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론] 바이마르 헌법 155조를 돌아보며  
병장 김민규  [Homepage]  2009-01-26 04:03:54, 조회: 115, 추천:0 

  바이마르 헌법 155조를 돌아보며
  2009. 1. 26, Minkiw


  “토지의 배분과 이용은 그 남용이 예방되고, 모든 독일인에게 건강한 주거와 모든 독일 가족에게 그에 필요한 주거와 경제공간을 보장하는 목적을 지향하도록 국가에 의하여 감시된다. -- 주거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주거지역의 개발촉진과 이용을 위하여, 또는 농업생산성의 제고를 위하여 토지취득이 필요한 경우에는 토지는 수용할 수 있다. -- 토지의 경작과 이용은 토지소유자의 공동체에 대한 의무이다. 토지에 대한 노동과 자본의 투하없이 성립하는 토지의 가격상승은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이용되어야 한다." <독일 바이마르 헌법 155조, 1919年>


  인간이 삶의 터전으로 삼는 지구는 우주에서도 극히 예외적으로 생명이 존속되기에 알맞은 조건을 갖추었지만, 공간적 유한성이라는 물리적 한계를 갖는다. 드넓은 삼차원의 세계에서 실제로 인간이 개척하며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은 대양과 척박한 산악, 동토를 제외하면 실제로 표면적의 절반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유사 이래로 문명은 강을 중심으로 발달해왔으며, 한정된 공간을 보다 짜임 있게 조직하며 살아가는 데서 문명의 고도화는 이루어질 수 있었다.

  땅을 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생명을 움트게 하는 모성母性에의 일방적 경탄에서부터, 개간과 인공적 구축을 통해 보다 활용이 용이한 상태로 변형시켜야 한다는 적극적 관점에 이르기까지 태도나 방법의 차원에서 수없는 정의의 시도가 이루어져왔다. 분명한 것은, 그 정의가 무엇이건 간에 인간은 어떠한 형태로든 그것을 개발했고 이용해 왔다는 것이다. 이로 인한 환경의 파괴와 지구의 신음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앞서 지적한 활용의 유한성은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을 뿐인 인간에게마저 효율에의 강박을 주었고, 그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정리되었다.


  “토지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인간생활과 생산을 위한 불가결한 기반이기 때문에, 그것이 농지이든, 산림지이든, 혹은 주거지이든 그 토지가 지니는 기능 내지 적성 혹은 지역에 따라 공공복리를 위해 가장 값지게 그리고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되지 않으면 아니되며 그를 위해 적정한 규제가 가해지지 않으면 아니됨을 의미한다.” <서원우, 1982>


  땅이 단순한 사유재산이 아니라 일종의 공공재라는 인식이 등장하고, 이용의 공동체적 책임이 강조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일찍이 유럽에서는 토지공개념이 주장되었으며, 앞서 언급한 바이마르 헌법의 예와 같이, 국가의 적극적 규제에 따른 그의 사회적 활용의 윤리가 명시되었다. 이는 비단 한 국가의 것만이 아니다. 자유중국 헌법은 “자유중국의 영토 내의 토지는 본래적으로 전 국민에게 귀속된다”1)는 문항을 통해 땅이 어느 한 사람에게 독점적으로 속한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하고 있으며, 애초에 국토가 섬이라는 테두리에 묶여 활용가능한 땅이 적었던 영국의 경우2)에는,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법률로서 그 행위규범을 제시하고 있다. 개발의 국유화와 개발허가제를 통한 국가의 감독권을 강화하고, 공공개발이익을 환수하여 그 이윤이 사회 전체에 돌아가게 하며, 보다 짜임새 있는 개발을 위해 국가의 공적취득권한을 강화하고, 국토균형발전을 위해 분산정책을 편 것이 그러하다. 심지어는 자유주의의 적극적 제창자였던 Adam Smith나 John Locke, D. Ricardo, J. S. Mill과 같은 학자들마저도 그 예외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라니 무언가 유별난 것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우리나라 역시도 이 문제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유월의 열기가 남아있던 1989년 정기국회에서, 시민의 대표자들은 택지소유에 관한 법률로 개인의 토지소유상한을 규정하고, 토지초과이득세법과 개발이익환수에 관한 법률을 통해 공공에의 이윤 환원을 지지하였다. 이에는 보다 근본적인 사회적 동의가 깔려있다. 헌법 122조는 “국가는 토지소유권에 대해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제한과 의무를 과할 수 있다”고 못박고 있으며, 민법 2조와 212조는 각각, “개인의 소유권이라도 권리는 남용하지 못하고 정당한 이익이 있는 범위 내에서만 행사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사사로운 이익에 메일 수밖에 없는 미시적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보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공간을 파악하고 설계하여 개발에 만전을 기하기 위함과 다름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접근은 현재에 와서 무수한 의혹을 받으며 비판에 직면해 있다. 무엇보다 땅이 가지는 성격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공공재와 사유재산을 가르는 가장 큰 기준은 ‘한 사람의 사용이 타인의 사용을 배제하는가’에 있다. 땅은, 얼핏 보기에는 그 공공성을 인정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되나, 실제로는 한 사람의 점유가 타인의 접근마저 원천적으로 봉쇄하며 배타적 사용의 권리역시 인정받으므로, 어떤 차원에서 보아도 공공재적 성격을 갖지 않는다.

