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내글내생각] 가족특선 영화 <쥬만지> 감상문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6-03 05:47:41, 조회: 179, 추천:2 

  다소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 한 편을 꼽으라고 하면, 오늘날 다소 우스꽝스러운 어드벤쳐물로만 알려진 <쥬만지>를 꼽아야할 것 같습니다. 쥬만지는 물론 가족영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것에게 붙이고 싶은 또 다른 이름은 '오이디푸스 영화'입니다. 주인공은 한 고전적인 부르주아 가정의 귀한 독자獨子입니다. 지나치게 귀하게 자란 탓인지 노동자 계급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받지만, 결코 응석받이는 아닌 주인공은 부모에게 그가 겪는 곤궁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아버지는 권위가 실린 위악적인 태도로 그에게 '남자답게' 맞서 싸울 것을 종용하고, 어머니는 잠자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만 남편을 나무라며 아들을 지켜봅니다. 요컨대 고전적인 부르주아 가정답게 저마다의 병적인 콤플렉스와 신경증을 앓는 '정상적인(?)', 다시 말해 오늘날에는 결코 찾아보기 힘든 훌륭한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경증자인 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그렇듯이, 겉으로는 아들에게 가혹하게 굴지만 사실 귀족 사립학교에 입학시키는 가장 도착적인 방식으로 그에게 훌륭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아들은 진정 '남자답게 싸우기 위해' 아버지에게 반항하며(오늘날 이런 훌륭한 미덕을 갖춘 남자아이란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그와 다시는 대화조차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아버지는 씩씩대며 약속된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섭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이 시점부터 어떤 시간적인 도약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주인공은 몰래 챙겨온 주만지라는 보드게임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그의 여자친구만이 유일한 사건의 목격자가 됩니다. 한 세대의 시간이 흐른 후 주인공이 살던 도시는 몰라볼 정도로 현대화되었지만, 실은 그의 실종이 야기한 우울한 트라우마들이 도처에 각인되어 있지요. 주인공이 살던 대저택은 폐허가 되다시피 하고, 도시에서는 저택에 관한 괴담이 떠돕니다. 전도가 유망하던 신발공장의 한 관리인은 주인공의 실종 때문에 실직하고 나서 빌빌거리는 경찰 노릇을 하며, 주인공의 최후를 목격한 여자친구는 뉴에이지 식 미신에 빠져듭니다. 그리고서는 한 남매가 주인공이 살던 저택에 이사를 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오이디푸스'를 모르는 오늘의 아이들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이모에 의해 양육되는 일종의 편부모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서로 증오하지만, 결코 애증으로 뒤엉킨 생산적 관계가 아니라, 매우 현대적인 차가운 무심함에 휩싸여 있습니다. 요컨대 어떤 신경증도, 어떤 애증도, 진정한 갈등도 싹틀 수 있는 정상적인 오이디푸스적 관계성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지요. 가령 그들은 사고로 부모님을 잃었지만 사실은, 영화 상에서 보여지듯이(그들은 저택의 임대인에게 생색내듯 부모를 잃은 슬픔을 연기합니다) 그들에게 그 사실은 아무래도 좋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들 후-오이디푸스적 남매 사이에는 뭔가 기묘한 근친상간적 분위기마저 감돌기까지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이들 남매가 다락방에서 쥬만지 보드 게임을 발견하게 되고, 실수로 주사위를 던지며 부지불식간에 보드게임의 말을 움직이게 됩니다. 그들은 게임이 발생시킨 기막힌 환상적 현실들을 체험합니다: 처음에 사자가 튀어나오고, 살인적인 벌의 공격을 받습니다. 그리고서, 우연찮게 어떤 칸으로 말을 움직이자 보드 게임 속에 빨려들어갔던 주인공이 장성한 모습으로 원래 살던 저택에서 튀어나오게 되죠. 그는 몰라보게 달라진 그의 생활세계에 충격을 받고서, 한 동안 실의에 빠지다가, 남매의 설득 끝에 결국 그의 여자친구를 만나며 그녀와 함께 게임을 마저 끝내기로 결심합니다. 

