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절과 순응에 대하여 
 
 
 
 
- 序

고등학교 시절, 어떤 선생이 모종의 이유를 들어 푸닥거리하던 게 생각난다. 학생들에게 아구창 한 대씩을 날리던가 하던 중이었는데, 그 때 어떤 노회한 학생 하나가 맞고는 짐짓 더 태연한 표정을 짓던 기억이 난다. 나는 이보다 더한 것도 많이 겪었고 이 정도 린치쯤은 내게 아무렇지 않으니 신경쓸 것 없으시다는 것처럼. 더 때려도 얼마든지 맞아드릴 수 있다는 표정으로 상기된 한쪽 볼을 내밀더랬다. 그의 인상은 참으로 진취적이었다. 그 때 나는 나와 다른 세계의 언어가 있음을 알았고, 그 언어가 곧 내 것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그는 과연 처음부터 그렇게 진취적이었을까. 그게 아니었다면, 맨 처음 손찌검을 당했을 때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어떻게 그 순간을 이겨냈을까. 
내 경우에 그것은, 아편이었다. 사람이 상처 앞에서 첫 번째로 취하는 반응은 고통의 상쇄였다. 일단 어떻게든 고통은 누그려져야 했다.




마음 한 구석을 이리에게 뜯어먹힌 날에도, 새 살은 어김없이 드러난 상처 속을 채워갔다. 마치 기계처럼 아무 말 없이 손에 잡히는 일거리를 주섬주섬 기우는 여공들같이, 채워지는 새 살은 뜯어먹은 자가 누군지 묻지 않았다. 

상처를 수습하기에도 벅찼다. 이유는 항상 나중에 예고되었다. 발가벗겨진 후에도 옷가지를 그러모아야 하는 사람처럼, 맞아서 부풀어오른 곳 멀쩡한 곳 모두, 건지지 못한 것 건질 수 있는 것 모두 처연하기만 했다. 하지만 처연하게 비어있는 환부 속 살은 꾸역꾸역 자라났다. 새된 구석구석 몸은 새 핑계를 만들어 상황에 의미를 부여했다.

차분해지지라도 않았다면 난 그 시간을 어찌 견뎌내었을까. 내 안의 이유와 내 밖의 원인이 팽팽히 맞붙는 가운데 어디로도 튕겨나지 못하고 박혀 있던 그 비좁은 속. 건드리면 터져버릴 것들을 팽팽히 에워싼 듯, 차분함은 애초에 차분하지 말았어야 할 것이었기에 오히려 평온했다. 그 평온은 자길 물어뜯는 이리에게 허점 하나라도 더 보여주기 싫다는 저항이기도 했고 결코 평온할 리 없는 제 스스로에 대한 모멸이기도 했다. 더러는 ‘피든 눈물이든, 쉽게 흘러내리고 싶지 않았다’고 발악하고도 싶었지만, 실은 그렇게라도 말해두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으리란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기워진 상처 아래를 나는 오래오래 앓았다. 태연하지 않은 속이 태연한 겉과 부대낄수록 더욱 그러했다. 평온함은 애초에 저항이었기에 의식적으로 지속되었고 애초에 모멸이었기에 평온은 더욱 은밀한 평온을 낳았다. 

평온은 복제되어 내 몸 구석구석 아프지 않은 부분까지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무엇을 견디는 것과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은 가면 갈수록 구별하기 어려워졌다. 그 가운데 유보된 것들은 언제까지고 유보되었다. 진심이니 이유니 하는 것들은 처음엔 꺼내보는 게 무서웠고 다음엔 꺼내는 게 의미가 없어 보였다. 내가 정녕 무엇을 원하는지가 점점 비어갈수록 나는 내 평온함의 일관성에 집착했다. 진심의 논리는 어려웠고 평온함의 논리는 쉬웠다. 누구나 자기 삶을 말이 되게 꾸리고 싶은 욕망이 있었으므로, 터질 곳 없는 그 욕망은 이상한 방향으로 투철해져갔다. 가오가 갑자기 생명처럼 여겨진다거나, 혹은 술자리에서 처음 만난 여자들이 가끔씩 진심으로 사랑스러워 보일 때도 있었다.

