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의 무소유에 대하여 
 병장 임정우 01-18 14:27 | HIT : 160 



 저는 그리도 유명한 '무소유' 관한 글을 읽은적이 있습니다. 제가 유일하게 읽은 법정스님의 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글을 읽은지는 5년이 지나버렸고, 애매하게 남은 기억의 잔재물들을 끄집어내서 쓰는만큼 분명 부족하고 -동시에 그걸 방패막이로 할수 있기에- 비겁한 글이 될수도 있음을 미리 시인하겠습니다.

 자, 그럼 5년전 기억의 퍼즐을 그럴듯하게라도 겹추어 보겠습니다.
 법정스님은 '난'을 기르게 됩니다. 난, 이란건 손이 무진장 가는 식물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매력이라고들 떠들수도 있습니다. 한없이 떠받들어 줬을때 한결 고결하게 되는, 어떤이는 허영의 산물이라고까지 말하기도하는, 그렇기에 소유의 예시로 들어 한점 부족함이 없을, 그런 식물입니다. 법정스님은 '난'의 매력에 빠진듯, 소유라는 탐닉의 술잔을 마심으로 오는 알딸딸한 취기에 사로잡혀, 불도로서의 생활을 포함한 자신의 추구하는 '도'의 약간의 균열이 생겼음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소유의 고통이고 슬픔이고 무가치함을 내포합니다. 법정스님의 깨달음은 소유의 반대편, 무소유의 필연성의 인과로 표출하여 그 해결책을 궁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타인에게 난을 양도하는 방법으로 무소유의 행복감을 획득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럼 이제 저의 장난스러운 유치함이 개입된 단상을 찌끄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5년전 처음으로 접한 이야기, 그리고 잊혀진 5년, 무소유라는건 -아무리 고매한 사람이 말할지라도- 건 당췌 있을 수도 없고, 오히려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모순의 극치라는 생각이 저의 가슴속의 넘실댐을 고백합니다. 법정스님이 무소유를 깨닫음으로 얻게되는 충족감이야 물론 신성함을 부정할수 없지만, 결국 무형의 충족감을 소유하기 위하여 유형의 '난'을 넘겨준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면 너무 섣부른 생각이라 하시겠습니까? 게다가 소유의 무가치함을 인식함으로 다가오게된 순결한 깨달음이, 타인에게 소유의 본질을 넘겨줌으로, 설령 그 타인이 '난'을 소유함으로 반드시 소유의 결박으로 사로잡힐것을 단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결론적으로 소유의 어두운부분을 빛으로 말살하거나 하는 궁극적인 승화의 방식이 아닌, 고작 떠넘김이라는 야비한 수작으로 해결을 보신다는 것에 대하여, 결국 저의 불쾌함은 저의 무지한 식견을 무시하고 피어오르게 되었던 겁니다.

 소유란 무얼까요? 소유를 현상적인 부분과 관념적인 부분으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ZZ건담-프라모델'을 소유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프라모델은 저의 책상위에 분명 현상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분명 저의 시선은 빈번하게 프라모델을 지나쳤을 것이고, 저의 사고 속에서도 분명 소중한 무언가로 자리매김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의 관념적인 부분에도 그 프라모델은 분명 존재하게 되는 겁니다. 실제와 관념이 중첩되는 것, 이것이 저에게의 소유입니다. 만약 저의 관심이 'SEED 건담' 이라는 새로운 프라모델에 현혹되어 책상위에 있는 'ZZ건담' 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면, 그래서 아무리 눈길이 지나쳐도 일말의 감흥이 없다면, 'ZZ건담'은 소유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ZZ건담'을 갖고 있어도, 그것으로 인하여 제가 어떠한 행동을 하던지 제약이 될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ZZ건담'이 소유로서 실상 무력화 되기 위해서는 'SEED건담' 이라는 대체품이 거의 필수적으로 필요하게 됩니다. 인간이 완벽하게 '무소유'라는 바다위에 뜨기는 불가능 하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법정 스님은 깨달음의 충족감이란 대체품으로 '난'이란 형상의 소유함을 극복해다고 말할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걸 깨닫는 순간부터는 '난'이 설령 곁에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소유'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린것이 되었던 겁니다. 다만, 그것이 성가셔 져서, 아니면 자비로운 마음에서 다른사람이 기르는 편이 낫다는 생각에서, 물론 그분의 마음을 훔쳐볼 도리가 없기에 확신할수는 없지만, 어찌되었던 누군가에게 넘겨주었겠지요. 그렇게, 그 소유의 결박은 소멸한게 아니라 고작 전해졌기 때문에 넘겨받은 사람은 법정스님처럼 열심히 깨달음을 추구하지 못한다면, 평생 그토록 끔찍한 '소유'의 결박에서 헤어나올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어버릴것은 약간만 생각해도 상당히 당연한 문제일겁니다. 결국, 관념적인 소유때문에 현상의 소유를 내던지는게 옳다 라는 결론으로 매듭지어질수도 있는데, 그게 또 복잡한 문제이지요. 현상과 관념은 완전히 분리될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됩니다. 그걸 말하는 사람은 신이거나, 사이비 교주정도 되겠지요.

