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론] 사막 한가운데의 프로슈머 경제를 꿈꾸다  
병장 김민규  [Homepage]  2009-01-27 05:42:41, 조회: 52, 추천:0 

사막 한가운데의 프로슈머 경제를 꿈꾸다
2009.1.27, Minkiw


  공공재 소비에 있어서 무임승차 문제는 상존하는 위협이다. 타인의 사용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여타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이 공공재일진대, 현실적으로 소수의 무책임한 소비는 타인의 사용을 제약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동네 우물 앞에 물 공장을 차려 바닥까지 물씨를 말려버린다 하면, 그것은 극도의 이기심이 낳은 사적私的 사용이라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썼던 글에서 토지의 공공성 문제를 논한 적이 있다. ([보론] 바이마르 헌법 155조를 돌아보며 참조) 땅은 모두가 다른 땅에 인접해 있는 것이고, 한 부분의 개발이 다른 부분과 무관하게 이루어진다 할 수 없으므로, 외부성에 입각한 타인에 대한 배려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이러한 개념에 입각해 책마을 논란을 살펴볼 것이다. 다소 지루하고 딱딱하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어쩌면 훈계하려 드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누린 그 깊은 기쁨이 다음 세대에서도 영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다시 한 번 발성發聲의 오만을 저지르고 있다.


  1. 건축물의 외부성과 우리의 책마을

  도시계획상 모든 건축물에 대해 접근권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은 기본적인 명제다. 즉, 남의 집이 저 한가운데에 있는데 걸어 들어갈 길도 남겨놓지 않고 사방으로 콘크리트 장벽을 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최소한의 생존권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 어떤 논리로도 반박할 수 없는 기본권이다. 그렇잖아, 굶겨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짓을 할까. 보다 적극적으로 도보를 넘어 도로 사용의 가능성을 보장하고자 하는 것이 현재의 추세다.

  주거지역 바로 옆에 시커먼 연기를 펄펄 내뿜는 공장을 지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은 환경권의 일종으로, 역시나 생존의 문제를 보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정책가들은 도시계획에 토지의 용도를 명시함으로서 이러한 지역구분을 명확히 한다. 주거지역에 상업시설이 마구잡이로 들어올 수 없고, 공장들을 특정 지역에 격리시키는 것은 공간 활용의 합목적성을 의도한 것이다. 게다가 용도별로 정해진 용적률과 층고 제한이 있어서, 하늘 저 높이 뻗어 오르고 싶은 건물들은 어정쩡하게 멈추어 선다. 설령 규정상 건축 가능한 높이를 초과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주변 지역의 일조권 - 햇빛을 쬘 수 있는 권리 - 을 심각하게 저해하지 않기 위해서 따져봐야 하는 골치 아픈 과정이 남아있다. 

  책마을이라는 공간 안에 들어선 ‘글’이라는 건축물은 이러한 권리들을 같은 맥락에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우선 생존의 문제를 담보하기 위하여, 우리는 초성체와 이모티콘을 금지하고 게시물 작성자를 “계급 성명”의 양식으로 남기게끔 강제하고 있다. 이는 폭파로의 개연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위험에 대한 사전적 구제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생산된 글들에 대한 접근권은 어떤 식으로 보장되어야 할 것인가. 과거의 글을 찾아보는 것이야 페이지를 돌려가며 검색을 하면 된다는 것쯤이야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새로 남겨진 글에 대한 접근성의 문제를 따져보도록 하겠다.
  노출빈도의 차별적 형성에 의해서 대부분의 글은 1페이지에 있을 때에 최대한의 주목을 받는다. 과거에 책마당과 내글/후기, 연재가 ‘책마당’이라는 하나의 카데고리에 통합되어 있을 때는, 새로 올라온 하나의 글은 불과 서너시간만에 2페이지로 튕겨나가며 금세 관심에서 잊히곤 했었다. 그 무엇도 주목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며 문제가 제기되어 시스템적 개편이 이루어졌고, 지금은 각 카데고리별로 세분된 메뉴 아래에서 각각의 글이 과거보다 최소한 세 배의 노출가능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타의 글을 여러 번에 나누어 올리는 행위에 대해 주민들은 리플로 사적 제재를 하고, 이것은 도배 금지라는 암묵적 법칙으로 자리잡았다.