  아마도 우리가 생각하는 공공성은 외부성(externality)에 입각한 무언가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모든 토지는 주변의 다른 토지와 인접해 있으며, 한 부분의 개발이 다른 부분의 개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이는 타인의 복리를 간섭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다. 현대사회에 있어서 외부성에 대한 고려는 접근권이나 일조권과 같은 구체적인 형태로 진행되고 있으며, 도시계획은 난립하는 건물들 사이에서 거시적 환경을 감안하기 위한 최소한의 개입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문제는 이 개입의 당사자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국가’라는 거대한 힘에 대한 기대를 세밀하게 살펴볼 때, 우리는 그 주체가 결국은 몇몇 사람의 공무원으로 대표되고 만다는 한계에 봉착한다. 두 동의 아파트를 짓더라도 그 안의 세부 동선과 공간 활용의 미학을 위해 수많은 전문가가 투입되어 갑론을박을 펼친다. 하물며 거대한 국토 전체에 대한 활용계획을 소수의 공직자가 수립하겠다는 것은 황당한 발상이다. 그나마 도시계획도 사사로운 이기심을 조율하고 활용가치를 증진하는 방향에서의 접근이 되어야 하지, 공간의 자의적 해석에 따른 강압적 규정이 될 수는 없다. 이러니 소유와 이용을 분리하여 개인에게는 법정지상권만 허용하겠다는 토지공개념은 우리가 편히 납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모든 땅이 국가에 귀속된다면 그 배분은 어떠한 기준에 따라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 실수요자 중심의 배급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을진대, 하다못해 고속철도 분기점을 확정하는 데에도 무수한 진통이 따르는 것을 보면, 이것이 순순히 어떤 확고한 방침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낙관주의다.

  토지의 사유화는 가격이라는 변수를 포함함으로서 가장 높은 지대를 지불할 수 있는 이가 땅을 낙찰 받도록 강제하였으며, 이는 최대한의 밀도 있는 개발이라는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정책자에 의한 일방적 배분이라면? 토지의 활용성은 개인이 가진 투자의 여력에 따라 차별적으로 결정될 것이다. 더구나 언제 이용의 권리를 박탈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작용한다면, 개인은 최소한의 기간에 투자원금을 회수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힐 것이고, 이는 규모성 있는 개발의 가능성 자체를 차단할 것이다. 

  땅이 유한한 것이라는 인식 역시도 막연한 것이다. 매장 총량이 정해져있다는 천연자원의 예를 들어보면, 마구잡이로 시추되어 사용되고 있는 석유의 고갈 위협은 언제나 제기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 부존량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이는 시추의 기술발전과 더불어서 사유화에 따른 가격변수가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예이다. 끌어올려지기에 경제성이 확보되는 원유만이 실제로 활용 가능한 것이다3). 만약 천연자원의 공공적 성격이 강조되어 이의 배분이 다른 기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면, 이러한 동기부여의 장난질은 진작 발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환경오염이 심화되어 날이 갈수록 지구상에 오염되지 않은 물은 줄어들었지만, 마실 수 있는 물의 양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한다. 사유화는 구체적인 이익을 가져옴으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활용 불가능한 것을 개척하게끔 하는 유인을 제공하였고, 이것이 설령 최선의 방책은 아닐 수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까지 발견된 차악次惡의 도구라는 점은 쉽사리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익동기는 우리로 하여금 땅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활용하게 하는 현실적 동인이 된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1989년 정기국회에서 의결된 세 개의 법안 중 두 개는 이미 위헌판결을 받았으며, 다른 하나 - 개발이익환수에 관한 법률 - 도 경기 둔화를 이유로 치일파일 미뤄지다 결국은 사문화死文化를 넘어 폐지될 상황에 처해있다. 여기서부터 인간이 인간 그 자체로 서지 못하는 모순은 시작된다. 땅의 주인은 그곳에 터를 잡고 애정을 가지며 살아온 선점자先占者가 아니라, 더 높은 지불용의를 가진 외지인으로 끊임없이 교체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갖게 되는 것이다.

