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월 통합 월베-독서후기]황석영, <바리데기>와 분단상황의 문제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4-17 16:11:49, 조회: 124, 추천:0 

  휴게실에 그의 책이 오랜만에 들어와서, 손에 들게 되었다. <바리데기>라는 책은, 신 내림을 받은 한 탈북자 소녀가 여러 나라를 전전하면서 겪는 고난과 깨달음을, 바리 이야기라는 설화라는 형태를 차용하여 형상화한 소설이다. 기본적으로 강신무를 통해 역사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스토리로 구성된, 전작 <손님>과, 비슷한 설화적 요소를 차용한 <심청>과도 비견될 수 있는 부분이다. 황석영에 대한 이런 저런 말이 많지만, 그의 소설들의 미덕은 무엇보다 억지로 설파하려 드는 태도 없이 설득력 있는 서정적 언어로 지금-여기의 지평을 언어화하는 데 있다. 그의 소설은 비록 역사소설은 아니지만 누구보다 더 역사성을 짙게 담아내는 측면이 있다. 이번의 소설 역시 황석영 자신의, 분단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문학적 형상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에 그가 분단상황을 접근하는 방법에는 새로운 무언가가 있었다. 가령 진보-보수로 양분되는 한국 담론지형에서 탈북자 인권이라든지 하는 쟁점은 분명 여러 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진보진영에서 흔히 외면하거나 간과하는 정치적 소재로 여겨진다. 

  여기에 황석영 자신은 이런 담론적 상황에 일종의 뒤틀림을 부여한다. 그는 바로 그러한 탈북자 소재를 정면으로 다루지만, 책 말미에 수록된 인터뷰에 분명히 수록되어 있듯, 북한의 비참한 인권실상과 탈북문제를 (월러스틴 류의) '세계체제론'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분단상황을 강대국들이 '경영하는' 하나의 정치적 상황으로 규정한다. 이것 자체는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는 여기에 분명히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을 암시한다. 

  그에게 북한은 전지구적 자본주의를 향해 재평성되어가는 세계 질서 속에서 희생된 주변부-국가이며, 난민들은 그 과정 속에서 발생한 '디아스포라'라는 것이다. 세계의 주변부에서 신자유주의적 환경에서 도태된 사람들은, 어떤 주권에도 정체성에도 지역에도 귀속되지 못한 채 여기저기를 떠도는 것이다. 여기에는 황석영 자신의 삶 역시 반영되어 있다. 그들은 특히나 부유한 자본주의적 중심 도시들에 모여 빈민촌을 형성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들을 '벌거벗은 삶' 혹은 '삶-정치Bio-Politics'의 대상으로 이론화하는 시도들이 오늘날 학계의 가장 세련된 담론들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들 난민을 포획하고 축출하고 수용하는 '정치'들이 일반적인 대의 민주주의적 주권 정치 '이전'의 가장 난폭하고 날것의 정치로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바리데기>에도 묘사되어 있듯이, 이들을 다루는 가장 선진화된 문명국가들이 자행하는 행위들이 어느 후진국 못지 않은 야만성으로 자행되는 것은 오늘날의 '현실'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문명 주변부를 형성하는 벌거벗은 난민의 '삶'들은 그래서 체제의 억압된 '진실'을 드러내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이 황석영 자신이 말했듯, 소설 상에서 바리가 중국에서 빚 때문에 팔려 간 곳을 '런던'으로 설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런던에는 여전히 옛 제국주의적 원죄가 여실히 남아 있는 곳이라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그의 이번 소설은 소설이기 이전에 일종의 정치적인 선택인 것이다.

  물론 1차적으로 그의 책의 정치성을 논하기 이전에, 그의 이런 새로운 '변화'가 그의 매우 능란하며 능숙하다는 평을 내릴 수 있다. 그는 결코 옛날의 민족주의 좌파의 담론으로 분단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가장 세련된 고급담론(디아스포라, 세계체제, 삶정치 기타 등등....)을 통해 과거의 프레임을 재전유하는 '변신'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이는 매우 황석영다운 능란함이라 볼 수 있다. 이 능란함을 비난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능란함을 예찬하고 띠워주는 마케팅에는 어떤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가령 황석영은 오늘날 모든 젊은 포스트 담론들(포스트민족주의 포스트모던 포스트문학)에 대한 의고주의적 반대자들의 중심 참조점이기도 하다. '민족이 죽었다고? 분단상황은 오늘날의 근본모순이 아니라고? 황석영을 봐라! 그는 여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이러한 옛날 주제들을 정면으로 다룰 수 있지 않은가?"라는 식이다. 나는 여기에 성찰이 결여되어 있음을 본다. 