이 기막힌 조우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이들 간의 세대차를 확인해 봐야 합니다. 말하자면 같은 '주만지' 게임을 하면서도 각각의 커플은 저마다 다른 실존적 층위에서 게임에 연루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이 남매들이 태어날 때 즈음에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이 출간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오이디푸스'는 고리타분한 학술교과서에나 실릴 법한 단어가 되었을 겁니다. 만약 동서냉전을 한참 겪어나갈 주인공 커플이 주만지와 마주치지 않고 자라났더라면, T.S. 엘리엇을 동시대인으로서 어떤 절실함을 가지고 향유했을지도 모릅니다. 반면에 이 남매의 손에 쥘만한 건 사실상 스티븐 킹 소설이나 기타 장르소설, 환상문학이 전부입니다. 말하자면 오이디푸스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게 된 이래로 그들에게 허용되는 유일한 서사는 '장르적인' 혹은 '환상문학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쥬만지 게임과 더불어 그들에게 바로 그 문이 열렸던 것이지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은 주저없이 주사위를 던질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주인공 커플에게 쥬만지란 후-오이디푸스 세대들이 이해할 리 없는, 바로 원초적인 상실과 부채감에 결부된 트라우마였습니다. 후-오이디푸스적 남매들이 몰입할 수 있었던 게임의 장르적 규칙들은, 그들에게 결코 게임의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주사위를 던지기로 결심했던 것은 그들이 지닌 과거에 대한 부채감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세대 차이가 주만지의 끝장을 보려는 이들 운명공동체 가운데 흥미로운 긴장감을 생성합니다.

  실제로 게임이 진행될수록 두 커플은 전혀 다른 운명을 겪습니다. 남매의 남동생은 게임의 벌칙상 원숭이로 '동물화'되고, 이들은 마치 치명적 연인관계처럼 변모해갑니다. 흥미로운 점은 주인공 커플과 달리 이들 남매가 겪는 주만지의 재앙들은 그의 유일한 혈육이나 다름 없는 '이모'와 대부분 무관한 것으로 남는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이 겪는 주만지 속 현실은, 슬프도록 생생한 순수한 가상적 이미지로서, 정작 그 현실적 임팩트는 정작 가장 가까운 타인에게 전달되지 못한 채로 증발되어버립니다. 요컨대 환상문학의 탈근대적 '합의'의 노선을 충실히 지키면서, 그들은 그들만의 환상 속에서 비극적으로 소진되어 버립니다. 마치 동반자살을 위한 도피여행을 떠난 커플처럼 말입니다. 반면에 주인공 커플이 진행하는 게임은 그들이 연루된 외부의 오이디푸스적 가족-서사와 부채의식에 항상 유기적으로 연결됩니다. 가령 주만지에서 튀어나온 극악무도한 사냥꾼(광기에 사로잡힌 채 주인공을 사냥하러 다니는 그는, 마치 캐리커처에서 튀어나온 듯한 전형적인 '제국주의자'의 표상으로 등장합니다.), 뭘 모르는 애들에게는 단순한 활극적인 악당에 불과하겠지만, 그는 사실 주인공의 아버지가 지닌 '초자아'적 측면을 대표합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자신을 총으로 겨눈 사냥꾼과 전적으로 무력한 상태로 대면한 주인공은 아버지의 주문과 같은 훈계를 되읊습니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남자답게 맞서 싸울 거야' 사냥꾼 빈정거리며 그에게 총을 쏘자, 총알은 마법적으로 그 앞에서 정지하고 모든 것이 다시 주만지로 빨려들어가며 게임이 끝납니다. 아이들의 눈에 이 장면은 물론 '판타지'입니다. 하지만 이는, 주인공 입장에서는 사실 리비도적 근거가 있는 것이며, 이 제스처는 사실상 아버지와의 오랜 애증어린 갈등에 대한 극적 화해로 기능합니다. 