  접근성의 확보는 일조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햇볕을 쬘 수 있는 권리, 즉 온화한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권리는 글 쓰는 이에게 있어서는 양분과도 같은 것이라, ‘우리는 우리의 글에 저작권을 요구한다’(병장 정병훈)와 같은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지나치게 압도적인 글이 다른 글의 빛을 가리우는 것을 방지하고 고른 관심의 분배를 위하여 우리는 <가지로>라는 보다 높은 차원에서의 찬사를 도입하여 리그를 2부로 나누었다.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은 생산의 합목적성을 의도한 것으로, 과거 명예의전당에 선배들이 남겨준 유산을 우리의 가치로 하여 스스로 그러한 사고의 산물을 낳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주거지역에서의 고성방가나 무분별한 광고지 무착, 매연 배출이 인정되지 않듯이, 책마을에서의 과도한 장난질은 질타의 대상이 된다. 목적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2. 책마을은 소유될 수 있는가

  책마을은 어느 누구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모두의 소지분小持分으로 형성되는 일종의 주식회사다. 우리는 우리가 올린 글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유보하며, 그 작은 조각들로 이루어진 책마을 자체는 그저 하나의 큰 묶음집에 불과할 뿐이다. 지금까지 저작권의 문제가 불거지지 않은 것은 이곳이 인트라넷이라는 폐쇄 환경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사바넷에 타인의 글을 동의없이 공개하는 것은, 실제로 법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어쨌건 공개된 공간에 글을 올렸다는 행위 자체는 타인의 이용을 허락하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야말로 완벽한 소유와 이용의 분리다. 이용자는 최소한의 도의를 지키고, 저작료를 지불하는 행위에 의해서 타인의 글을 이용하는 권리를 획득한다. 즉 무분별한 악플을 달지 않고, 합당한 리플로 피드백을 하는 등의 적극적인 관심으로 그의 고마움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글을 올리는 데에도 마찬가지의 도의가 따른다. 개별적 글은 다른 글과의 연계성을 감안하여 생산되어야 하며, 독립적으로 떨어져 나홀로 독고다이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위에서 언급했던 일조권-접근권-생존권-합목적성은 그것을 가늠하는 좋은 기준이 될 것이다. 타인의 글을 마구잡이로 밀어내며 도배를 해서는 안되고, 공간 자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형식적, 내용적 요소를 갖추는 것은 가급적 지양해야 한다. 글은 궁극적으로 사유라는 목적에 부합해야 하니 신변잡기 일색이나 소녀시대 파이팅으로만 점칠되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더불어 다른 글에 대한 일조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잘 썼으면 제발 <가지로> 가야 한다.

  그러한 최소한의 도의는 여러 사람의 언어로 기술되었다. 다음의 글들을 참조하면 대강의 맥이 잡히리라 믿는다.

  글쓰기의 도의(병장 문두환)
  「69(Sixty Nine)」,「Speed」- 무엇이 우리를 열-받게 하는가(상병 정근영)
  공 좀 찹시다(병장 주해성)
  당신이 생각하는 책마을은 무엇입니까?(병장 김민규)



  3. 여기는 네이놈이 아니예요

  가끔 글들을 둘러보다보면, 책마을이 ‘당연히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네이놈이나 다옴 정도의 포털 사이트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종종 있는 것 같다. 이야말로 거대한 오해이며 착각이다. 여기는, 업무용 전산망에 볼썽사납게 얹혀진, 작은 ‘동아리’일 뿐이다.