  물론 나는 황석영에게 여전히 배울 점이 있고, 특히나, 우리의 상황을 규정하는 역사성에 대한 그의 진지한 접근들은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되는 바라고 생각한다. 분단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은 가장 진보적인 젊은이들에게도 흔히 거부되는 것인데, 오히려, 단순히 민족문제로서 뿐만 아니라, 세계체제의 연속선 상에서, 혹은 어떤 다국적 프레임에 의한 분단경영의 문제(가령 탈북자들은 다국적 자본의 입장에서, 손쉽게 쓰다 버릴 수 있는 노동력이기도 하다)를 다각도로 생각해 봐야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들 간에는 어떤 긴장이 있고, 혹은 더 정확히 말해서 '시차'적인 간극들이 존재한다. 분단상황과 같은 역사적 상황들은 여러 프레임들을 통해 고찰될 수 있지만, 이러한 프레임들이 모두 다 한꺼번에 양립 가능한 것은 아니다. 가령 탈북자들을 디아스포라(난민)이라고 본다면, 우리가 그들을 '바리공주'와 같은 민족적 원형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혹은 '민족'이라는 근대국가적 틀(좌우 모두 공유되는)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이런 담론적 '기회비용'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서, 이런 고급담론들을 재해석해서 변용시키고 소설화시키고 상품화시키는 것에서, 황석영의 '능수능란함'이 보이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선택'의 문제는 흔히 간과되고, 여전히 어떤 담론적 헤게모니(분단문제의 권위자로서 황석영과 같은 진보 문단의 큰 어른)의 이런 저런 옷차림과 같은 것으로 새로운 이론들이 쓰다 내버려지는 것이다. 오늘날 요란하게 선전되는 녹X성장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것이 젊은이들의 문제라고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흔히 개탄되었다는 것을 보아왔지만, 실은 기성담론에 의해 패러디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은 그들이 역사성에 대해 정말로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만든다. 왜냐하면 역사성이란 바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 대신 무엇을 할 수 없느냐에 대한, 기회비용에 대한, '선택'을 강제하는 비판적 물음이기 때문이다. 가령 디아스포라가 진정 하나의 역사적 문제라면, 그들의 존재는 오늘날 전세계적 자본주의의 틀 내부에서 아무리 전복적이고 요란한 담론들을 생산해 내더라도, 그것들은 기본적으로 무용하다는 진리를 가르쳐 준다. 그런 가르침은 오늘날 한국의 담론지형에도 마찬가지로 유효하다. 그런데 황석영 자신은 여전히 분단상황은 강대국들 간에 합의된 어떤 음모라는 구좌파적 시각을 버리지 않는다. 이는 세계체제론이라든지 디아스포라라든지 삶-정치의 이璲 틀들이 '버릴 것'을 요구하는 관점인데도 말이다.

  우리가 일단 그 '틀'을 인정한다면, 더 이상의 전복은 없다. 말하자면 황석영과 이를 위시한 <창작과 비평> 그리고 백낙청 같은 민족주의적 진보문단의 헤게모니는 그 물음에 여전히 답하지 않고서, 구태를 답습하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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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1.21.55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10
09:34:43 

 

상병 김예찬 
48.9.2.115   바리 이야기를 '민족-여자-어머니-구원'의 단순한 이야기로 승화시킨 것 자체가 불편하게 다가왔던 기억이 나는군요. 서경식 선생의 글들과 비교해 볼 때 황석영의 '디아스포라'가 얼마나 고민 없는 손쉬운 선택인지 확연히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2009-04-17
17:12:15
 

 

상병 박원익 
54.1.19.46   김예찬/시종일관 오타로 일관했군요. 수정하겠습니다. 다이스포라->디아스포라(눈물) 


[4,5월 통합 월베-독서후기] 황석영의 <바리데기> - 박원익씨의 1267번글에 부쳐  
상병 홍명교   2009-04-18 21:47:29, 조회: 116, 추천:0 

<바리데기>

나 역시 작년말 진중문고로 보급된 <바리데기>를 읽었다. 지난 3월경이었으며, 사르트르 저작들과 카뮈 전집을 읽고 머릿속이 복잡할 즈음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실존주의에 완전히 빠져들어 그 매력에 홀딱 반해버렸지만, 그것은 무척 우울하고 시니컬한 것이어서 심취하기엔 두려운 사상이기도 해서, 지친 나는 그것보다는 예쁜 여자친구랑 전화통화하는 것이 더 좋고, 또 종종은 스토리텔링이 강조된 소설을 읽으며 쉬어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리데기>를 읽었다. 이런 점은 다른 독자들과는 또 다른 방식의 언어해석으로 귀착되었을 것이다. 

