납입금을 모아 그들을 모집한 상위 투자자에게 배당해주고, 남는 이익을 축적/착복하는 길이다. 그러나 ‘순환’처럼 보이는 이 ‘고리’는 지속적인 납입이 없이는 이어지지 않으며, 이 순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다른 인간을 위해 사들여야 한다. 타인을 하나의 재화로 보고 구매/판매해야만 유지할 수 있는 사회, 문제는 이러한 회사 운영은 명백히 불법이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충분히 법망을 빠져나가고, 빠져나가면서까지 이러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것에 대해 묵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멀리 돌아왔지만 돌아온 곳은 바로 여기다. 인간을 인간이지 못하게 만드는 데에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공동체 속에 묻혀 있던 인간을 꺼내 개인으로 정초하고, 그 개인들을 바탕으로 하는 계약사회를 이루려는 기획은 인간을 ‘합리적 개인’으로 주조하는 가운데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과연 기획은 가역적인가? 이미 다비드상은 석고 덩어리가 아니다. 오히려 프로젝트로서의 기획은 여전히 진행되어야 한다. 다만 이 ‘불안’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기획은, 인간에 대한 ‘존엄’을 상기할 수 있는 기획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존엄은 단순히 하나의 제도나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총체적인 사회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할게다. 그런 것이 진정한 ‘사회’주의는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