내 진심이 함부로 다뤄졌으므로 다른 진심도 함부로 다뤄졌다. 그 속에서 진심이고 이유를 이야기하는 것은 점점 철없는 소리로 여겨졌다. 순진하다고, 덜 겪어서 그러는 거라고. 중요한 건 이등병의 행동양식이지, 이등병의 진심이나 그 행동양식의 이유 따위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얘기들은 꼭 내 상처를 주섬주섬 기웠던 그 때의 기억을 비웃는 듯했다. 그건 꼭 내 몸을 비웃는 것 같았고 내 초라한 역사를 비웃는 것 같았고 나조차 모르는 내 진심을 비웃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 말들은 말이 안되면 안되는 대로, 말이 되면 되는 대로 기분 나빴다. 이유를 안다는 건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태도의 문제였으므로, 진심을 말하는 것은 항상 어딘가 비참했고, 나는 호방하게 닦아온 내 평온함의 질서를 건드리는 게 싫었다. 숫제 ‘뭘 좀 아는’ 사람과 얘기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감정의 기복에 비추어 비교적 적은 변화를 보이는 표정을 갖게 됐고, 그것이 정치적 올바름으로 어떻게 재단되는지에 상관없이 “이등병은 처음에 갈궈야 일을 빨리 배운다”는 말에 공감하게 됐으며, 세상의 진실에 대해 얼마간 무심해졌다. 근본을 이야기하고, 근본에 딸릴 요령을 이야기하고, 그 요령에 미분되어버릴 근본을 이야기하고, 요령을 이야기하고, 요령‘만’ 이야기하고, 세상은 먹고 사는 요령으로 가득했다. 어떤 경우에도 요령은 근본보다 아름다웠다. 드러난 웃음은 드러나지 않은 사랑보다 아름다웠다. 파업보다는 성공신화가 아름다웠다. 근본이 빠진 요령은 사랑없는 섹스처럼 비참했지만, 꿩 대신 닭이라고 그도 과히 나쁘진 않았다. 세상은 원나잇스탠드로 넘쳐났다. 사랑이 없는 사람보다 테크닉이 없는 사람이 더 싫듯, 근본이 없는 사람들보다 요령이 없는 사람들이 더 미웠다. 자본가보다 시위꾼이 더 욕을 듣는 것처럼. 

나는 그런 나를 더 이상 예전처럼 미워할 수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나는 이미 나에게, 또 나같은 그들에게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있었다.


사람도 술도 외로움도 그립지 않은 나날 속, 쉽게 쥘 수 있는 것들만이 나를 위로한다. 영양가 빠지고 맛만 남은 PX의 음식들처럼, 내가 말하고자 했던 사소함은 그래, 이런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난 요즘 백랍같은 얼굴로 자기 빈틈 하나도 안내보이고 바른 소리만 하는 사람들이 차라리 부럽다. 그들을 비웃고 싶은 만큼, 그들이 열렬히 부럽다. 이런 걸 “비판적 지지” 따위라 부른다던가. 

바른 소리라고 쉽게 비웃지 말 일이다. 그들은 이미 그들의 말이 상대에게 어느 정도까지 먹힐지 알고 말하는 사람이다. 알고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다. 헛소리 제대로 하는 사람보다 바른 소리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 까는 것이 쉽긴 더 쉽지만, 우리가 먼저 미워할 것은 요령 없는 사람이 아니라 근본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이 견해를 “비판적으로 지지”한다. 그래, 이것도 작전상 후퇴라면 후퇴다. - 20060524, cryingkid


[5.25. 일부 수정.]
 

  
 
 
 
상병 송희석 (2006/05/24 16:08:37)

요즘 전략상 후퇴가 유행이군요.    
 
 
 병장 박진우 (2006/05/24 16:41:09)

김대현발 폭풍이 점점 세력을 확장시키는군요. 
으흐흐.    
 
 
일병 김지민 (2006/05/25 08:04:54)

앗 대현님!    
 
 
병장 주영준 (2006/05/25 14:10:17)

아프다.    
 
 
 병장 노지훈 (2006/05/26 00:27:11)

전략상 후퇴보다는 전술상 후퇴가 되길...    
 
 
병장 김석윤 (2006/05/26 18:46:54)

심장이 아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