또한 나의 황석영 독서에는 일종의 단절이 있는데, 초등학생시절에 읽은 <장길산>, 그리고 그의 젊은 시절의 단편들은 수능공부할때 거의 대부분 읽었고, 궁에 와서 다시 일전에 <개밥바라기별>을 읽은게 전부다. 그러니까 두번의 단절이 있었던 것이며, 그 사이사이에 비어있는 목록들이 있다. 이점은 나의 “황석영 문학” 독해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점임을 인정한다. 작가론 측면에서는 내 입장이 좀 더 열악하리라는 것이다. 어쨌든 그런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바리데기>라는 하나의 소설을 해석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다른 이들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 이것은 예술작품으로서의 문학을 대하는 변화된 내 자세와도 관련되어있을 것이며, 또한 정치와 문학, 그리고 정치적인 문학에 대한 관점의 반영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우선 <바리데기>의 마지막 부분에 수록된 황석영 인터뷰를 읽고 질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황석영이 대가이며 정치적인 활동을 계속해온 소설가라지만 이런 인터뷰를 소설의 후반부에 수록하는건 독자에 대한 모독으로 읽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에는 다소간 모독적으로 느낀다. 요컨대, 부록을 어떻게 붙이건 그건 작가의 자유라지만 내 생각에는 이건 너무 과하다 싶다. 어느 작가인들 자신의 작품에 정치적 의미 부여를 전혀 하지 않는 작가가 어디있겠는가. 더군다나 ‘황석영’인데. 이것에 대해 한탄하는 게 아니다. 작가후기를 가름하여 수록된 인터뷰는 작가가 할 말을 넘어섰다. 작가가 이미 “이 작품은 이러이러한 의도에 의해, 이러이러한 의미를 부여하여 쓰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건 우습지 않은가? 정답을 제시해버린 것이다. 이건 평론가가 쓴 분석하는 글을 싣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평론가가 어떻게 쓰건 간에 독자는 자기만의 해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석영은 문학작품에 존재할 수 없는 ‘정답’을 말해버렸다. 그런 이상 이런저런 비판을 받는 것은 자기 팔짜요, 자기 업보리라. 다만 부록을 읽고 질겁했던, 자유롭고 창조적인 독자임을 자임하는 나는 이를 무시해버리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말하자면, 인터뷰를 근거로 한 <바리데기>비판은 무용하며, 작가 비판으로서는 그 외부에서만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비판자들에게 되묻고 싶다. (cf. <문학이란 무엇인가>을 통해 사르트르가 주창한 ‘독자론’으로부터) 나는 황석영 정치사상집을 읽지 않았다. 나는 <바리데기>라는 훌륭한 스토리텔링 소설작품을 읽은 자유로운 독자이다. 물론, 문학은 다분히 정치적이(어야하)며,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나는 안다. ‘그것’과 ‘이것’은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바리데기> 독서후기를 쓰려고 한다.

<바리데기>는 문학이 태초에 지닌 제의적 측면을 소재로 부상시켜 강조한다. ‘제의’의 참여자는 다름 아닌 주인공인 바리 자신으로, 바리는 작명의 동기나 의미부여 모두 바리공주 설화에 그 재료를 빌려오고 있다. 이는 작가 본연의 스타일이 다시 인입된 것으로 의고주의에 대한 화답이라거나 고전 작품 예찬이라기보다는 내가 보기엔 그다지 부적절해보이지 않는다. 이건 상업적이라는 비판을 감수하고 감행한 스타일적 모험이다. <손님>은 읽지 않아서 어쩐지 모르겠지만 <개밥바라기별>과 <바리데기>는 그보다 더 전에 작가 자신이 추구하던 스타일과는 또다른 플롯 망을 갖고 있으며, ‘스토리텔러’로서의 황석영이 되기 위한 시도들로 보인다. 요컨대 황석영 같은 ‘대가’들이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는 건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는 누차례(cf. <무릎팍도사> 황석영편, 몇몇 인터뷰 등) 오늘날의 20대와 소통하고 싶다고 말해왔는데, <바리데기>가 갖는 플롯은 그것과 떨어져있는 선택이 아닌 것이다. 이 선택은 결과적으로 ‘상업적으로’ 성공적인 선택이 되었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작가를 비판하는 건 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는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해야할 것은 취했다. 다분히 그만의 기준으로 말이다. 그러나 최소한의 영역은 지키고 가려한다. 디아스포라의 문제이다. 이점에 대한 박원익씨의 비판은 어느 정도 수긍할 지점이 있으나, 나는 박원익씨와 다르게 생각한다. ‘이주’라는 토픽은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들 중 소재적으로 가장 ‘인간’의 것인 토픽으로 최근 영화나 문학의 영역에서 주목받는 토픽이다. 이런 점을 들어 작가가 세계체제이론 이론적 재료를 빌려와 물타기 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작가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다소 억울하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우선 첫째로, 이 소설 <바리데기>에서 탈북자인 ‘바리’의 이야기는 탈북자 인권을 말하기 위해 소환한 스토리라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이 소설은 탈북자 인권에 대해 말한다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요컨대 작가가 ‘바리공주 설화’를 통해 민족적 원형 같은 걸 보았고, 그걸 계속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결국 소설로 발전시킨 것이라고 말했다는 데 사실 우리 독자들이 작가가 소설 외부에서 뭐라고 말했건 무슨 상관인가. 독자가 소설을 읽은 이상 이미 작품은 작가의 손을 벗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황석영의 잘못은 그의 계도적인 자세이다. 그는 20대를 제대로 만나려면 아직 한참 먼 것처럼 보인다. 계도자의 자세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시도한 변신은 내적으로 이야기할 꺼리가 있다. 