 아, 괜히 헛소리가 길어졌군요. 
 이번에 법정스님이 '홀로사는 즐거움'이라는 수필집을 내셨다는데,
 그 글을 조금도 읽어보진 못했지만, 죄송하게도 '홀로사는 즐거움'이라는 제목만으로도 괜한 반골적인 기질이 자극됨이 느껴집니다. 이제 다 썼습니다. 어떤 분이던지 저의 이토록 허무맹랑한 글을 파훼해 주시길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이상.  


 병장 이윤창 
 크오.... 뇌좀 다른쪽으로 회전시킬라고 간만에 들어왔는데[..........] 

ZZ 건담이 또 불태우네요[.............] 01-18   

 상병 조윤호 
 나같은 경우엔 소유에 꽤나 집착해서 액션 피규어란 것을 모았단다. 
 스폰, 베르세르크, 헐크, 스파이더맨, 이나중탁구부, 바비인형(!) 
 근데 지금은 다 어딨는 줄 아니? 사과박스안에 쌓여 장롱에 있다. 
( 아마 엄마가 싸놨을꺼다.) 

 나에게 소유란 역시나 다들 그렇듯,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무소유로 변질되지. 
 근데 그걸 유일하게 이겨내는 놈이 바로 음반이란다. 

 이 글에선 너의 심통이 가득 드러나서 괜히 즐겁다. 01-18   

 병장 임정우 
 나중에 진짜 사과들은 사과박스 가져가서 너희 어머니와 거래를 해야겠다. 
 아마 분명 너희 어머니는 나의 거래에 응하실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봐야 사과박스의 교환인걸, 01-18   

 상병 조윤호 
 돈이 많이 들어서 포기했다. 그래도 나중에 혼자 살때 되면, 다시 다 꺼내서 진열해놓을 꺼야.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거든, 지금도 사고 싶은건 무지 많은데 예전 만큼은 아니다. 
 뜨거운 열정은 사라졌단 증거지. 12인치내일의 죠 프리미엄 붙어 40만원인가 하던거 
 엄마한테 사달랬다가 담배피다 걸렸을때 보다 더 욕들었었지. 


 소유의 집착을 벗고 무소유의 경지는 너무 재미없는 거 아닌가. 
 못가져서 삘좀 받고 해야 살만한 인생이지. 01-18   

 상병 천영철 
 정말 좋은말씀들이죠 01-18   

 병장 임정우 
 털썩... 01-18   

 병장 이영욱 
 전 왜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무라는 것'을 소유하는 것에 집착한다는 생각을 했을까요. 
 하여튼 이놈의 뇌구조는 비정상적인 것 같아요.. 01-18   

 병장 임정우 
 영욱 / 오, 그래요. 그런 생각도 있군요. 01-18   

 병장 이영욱 
 무(無)는 '무라는 것'있기에 유(有)다!라는 생각이 들어 해 본 말입니다. 
 한마디로 지나가는 행인의 '토'달기. 01-18   

 병장 성태식 
 어엇. 그렇지 않은듯 해요. 법정스님은 자신이 난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집착을 떨어내기 위해 난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한 듯 합니다. 

 난이 자신에게 주는 집착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겼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난은 법정스님에게 집착을 느끼게 하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집착을 느끼게 한다고할 수는 없지요. 
 어차피 스스로 집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난 선물을 받으나 마나 마찬가지니까요. 

 물론 정우씨의 지적은 타당합니다. 해탈에 대해 집착하면 그건 해탈하지 못했다는 증거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반론은 '집착'이라는 단어가 '욕망의 충족'을 의미하며, 법정스님의 행동이 
 자신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일 때에 성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이러한 공리체계로 
 논리정연하게 반론을 들어가면 법정스님도 별로 할 말씀은 없으실겁니다. 