  효율에의 강박은 저개발의 요지要地를 묵과할 수 없는 주요한 근거로 작용한다. 자유주의적 노선에 따라 불간섭주의를 제창한 자본주의 국가에서보다도, 앞서 언급한 중국과 독일의 예에서 보듯 모순을 국가가 나서 적극적으로 시정해야 한다는 사회주의적 국가에서 오히려 이러한 경향성이 더 짙게 나타났다는 점은 유의할 만한 대목이다. 오히려 미국과 같은 경우에는, 워낙 광활한 대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법령상 토지에 대한 별도의 국가의 간섭적 시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성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적 시각은 그 간섭을 ‘국가’라는 권력을 동원해 실현하고,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지불용의’라는 자본의 힘을 동원해 구체화할 뿐이다. 그러니까 방법상의 차이가 있을 뿐,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바는 같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재개발이 가지는 폭력성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특정 목적을 위해 인간의 삶이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해체의 철학에 있다. 소유하며 이용하던 이는 집단적 목적 앞에 소유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소유권 없이 이용만을 하던 세입자는 낮은 수준의 권리만을 주장할 수밖에 없으며, 소유하되 이용하지 않던 자는 그 무엇도 인정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수적 우세를 빌미로 소수를 몰아내는 억압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법률에 명시되어 절차적 정합성을 인정받는다고 할지라도, 결론은 다르지 않다.

  하다못해 남의 땅에서 농사를 짓더라도 일정 시한이 지나면 그 권리를 점진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이 도리이며 현재의 법적 인식이다. 정말로 불가피하게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여 외부적 재구성을 할 수 밖에 없다면, 기존의 삶에 대한 충분한 존중에서 우러나오는 합당한 보상으로 그것이 타지에서도 지속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임에는 의당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그것이 안정적 주거와 용의한 접근성에 따른 활동에의 편의였다고 하면, 최소한 같은 수준의 그것을 누릴 수 있도록 국가가 나서서 배려해야 한다. 만약 지역상권의 경쟁력에 기반한 상업적 성취였다고 하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 다시금 모험을 감행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할 최소한의 조치는 당연히 따라와야 한다. 그 방법론이 자본적 보상이든, 토지의 국가적 재분배이든, 그것은 이미 중요한 일이 아니다. 재개발 자체가 이념과 방법을 넘어서서 당위로 인정받는다면, 기존민에 대한 충실하고 합당한 대우 역시도 같은 차원에서 접근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의 시선은 너무도 좁고 편협하다. 어느 날 재배치의 대상이 된 개인은 황당한 처우에도 달리 대항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의혹의 눈길만을 받을 뿐이다. 앞전의 글에서 지적한 소위 작전세력과의 연대는 안타까운 돌파구다. 그만큼이나 소통의 채널이 부재하다는 증거이며, 이 사회가 떳떳한 소수의 의견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극단적 파국일 것이다.

  살아있다면, 들어봐야 한다. 요동친다면, 가라앉기까지 기다려 줘야 한다. 그것은 언제 다수로부터 떨어져 소수가 될지 모르는 우리 스스로를 위한 최소한의 보험이기도 하다. 계약으로 구성된 관념이 실존을 부정하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 함께 더 높은 방향을 지향하자는 진보에의 의지가, 일부를 파괴함으로서 여타의 이익을 확보하는 제로섬이 되어서야 곤란한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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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유중국의 영토 내의 토지는 본래적으로 전국민에게 귀속된다. 정당하게 취득된 토지소유권은 이를 보장한다.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은 그 가치에 따라 납세의 의무를 진다. 정부는 이 가격으로 토지를 구입할 수도 있다. 투자의 결과 발생하는 토지의 증가분에 대해서는 국민전체의 복지를 위하여 토지증가세를 과할 수 있다.” <자유중국 헌법 143조>

2) 영국의 국토 총면적은 약 24Km^2에 이르는데, 이중 인간이 점유한 면적은 약 16만Km^2로 무려 67%에 달한다.

