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론]'위기론'에 부쳐(3)- 책마을의 술잔과 우리의 발걸음에 대해서  
병장 홍석기   2008-12-24 10:46:10, 조회: 200, 추천:0 

1,2 부는 동석님의 강권(?) 으로 인하여 책가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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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3. '위기론‘에서 얻어야 할 것들.

3-1.‘양적 발전’ 뒤돌아 보기.
잠깐 순호님의 댓글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양적 발전’의 한계를 논할 때 다음과 가은 지적을 받곤 합니다. ‘아 글이 너무 많아,’ ‘하얀 건 백지요, 검은 건 종이라.’ 글이 지나치게 많아 심도있는 논의를 방해하고, 양이 많아봤자 정작 내용은 별로 없다, 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 논리에 대한 카운터 펀치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2부에서 이미 논의하였듯이 일단 글이 많으면, ‘읽을 거리가 늘어나고, 생각 거리가 늘어나며, 고민 거리가 늘어나고, 나눔 거리가 늘어나’ 죠. 즉 소통의 스펙트럼이 늘어나고, 그만큼 더 많은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겠지요. 순호님의 비유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술자리’를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술자리에 가면 어떻게 합니까. 적당히 알코올도 들어갔겠다, 무거운 주제든 가벼운 주제든, 말이 되든 안되든, 관심이 있든 없든 일단 말을 꺼내고 억지로라도 받아쳐 주고 하면서 소통을 이루어 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번 술자리를 같이 한 사람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죠. 또한 이런 이유에서, 내용이 어렵고 주제가 어떻든 간에 우리가 최대한 말을 많이 나눠 보는 것이 중요하다, 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단지 여기에는 ‘책마을’이 ‘술자리’와 같다, 또는 최소한 비슷한 성격을 띌 수 있다‘는 가정 하에, 라는 문장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아쉽게도 이 가정은 참이 될 수 없습니다. 그 근거를 들어보죠.


‘술자리’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앉아 말을 나눕니다. 이러한 ‘술자리’의 성격상, 말의 길이가 길든 짧든 횡설수설이든 간에 우리는 서로의 표정과, 대화의 톤을 느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상대방의 말 속에 녹아있는 그 감정을 읽을 수 있지요. 또한 같은 방식으로 나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소통이 이루어 집니다. 하지만 책마을에서는 상대방의 표정은 커녕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으로, 서로에 대한 단서로는 ‘병장 이동슥’, ‘병장 홍쉑기’ 라는 아이디 뿐이고, ‘텍스트’만이 유일한 소통의 수단입니다 (심지어 이모티콘도 금지되어 있죠). 말과 글은 현저히 다릅니다. 상대방의 톤, 표정, 감정을 읽을 수 없고 나의 감정을 전달할 수도 업습니다. 기본적으로 텍스트는 무미건조할 뿐이죠.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술자리처럼 짤막짤막한 대화나 횡설수설을 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감흥도 불러 일으키지 않고, 상대방을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소통’은 요원할 뿐이죠.


사실 ‘술자리’와 같은 대화를 나누고 싶으시다면, 책마을보다 더 나은 곳이 있습니다. 바로 ‘내무실’입니다. 어쩌면 술자리보다 더 술자리 같은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최적의 공간입니다. 서로의 얼굴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서로의 말투, 버릇, 생활양식 모두를 너무나도 잘 숙지하고 있으니까요. 진짜로 술을 까지 않아도, 충분히 소통을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외롭다고, 심심하다고 저렇듯 소통을 위해 주어진 공간을 버리고 ‘책마을’에서 소통을 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혹시나 근무시간이라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서, 라고 생각하신다면, 당신이 책마을에 온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네가 외롭든 얼마나 외롭든 ‘책마을’이 그것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요. 일시적으로 그것을 잊어버릴 수 있을 뿐, 그 외로움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는지요. 외로운 것이 외로운 거지, ‘책마을’ 이라고 럭키 세븐이 되지는 않겠지요. 우리가 이러한 태도를 유지한다면, 우리의 ‘공허함’은 채워질 수 없을 것입니다.



3-2 발걸음.