소설의 내재적 측면에서 바라볼 때 바리공주 설화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스토리텔링 플롯의 제의성을 갖추기 위한 하나의 소설적 장치에 불과하다. 그것의 장소적 배경이 90년대 북한이라는 점은 작가가 디아스포라, 삶, 신자유주의 등에 대해 말하기 위해 끌어들인 하나의 필연적 결과인 것이다. 또한 바리의 ‘연옥’은 그가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형상화한 ‘무장당한 세계’, 신자유주의 시대의 상징화된 모습이라고 볼 수 있으며, 작가는 이점에 바리공주 설화에 매력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바리가 안내자 까치를 따라 연옥을 지나는 장면들에서 이 소설의 핵심적인 에너지가 느껴지는 것은 나에게서 뿐일까? 이 소설에 대해 비평하려면 결코 이 연옥 시퀀스를 빼놓을 수 없다. 연옥에서 바리는 기억을 소환하고, 또 갖가지 피부색을 지닌 무수한 인연들과의 관계맺음을 재설정하고, 또 종국적인 화해를 시도한다. 이 점은 바리가 겪는 무수한 비극적 사건들과 죽음들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긍정적인 에너지를 놓치지 않고 끝맺어질 수 있는 유일한 끈이다. 이 끈을 놓치면 작가는 이야기를 비극으로 치닫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치열한 작가과 이야기 사이의 투쟁을 십분 이해한다. 