3) 시추의 경제학 - 지속적 물가상승과 시추기술의 발달은 원유가격을 상승시키고 시추의 원가를 절감시켜 기업의 입장에서 경제성있는 원유의 범위를 확대해 나간다. 즉, 시추원가와 이윤폭을 감안하여 배럴당 200$의 비용이 들어가는 원유층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국제거래가격이 100$선에 형성되어 있다면 누구도 그것을 시추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원유가격이 200$로 상승하다면, 그 원유는 바로 추출의 대상이 되고 국제 원유 부존량에 포함된다. 즉, 부존량은 지구에 매장된 자원의 총량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접근 가능한 경제성있는 자원만을 계산에 넣는 매우 자의적인 단어다.

※ 가급적 레퍼런스 없이 글을 쓰는 노템전을 평소의 원칙으로 삼는 저이나,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사바넷의 도움을 받았음을 밝힙니다. 학술 세미나의 발제문을 몇 편 읽고, 다양한 출처의 법적, 경제학적, 사회학적 지식을 참고하였습니다. 이는 현재를 어떻게 인식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개인적 물음에서 나온 것이었고, 그 나름의 결과를 공유해보고자 하는 욕심에 비록 '캐쉬빨' 글이지만 슬쩍 남겨봅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8:27:51 

 

병장 김민규 
  제목이 너무 센가. 푹 빠져서 써재끼고 나니 어느새 피곤해져서, 마땅히 다른 제목은 떠오르지 않고, 제목 미정으로 둘까 하다 일단 저질러 봅니다. 피드백 주시면 적정선에서 타협볼게요. 2009-01-26
04:43:08
  

 

상병 이지훈 
  일단 한 번 읽었는데 한 번으로는 부족한 것 같군요. 좀 더 진득하게 읽어볼게요 차례지내고 와서요. 흐흐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2009-01-26
07:45:57
  

 

상병 이지훈 
  음. 캐쉬빨도 실력이 받쳐줘야 나오는겁니다.(예:프리스타일)읽느라 고생했습니다. 흐 
시추의 경제학이라...매우 흥미롭군요. 뭔가 어두운 음모론같은 느낌이...흐흐 어쨌뜬, 

땅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국가 혹은 자본이 땅을 관리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인데 모두 어느 정도 한계를 지니고 있다. 재개발때문에 재배치된 대상들은 기존에 누리던 것에 대한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한계' , 그리고 좁은 소통의 채널 때문에 이것이 어렵고, 최근 이러한 '일'까지 터지게 되었다. 넓고 다양한 소통의 채널을 통해 이를 해결해야 한다. 

제가 이해한 것을 위험하지만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민규님 말씀은 법적 제제 혹은 어떠한 권력으로는 토지 문제, 재개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긴 어렵고 기존민과 개발자, 그리고 제3자들과의 소통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인가요? 

언론(소통)의 문제입니까, 아니면 토지를 관리하는 권력(법)의 문제입니까? 긁적 2009-01-26
08:57:11
  

 

병장 김민규 
  말씀하신대로 배분의 측면에서는, 이념적 차이나 방법론과 무관하게 어떤 형태로든 필요악의 강제력이 작용할 수 밖에 없고, 당장 그것을 극적으로 개선할만한 대안이 제시되기는 사실상 어려운게 현실입니다. 재개발의 필요가 요청될 경우에 모순은 극대화되겠지요. 그 필요를 그저 외면할수만은 없는 이상, 어떤 방식으로든 합의에 도달하는 과정은 필요할겁니다. 

소통의 창구를 마련하고 이야기를 세밀하게 들어봐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민간 안에서의 개별적 노력에는 회의적입니다. 기존민들이 "최소한 같은 수준의 그것을 누릴 수 있도록 국가가 나서서 배려해야" 합니다. 이것은 재개발 자체가 당위적 필요로 인정받는다면, 같은 차원에서 존중되어야 할 당연한 권리입니다. (아래 세 번째 단락 참조) 

즉 삶의 인격성에 대한 당연한 요구이며, 그것이 외면받지 않기를 원하는 희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토지를 보는 시각이나 방법론의 차원은 아닙니다. 2009-01-26
09:24:07
  

 