‘공감’과 ‘소통’은 간단한 리플의 메아리나 단순한 끄적인 만으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글내생각: 6000자 이상의 글만 허용, 연재: 더블엔터 금지, 일상이야기: 3000자 내외 권장, 이렇게 가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지, 다음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한 발 내딛어 준다면, 각자의 자라온 환경도, 인생도, 세상도 너무나 다르기에 아직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들 이지만, 내가 당신을 위해 먼 거리를 뛰어온 만큼 당신도 먼 거리를 뛰어와 줄 수 있다면, 딱 그만큼의 성의를 서로에게 보여준다면, 우리는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당신이 경험한 사건에 대해, 관심사에 대해, 꿈에 대해서, 내무실원들이든, 친구든, 책이든 
그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고, 자신의 머리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약간의 시간을 내어 글에 옮겨 적어 봅시다. 그러면서 조금씩 사유와 소통의 원석을 다듬어 봅시다. TV 보고 플스 하고 할 거 다 해 가면서 책마을까지 다 하려고 하지 말고, 정말 책마을을 사랑하신다면 약간의 시간을 쪼개서 서로간의 사유의 결과물을 교환하여 봅시다.  ‘소통’ 해  보자구요. 일전에 박종민씨는 이렇게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또래의 청춘들이 겪는 아픔이란 사실 크게 보면 몇 가지 사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누군가는 사랑에 울고, 누군가는 녹록치 않은 경제형편에 울고, 누군가는 불안한 미래에 울 뿐이라고. 우리 세대의 고민이란 보편적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글이든 간에, 치열한 사유와 고민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담겨 있을 수 있다면, 충분히 모두의 공감을 가지고 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낙현님의 댓글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그 동네가 변해도 ‘사람이 사는 곳’ 이란 것은 바뀌어서는 안 된다고. ‘책마을을 사랑하는 사람’은 바뀌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부단히 책마을을 책마을로 만들어야 하고, 그걸 게을리 한다면 변화도 위기도 뭐도 말할 것도 없이 그냥 책마을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고.  지금 책마을은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인문, 독서’ 를 주제로 한 인트라넷 커뮤니티를 넘어서, ‘시즌 2’라는 이름으로 ‘20대를 위한 소통의 장’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변화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왜 ‘소통의 장’ 을 원하는지, 왜 변화하려고 하는지 근본적인 이유를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밖에 나가면 하지도 않을 잡담 늘어놓자는 것이 그 이유는 아니었을 겁니다. 서로의 의견을 모아 우리의 현실을 파헤쳐 보고, 우리의 아픔을 나눠 보고, 우리 세대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해결책을 강구해보자, 는 것이 근본적인 이유가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이것은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책마을이 위와 같은 기능을 계속 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치열한 사유와 소통의 시도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날마다 ‘일정 수준 이상’ 의 책을 일고 ‘일정 수준 이상’의 독서후기를 남겨라, 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맨날 골 아픈 이야기만 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지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모두에게 울림을 주며, 서로의 아픔을 쓰다듬어 줄 수 있는 글을 몇 번이나 만들어 보았는지, 이곳에서 나누어 보았는지 말입니다.



이상은 정병훈님의 글을 재구성하여, 3부작으로 제 의견을 개진해 보았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책마을에는 ‘위기론’이 들이닥쳤고, 병훈님은 홀로 치열한 사유의 결과를 우리에게 쥐어 주며 싸워 나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일이 많다는, 휴가가가 임박했다는, 또는 단순히 귀찮다는 핑계로 함께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던 사이, 필진이기도 했던 병훈님이 책마을을 탈퇴해버리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필진이 ‘사퇴’가 아닌 ‘탈퇴’를 한 경우는, 이승일 씨를 제외하고는 전무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나마 승일씨의 경우도 여기가 아닌 사바넷에서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후회감이 물밀듯 밀려왔습니다. 같잖은 이유로 대응을 회피했던 저도 책임을 면할 수 없으니까요. 그 후, 병훈님의 글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저 말고 이미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병훈님은  ‘뻘짓’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서 제가 본 것은 책마을에 자신만에 ‘정의’를 내리고, 그 ‘정의’를 벗어나지 못하여 ‘변화’를 거부하는 ‘진리 의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계몽주의자’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병훈님과 동석님은 책마을을 단순한 독서 커뮤니티에서 ‘20대를 위한 소통의 장’ 으로 변화시키려는 나름 원대한 이상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어떻게 그 이상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 병훈님은 책마을이 지니는 한계를 넘어야 가능성이 열린다고 보았고, 동석님은 더 많은 가능성이 열린다면 자동적으로 한계를 넘을 수 있다고 서로 정반대의 접근을 시도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병훈님의 경우는, 문제점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뿐이고,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가 원하는 대안 공간으로서의 책마을을 원한다면, 이 한계를 돌파할 필요가 충분이 있습니다. 진심어린 고민 없다면 소통의 장이 필요할 수 있을까요.  


