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장 이종보 [Homepage] 2009-09-19 21:29:18, 조회: 266, 추천:0
어제는, 오랜만에 일일노동(전문용어로는 작업이라고도 한다. 아마도)을 한바탕 치루고 왔다. 내용이래봐야 별거 없어서 2km정도의 구간을 걸으면서 손으로 길가에 있는 잡초를 뽑는 일이었다. 물론, 늦여름의 나름 강력한 햇볕을 온 몸으로 받아가며 엉금엉금 기어가는지 걸어가는지도 모르는 속도로 2km라는 짧지만은 않은 거리를 간다는 것 자체는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서도. 덕분에, 랄껀 없지만 준우씨 사는 곳에 가서 서로 대면은 하지 못하고, 실물 대신 제복에다가 경건히 인사도 해 보고(제복 왼쪽 윗주머니에 새겨져있는 호랑이 비슷한 무늬에서 준우씨의 인상이 느껴졌는데, 뭐랄까. 요즘 파이터화- 되어가는 준우씨의 인상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 하였다. 껄껄)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인 집을 보면서 더불어 주거조건이 불안한 한 사람의 동지로써 동병상련에 젖어보기도 하였더랬다.
08년 여름 '한창 때'인 신입사원 공돌이는 '넌 할 줄 아는것도, 할 수 있는것도 없으니 이거라도 해라' 라는 선배들의 부당한 요구(?)에 상처받은 존심과 부글부글 목까지 차오르는 분노를 말없이 삼키고 전파사 일과는 아무 관계없는 '창문에 모기장 달기' 와 (지붕있는)'휴게실 증설' 등의 잡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막상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이런저런 불만이 쌓여 있다가도 일을 시작하면 그런 불만따윈 싹 날아가고 일에만 집중하게 되는 내 자신이 신기하기도 했지만, 처음 하는 일에 대한 호기심이나 신기함 등 '처음 하는 일이라 재미있다.' 로 표현 될만한 어떠한 감정도 있었다. 그리고 이걸 하고 있으면 하릴없이 전파사에 앉아 눈치밥 보다가 선배들 일 끝내고 들어왔을때의 지친 모습과 '넌 뭐했냐' 혹은 '넌 뭐하는 놈이냐' 라는 무언의(보통 눈빛으로) 질문을 받았을때의 그 당혹감과 고통을 겪는 일이 없어서 나름대로는 마음 편한 일이었다. 덕분에 일을 할 때 만큼은 열심히, 적극적으로 참가해서 소소한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고 그 결과물이랄까- 하는 것으로 마을에서 '나름 괜찮은 놈' 이라는 평가를 얻어 내게 되었고, 그것은 3학년 어느 순간까지 나에게 있어서 '어찌어찌 이용해 먹을 만한' 무언가의 껀덕지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09년, 여름이 슬슬 끝나가는 시기에 나는 '한번만 더 평일 대낮에 퍼질러 자면 니놈의 기름기 가득한 배때기를 분해해서 산맷돼지의 밥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라는 말(이라고 쓰고 최후통첩이라고 해석 가능한)이나 듣고 다니는 전형적인 대한민국의 4학년 어느 학생으로 전락해버렸다. 내가 신입사원때 그렇게 속으로나마 손가락질 해 마지않았던 어느 선배의 모습으로. '최소한 저런 모습은 되지 말자.' 라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다짐해 마지않았던 그런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아아 젠장. 언젠가 이런 말을 한적이 있었다. '나 요즘 할 일이 없어서 시간이 안 가는데, 정말 미치겠다. 아직도 집에 갈 날이 보이지 않아.' 이 말을 들은 후배의 대답이 명답이었는데 '이런, 완전히 잉여인간 아닙니까?' 이라는 대답 되시겠다. 그 당시야 '이런 개념없는 놈.' 이라는 대답과 함께 가벼운 사랑의 매(절대 모두가 상상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다.)를 선사하고, (애써) 웃으며 넘겼지만. 이건 정말로, 나에게 있어서 심각한 고민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잉여인간이라니.
난 22년동안을 3인 가정의 외아들로 지냈다. 덕분에 '혼자 지내는 것' 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눈치밥이라는 것은 국어사전에도 없는, 책장 어느 구석에서 잠자고 있을 먼지 풀풀 날리는 백과사전에나 기록되어있을법한 관념적인 단어이고 개념이었다. 신입사원 때 막내라는 이유로 배때기 가득 우겨넣어야 했던 눈치밥은 내게 엄청난 정신적 스트레스일 뿐이었고, 거기서 찾은 대답은 '남이고 뭐고 일단 나부터 살아야 하니까 내 할일이라도 열심히 하자.' 였다. 치고 올라가기, 한 사람분의 계단에서 남을 밀고 올라가는 것은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재수시절 30명이 넘는 교실 안에서 나는 스스로 혼자였고, 당시 60만 수험생 모두는 나의 경쟁자였다. 결국 나는 (당시에 느끼기엔)개미구멍 같았던 입시지옥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꿈 같았던 캠퍼스 정문에서 나는 혼자였다. 스스로 남을 밀쳐내고 선 자리는 고독하다. 빈 껍데기이다. 몸서리치게 깨달았던 사실을 나는 다시 반복하고 있었다. 그땐, 그 정도로 정신적으로 핀치에 몰려 있었다. 결국 빌빌거리던 '못난 놈'은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나름 괜찮은 놈'이 되었다. 그렇게 새해가 되고, '이제 좀 살만하네.' 라고 느낄 즈음엔 어떤 선배에 음모(?)에 의해 어깨에 녹색 잔디가 달렸고, 다시 나는 절망해야 했다.
