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코스키가 간다』, 한재호 / 창비
2009. 11. 16(월) 읽음

창비 신인소설상(?)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신인작가 한재호의 첫 장편소설. 그는 ‘부코스키’ 또는 ‘나’라고 불리는 인물의 행로를 통해, 서울의 ‘길들’을 통해 청춘의 방황을 스케치한다. 나는 이 소설의 마지막에 실린 비평만큼 적절한 글을 본 적 없다. 조경아였나? 아무튼 그 문학비평가가 쓴 이 소설에 대한 비평은 참으로 객관적으로 잘 쓰여진 것 같다. 

“절망이 벤치 위에 앉아있다.” (p142)
프레베르의 시를 인용한 문구이다. 이 소설은 ‘청년실업’이라는 사회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그런 일반화된 ‘절망’의 시기에 ‘청춘’이기 힘든 시절의 인물들이 그 절망을 어떻게 따라가고있는가를 살피고 있다. 다분히 ‘나’로부터 시작해 ‘나’로 끝나는 소설이기 때문에 이 소설의 부코스키, 나와 작가의 호명을 따로 떨어뜨려서 생각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안팎을 둘러싸고 가장 결정적인 패착지점은, ‘작가의 말’이다. 비로소 이 소설의 작가 한재호는 바로 이 ‘절망’의 서사를 담담하게 써냄으로써 기적적으로 절망에서 탈출했다는 것. 요컨대 문단에 등극했다는 것. 그런데 그걸 읽고있는 우리들은 여전히 그 절망의 장 위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것. 그것이 독자들을 아연실색케 하지 않을까, 싶다.

“88만원 세대론은 서구에서 유행한 신좌파이론의 재탕 삼탕으로 요즘 세대의 실제와는 동떨어진 면이 많다. 사실 현재의 젊은 세대는 개인적인 꿈이나 여가 따위에 그다지 애착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통념과는 달리 이전보다 가족이나 사랑 따위의 고루한 가치에 더욱 비중을 두는 걸로 분석된다. […]” (p116)

선배의 결혼식에 갔다가 “술김에” 잠자리를 같이 했다가 그 이후로 ‘나’와 동거하게 된 ‘거북이’가 인터넷에 뜬 뉴스기사를 읽은 대목이다. 이 소설은 정말 그 ‘88만원세대론’이 환기시키는 현실을 관통하면서도, 동시에 우회하고 있는데, 이 대목에서 작가가 88만원세대론이란 것에 대해서 견지하고 있는 비판적 시선을 알 수 있다. 정말 오늘날 젊은 세대는 개인적인 꿈이나 여가 따위에 그다지 애착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족이나 사랑 따위의 고루한 가치”에 비중을 두는 것처럼 보여지는 것은, 조금 더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그것은 어떤 위장이지 않은가? “가족이나 사랑 따위”라도 애착을 지닌 것처럼 드러내야하는 필요성을 느끼는 것에 지나지 않는건 아닐까. 실제론 그 무엇에도 애착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이지 않을까? 

“해야 할 일이란 그토록 많아.” (p207)

프레베르의 시 <꽃집에서>를 인용하며 소설은 끝난다. 이 조심스럽고 거리감 있는 소설에서 작가의 의지가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요컨대 취업 전선에서 하릴없는 약육강식의 논리와 진입의 환상, 열외의 공포 속에 사로잡혀 사는 것보다, 차라리 “해야 할 일이란 그토록 많”음을 인식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역설적 요청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이 지점에서는 다소 상투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
“조언 좀 해봐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현실적인 조언”
나는 피식 웃었다.
“나부터도 죽어라 실패만 계속했는데, 도움이 되겠어? 뭐라도 된 놈한테 알아봐야지.”
“그런가요?”
그쯤에서 그녀도 기분 좋게 웃었다.
“원래 실패한 사람의 사례가 더 도움이 되지 않나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긍정적으로 읽을 수 있는건, 청년실업자들에 대한 어떤 열패감 가득한 시선으로 지속되었던 최근의 소설들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다는 점 때문일 거다. 

작가가 야심차게 시도한 것처럼 느껴지는, 청년실업자 '나'의 발걸음, 익명성의 늪으로 파고들어간 무수한 부코스키들의 발걸음으로 그려내고자 했던 서울의 풍경은 다소 밋밋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니까 사당동이든 종로3가 뒷골목이든, 그 길들의 안까지 파고드는 무엇이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