  동아리는 관심과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간에 공감대가 형성되는 일을 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는 조직이다. 그러니까, 축구 동아리에 들어가서 농구 하자고 요구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책마을에 들어오기로 결정했다면 이곳의 관심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이곳의 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게시판’을 찾는 편이 빠를 일이다.

  많은 어둠의 게시판이 수도 없이 생겨났다 사라지는 인트라넷의 환경이기에 보트피플의 유입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이곳 역시도 그 모두를 무한정 수용하기에는 명백한 한계를 지니는 곳이기에, 일방적 호의를 언제까지고 베풀 수는 없다. 그야말로 남의 돈 빌려 생색내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그러니까 도의적 차원에서 옳을지는 모르겠지만, 능력 밖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곳 역시도 쉽게 지켜진 공간이 아니고, 지금 당장에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기는 상존하고 있다. 제2, 제3의 백업플랜을 강구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 끝에서 마지막 남은 미약한 가능성 하나로 버텨가는 처지다. 모든 누리던 것들이 사라진 곳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남은 단 하나의 자아표출의 방법을 쉽게 포기할 수 없다. 스스로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뚜렷한 정체성의 고수는 고집되어야만 한다. 빅브라더들에게 표면적으로 보일 수 있는 자기계발이라는 그나마의 명분마저 잃어버리고 난 ‘잡기장 책마을’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책마을에는 상당한 고수들이 포진해있다. 이런 사실은 책가지에 올려진 주옥같은 글을 보거나 책마을을 하루만 가만히 들여다봐도 알 수 있는데 이런 이유로 우리 책마을이 정통성을 부여받고 오랫동안 거주이전의 압박 속 에서도 면면히 이어올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나 역시 길게는 A4지 두장이요 짧게는 한 장을 채우기도 힘든 칼럼을 쓰면서도 기꺼이 나의 미천한 내공을 쌓는 도장으로 책가지를 허락해 주신 것에 대해 늘 깊은 감사를 드리게 된다. 
<득도(得道), 하지연>



  책마을의 르네상스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희망을 꿈꿀 수 있다. 지금보다 조회수가 줄어들고 회전율이 낮아져도 괜찮다. 더 높은 비율의 생산물들이 그 섬세한 자태로 충분한 일조량을 누릴 수 있어야 하며, 생산자와 이용자는 달리 구분되어서는 안되고, 우리 모두는 끊임없는 추구로 내적 발전을 일궈 나가야 한다. 프로슈머 경제는 이곳에서 실현될 수 있다. 양화의 선순환은 “당신이 훗날 스스로를 한 권의 책으로 반추할 때, 젊은 날의 한 챕터에 '책마을'이라는 페이지가 쓰여질 수 있”도록 할 것이다(새롭게 인사합니다, 상병 김예찬)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당연한 책무이다. 20대적 열정에 대한 도리이며, 명예의 전당을 이용한 이용객으로서의 당연한 저작권료 지불이고, 미래의 후배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일 것이다. 우리만큼이나 막막하게 어느 날 궁에 떨어진 이들을 위해 마실 물 한 모금을 남겨놓는 것, 그것이 곧 책마을의 계승이고 전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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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가진 특유의 능력은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 그리고 언어를 통해 풍부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의사소통을 통해 이타적 행위를 존속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의사소통을 통해 배신을 경계하고 이타적 행위를 합의할 수 있지 않았을까?

  경제학 이론은 차디찬 결과만을 남겨준다. 어쨌든 공공재는 무임승차하는 것이 이득이다. 개인의 입장에서 군대는 안 가는 게 가는 것보다 2년 이득이고, 어차피 앞집 사람이 청소할 동네 골목은 청소를 안 하는 게 이득 아닌가.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의사소통을 ‘값싼 수다떨기’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실험은 이론적 예측과는 동떨어진 결과를 보여주더라는 것이다. 공공재 게임(*)에서 의사소통을 전제로 했더니, 그러지 않은 경우와 비교했을 때 기부금액 수준이 40~45%가량 추가로 상승했다.