정리하자면, 작가는 바리공주 설화의 제의성에 도구적 필요성을 가졌고, 그가 참고한(어느 작품이라더라?) 바리의 연옥 이미지에서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억압받는 이주자들의 현실을 형상화할 수 있다는 매력을 느꼈다. 또 현실에서 드러나는 억압자들간의 갈등과 폭력을 플롯 안에 스토리로 표면화한 가운데 그 플롯의 기승전결 구도의 갈등 문제와 “haphazard”를 결말부에서 까치 설화와 염라대왕 이야기로 풀어내는 완결성을 갖는다. 이점은 다분히 아리스토텔레스적이다. 그리고 주제는 누가 보아도 디아스포라. 세계체제론이 떠오르는 건 당연하다. 주지하다시피 작가는 한반도 분단상황을 강대국들이 경영하는 하나의 정치적 상황으로 규정하는데, 나는 이것이 틀린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작가의 지난 정치적 행보를 들어 이 말을 ‘민족주의’ 사상을 위한 이론적 소환이라고 비판하는 건 논리적 오류가 아닌가 싶다. 작가의 “여전히 분단상황은 강대국들 간에 합의된 어떤 음모”라는 주장이 “구좌파적 시각”이라는 박원익씨의 비판 역시 무리가 있어보인다. 둘 사이에는 논리적 개연성이 거의 존재하지 않아보인다. 작가의 한반도 정세 분석 자체는 사실 백승욱이나 발리바르가 했다고 해도 무리가 없는 주장이다. 물론 ‘음모’라는 단어에 집착한다면 문제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 말에서 중요한 건 ‘음모’라는 단어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물론 박원익씨는 황석영의 지난 행보를 논리적 연결의 준거점으로 삼았으리라 생각되고, 또 우리는 언제나 작가에 대해 비판할 때 그의 모든 것을 논거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제로 부각된 ‘디아스포라’ 문제와 연결된 작가의 말 한마디가 작가의 지난 정치적 행보와 연결될 순 없다. 나는 그가 20여 년 전에 월북한 이후 보인 정치적 행보가 디아스포라의 문제로 격상된 것에 도리어 찬사를 보내고 싶다. 심지어, 설사, 그것이 출판시장에서의 상업적인 것을 고려한 선택이든 뭐든 간에 말이다. 물론 상업적 고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점을 비판하려면 출판되는 모든 책을 비판하기라도 해야하는 걸까? 우리는 ‘진정성’을 판단하기엔 그에 대해 너무 모르는 그냥 평범한 독자다. 게다가 그가 <바리데기>라는 소설에다가 바리데기 인형이나 발마사지 할인티켓을 끼워 판 건 아니지 않은가. 도리어 나는 <바리데기>의 무수한 독자 중 한 명이자 신자유주의 시대를 사는 20대로서, 작가의 20대와의 소통을 시도하는 스타일의 도전과 ‘이주’ 토픽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시도를 칭찬해야할 의무감을 느낀다. 이 토픽의 대중적 회자가 지금 우리가 해야할 가장 큰 책무임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하나 더 짚고 넘어갈 게 있다. 포스트민족주의나 포스트모던 포스트문학 역시 우리에겐 너무 늙은 담론들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것의 의고주의적 반대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20년 전 이야기꺼리가 아닌가 싶다. 오늘날 문학의 확고부동한 탐구의 중심은 스타일이 아니라 주제에 가 있다고 보는게 더 정확하다. 더 이상 어떤 스타일이 옳은가는 문제가 아니며, 어떤 이야기와 적합한 스타일인가가 문제가 될 뿐이다. 덧붙이자면 육체와 신자유주의가 파괴한 삶-정치가 오늘날 문학의 문제이며, <바리데기>는 그 문제를 대단히 적확하게 취하고 있다. 

예찬씨는 ‘민족-여자-어머니-구원’의 구도가 불편하다고 말했다. 사실 어떤 맥락에서 말하는건지 수긍이 되면서도, 이 소설에서 그런 도식이 성립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스토리의 객체와 스토리 자체가 연상 이미지의 측면에서만 연결된 도식으로 내용 비판을 가하는 건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이 소설은 '민족'이야기로 읽힐 수 없으며, 더군다나 여성을 주체로 삼았다는 점 자체가 민족-여성 도식의 성립으로 이어질 순 없기 때문이다. 나는 반대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가장 억압받는 계급으로서의 '이동을 강제당한' 여성을 사건 해결의 주체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긍정될만 하다고 여기고, 반면 피억압계급 내부 갈등 해소의 주체를 여성의 역할로 국한 시키는 혐의가 있다는 점에서는 예찬씨가 언급한 혐의를 지적받는걸 피하기 어려운 지점도 있어보인다고 생각한다. 또 어머니-구원의 구도는 바리공주 설화를 내세운 이상 불가결한 요소들이었으나, 이점이 모성의 도덕적 규율로서 '인내'의 윤리를 은근히 성립시킨다는 점에서도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언급하신 서경식의 글은 읽지 못해서 그 이상 할 수 있는 말은 없는 것 같다. 

어떤 비평을 할 것인가? 이것은 결코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문제와 다른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리데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오늘날 20대가 황석영에게 대단히 못미더운 점이라도 있기라도 할까? 만약 못미더운 점이 있다면 그건 그가 “늙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 소설은 신자유주의 시대를 사는 20대를 겨냥한 대중소설이고, 그가 20여 년 전에 북한에 간 건 대중들에겐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오늘날 기성 작가들이 도전하고 있는 20대 성장소설의 영역에 늙은 그가 들어와 힘차게 몸부림치고, 또 활약하고 있는 것에 박수를 보내며, 내가 만약 작가에게 한 마디 말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물을 것이다. 

“영화화를 노리셨습니까? 런던 로케 비용과 CG 때문에 부담이 되는군요.”

(근무 시간이 다 끝나가서, 성급히 글을 마무리합니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6-10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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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10
09:34:52 

 

상병 홍명교 
20.19.3.49   급히 써서 두서가 심하게 없습니다. 2009-04-18
21:47:43
 

 

상병 박원익 
54.1.24.50   잘 읽었습니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서 찬찬히 댓글 달겠습니다. 2009-04-21
04:47:07
 

 

상병 김태완 
16.48.6.22   옹호론자와 비판론자의 격돌 현장이었군요. 그러나 금방 식어버린 것 같다는. 2009-05-22
08:5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