병훈씨가 이야기했던 ‘책마을 부흥’은 주민들을 상대로 충고를 하거나 무지한 너희들은 이렇게 하면 안된다, 같은 계몽주의를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들 충분히 똑똑하고 자질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시도하려 하지 않는가, 에 대한 아쉬움의 토로이며, 좀더 힘을 내보자, 는 격려와 성원을 보내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봤자 뻔한 얘기고 다 아는 얘기다, 말은 쉽지 쉽게 되겠냐, 또 이런 글 올려봤자 얼마나 바뀌겠냐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네, 우리는 이상의 세계에 영원히 도달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나아가 봤자 1이 아닌 0.9999...에 머물 뿐이죠. 싸워서 이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상에 닿을 수 없다 하더라도 그곳을 향해 내딛는 한 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그것이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체 게바라가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하지만 가슴 속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고 말한 것도, 꿈을 접고 일단 토익책 사자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실천해보자는 의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럼 이만, 긴 3부작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이 내딛을 한 걸음을 기대하면서.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1-02 13:42)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3:08:01 

 

상병 이동열 
  첫 댓글을 기록하게 되겠네요(웃음) 잘 읽었습니다- 
사실 뭔가 좀더 진행된 논의이었기를 바랬는데 
어쩌면 제 생각보다는 부드러운 글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구절이 마음 속 깊이 와 닿습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하지만 가슴 속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한번씩 저도 되뇌이는 구절입니다. 학교 다닐 무렵 가까웠던 선본의 이름이기도 했기에- 
요즘따라 부쩍 생각하는 화두이기도 합니다. 
궁생활에서 지내는 동안 저도 리얼리스트이고 싶었기에- 
풍차에 돌진하는 돈끼호떼마냥 궁생활에 돌진하여 바꾸고 싶었지요. 
물론 좌절하고 있습니다(웃음) 

아무튼 여기서 문제는 아무리 리얼리스트가 되자고 외쳐도 석기님의 말씀하시는 "또 이런 글 올려봤자 얼마나 바뀌겠냐고 하시는 분들"조차 적을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무얼 바꾸려하는지 왜 바꾸려하는지도 이해가 가지 않으실 분도 계시겠지요. 이런 상황에서야 말로 진정한 '소통'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을 구성원 대부분이 의견을 개진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008-12-24
11:46:34
  

 

병장 정병훈 
  누가 제 이름을 부릅니까. 

글이 올려진지 아직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고, 참여도 많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석기님께서 생각하던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긴 조금 힘들어 보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예지) 그것이 제가 생각한 것이 정답이라면 말입니다. 

더불어, 조금은 진보된 얘기가 나왔으면 했으나, 결국은 제자리의 모습을 보여주는것 같습니다. 좀더 진행된 논의가 나오거나, 석기님만의 해결책이나 모범답안이라도 제시되어 있길 바랐는데 말이죠. 

다만. 석기님께서 말씀하신 이 부분이 사실이길 바랄 뿐입니다. 저는 적어도 석기님의 말씀이과 같은 꿈을 꾸고 있습니다. 동석씨는 모르겠군요. 동석씨와의 몇번의 얘기속에서도 저는 사실 느끼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것이 바로 누구누구의 책마을이고, '대부분의 주민분들이 원하는가'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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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훈님과 동석님은 책마을을 단순한 독서 커뮤니티에서 ‘20대를 위한 소통의 장’ 으로 변화시키려는 나름 원대한 이상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어떻게 그 이상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 병훈님은 책마을이 지니는 한계를 넘어야 가능성이 열린다고 보았고, 동석님은 더 많은 가능성이 열린다면 자동적으로 한계를 넘을 수 있다고 서로 정반대의 접근을 시도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병훈님의 경우는, 문제점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뿐이고,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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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 
말씀대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말씀하신대로 하실거라 믿고 있겠습니다. 2008-12-26
17:23:54
  

 

상병 정근영 
  공감합니다. 
책마을의 문이 닫히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에게라도 열려 있는 만큼 글을 쓸때 책마을의 의미를 한 번 곱씹어 주셨으면 합니다. 
생각해보니, 저는 오히려 병훈씨와 같은 입장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병훈씨의 자극적인 단어들에 자극을 받고 눈이 멀어, 맹목적으로 병훈님을 비난했을 뿐이지요.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2008-12-26
21:46:12
  

 

병장 김동욱 
  몇 번을 읽다가, 댓글을 달려하다가, 그냥 에잇 모르겠다하며 인트라넷 창을 닫고 책을 읽다가, 머릿속에 뭔가 오가는 찝찝함때문에-일종의 책마을에 대한 부채의식 같은 것일지도- 다시 근처에 있는 광부님의 눈치를 봐가며 자리를 잡고 고쳐앉았습니다. 

'소통'. 사전을 찾아보면 너무 쉽게 정의되있는 것 같은데, 사랑이니 이해니 하는 단어들이 그런 것처럼 거기까지 다다르는 길은 결코 순탄해보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거기다 앞에 '진정한'이니 '깊은' 이니 같은 형용사(결국엔 동어반복일지 몰라도)까지 붙어버린다면 첩첩산중. 다른 그 쪽을 향해 있는 것 같은데 누구는 이 길로 가고 누구는 그 길이 아니라고 하고. 