리더(leader)라는 자리는 남에 위에 서 있는 자리가 아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그렇다. 리더는 남보다 '한 걸음'만 앞에 있어야 한다. 언제라도 손을 내밀어 타인을 끌어줘야 한다. 긴급할 때에는 재빠르게 등 뒤로 돌아가 받쳐주고 떠밀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냉정해져야 한다. 때론 거침없는 독설도 퍼부을 수 있어야 한다. 때론 따뜻한 말로 위로해줄 수 있어야 한다. 활발하게 남을 이끌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난 그 모든것에 서툴렀다. 남에게 독설을 퍼붓느니 속으로 꾹꾹 눌러 참았고, 이끌어도 따라오지 않는 타인을 원망하며 '내 속 태우느니 그냥 내가 하고말지.' 라는 마인드로 일관해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나는 한동안 '나 혼자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혼자 할 수 있는것도 물론 한계가 있는 법이다. '당연히 저 인간이 하겠지.' 하고 생각하는 동료들과 '저 인간은 그래도 시키면 하니까.' 라고 생각하는 상관들 사이에서, 나는 갈 곳을 잃고 주저앉았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또다시 외로운 자리였다. 처음부터 어긋난 길의 종착지따윈 명약관화한 것이었다. 다만, 내가 최선을 다한 몸부림은 그 종착점에 조금 늦게 도착하기 위함에 지나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날, 나는 입사하고 두 번째로 몸서리치게 서러운 밤을 보내야 했다.
어쩌면 전부 나 때문일지도 모를, 그래도 나 때문에 무너지지는 않았던거 같았던 방 안의 질서는 내가 주저앉은 날을 기점으로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무너진 잔해에 묻혀있던 현판에는 사상누각(砂上樓閣)이라는 네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그 날은 후배들에게 있어 거리로 뛰쳐나갈 수 없었던 '해방의 날' 이었을 테지만, 후배들에게 나란 존재는 20세기 초 일본같은 존재였는지 아니면 20세기 말 러시아같은 존재였는지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것은 이제 대부분의 후배들에게 내가 하는 소리는 '쟤 뭐라는거야.' 정도로밖에 인식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겉으로야 어쨋든 말이지. 이민족의 침공 없이도 춘추전국시대는 막을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 되었고, 수많은 후배들이 부르짖어 마지않는 나는 그저 주(周)나라의 왕(王)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내가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방 안을 굴러다니고, 후배들에게 재미없는 농담이나 던지고, 상관들의 눈을 피해다니며 뺀질거리는정도- 그런 한심한 자유, 아니지, 구제불능의 방종 뿐이었다.
그리고 09년 9월 중순의 어느 날, 나는 08년 여름 어느 날처럼 '전파사'의 소속 직원인 내 직책과는 하등의 관계 없는 잡초제거라는 잡일을 시작했다. 내가 자진해서. 아무리 인생은(아니, 돈이었던가?) 돌고 도는 것이라지만 그래도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지. 나는 그렇게라도 나름대로는 '속 편했던' 1,2학년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마음만이라도. 그리하여 늦여름의 태양이 가는 여름을 아쉬워하듯 한창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을 어느 시점에, '10분간 휴식' 이라는 반가운 주문에 찾아 들어간 어느 그늘가에 자리잡은 바윗덩어리에 앉아 있자니,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벗어놓은 내 장갑에 눈길이 갔다. 수 시간째 흙바닥을 열심히 헤집은 끝에 붉은 고무코팅은 다 벗겨지고 면으로 덮인 손가락부분엔 실밥이 다 풀어지고 온통 구멍이 뚫려 있었다. 누군가 길을 가다 발견해도 쓰레기라고 생각하고 쓰레기통으로 내던져버릴 그런 장갑. 아아, 10분 뒤에는 그런 장갑을 끼고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한다. 이런 젠장.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 장갑은 내 신세와 닮아있을지도 몰라. 누군가의 손 대신 너덜너덜하게 되어 이제 남은건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그런 장갑,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 장갑을 다시 낄 수 밖에 없다. 어쨋든 맨손으로 작업하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곳에서 이런 소모품 같은 존재였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퇴사를 앞둔 사원은 구멍 뚫린 장갑처럼 너덜너덜한 채로 살다가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쓰레기통(이라고 쓰고 피아노를 치는 행위 그리고 그 후에 다른 마을로 내쳐지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해석한다.)에 버려지는 것이 먼저일까? 아니면 그 전에 집으로 귀환하는게 먼저일까? 아니, 나는 언제부터 이런 갈때까지 간 존재가 되어버린 걸까? 10분이라는 시간은, 그에 대한 대답을 만들어주기엔 너무 짧았다. 기계적으로 손을 놀리는 사이, 10분간의 생각은 뽑히는 풀처럼 내 머리에서 빠져나갈 뿐, 이빨 사이에 낀 가시처럼 고민만이 뇌 속에 푹 하고 파묻혀 떨어지지 않는다.