병장 김민규 
  근데 조용히 머리속으로 따지다 보니 제목에서 155조에 대한 반대를 이야기하는 것은 도대체가 어폐가 있군요. 아마도 잠에 취해 끄적였기 때문이 아니었던지? 표현을 조금 돌려 봅니다. 아마도 보다 부합하지 않나 싶어요. 수위 문제도 해결되고. 2009-01-26
10:01:21
  

 

상병 이지훈 
  소통의 창구라...생각이 많아집니다. 음음 2009-01-26
11:13:43
  

 

병장 이동석 
  어익후, 그저 반갑고 고마울 뿐이죠, 잘 읽겠습니다. 2009-01-26
12:38:16
 

 

병장 김동욱 
  잘 읽었어요. 의문점 드는 것 몇가지. 

말씀하려고 하시는 것은 알겠는데 여러 번 읽어봐도 그걸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헷갈리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는 저의 이해력이 부족하다는 데 기인하는 듯 해요, 흑) 

1. 몇가지 국가들의 사례는 토지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정당하는 걸 보여준다. 하지만 토지는 공공재가 아니며 이런 인식은 토지의 외부성 때문이다. 이러한 외부성의 해결을 위해 국가의 개입이 필요한데, 이것은 일방적 배분이며 황당한 발상이기에 결국에 토지의 사유화가 최선은 아니지만 차악이다, 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럼 인간이 인간답게 설 수 없는 모순이 생기는 것은 토지가 사유화되었기때문이다. 라고 하신 건가요? "문제는 이 개입의 당사자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라는 부분에 몰입해 있어서 처음에는 이 글이 국가에 대한 개입의 문제점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그건 저의 삽질이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에 국가나 자본이나 간섭하니까 같은 것이고 재개발도 그런 간섭의 일환이니까 문제다, 라는 건가요. 

2. 소통의 창구를 마련하고 이야기를 세말하게 들어봐야 한다, 는 결론이면 굳이 바이마르 헌법을 끌어와서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었냐는 의문이 듭니다. 그것을 통해서 말하려는 바는 국가개입이 가지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인 것 같아서 말이지요. 

이 글의 대부분을 "토지를 보는 시각이나 방법론의 차원"에 할애하고 있는데, 결국에 그것과 매치되지 않는 결론. 그래서 이 글을 몇번이나 매달려서 읽다가 무려 방금 위의 댓글을 보고 허무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3. 비배제성과 비경합성이라는 공공재의 정의로 따지면 애초에 토지는 공공재에 속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땅이 가지는 공공재적 성격' 또는 '토지공개념'은 토지가 정의상 공공재에 속하냐, 속하지 않느냐의 문제와는 달라보입니다. 

4. 토지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반드시 "몇몇 사람의 공무원으로 대표되고 만다는" 식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기본적인 국가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기인하는지 모르겠는데 국가의 관리를 통해서 충분히 긍정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토지가 '외부성'을 가지기 때문에 이 문제를 푸는 것이 필요합니다. (코즈의 정리) 민간적인 조정이 가능하다면야 좋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대개 국가의 개입이 요구됩니다. 하지만 그런 국가의 개입을 단순히 몇몇 공무원에 의한 "공간의 자의적인 해석에 의한 강압적 규정"이라고 못박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이후에 결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민간인들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내는 것이- 그리고 그러한 것을 제도로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국가의 개입입니다. 물론 수위를 나눌 수는 있겠으나 두 경우 모두 국가가 개입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토지공개념 같은 제도가 확립된다면, 그 이해당사자를 협상테이블로 끌어들이는 국가의 역할이 한결 수월해 질거라 생각합니다. 

5. 토지의 이용은 어디까지나 경제문제의 영역 안에서만 끝날 것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으로 옮아와야 합니다. 그냥 시장에 맡겨놓는다면 "땅의 주인은 그곳에 터를 잡고 애정을 가지며 살아온 선점자先占者가 아니라, 더 높은 지불용의를 가진 외지인으로 끊임없이 교체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피할수 없습니다. 고로, 정부가 개입해야 합니다. 만약 시장에만 다 이뤄졌다면 그나마 농지는 농사를 짓는 이들만 소유할 수 있다는 경자유전의 법률 역시 남아있지 않았을 겁니다. 