  그래서 <주만지>는 아이들을 위한 판타지인 동시에 어른들을 위한 비극적 동화라는 이중적 기능을 매우 영리한 방식으로 성취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마지막 화해의 장면 역시 굉장히 애매합니다. 주인공과 여자친구는 게임이 끝나고 어느새 보드게임을 앞에 두고서 과거로 돌아와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그들 사이의 오랜 사춘기적 갈등을 끝나고 성공적인 성적관계로 진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파티에서 돌아온 아버지에게 달려가서, 그를 힘껏 포옹합니다. 아버지는 다소 당황스러운 그러나 한층 누그러진 표정으로 '나한테 말도 안 건다고 했잖니?'라며, 아들을 껴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이 곳에 오기 위해 장장 3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 자리에 오지 못했던 다른 시간상의 계열에서는, 아버지는 격렬한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아들을 찾기 위해 전 재산을 탕진하고 자신의 생명마저 소모시켜버렸다는 사실이 여전히 남습니다. 요컨대 이 화해의 장면은 사실 굉장히 비극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지요. 영화 말미에 주인공-커플은 여전히, 자신들의 다른 '잠재적 미래'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다소 희극적인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전에 <카스테라>라든지, <삼미 슈퍼스타즈>를 통해 박민규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었지만, 오늘날 한 가지 지적 유행 중 하나가 있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사후적으로라도 리셋할 수 있는 어떤 '게임'으로, 혹은 다양한 잠재적인 루트들이 서로를 반영하며 패러디적인 방식으로 공존하는 세계관으로 사고하는 습관입니다. 말하자면 <주만지> 역시도 현실을 게임으로서 '재발견'하는 오늘날의 탈근대적인 판타지적 사고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봐도 좋습니다. 사실 이러한 현실의 '재발견'은 새삼스럽기까지 합니다. 이런 생각은 바로크의 피카레스크적인 기담奇談(주1)들이나, 중세 식 영웅 활극 및 심지어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論'(주2)에서 이미 발견됩니다. 말하자면 가장 극단적인 포스트모던 서사가 마치 중세로의 퇴행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이 어떤 임의적인 동시에 불가피한 게임의 규칙을 통해 성립한다는 '발견'은 매우 오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재발견'이 지나치게 뜬금 없이 대두되었다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여기에는 어떤 급작스러운 외상적 '억압'과 '왜곡' 그리고 '단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쥬만지는 이러한 중세-바로크적-포스트모던 사고방식에 대해 기묘하고도 의미심장한 '위반'에 걸쳐있습니다. 말하자면, 쥬만지가 대변하는, 수 많은 가능세계들과 게임을 벌이는 포스트모던한 활극의 지평은, 사실상 과거에 잊혀지고 억압되고 은폐된 고전적인 오이디푸스 서사의 뒤틀린 '귀환'으로서만 가능한 것은 아닐까요. 결국 두 남매의 비극적인 최후는 다시금 본래의 오이디푸스적인 주인공의 결단을 통해서만 소급적으로 취소되고, 그들이 시작한 새로운 세계(주인공 커플은 성공적으로 장성하여 결혼에 성공합니다) 속에서 대면한 남매는 본래의 부모와 함께 건강함과 행복을 찾았듯이 말입니다. 다시 말해, 실제 '게임'에서 성공한 것은 이들 남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본의와 무관하게) 새로운 서사의 계열을 만들어내서 행복하고 외상을 모르는 현실 속으로 진입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성공적인 게임이 아니면 무엇일까요. 그러나 주인공은 여전히 '게임'과 무관한 실존적 층위에 시종일관 연루되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를 움직였던 것은 기본적으로 아버지에 대한 빚과 어머니에 대한 사랑, 그리고 외부의 세계에 대한 책임감이었던 것이지요. 남매의 해피-엔딩은 사실상 이러한 주인공의 자세에 대해 '빚'지고 있는 것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사실 주인공이 자라난 유년기는, 제 아무리 옛날이라 해도 기껏해야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졸업>이 개봉되었던 당시와 동시대에 불과하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주인공의 유년기는 고전적인 부르주아 핵가족의 가치가 성공적으로 고수되었던 시대이기는커녕, 이미 핵가족의 가치와 기성의 가족적 질서에 대한 반란과 의문으로 점철되었던 불안한 시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떻게 본다면, 기본적으로 나이브한 판타지 가족오락-영화로 제작되었던 <쥬만지>는 이러한 영화사적 맥락에 견주어 볼 때, 60-70년대(당시의 시대상에 관한 설명으로, <로널드 프레이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1968년의 목소리> 참조.) 미국의 갑작스러운 오이디푸스의 상실을 뒤늦게 만회하려는 뒤틀린 시도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이디푸스의 상실과 관련해서 우리 역시도 공통된 의제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발을 딛고 있는, 후-오이디푸스적 '서사'의 지평(더 이상 역사적 지평의 불가능성에 의해 고뇌하지도 불안해 하지도 신경증을 앓지도 않는, 순진무구한 장르적 지평)은 여전히 이전 세대에 대해 어떤 '빚'을 지고 있지는 않은지요.       