- 아아, 새우깡 한봉지에 병소주라도 좋으니, 술이나 한잔 하고싶다. 아니, 지금 살고있는 첩첩산중에선 꿈같은 생각이겠지. 오늘은, 정말로, 담배라는것이 피고싶어진다. 누구, 담배한대 주실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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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10-01-27
13:22:49
병장 이 원
너무 멀군요. 담배정도면 얼마든지 드릴수 있는데.
힘내요 종보씨. 2009-09-19
22:18:14
상병 조용진
힘내요 종보씨
블랙데빌 이 생겼는데 한갑 쥐어주고 싶어요.
으으 2009-09-19
22:25:34
병장 정두영
저도 요즘 술한잔이 계속 생각나네요. 고기에 소주가 최고죠. 2009-09-19
22:25:43
병장 이 원
용진/
으악- 거기 어디예요!!! 2009-09-19
22:29:39
병장 이종보
/ 원
언젠가 금연에 대한 이야기를 쓴 적이 있는데, 그 글에 주인공인 후배의 흡연량이 너무 무서워서 피기가 망설여 지기도 해요. 사실 여태까지 그것때문에 참을 수 있었거든요. 개인적인 입장에선 다행이지만, 뭐랄까 그놈팽이의 폐나이(65살로 추정되는)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뭐 그렇답니다.
근데, 요즘은 정말로 담배가 땡기네요.
/ 용진
제가 알고있는 담배메이커라고는 두 손으로 다 셀 수도 있을 정도라 블랙데빌이라는게 뭔지 잘 모르겠군요. 근데, 맛있는건가요? 흠-?
/ 두영
고기까지도 안바라고 그냥 과자 몇봉지만 있어도 소주따위, 원없이 먹어버릴 수 있을거 같네요.(웃음) 2009-09-19
22:44:39
상병 김 건
요즈음 간혹 심히 안주스러운 식사가 나오면 정말 소주한잔이 아쉬워 집니다. (웃음)
사실 잔디의 무게, 라는 것을 잘 모르고 있었는데 덕분에 느끼는 바가 많군요. 2009-09-19
22:52:50
병장 이 원
종보./
음. 수입담배예요. 매니아들한테는 꽤 좋은 이미지죠.
아, 벌써부터 마 7이 생각나는군요. 껄껄 2009-09-19
22:59:54
상병 조용진
원, 종보/
전 집이 부산이라 슈가 나갈때마다
남포동 국제시장골목(깡통시장)에서 담배를 구입하곤 하지요
꼴초 정돈 아니지만 색다른 담배에 뭔가 가치있는 희열을 느낀다고나 할까요 후훗
거기엔 없는 물건이 없습니다. 술 담배 옷 각종 생활재료? 들 까지 말이에요
블랙데빌이 네덜란드 담배죠? 헤이즐넛 향이나는 검은색 담배에요 깊은 맛이나지요
블랙데빌 블랙스톤 럭키스트라이크 카멜 디맥 등등 많은 담배를 소유하고 있답니다 후훗 훗날 정모에 참석할 날이오면 흡연자에게 선물로 한갑씩 다양한 담배를 돌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영웅등극?) 2009-09-20
00:31:19
상병 김 건
침 질질입니다...어떤 맛인지 매우 궁금하군요. 2009-09-20
02:33:16
상병 조용진
건씨. 예약인가요?후훗 2009-09-20
02:34:23
상병 김 건
용진 //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이미 저는 낚인거군요. 파닥파닥.
정모때 뵙겠습니다. (웃음)
+ 궁인플루엔자 덕분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2009-09-20
04:30:06
병장 양동훈
용진// 다 필요없고, 다비도프요. 2009-09-20
09:43:44
병장 이 원
용진//
음.럭스랑 블데 예약이요~ 껄껄 2009-09-20
11:23:05
상병 박준우
호랑이 아닙니다. 용입니다. 2009-09-20
19:50:42
상병 조용진
동훈// 다비도프는 우리집에 한 두보루 있는걸로 기억합니다 슬림 버전으로 말이죠
원// 럭스랑 블데 알겠습니다 후후 그런데 난 경남권이랍니다.후후 2009-09-20
21:08:15
상병 권홍목
블랙데빌은 비흡연자가 맡아도 참 좋은 향인듯 2009-09-21
18:5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