민규님이 말씀한 것처럼 국가의 개입이 부정적일 수 있는 여지는 상존합니다. 국가가 자신들만의 지대추구rent-seeking를 위해 행동한다면, 이는 자본의 행태와 별다를 바가 없을 겁니다. 아니, 오히려 "국가의 실패보다 시장의 실패가 낫다"는 말처럼 더욱 심한 문제를 만들어낼 지도 모릅니다. 토지관리가 몇몇 공무원에 의해 처리되는 것도 그런 것이겠죠. 

하지만 국가의 개입은 무조건 문제점을 양산한다는 생각은, 신자유주의의 복음 중 하나입니다. 이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그런 부분은 시민들의 참여와 제3부문에 의해서 충분히 교정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국가의 개입에 따른 성과가 결정되는 것이지 그 자체로 판단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민규님이 말씀하신 이야기가 이런 부분은 아닌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끝부분에 말하려고 했던 것이 중요한 것일텐데 글 중간에 이런 식의 전개가 보이기에 약간은 오버일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붙잡고 있었으니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길. 2009-01-28
03:54:14
  

 

병장 김동욱 
  저 역시 재개발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최근의 문제는 단순히 재개발 자체의 정당성의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도시정비는 분명히 필요한 사업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실행해나가는 데 있어서 기존의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세입자나 상가입주민들이 피해를 받지 않도록 진행하는 공정한 제도적인 절차를 수립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석훈이 우선 망자에 대한 예의를 갖춰라, 라고 했는데 이런 말 하기가 그렇지만 말이지요.) 결국에 민규님이나 저나 생각하는 건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위에서 더 헷갈렸던 거구요. 

현재의 재개발의 문제점을 자세히 들여다보려면 '땅값경제'나 '서울로의 초집중화', '토건국가' 등에 대한, 즉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이 더 설득력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덧. 위의 땅이 유한하다, 라는 생각에 관해서는 마찬가지로 위에 나오는 인물인 리카도의 차액지대론을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땅이 더 많이 개발된다고 해서 다 같은 땅이 아니기에 결국에는 기존의 좀더 좋은 땅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 더 많은 차액을 챙길거라는 겁니다. 애초에 토지 자체가 누구의 소유의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웃기다는 건 차치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더 좋은 땅을 물려받았다고 해서 더 많은 이득을 얻는 건 불공평하지 않나요? 토지공개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기에 뭐라 말하기 망설여지지만 적어도 가능한 누군가의 이해관계에 치우침이 없도록 공적으로 관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덧2. 참고하신 자료를 말씀해주시는 게 좀더 이야기하기 편하지 않냐는 생각이 듭니다! 2009-01-28
04:08:35
  

 

병장 김동욱 
  생각해봤는데, 제가 헷갈린 이유는 이 글이 바이마르 헌법을 비판하면서 시작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재개발에 대해서 바이마르 헌법적인 해결책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게 제목을 고치신 민규님의 고민이기도 했던 것 같구요. 2009-01-28
07:04:55
  

 

병장 김민규 
  동욱님 오셨네요. 히히. 나는야 강태공 

우선 이 글의 배경에 대한 약간의 설명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글은 저의 평소의 이해를 담고있다고 하기보다는, 대안의 모색을 위한 자료탐색과 사고의 흐름을 따라 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토지의 상품화가 모순의 근본적 이유라고 생각했고, 그를 비판하기 위해 평소 막연하게만 이해하고 있던 토지공개념에 다가갔습니다. 공공재적 성격을 따진 것은 公이라는 단어가 주는 도의적 결벽성때문이었는데, 적절한 수준에서의 현실적 판단이 필요했기 때문이지요. 

사유화에 따른 물신주의가 빚어낸 강박적 개발론을 반박하기 위해서 그것에 다가갔지만, 오히려 바이마르 헌법은 저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그러니까 자본적 접근과 방법론적인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인 목적성은 같았어요. 오히려 상품화보다도 더 위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사회주의에서 오히려 더 전체주의적이며 국가적인 불도저식 접근이 용이하겠더군요. 그것야말로 어떠한 목적성 아래 인간의 '삶'을 해체하는 것이었습니다. 