 제 생각에는 이와 같은 주장들은 불가의 가르침과 별로 상관이 없는 듯 합니다. 
 그런 종교적 가르침은 하나의 사실에 대한 주장이 아니고 당위에 대한 주장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논리적으로 모순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모순됩니다.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면서 요리하기는 귀찮아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러한 우리의 욕망을 명제화해서 공리체계에 집어넣는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요. 
 종교적 가르침은 대개 이런 측면에 기반하고 있기에 논리적인 방법으로 접근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01-18   

 병장 손주휘 
 내생각에는 법정스님이 그 글은 쓰신 이유가 자신의 설법을 전파하기 위함이나 자신이 이러한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자랑하는데 있는게 아니라 단지 돈에 권력에 너무나 현상적인 것에만 매달려 사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잠시라도 그 집착에서 마음을 놓아 버리는게 어떻소~라고 슬쩍 운을 띄운게 아닐까 싶다. 어린이들에게는 동화를 통해서 가르치는 것이 효과적이듯이 쉬운 글을 통해서 말을 한거고, 어쩌면 내용 자체도 픽션일 가능성도 있을 듯해. 
 쉽게 적은 글을 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렵게만 생각하냐 는 비겁한 반박뿐이 못하는 내 내공이 못내 아쉽지만 이번 경우는 이 답에 최선인것 같다. 세계 최고의 개그맨도 어디 한번 웃겨봐라~는 사람에게는 웃음을 줄수 없는법. 
 확실한건 난 그냥 그렇구나 하고 지나간건데 넌 뭔가 참신한 발상을 가진건 사실인듯해. 01-19   

 병장 임정우 
 태식 / 
 난이 자신에게 주는 집착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겼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난은 법정스님에게 집착을 느끼게 하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집착을 느끼게 한다고할 수는 없지요. 

--> 그러면 책을 발간할 이유도 없는 것이지요. 
 법정스님이 그런 내용의 책을 낸것은 아무래도 자신의 깨달음을 공유하겠다는 욕구가 
 조금도 포함되지 않았을리는 만무하니깐요. 
 반드시는 아니더라도, 법정스님은 소유의 안타까움을 어느정도 전파하겠다는,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것이든 소유라는 것은 아무래도 별로구나, 라는 명제가 
 기본적으로 깔려있어야 할겁니다. 01-19   

 병장 임정우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면서 요리하기는 귀찮아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 이게 바로 보통사람 이지요. 
 하지만 법정스님은 조금 특출난 편이지 않나요? 
 만약 스스로 정말 부족해서 남에게 말할처지도 못된다고 자책이라도 하신다면 
 책을 낼 용기를 가질수도 없을테고, 가르침을 운운한다는건 더욱 무리일테니깐요. 
 분명 이런 글을 씀으로서 어느정도 자신의 정보 공유를 바랬을 테고 
 그것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이런 글을 책으로 전파했다면 그것 역시 
 일종의 무지의 소산이라고 까지 생각이 됩니다. 좀 극단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솔직히 보통사람들끼리 서로 배울점이 없다고 할건 없겠지만, 
 소위 대부분의 사람들이 법정스님 이라고 하면 '우와'라는 찬탄사와 함께 
 정말 우리와 <레베루>가 다르구나! 따위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걸 보면 
 저의 꽤나 뒤틀린 심성은 쉽사리 동의를 해서는 안된다는 결심을 하게되는 
 편이라서 말입니다. 

 음, 그리고 종교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습니다. 헤. 01-19   

 병장 임정우 
 손주휘 병장님 / 
 제가 확실히 극단적인 부분이 있기에, 분명 합당하지 못하는 
 이해가 생기는게 있는것 같습니다. 
 그리고, 법정스님이 이런 글을 쓴 의도를, 본인 이외의 어느 누구도 모른다는 
, 솔직히 본인도 그걸 제대로 알수있을거라고 믿진 않지만, 전제하에서 
 무소유란 글을 저 나름으로 해체해 본다면, 이처럼 반골적인 내용이 
 탄생하게 될수밖에 없는 것을 피할수가 없습니다. 

 우선 대다수의 사람들이 찬양하면, 비틀어 보는게 저의 심성. 01-19   

 병장 제갈승 
 소유에 대한 개념 차에서 오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너무 무지를 드러내는 건가요? 01-19   

 병장 임정우 
 갈승 / 물론 그것도 인정될만한 합니다. 하지만 어느정도 공통분모를 정해놓고 
 대화가 이루어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개념의 베이스는 거의 일치할테니깐요. 아님 말고. 01-19   

 상병 정광선 
 제 기억이 맞다면, 법정 스님은 무소유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지 않은 것을 소유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 같아요. 무소유는 소유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는 거지요. 무소유라는 것은 빈털털이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자신에게 필요한 것, 자신을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끔 하는 것들만 품안에 안고 만족하며 살아야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얘기한 것 같아요. 01-19   

 병장 임정우 
 광선 / 그렇다면 이야기가 더욱 복잡해지고 궤론이 침입할 여지가 무진장하게 노출되어 버리겠네요. '진정 필요하다'를 두부 모 자를듯이 정할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런 이야기로 흐르면 너무 복잡해서 저는 도망가 버릴지도 몰라요. 휘잉~ 01-19   

 병장 김용운 
 내가 소유한것을 "난"-ex는.. 타인에게 배푼다는 뜻이 있지않을까 싶습니다. 내게 있는것은 소유의 욕심이니 그것을 배푼다는.. 뜻입니다. 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