  (*공공재 게임: 열 명의 사람이 각자 1000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이 돈을 원하는 액수만큼 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기부된 총액은 두 배로 곱해져, 모두에게 동일하게 나누어진다. 열 명 모두 1000원을 기부할 경우 열 명 모두 1000원의 추가 이득을 얻는다. 그러나 아홉 명이 1000원을 내고 한 명이 내지 않을 경우, 돈을 낸 사람은 900원의 추가 이득을 얻지만 돈을 내지 않은 사람은 1800원의 이득을 얻게 된다. 이런 식으로 계산해 보면, 돈을 내는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는 기부한 돈 이하의 금액을 받게 되지만 돈을 내지 않은 사람은 무조건 이득을 보게 된다. 이는 공공재의 속성과 흡사하기 때문에 ‘공공재 게임’이라고 부른다.)

  공공재 게임에서 의사소통이 갖는 효과는 크다. 재미있는 것은, 의사소통이 가능한 상태에서 무임승차자에 대한 적발과 처벌이 추가되지 않아도 그 효과는 유지되더라는 것이다.(물론 의사소통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타적 행위에 대해 토론하는 과정 자체가 사람들의 이타적 행위를 촉진시킬 수 있다.

  의사소통이 어떤 차원에서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확립된 이론은 없으나, 몇 가지 가설은 존재한다. 의사소통을 통해 사회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행동이 뭔지 이해할 수 있으며, 의사소통이 이타적 행동을 해야 된다는 의무감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 서로의 진심을 확인함으로써 신뢰가 증대된다는 점, 집단의식이 생겨난다는 점, 의사소통만으로도 배신 전략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 정도가 있는데, 최근 집중적으로 연구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의사소통은 꼭, 얼굴을 맞댄 상태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공재 게임에서 컴퓨터 메신저를 통해 같은 형태로 의사소통을 한 경우, 얼굴을 맞대고 한 것보다 기부율이 현격하게 떨어졌다고 한다. ‘술 한잔’의 사회적 역할은 여기서도 발견된다.

<정리_이타적 인간의 출현, 병장 김현진>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5:52:27 

 

병장 이동석 
  의사소통은 꼭, 얼굴을 맞댄 상태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공재 게임에서 컴퓨터 메신저를 통해 같은 형태로 의사소통을 한 경우, 얼굴을 맞대고 한 것보다 기부율이 현격하게 떨어졌다고 한다. ‘술 한잔’의 사회적 역할은 여기서도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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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좋군요. 허허. 2009-01-27
10:58:55
 

 

병장 김민규 
  책마을의 장미는 정모. 역시 그런 것이었지요 2009-01-27
11:00:18
  

 

병장 이동석 
  그건 그렇고 [과거 명예의전당에 선배들이 남겨준 유산]에서의 이 선배는 그냥 지구를 먼저 살다 갔던 공룡들에 대한 예우정도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할 종묘사직은 아니라고 말하는게 오해의 소지가 적을것 같군요. 물론 남은 뼛조각들로 사골을 끓여먹어서는 곤란합니다. 

우리에겐 그럴 권리가 없어요. 2009-01-27
11:12:30
 

 

상병 이지훈 
  좋은글 고마워요 

책마을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다룬 모든 글들의 내용을 압축해서 담은 듯 하군요 

이런 글 덕분에 오늘도 책마을에 기고할 글을 열심히 닦을 수 있는 것 같아요 흐 

그나저나 책마을의 장미(밤에만 피는?)라니, 저도 보고 싶은데 아직은...흑 2009-01-27
11:14:59
  

 

상병 이지훈 
  동석// 

기가막힌 비유로군요 허허 2009-01-27
11:16:10
  

 

병장 김민규 
  그래요. 명예의 전당이 그자체로 idol은 아니겠지만, 막연한 지향성을 구체화해준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고맙죠. 혹시 압니까. 2년 후 책마을에 이런 글이 남겨질지 

과거 책마을의 르네상스를 이루었던 이동석은...(후략) 2009-01-27
12:1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