(주1) 삽화적인 이야기의 계열들이 비일관적인 방식으로 엮여 있는 이야기 구조.

(주2) 현실세계 배후에는 수 많은 자족적이며 대안적인 가능세계(모나드)들이 잠재적인 공존하고 있으며, 실제로 체험되는 세계는 이 공존하는 모나드의 무한한 계열들 중의 한 가지 '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라이프니츠의 철학적 사고.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6-08 13:58) 

54.1.21.55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10
09:33:45 

 

상병 이동현 
8.48.3.31   Amazing 2009-06-03
08:10:41
 

 

상병 진수유 
40.6.1.143   잘 읽었습니다. 2009-06-03
09:55:00
 

 

상병 김태완 
16.48.6.22   주만지를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셨군요. 
재밌게 잘 봤습니다. 

결론적으로 60-70년대 핵가족으로의 전환기를 풍미한 오이디푸스 가족상에 잔재하려던 기성 가족질서의 안착이 수틀리자 이를 타파하기 위해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안정된 핵가족상을 만들려고 노력한 주인공과 같은 사람들에게 감사를 느끼자는 말씀이시군요. 

여태 그들의 노력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 없이 순진무구하게 잘 살았던 것에 수치를 느낍니다. 가끔씩 이들 뿐만 아니라 내가 지금 이렇게 살 수 있도록 운동하고 싸워준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2009-06-03
14:52:49
 

 

상병 박원익 
54.1.21.55   이동현/다 쓰고 나서 "어메이징 그레이스!"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진수유/매번 감사합니다. 
김태완/헉(땀 삐질), 이렇게 요약해놓고 보니, 의도와 무관하게 뭔가 비꼬는 말투로 들리네요. 
글쎄요, 제 의도는 기성의 가족적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자는 것보다는, 콤플렉스 자체가 해소되지 못한 채(물론 완전히 성공적인 해소는 정의상 존재할 수 없지만) 부인되고 억압될 때, 치르는 대가가 뭔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2009-06-03
20:35:12
 

 

병장 이동열 
22.36.32.21   지금까지 읽은 원익님의 글 중에서 가장 친절하고 즐겁게 읽었습니다. 늘 원익님을 주목하고 있었지만(그렇다고 스토커는 아닙니다. 크크크) 쉽게 코멘트를 달 수는 없었습니다. 혹시 예전에 저희가 스쳤을지도 모름에도- 

여담이고, 저 역시 주만지를 굉장히 재미있게 봤습니다. 하지만 원익님과 같은 생각을 하지는 못 했는데, 읽는내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해소가 부인되는 현 시대에 대한 원익님의 견해에 놀랄따름입니다. 저같은 경우 다행히도 좋은 가정환경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겪고 이를 어느정도 해소 한 '듯'했지만요. 하지만 대다수의 이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이겨내지 못한채 그들에게 현 세대의 양면성이 부여되어버리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잘 읽었습니다. 감사의 의미로, 가지로- 2009-06-04
09:30:08
 

 

상병 박원익 
54.1.19.119   사실 주만지도 그렇고, 다른 이들은 에이젠슈타인이니 베르히만이니 켄 로치니 하는 영화들을 줄줄 꿰는데, 제 페이보릿 영화목록은 하나 같이, 아나스타샤 푸카니, 이집트 왕자니, 찰리와 초콜릿 공장 등등이어서, 자격지심이 있습니다. 저도 어릴적부터 재밌게 본 영화라 즐겁게 쓸 수 있었습니다.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09-06-04
15:32:11
 

 

상병 김태완 
16.48.6.22   가지로- 2009-06-05
07:54:22
 

 

상병 양동훈 
18.1.17.5   책마을에 온 뒤로 처음으로 날려봅니다. 

가지로- 2009-06-06
14:55:11