국가권력이 법규라는 형태로 구체화되면(그것도 헌법이라는 최상위법이라면) 분명 부패와 남용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고, 이에 대한 우려는 과도해서 지나침이 없습니다. 오히려 권력에 대한 낙관적 기대야말로 견제해야 할 것이지요. 말씀하신대로 민간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는 효과적 중재의 자세야말로 제가 기대하는 국가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바이마르 헌법에서의 맥락만으로는, 그 구체적 실천방법에 자의적인 해석의 여지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반대하면서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배신감때문입니다. 자본적 접근을 비판하기 위해서라도 저의 기대감을 충족해 줬어야 했는데, 이건 노선과 방법의 차이가 있을뿐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바가 같으니까요. 저의 사고는 허무로 흐릅니다. 자본적이든 국가적이든 결국은 이상理想은 없고, 그렇다면 그나마의 차악을 택할수밖에 없는것이라는 현실론적 타협에 들어갑니다. 도시주의자인 저의 신념을 포기하고 뭔가 인간적인 해법을 찾기 위해 公을 찾았더니, 그야말로 工인 것을 어떡합니까. 

피할 수 없는 필요악이라면, 그나마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쪽을 보다 섬세하게 배려하는 것이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겠지요. 억지로라도 도시주의에서 벗어나 보려고 애를 썼는데, 다시금 재개발 자체에 대해 반대할 명분을 잃어버렸습니다. 가장 바이마르적인 시각으로, 그러나 방법적인 측면에서는 가장 자본적인 입장으로 회귀하고 맙니다. 보상이라도 제대로 해 주자. 돈으로. 

시각과 방법론에서 해법을 찾아보고자 하다 결국 그것에는 답이 없음을 깨달아버리니, 완벽한 용두사미가 되어 글은 중언부언이 되어버립니다. 일관된 입장을 견지해야 할 것은 가장 기본적인 글쓰기의 도의일진대, 그저 사고가 흘렀던 방향을 시간순서대로 나열하니 답이 없었던 과정만큼이나 뒤죽박죽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우리의 현실인지도 모릅니다. 

첨언해서 구체적인 소스들을 밝히지 못한 것은, 워낙 다양한 사이트를 돌아다녔기 때문이기도 하고, 딱히 출처라고 하기 애매한 것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들도 퍼놓고 어디서 펐는지 몰라요. 그러니 그걸 2차적으로 보는 사람은 <누구누구 네이놈 블로그> 이렇게 적는 수밖에는요. 세상에 2009-01-28
12:07:53
  

 

병장 김민규 
  말씀하신대로 차라리 서울로의 집중화를 실용적이고 선험적인 관점에서 돌아보는 것이 훨씬 유용할 뻔 했고, 설득력 있었을 것입니다. 동욱님의 어지러움은 순전히 '다른 곳에서 대안을 찾아보고자 한' 저의 뻘짓때문이예요. 그러나 그 역시도 그냥 하나의 접근입니다. 언급하신 주제역시 하나의 유효한 접근의 차원에서, 또 하나의 보론으로 다루어보고자 하는 생각도 있었어요. (잘 나올지는 모르겠습니다. 워낙 지식의 기반이 얕아서. 그래서 망설이고 있습니다) 

어렵습니다. 왜 쉽사리 효과적인 대안이 안 나오는지 몸으로 느끼고 있어요. 정말 우리는, 가장 덜 악한 악마에게 이 사회를 맡겨야만 하는 걸까요? 2009-01-28
12:20:31
  

 

병장 김민규 
  차액지대론에 대해서 종일 생각을 해 봤는데, 토지의 상품화를 부정할 수 없는 이상 상속세나 증여세와 같은 일률적인 룰로 그것에 접근해야지, 단지 토지의 형태로 넘겨줬으니까 그것의 공공성을 근거로 재산권의 침해에 이를 수 있는 공적 개입을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1. 주식으로 넘겨주었다고 하더라도 다 같은 주식이 아닐뿐더러 거래행위가 자유롭게 보장되는 이상 특정 토지를 소유한 것이 죄목이 될 수 있는가. 어차피 희소성과 가격변동의 차별성은 동일한 것이 아닌가. 

2. 투자의 관점에서 토지를 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인위적인 법령을 통해 다른 방법으로 상속하도록 유도한다면, 실수요에 의한 가택 상속은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일정액수나 평수로 그것을 구분한다는 것이야말로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이 아닌가. (물론 동기님이 지적하신, 최상위층이 투기목적으로 주택과 토지를 보유하는 현실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나 선의의 피해자 양산이 우려된다는 겁니다.) 

왜이렇게 개입에 부정적인가 하면, 놈정권때 피박을 써서 그래요. 급히 해야 할 일이 생겨서 하고 싶은 말은 다 못하고 남기고 가네요. 2009-01-28
17:1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