사실 굳이 배배꼬고 이런저런 비유과 인용으로 가득차 있지 않다하더라도 단순한 한두마디일지라도 또 그것이 어쩌면 자신과 하등 관계가 없어보이는 것이더라도 - 그것이 어떤 이에게는 따스한 손길이 되어 그를 어루만져주며 그의 일상의 속살들이 영글어질 수도록 해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건 다 집어치우고 사랑한다는 누군가의 한마디가 힘겹게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작은 힘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맨체스터 대학의 자그마한 책자 하나가 케냐에서 쓰레기를 뒤지며 마약에 찌든 생활을 하던 이를 그 곳에서 벗어나 그 책자 속의 대학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케이스들을 들먹이며 그것을 일반화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석기님말마따나 우리가 이야기하는 공간에서는, 소통의 상당부분을 담당하는 대부분의 비/반언어적인 정보들은 텍스트 속으로 기어들어가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의 표정과, 대화의 톤" 같은 것으로서 한발앞서 눈치를 깔만한 요소가 전혀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이 공간 안에서 미약하나마 소통을 원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우리들의 이야기를 위해 한발 내딛고자 한다면, "치열한 사유와 고민의 흔적"을 들어내보일 수 있도록 그 속에서 자신을 들어내보일 수 있도록 -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모니터든 연습장이든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것이 아마 이 공간에 대한, 그리고 오늘도 이 공간에서 '소통'이란 걸 부여잡고 있는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며 정성일 겁니다.그렇다고 글이 어떠해야한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그만한 식견도 없거니와 시야도 갖추지 못한 중생이 감히 그런 주문을 하겠습니까. 일종의 마음가짐(?) 같은거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전에 허원영씨의 글이었나, 거기서 댓글을 달때 적어도 세네번은 글과 댓글을 읽어보고 단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뭐 다들 그렇게 하는게 옳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의 사려깊고 논리적인 글들을 그냥 나온게 아니라는 거죠. 저와는 거의 안드로메다수준인 그런 레벨조차 그런 노력을 한다는 데 조금 귀를 기울였으면 합니다. 불완전하기만한 텍스트만을 통해서 소통이란 대업을 달성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겁니다. (그렇기에 '술자리'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을 겁니다. 여긴 애초에 너무 신경쓸게 많으니까.) 

그 곳으로 향하는 길 가운데 무탈한 길은 없으며, 또한 첩경도 없을 겁니다. 거기다가 알튀세르를 말하는 누군가는 되고, 전민희를 말하는 누군가는 안되지도 않을 것이고. 결국에는 우리가 아는 가장 단순한 방법만이 남아 있을 것이고 그렇기에 그 과정이 어쩌면 즐거울지도 어쩌면 지난할지도 모릅니다. 
. 

다들 알고 있잖아요. 그렇게 시작해보자구요. 2008-12-27
23:42:04
  

 

책마을 
  보론이니 한몸입니다 일전에 이야기된 글들과 함께 가지로 2009-01-02
13:43:37
  

 

병장 이동석 
  저는 이 글이 이동슥에게 별로 비판적이지 않기에 이 글에 비판적입니다. 그러나 이 글이 별 다른 논의를 증폭시키지 못했기에 이 글에 대한 판단은 유보해야겠습니다. 

다만, 요새의 흐름을 보면, 소통이 불가-하다고 느끼기 된 원인은 김동석씨의 글에서 단초를 찾을수 있을듯 합니다. 

[소통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소통은 오히려 이전보다 요원해졌다. 물론 우리가 정치가와 언론의 수완에 놀아난 것만은 아니다. 이건 모두의 자작극이다. 골치아프게 최선의 길을 강구하는 대신 정치적 제스처에 적당히 울고 웃으며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늘어놓는 편한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두셋의 진영에 적당히 설득력있어보이는 쪽으로 붙어서 분노를 표출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아주 쉬운 일이며 아무런 해도 없다. 물론 아무런 득도 없다.] 

물론 1:1 대입은 불가능하겠지만, 당연히 응용-변주-적용시켜보면 우리가 할 이야기가 생깁니다. 왜 일전에 쓸데없다고 생각되는- 이를테면 책마을 특권층-비특권층의 논쟁이 불거졌는지 어째서 우리의 논쟁은 파국으로만 흘러가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2009-01-04
02:04:56
 

 

병장 이동석 
  저는 이 글이 이동슥에게 별로 비판적이지 않기에 이 글에 비판적입니다. 그러나 이 글이 별 다른 논의를 증폭시키지 못했기에 이 글에 대한 판단은 유보해야겠습니다. 

(이 말은 이 텍스트 자체로의 의미보단, 이 텍스트가 유발하는 현상-이 더 유의미하다고 생각했기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진 유발한 현상-이라고 해봐야 무관심-이기에 판단을 유보 하는것입니다.) 2009-01-04
02:0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